[행복]은 과연 허진호 감독의 행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8월의 크리스마스]이후 [봄날은 간다] 등을 통해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진경산수를 그려왔던 허진호 감독은 그러나 한류 스타로서의 마케팅적 가치가 큰 배용준을 주인공으로 한 [외출]에서는 평상심을 잃고 흔들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흔들림이었지만, 허진호 영화에서는 그런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빚는다. 무엇인가를 보여주겠다는 목적의식과 욕망이 앞서면 허진호 영화는 후퇴한다. 그렇다고 [행복]에서 허진호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출발선으로 회귀한 것은 아니다. 이미 그는 욕망을 품고 몇 발 전진했으며 이제는 그 욕망을 생산적 힘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적응능력을 확보했다.
[행복]은 허진호 멜러 영화의 가장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대중적으로는 매우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는 훨씬 편안하게 대중들에게 말을 걸고 다가간다. [8월의 크리스마스]나 [봄날은 간다]에서처럼 숨소리 하나, 손동작 하나가 우주를 들었다 놓을 정도의 무게감을 갖는 섬세한 연출이 그립기는 하지만,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좀 더 많은사람들이 편안하게 경청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행복]은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보다 훨씬 더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배우들은 자신의 감정을 예전의 허진호 영화에서처럼 억제하지 않고 뜨겁게 분출한다. 그래서 영화수용자들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정서적 효과가 뛰어나다.
강한 남성적 힘과 섬세한 여성적 내면을 조화한 황정민은 허진호 영화의 정적인 인물을 뛰어 넘어 감정의 변화가 크고 행동반경이 뚜렷한 역동적 캐릭터를 보여 준다. 허진호의 남자들 중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행복]의 영수는, 한석규가 연기한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과 함께 가장 울림이 큰 배역이다. 한석규가 섬세한 연기로 죽음을 눈 앞에 둔채 불가능한 사랑에 가슴 아파하는 인간적인 고뇌를 깊이 있게 드러냈다면, 황정민은 자신에게 치유의 삶을 주었던 여자를 버리고 다시 도시의 불빛과 술의 유혹 속으로 떠나는, 투박하고 거칠지만 훨씬 땀냄새 나는 인물의 육화로 배역에 생동감과 현실감을 부여한다. 정원이라는 인물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비가시적 캐릭터의 현현이라면, 영수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자기 안에서 영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폭넓은 공감대를 획득한다.
[행복]은 오염된 도시와 청정한 자연을 대비시키며 한 남자와 두 여자 사이의 삼각관계를 축으로 전개되는 통속적 구조의 멜러 영화지만, 섬세한 연출 감각에 의해 통속적 때가 벗겨진다. 허진호는 항상 점프컷에 의해 생성되는 힘을 뛰어나게 활용한다. 그것이 산문적 서사전개에 시적 여백과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고, 허진호 영화를 통속화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영수가 시골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간 이후를 그린 [행복]의 마지막 시퀀스는 빈번한 점프컷으로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면서 통속적 서사전개에 놀라운 여백의 상상력을 부여해서 작품이 범상함의 평면성을 극복하게 해준다.
다시 도시생활에 길들여진 영수가 어느 날 클럽 화장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는 장면, 거실에서 술을 마시다가 쓰러진 영수가 밤 새고 들어온 은희에게 [너는 이렇게 사는게 좋냐?]라고 내뱉는 대사 속에는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강한 힘이 들어 있다. 이렇게 통속적 서사구조 속에서 자기모멸이라는 화두를 던지는 것은 이 영화가 다른 멜로영화와 결별을 선언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행복]의 외형적 구조는 도시-시골의 오딧세이적 장소 변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도시에서 클럽을 운영하던 영수(황정민 분)가 시골로 떠난 것은 클럽 운영에 실패했고, 불규칙하고 방탕한 생활에서 간경변이라는 병을 얻었기 때문이다. 영수가 같이 살던 수연(공효진 분)에게 외국으로 몇 년 떠나 있겠다고 말하지만 수연은 미련을 두지 않는다. 깊은 산 속 [행복의 집] 요양원으로 영수가 떠난 것은 도시에서 생긴 병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시골은 도시에서 생긴 병을 치유해주는 공간적 기능을 갖고 있다. 문명/자연의 단순하고 도식적인 이분법이 [행복]에서 외형적으로 두드러지게 눈에 안띄는 것은 인물의 감정을 앞세우는 허진호의 연출 때문이다. 그는 푸른 들판과 낙엽지는 가을과 눈 내리는 겨울을 모두 화면에 담고 있지만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두드러지게 강조할 수 있는 롱샷 대신, 인물에 대한 클로즈업을 택한다. 허진호의 인간들은 모두 주변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문명화 된 도시 속에서 인간은 병을 얻고 대자연과 순수한 사랑 속에서 병든 인간은 치유된다. 도식적인 설정이다.
영수가 처음 시골로 떠나기까지의 도시에서의 삶은 짧게 그려져 있다. 그의 도시적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술과 여자다. 가게를 정리하고 얼마 안된 돈을 챙겨 도시를 떠난다. [행복의 집]으로 들어가는 시골 비포장도로 구멍가게 앞에서 처음 은희(임수정 분)를 만났을 때도 그는 도시 생활의 연장선상에서 소주를 마신다. 가게 앞 평상에 앉아 있는 은희의 옆으로 슬금슬금 접근하는 영수와 그가 접근할 때마다 조금씩 피하는 은희의 모습을 함께 잡은 투샷은, 이제 두 인물이 운명의 굴레에 함께 엮이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뒤돌아선 은희가 거울을 보고 얼굴을 매만지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녀의 마음 속으로 영수가 들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복의 집] 씬들은 짧지만 재미있다. 원장(신신애 분)의 구령소리에 맞춰 아침에 마당에서 함께 하는 우스꽝스러운 맨손체조, 그리고 2인 1실의 룸메이트였던 폐암 말기의 남자(박인환 분)가 회복불가능하다는 병원의 통보를 받고 자살을 선택할 때까지도. 시골 요양원에서의 생활은 청정하게 그려져 있다. 도시 생활과의 의도적인 대비를 강조하지 않으면서 서서히 은희와 가까워지는 영수의 해맑은 모습을 통해, 허진호 감독은 자연이 갖는 치유의 힘을 드러내려고 한다. 도식적 구도 속에서 돌발적인 힘으로 솟구치는 것은 여성 캐릭터다.
영수의 방으로 먼저 과일 깎은 접시를 내미는 것도 은희고, 그의 방문 앞에서 망설이다가 들어가 섹스를 할 때도 은희의 선택이 강조된다. [우리 같이 살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땐 헤어지죠 뭐.]라고 먼저 동거를 제안하는 것도 은희다. 폐의 40%만 남아 있는 몸으로 8년째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은희는, 환자이면서 동시에 요양원의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는 스텝이다. 영수와 첫 섹스를 할 때, 영수의 손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자 [숨이 차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말한다. 사랑 앞에서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이 허진호 영화에서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은희는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르는 극단적 상황에 처해져 있다. 그것이 그들의 유한한 사랑을 숨가쁘게 만든다.
요양원을 나와 작은 집을 얻어 동거를 하는 은희와 영수의 삶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되지는 않는다. 영수가 바지춤에 수건을 찔러 놓고 농사일을 하는 것도, 은희가 꼬박꼬박 영수의 약을 챙겨주고 돌봐주는 것도, 권태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결정적인 것은 옛 여자 친구인 수연이 그들의 삶에 나타난 것이다. 영수는 다시 도시생활이 그리워진다. 잠깐 은희의 곁을 떠나 도시로 돌아간 영수는 힘들게 끊었던 술을 마시며 예전의 생활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은희와 헤어지기 위해 다시 돌아간 시골에서의 삶이 행복할 수가 없다.
버스 정류장까지 영수를 마중 나간 은희가 다시 영수를 보고 [못생겨졌어]라고 말하는 대사 속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도시에 갔다가 돌아온 영수는 은희의 대사가 아니더라도 진짜 못생겨졌다. 맑은 얼굴은 다시 타락한 생활에 찌들어 탁해졌고 눈빛에서는 시골생활에 대한 권태와 도시생활을 그리워하는 욕망이 번쩍인다. 이제 남은 것은 이별 뿐이다.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아 [그 여자보다 더 잘할께]라고 싹싹 비는 은희의 곁을 떠나는 영수의 모습에서 남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 이유의 대부분은 캐릭터와 빈틈을 보이지 않게 밀착한 황정민 때문이다.
허진호 감독의 네번째 영화 [행복]은 욕망에 찌든 도시에서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진정한 행복은 순수한 사랑에서 찾아온다는 것을 탕아의 귀환으로 말하려고 한다. 도식적인 결말이고 상투적인 플롯이지만, 허진호는 서사의 외형적 안정성을 선택한 대신 내면적 격렬함의 모험을 시도한다. 억제된 감정은 분출되고, 캐릭터는 더욱 현실화되었다. 이것이 [행복]이 많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만날 수 있는 이유이다.
첫댓글 땅게라 이유진씨가 설립한, 영화사 집의 작품입니다
오 나다에 가끔 오시는 '마야'님이시죠. 아직 이 닉네임 쓰시는지?
좀 아플 것 같은데요...후후 그래도 보고 싶네요.
외형적 안정성...과... 내면적 격렬함의 대비! 탱고와 좀 닮았군요
임수정이 너무 예뻐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