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퇴가 아닌 성숙으로 '나이 듦의 재발견
그저 나이 들면서 마음이 변하는 건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혼자 외쳐보지만 어쩔 수 없이 한 해가 다르게 변해가는 몸 때문에
마음도 따라서 변하는 건지 알 수 없다.
나이가 30대이건 70대이건 '그때가 좋았지'라고 혼자서 푸념할 때가 있다면 그건 당신이 나이 들었다는 증거다.
그런들 무슨 상관이랴? 나이 마흔이 너무나 무서웠다던 한 인생 선배가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마흔 넘으면 무슨 재미로 살까 싶었는데 오히려 더 편안해지고 인생도 즐겁다. 오십이 넘고 육십이 넘어도 새로운 삶이 있을 것 같다."
◆마음만은 영원히 젊고 싶건만…
직장인 정현모(가명·43)씨는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기자의 물음에 "아직 많이 안 먹어봐서 모르겠다"고 답했다.
평소 원더걸스의 '노바디'를 흥얼거리고 주말이면 청바지 입고 모자를 쓰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동안(童顔)이라고 우겨대는 정씨. 좋다. 나이 사십을 뜻하는 불혹(不惑)이 무엇인가?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지 않게 됐다는 뜻인 만큼 남들이 뭐라고 하건 '나 홀로 젊게 사시라' 선언하는 것, 그거 좋은 현상이다.
노바디도 좋고, 아직 청바지가 어울리는 뱃살 적은 몸매도 좋고, 비록 약간의 탈모를 가리기 위한 고육지책일지언정 모자를 써서 동안 효과를 보는 것도 좋다.
그런데 회사 후배 이야기를 꺼내니 갑자기 욕부터 튀어나오는 것은 무슨 반응인가? "요즘 젊은 애들은 안 돼. 한마디로 싸가지가 없어"라며 세대 이감(異感)의 격정을 토해냈다. 내용인 즉 이렇다. 회식날 후배들과 함께 어울려 노래방에 갔는데 도무지 마이크 잡을 기회를 주지 않더라나. 물론 처음에 "과장님 먼저 한 곡 하시죠"라고 권했지만 냉큼 잡아들기가 뭣해서 거절했더니 30분이 넘도록 자기들끼리 놀더라는 것. 그래도 조금은 미안했던지 구석에 앉아있는 정씨에게 누군가 다시 마이크를 건넸고 벌써 외어두고 있던 번호를 꾹꾹 눌러 노래를 시작했다.
대학시절 그렇게나 좋아했던 김현식의 노래를 열창했고, 후배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화장실 입구에서 우연히 엿듣게 된 후배 둘의 대화가 그날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버렸다.
"정 과장, 요즘 노래 안 듣냐? 분위기 얼어붙는 거 봤지? 1차 끝나면 적당히 먼저 가 주는 게 예의인데." 이후로도 원더걸스의 '노바디'를 회식 자리에서 부른 적은 한 번도 없다. "지들은 나이 안 먹나. 일은 개뿔도 못하는 녀석들이 노는 것만 좋아해." 얼마나 나이를 더 먹어야 '나이듦'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정 과장이 후배들과 회식 2차를 갈 일은 별로 없어 보인다.
◆나이는 상대적인 숫자일 뿐
유치원에서 다섯살 아이들이 서로 싸우는 걸 본 여섯살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지. "하여간 요즘 애들은. 쯧쯧." 나이는 상대적이다.
양모(46)씨는 서울에서 고교를 졸업했다. 일년에 두어 번 모이는 동창모임에 가면 늘 막내다. 기업체 임원 아니면 기관장급 선배들이 즐비하다 보니 동창회 평균 연령이 50대 초반. 선배들이 '○○야'라고 이름을 부르며 "아직 한창 때다.
나이 오십 넘어가면 힘들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노라면 '이 나이에 이런 대접을 받나' 싶다가도 은근히 '아직은 내가 젊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40대를 바라보는 교사 이모씨는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여유가 생겼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조그만 자극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지만 이제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객관적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됐다는 것. "학생들이 왜 말을 듣지 않는지 너무 속상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나도 아이를 키우다 보니 많이 이해하게 됐습니다.
젊은 후배 교사들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하면서 스스로 나이를 떠올릴 때가 있지만 연륜이 쌓이고 있을 뿐 스스로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가끔씩 마음이 조급해 질 때는 있지만…."
두류공원에서 만난 50대 아주머니는 "아직 한창 때"라고 했다. 매일 40분씩 걸어서 공원 한바퀴를 돈다는 이 아주머니는 문화예술회관 앞에 모여있는 노인들을 가리키면서 "미안한 말이지만 저 분들보다 20세 정도는 어릴 것"이라며 "비록 최신 가요도 모르고 컴퓨터도 서툴지만 스스로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백일이 된 손녀 딸 사진을 꺼내보였다.
문화예술회관 앞 벤치에 홀로 앉아있는 한 할아버지에게 조심스레 '나이듦'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일흔이 넘었다는 그 할아버지는 엉뚱한 사람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한참 뜸을 들이고서야 말문을 열었다. "나이 들었지. 그래 칠십이 넘었으니 나이가 들었다고 할 수도 있지. 하지만 늙은이 주책이라고 할지 몰라도 아직 난 늙었다고 생각 안 해. 노인들끼리 서로 한 두 살 많네 적네 말다툼도 하지만 정작 속내를 들여다보면 아직 다 청춘이야. 그런데도 여기 앉아있으니 그게 서글픈 게지. 나이든 건 아냐."
◆노화와 늙음은 다르다.
저명한 생물학자인 조지 윌리엄스 뉴욕주립대 명예교수는 노화는 인체를 조절하고 유지하는 메커니즘의 정밀도가 떨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늙는다는 것과 노화는 다르다고 말한다. 인생의 절정기인 20대 초반을 지나면서 노화가 시작되지만 그렇다고 늙었다고 표현하지는 않는다는 것. 노화는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아직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나이를 가늠할 수 있는 첫번째 지표는 바로 피부다. 최근 TV 광고를 통해 새삼 얼굴을 알리고 있는 '영원한 연인' 오드리 헵번. 지난 1953년 영화 '로마의 휴일'에 등장한 헵번과 1992년. 생을 마친 헵번의 얼굴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단지 세월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며 아프리카의 강렬한 태양 아래 어린이들을 돌보느라 자외선에 많이 노출됐기 때문에 탱탱하고 곱던 피부도 많은 주름이 지고 말았다. 피부 안쪽의 섬유질이나 액체 성분이 줄어들면 주름이 진다. 젊은 사람들도 주름이 지는 데, 이유는 피부에 수분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거나 피지 분비가 감소해 건조해졌기 때문이다.
수분 공급이 원활해지면 어느 정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피부 관련 제품들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것 중 하나가 엘라스틴, 레티놀이다. 엘라스틴은 콜라겐과 함께 진피를 구성하는 단백질로 피부를 탱탱하게 잡아당겨주는 역할을 한다. 레티놀은 비타민A를 유도하는 물질로 피부 각질 및 주름제거 효과가 있다. 피부 내 진피 깊숙히 피부 개선 물질을 집어넣는 방법으로 보톡스(botox)와 필러(filler)가 있다.
보톡스는 상한 통조림에서 생기는 박테리아가 만든 독소를 정제한 것으로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를 막아 근육을 마비시키는 작용을 한다. 얼굴 근육 때문에 표정 주름을 일정 기간 동안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 필러는 진피 구성성분과 비슷한 물질을 주름 부위에 직접 채워 넣어 원상복귀시키는 방법이다. 바르는 필러 제품도 시중에 나와 있다.
◆노화를 늦추는 비결은 없을까?
노화를 늦추면 수명이 연장된다. 가장 널리 알려진 방법은 체내에 섭취되는 칼로리를 제한하는 것, 즉 소식(小食)이다. 체내 지방조직이 적은 쥐의 수명이 길어진다는 결과도 나왔고, 장수촌 100세 노인들의 공통점도 바로 적게 먹기였다. 인간에게 적용된 적은 없지만 적절한 자극이 생명체의 수명연장을 가져온다는 연구도 있었다. 꼬마선충이나 초파리에게 일시적 열충격을 줬을 때 오히려 수명이 증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처럼 작은 스트레스가 몸에 좋은 효과를 주는 현상을 '호메시스'(Hormesis)라 부른다.
체온을 조절해 수명을 늘릴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사이언스'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연구 팀은 시상하부에 열을 발생시켜 방어작용으로 체온을 낮추게 하는 형질전환 쥐를 만들었다. 쥐의 체온은 0.3~0.5℃ 정도 낮아졌고, 수명은 수컷이 12%, 암컷은 20% 늘었다. 이 쥐는 활동성과 수면, 음식섭취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체중도 줄지 않았다. 체온이 떨어지면 높은 체온을 유지할 때만큼 많은 에너지가 필요 없고, 에너지를 만들 때 생기는 부산물인 활성산소도 적어져 노화를 방지한다는 뜻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빨리 늙는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스트레스가 극심한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의 세포 나이는 9~17년이나 차이가 났다. 마음과 세포가 연결되는 정확한 메커니즘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나이가 든다는 것 체크리스트
1. 가끔씩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다 보면 내가 무슨 얘기하는지 나도 이해 못한다.
2. 예전에 고분고분하던 아래직원이 은근히 반항하는 느낌이 든다.
3. 컴퓨터로 글을 써놓고 보면 오타(맞춤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타이핑 실수)가 부쩍 많아진다.
4.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억지로 웃어주는 느낌이다.
5. 노래방에서 마이크 잡기가 꺼려진다.
6. 혼자 있는 게 제일 속 편하다.
7. 1박2일, 패밀리가 떴다 등의 프로그램이 왜 재미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8. 예전이면 바로 다른 채널로 돌리던 가요무대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9. 혹시 몸에 큰 병이 있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된다.
10. 음악 들으면서 책 읽기가 안 된다.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음악을 꺼야한다.
11. 날이 선선해진 뒤 샤워하고 나서 오일을 바르지 않으면 몸이 건조해진다.
12. 옛날에는 그저 담담하던 슬픈 영화, 지금 보면 눈물을 글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