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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중국의 전통의학 |
1. 서 론
현대의학의 발전과 더불어 전통의학이 크게 주목받고 있다. 현대의학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전통적 치료법에 대한 관심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전통의학이 이렇게 주목을 받게 된 이유를 이종찬(2000)의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서구 사회가 점점 후기산업사회로 이전하면서 질병의 역학적 구조가 변하게 되어 기존의 임상적 효능이 감소되기 시작했으며, 첨단 의료기술로도 고칠 수 없는 불치병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환자들이 기존의 의학적 권위를 점점 신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근대 임상의학의 방법론적 토대가 되어왔던 실증주의에 대한 거부감 즉, 인격체로서의 환자의 정신적 차원을 이해하기보다는 질병을 분자생물학적 차원에서만 파악하려는 의학 문화에 대해 소비자들이 조금씩 염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환자들이 소외된 개체로 전락하여 진료를 받기보다는 색다른 서비스 공간에서 환자로서의 권리를 누리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전통의학의 유용성과 역할에 대한 관심은 1차의료 영역에서 한층 더 커지고 있다. 전통의료의 제공자들은 주민들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함께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1차의료의 고유한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지역사회에서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의료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의료비 절감에도 기여하고 있다.
이에 세계보건기구는 전통의학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전통의약에 대한 국가정책 입안을 유도하고, 치료의 안전성과 효과를 연구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그로 인해 과거에는 개발도상국가들에서 주로 이용되던 전통의학이 최근에는 선진국에서도 관심과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아시아는 물론이고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역사적 환경과 문화 및 신앙의 토대에서 전통의학을 꾸준히 이용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서태평양 지역의 35개국을 전통의학에 관한 학문적 체계를 갖춘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으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다(신민규 등, 1998). 전자에 해당되는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전통의학체계를 정비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한국과 일본 등 동북아시아 국가들도 전통의학에 대해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원을 중국에 두고 있다. 중국은 수 천년의 역사를 통해 풍부한 이론과 경험을 바탕으로 전통의학을 발전시켰고, 특히 침술을 전통의학의 핵심의술로 삼았다.
침술에 관한 여러 학술대회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Acupuncture Chinese”란 문구를 자주 보게 되는데 그들은 그것 자체를 중의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의학이란 용어는 또한 전통의학과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중국인들은 침술로 그들의 학술을 대변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현대의학의 학문적 토대에서 전통의학을 재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독특한 진단방법과 체계적인 접근, 풍부한 임상적 내력은 국가번영에 기여한 바가 크고 국제사회로부터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전통의학은 서양의학과는 다른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양의학의 측면에서 과학적 타당성을 입증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전통의학의 장점과 보완적 의료로서의 가치에 대해서는 많은 의과학자들도 동의하는 바여서 이에 대한 과학적인 검증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정부는 1977년 이후로 중서의결합 방침을 고수하여 전통 전통의학의 과학화에 중점을 두고 있고 그 성과로서 침술의 신경?화학적 작용기전과 암환자에 대한 부작용 제거 효과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전통의학은 중국문화의 통합적 산물이다. 전통의학은 의료뿐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 환경과 민족정서를 반영하는 것이다.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 WTO 가입과 시장개방이라는 최근의 급속한 정치?사회적 변화 속에서 전통의학의 역할과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의료제도의 전반적인 현황과 중의학 발전방안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綠 康 天 然 物 硏 究 所
Tianjin Lukang Natural Products Research & Laboratory Co., Ltd. |
2. 중국의료제도의 전반적인 현황
1). 중국의료의 역사적 배경
고대 중국의 전통의학에서는 ‘질병은 자연의 힘에 대해 인간 신체의 불균형 때문에 생긴다’고 보았다. 기원전 200년에는 침과 마사지가 문헌에 치료법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양의학이 소개된 것은 17세기에 들어서이다. 1912년 보건부(Department of Public Health)가 설립되었고 1945년까지 30개의 의과대학이 다양한 지역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간동안에도 의사들은 여전히 전통의학의 일차적 시술자였으며 점차 현대적인 의료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공공 및 민간의료를 현대화하는데 실패하여 병원과 의료시설은 전체적으로 부족하게 되었다.
현대적인 의료서비스는 사회당이 집권하면서 체계화되었다. 군인과 시민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이 설립되기 시작하였고 전통의학과 서양의학을 혼합한 형태의 보건의료를 제공되었다.
1966년의 문화혁명은 10년에 걸쳐 민간의료 공급자를 거의 없애고 중앙집중화 된 지방 정부중심의 체계를 형성하였다. 이 시기에는 도시의 의료인들을 분산시켜 농촌주민의 의료요구를 해결해 보자는 발로로서 소위 ‘Barefoot Doctor'가 소개되었다. 이들은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이 혼합된 내용의 의학교육을 받은 의사로서 농촌지역에서 일차보건의료를 담당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서양의학이 더욱 보강된 동양의학을 계속 양성함으로써 농촌지역 국민의 신뢰를 얻고자 노력하였다. 침술원이 널리 성행하였으나 서양식 병원에서 훈련된 의사의 감독 하에서 시술되었다. 동양의학 학교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서양의학 학교에 지원하여 국가고시를 통과해야 가능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사이에는 자유시장체계로의 변화와 개혁을 맞이하게 되었다. 개혁이 시작된 이후 3년 만에 농촌의 평균 수입이 2배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리(village) 병원에서 멀리 떨어진 현(county)이나 시(city)병원까지 진료를 받기 위해 애써야 했다.
개인의사들은 지역에서 의원을 개원할 수 있게 되었고 행위별수가제와 의료보험의 발달은 새로운 사유화체계로 재원을 조달하게 되었다.
보건의료요원의 수는 농촌지역에서 상당히 감소한 반면, 의료요구는 증가하는 상태가 되어 입원을 위해서 상당히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1990년에는 모든 리(village)의 보건의료의 반이 개인의사에 의해 제공되었고 도시지역에서도 느리긴 하지만 비슷한 변화가 일어났다.
도시지역에서는 단지 3.3%의 의사들만이 사적으로 의료를 제공하였고 많은 수가 공공시설에서 봉급을 받으면서 시간제로 개인진료를 시행하였다. WHO의 ‘Health for all by the 2000 year'라는 슬로건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의 중국 경제?사회적 발전은 위생 및 면역과 공중보건에 있어 농촌지역의 수준저하 현상을 보였다.
또한 이와 함께 예방의료에서 치료의학으로의 전환을 보이게 되었는데 이것은 중서의 결합이라는 정책적 기조 속에서 서양의학의 역할이 좀더 커지게 되는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은 4,700여 년의 역사와 함께 고대부터 불교와 같은 종교에 뿌리를 둔 전통의학이 존재해 왔다. 환자들은 문화의 한 부분으로 인식했다는 사실과 가족중심의 보건의료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중국의료가 가지는 큰 특징이다.
유구한 문화적 전통은 20세기의 정치?사회적 변화 속에서 보건의료에 있어서도 드라마틱한 전환을 보여 왔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가족과 지역사회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서양의학을 받아들여 중국 전통의학에 접목하여 조화로운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2). 중국의 보건지표
보건지표의 현황은 바로 현재의 보건실태를 나타내는 좌표라고 할 수 있다. 한 국가의 보건 수준이 과거에 비해 향상되었는지 저하되었는지, 또는 다른 나라에 비해 어떤 수준인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이를 바탕으로 정책목표를 설정하고 목표수준의 지표를 제시하여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중국의 인구지표와 기대여명, 의료비용, 의료인력, 주요 사망원인을 통해 중국의 보건실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인구지표
<표 1> 동양 3국의 인구지표
인구성장률
(1990-2000) 60세 이상 인구
(2000) 영아사망률
(1,000명당, 2000) 남 여 중 국 1.0(%) 10.0(%) 38(명) 44(명) 한 국 0.9(%) 11.0(%) 10(명) 9(명) 일 본 0.3(%) 23.2(%) 5(명) 4(명)
* 자료: http://www.who.int/country/chn/en
1990년부터 2000년 사이의 인구성장률은 우리 나라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보건의료수준의 향상으로 인한 사망률의 감소와 더불어 특히 정부의 가족계획정책으로 인한 출산율의 감소는 인구의 노령화를 가속화하였는데, 2000년도 기준으로 60세 이상 인구의 비율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와 더불어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영아 사망률은 남자 38명 여자 44명으로서 높은 사망률을 보이고 있어 영아사망률로 본 보건의료 여건은 열악한 것으로 보인다.
(2) 기대여명(Life expectancy)
<표 2> 동양 3국의 기대여명 (단위: 년)
Life expectancy at birth(2000) Health life expectancy at age 60 (2000) 남 여 남 여 중 국 73.0 68.9 11.8 14.3 한 국 78.3 70.5 12.3 16.0 일 본 84.7 77.5 17.6 21.4
* 자료: http://www.who.int/country/chn/en
출생시의 기대여명은 남자 73세 여자 68.9세로서 우리 나라와 일본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건강수준을 보정한 기대여명 역시 우리 나라와 일본보다 낮아 보건상태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3) 의료비용(Health expenditure)
<표 3> 동양 3국의 의료비용
Total health expentiture
as % of GDP, 1998 Health expentiture
as % of total expenditure on health, 1998 Public Private 중 국 4.5 38.8 61.2 한 국 5.1 46.2 53.8 일 본 7.2 78.1 21.9
* 자료: http://www.who.int/country/chn/en
GNP에서 차지하는 보건의료 지출비용은 보건의료분야에 대한 지출비용은 적은 우리나라와 비슷하고 일본에 비하면 현저하게 적은 편이다. 그 중에서 민간의료에 대한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우리나라나 일본에 비해 월등히 높다.
1949년 이래로 중국의 모든 병원은 국가나 지방정부에 의해 운영되다가 1980년부터는 운영책임을 의사를 비롯한 보건의료인력에 위임되었는데 민간부분의 지출비중이 큰 것은 여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4) 의료인력(Human resource)
<표 4> 동양 3국의 의료인력 (단위: 명)
Human resource
(rate per 100,000 population) Physicians Nurses 중 국('98) 161.7 98.6 한 국('97) 136.1 291.2 일 본('96) 193.2 744.9
* 자료: http://www.who.int/country/chn/en
인구 10만명 당 의사인력은 우리나라보다 많고 일본보다는 적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1950-1960년대에는 간호사 수가 급증하였으나, 문화혁명(1966-1976)으로 인해 위상이 실추된 이후 간호사 인력은 현저히 부족하게 되었다. 또한 이것은 한의학이 가지고 있는 진료업무의 특성을 반영하는데 기인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5) 주요 사망원인
<표 5> 동양 3국의 주요 사망원인
1위 2위 3위 4위 5위 중 국(‘94) 뇌혈관질환 암 심장질환 소화기계질환 불의의 사고 한 국(‘96) 뇌혈관질환 암 노쇠 불의의 사고 소화기계질환 일 본(‘95) 암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폐렴 불의의 사고
* 자료: 한국한의학연구원, 한국과 동양3국의 한의학 정책 비교 연구, 1997
과거에 전염병이 사망원인 1위이던 것에 비해 전염병 및 재해퇴치운동으로 1990년 이후에는 암과 뇌혈관질환이 주요 사망원인이 되었다. 특히 고령화사회에 접어들면서 뇌혈관 질환이 사망원인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하다.
3). 중국의 보건의료체계
중국의 보건의료는 공산당의 통제와 함께 지방분권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의료의 질과 의료보험에 있어 도시와 농촌간 격차가 심한 편이고 서양의학과 전통의학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중서의 결합을 시도하면서 한편으로 학교보건과 복지를 강조한다.
일반인들의 건강관리는 중의학적 방법을 이용한다. 기공, 안마, 미용, 태극권, 침구(금연) 등이 그것인데 서양식 건강관리 개념이 없어 운동이나 금연과 같은 건강증진 프로그램을 국가가 관리하지 않는다.
즉, 개개인은 자발적인 신체단련으로 건강을 유지한다. 저지방 식이와 운동에 노력한 덕분에 국민들의 심장질환은 적으나 흡연이 전체 국민건강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 중국 보건의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중국의 보건의료체계를 구성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보건의료 체계는 그 사회의 기본적인 목표나 가치체계, 과학, 상업적 요인 등을 포함한 제반 사회환경의 영향 하에 점진적으로 형성된 역사적 산물로 볼 수 있다(kleczkowski 등, 1984). 보건의료체계는 사회를 구성하는 여타 하위체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제반 사회환경과 보건의료체계는 끊임없이 상호작용 한다고 할 수 있다.
보건의료의 특성을 바탕으로 보건의료체계를 구성하는 인자들인 보건의료자원, 보건의료조직, 보건의료서비스 전달, 보건의료 재원조달, 보건의료 보수지불 등을 살펴본다면 중국의 보건의료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보건의료조직
국가최고행정기관인 국무원(State Council) 아래 41개의 부위를 설치하고 있는데, 그 중 보건의료를 담당하는 최고부서는 위생부(Ministry of public health)이고 산하에 보건위생청, 시보건위생청, 보건위생국 등의 하부 조직들로 구성되어 있다(그림1). 서양의학은 주로 위생부에서 관장하고 있고 중의학은 주로 국무원 산하의 중의약관리국에서 관장하고 있어 보건의료 행정체계는 이원화되어 있다.
<그림 1> 중국의 보건의료조직
국무원 위생부 국립의과대학
연구기관
약품통제기관 province
정부
(200만-1억2천만명) province
보건위생청 병원
방역위생소
약품통제기관 시정부 시보건위생청 병원
부유위생병원
방역위생소 county
정부(10만-130만명) county
보건위생국 카운티병원
카운티부유위생원(모자보건소) township
정부
(2만-8만명) township
위생소 village
(1천-1만명)
주민위원회 village 크리닉
*자료 : Health in China. The healthcare market, BMJ. 314(7094): 11616-8, 1997 May 31
(2) 의료전달체계
1차 의료기관은 local level에 있는 지역사회 병원으로 여기서는 예방의료 및 기본치료, 재활을 담당하고 있다. 2차 의료기관으로는 regional level의 병원으로 어느 정도 제한을 둔 지역사회 범위에서 다소 복합적인 치료를 제공한다. 3차 의료기관은 고도로 전문화된 병원으로서 치료와 의학교육 및 연구의 책임을 가진다.
1, 2, 3차 의료기관은 다시 각각 A, B, C 와 S로 분류하는데 의료기술, 서비스의 질, 의료시설, 관리전문화 등에 따라 전문위원회가 각각의 1,2,3차 의료기관을 세부적으로 나누고 있다(Zhi-kuan, 1994). 지방의 1차 병원은 1차의료를, county, district, city 의 2차 병원은 외래, 입원환자의 질병치료를 위주로 하고 provincial, national 병원은 3차 진료를 주로 담당한다.
지방 병원은 50%정도의 병상점유율을 보이고 도시나 국립병원은 85-90%의 높은 병상점유율을 보이는데 이는 지방의 여유 있는 환자들이 도시의 병원을 이용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3) 의료인력
① 의사
중국은 50년대 후반부터 “중서의결합방침”을 규정하고 중서의결합 사업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지원해 왔고 큰 성과를 이루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인력에 있어서도 서로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도록 양쪽의 기본원리를 모두 교육하여 중의와 서의의 균형적 발전을 시도하였다.
양의사는 모두 의학 본과대학(5년)이나 의학 단과대학(3년)을 나온 사람으로 별도의 면허시험을 거치지 않고 국가에서 국립병원으로 배치해 주며 상급의사의 지도 하에 임상실습을 한다. 대학졸업 후의 교육에 대해서는 정해진 규정이 없으며 통상적으로 큰 도시에 있는 의과대학부속병원에 가서 연수를 받는 것이 보통이다.
양의사의 계급은 국가통일규정에 따라 주임의사(교수급), 부주임의사(부교수급), 주치의사(전문의), 주원의사의 급으로 나누며 그 아래는 의사(醫士)로서 단과대학의 졸업생인데 역시 醫師로 진급할 수 있다.
중의사는 대부분 5년제 중의 본과대학이나 중의 단과대학을 졸업하고 일부는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도제형식에 따라 중의가 될 수 있다. 교육내용은 중의학과 서의학을 7:3의 비율로 하고 있다. 중의의 영역은 내과, 산부인과, 피부과 직장외과, 골과(성형외과), 침술과 등으로 구분한다.
문화혁명의 소산으로써 이른바 Varefoot Doctor(맨발의 의사)라는 개념이 소개되었는데, 도시에 집중된 의료인력을 농촌으로 분산하고자 만들어진 보조의료인력이다. 중학교 졸업자가 지역구 보건소에서 2-6개월간 간단한 교육을 받고 중의와 기본적인 서의를 합한 의료를 제공한다.
5년 이상 맨발의 의사로 근무하고 성에서 주관한 시험에 합격하면 농촌의사 자격증을 획득한다. Varefoot doctor의 지도 아래 보건보조원이 있어 응급처치, 애국보건캠페인, 보건증진활동을 하고 그 외의 위생부문 지도자, 가족단위지도자, 여성지도자 등의 보건요원이 있다.
② 간호사
중국은 1909년에 Chinese Nursing Association을 창립하였고, 1922년에는 International Council for Nrs.에 11번째 회원이 되었다. 1950, 60년대 간호사 수가 급증하였고 문화혁명(1966-1976)으로 인해 위상이 실추되어 현재는 간호교육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간호사인력은 부족한 상태이다(1980년대부터 뚜렷). 의사들이 환자요구에 관한 모든 결정을 하고 간호는 병원 환경에 한정되어 있다. 1990년 9개 대학 수준 교육 프로그램이 있으나 교과서, 교육장소가 부족한 실정이다.
③ 서약사와 중약사
약학대학이나 약학 학부를 나온 사람들이 서약사가 되는데 이들도 주임약사, 주 부임약사, 주관약사, 약사로 구분하고 단과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약제사가 된다. 약학학부와 약학대학의 졸업생수가 이과대학 졸업생수의 1/10도 안되기 때문에 병원에는 일반적으로 의사의 수가 많고 15-20명이 되는 병원에도 주임약사나 주주임 약사가 없을 수도 있다.
중약사는 중의대학의 중약학부 졸업생이나 대학졸업생이 되는 데 주로 연구사업에 종사하고 병원의 중약방에 종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서 그 수가 서약사보다 더 적고 병원에는 중약 전문지식을 갖춘 약제사만 있는 경우가 많다.
④ 의료시설
중국의 의료시설은 크게 일반병원, 요양소, 모자보건센터, 보건소, 응급치료소, 보건진료소 등으로 구분된다. 1949년 이래로 중국의 모든 병원은 국가나 지방정부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국영 내지는 지자체 병원인데 정부는 1980년부터 병원을 하나의 사기업으로 운영책임을 의사를 비롯한 보건의료인력에 위임하였다.
이들 병원의 형태는 중의병원, 서의병원, 중?서의 결합병원(어느 경우든 중?서 양쪽 모두 포함. 단, 중의 병원은 서의에 대한 중의의 비율이 90%정도며 서의 병원은 그 비율이 반대임. 중?서의 결합병원은 각각 50%씩을 차지함) 등이 있다.
요양소는 노동조합이나 산업체가 운영하는 것으로 문화혁명 당시 문을 닫았다가 다시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모자보건센터의 경우 현 단위에 존재하며 분만이나 간단한 예방 및 치료를 담당하여 분만 가능한 여성과 어린이의 진료를 담당하고 있다.
보건소는 인민지역구나 도시의 구에서 주로 외래환자를 대상으로 진료를 하며 응급진료소는 대도시의 병원에 부속되어 있다. 생산연대의 단위에서 전체의료제도 안으로 들어오는 입구 역할을 하고 있는 보건진료소는 필요에 따라 환자를 후송할 수 있으며 농촌의사가 그 조수와 함께 상주하며 질병의 치료, 예방 접종, 가족계획에 대한 상담을 수행한다.
⑤ 재원조달
의료재원은 저소득 빈곤가구를 위한 공적부조와 유소득층을 위한 사회보험, 그리고 본인부담 등 세 가지의 재원이 있다. 도시와 농촌이 각기 다른 재정을 가지고 있는데 도시지역의 주민은 대부분이 정부나 기업체에 고용되어 있어 이들은 고용주가 보험을 책임지고 있고 농촌주민은 체계적인 재원을 가지고 있지 못한 실정에서 개인지불 방식으로 의료재원이 조달된다.
(a) 도시지역
사회보험으로 노동보험과 공무원고용보험이 있고 국가의 공적부조가 있다. 약 37%의 인구가 대도시에 거주하며 이 중 50%가 주정부(state)와 대집체 소유기업에 의한 노동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노동보험은 가장 큰 사회보장제도의 하나이며 약 2억 1백만명의 주정부 노동자와 퇴직자가 혜택을 받고 있다.
노동보험은 고용주가 의료비 전액을 지불하며 부양가족인 경우는 50%를 지불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의료비 전체를 상환해주는 기업이 줄어들고 있고, 1990년 이후에는 기본급의 8%~9%를 종업원이 부담하게 하고 부양가족에 대한 혜택도 제외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Therse Hesketh, 1997).
공무원고용보험은 공무원을 위한 보험으로 본인인 경우 100%의 의료비를 지불하고 있으나 부양가족에 대한 혜택은 없다. 그리고 중앙정부에서는 빈곤자를 위한 최저생활유지 목적을 위하여 공적부조로 10%정도를 보조하고 있다.
공적부조는 사회보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빈곤자를 위한 재정이며 그 대상자는 주로 농촌의 빈곤가정, 노인, 장애인등이 되며 의료혜택과 기타생활보조의 혜택을 주게 된다.
사회보험으로는 노동보험이 주종을 이루는데 많은 노동자들이 제각기 다른 사회경제 환경속에서 제각기 다른 보험내용으로 집행되고 있어서 국가에서 의도한 보험규정이 제대로 집행되지 못하고 있다.
도시노동자의 91.7%와 농촌노동자 2.3%만이 혜택을 받고 있다. 기타 보험으로는 도시근교농민들은 스스로 보험조합을 만들어 혜택을 받고 있으나 그 수는 농촌 노동자의 2.3%에 불과하다.
노동보험은 국가, 국유기업, 집체기업, 기타 개인기업등이 보험자로 되어 있고 기업이 일정 비율 기여금을 지불하고 소수 국가지급이 지원된다(장경섭, 1993). 중국에서의 의료보험은 제3지불자가 없고 고용주 자가보험시스탬이다.
즉 노동보험은 강제의무사항으로 기본임금에서 일률적으로 8%~9%를 공제하여 재원을 각 기업별로 따로 가지고 있다가 노동자나 부양가족, 퇴직자가 청구를 할 경우 지불되며 공무원고용보험은 정부 각 기관별로 지출 예산으로 할당하여 예산항목에서 지출되는 형식이다.
국유기업노동자, 집체소유제 노동자는 노동보험으로 각 기업체소유의 크리닉에서 의료혜택을 받는데 한 번 방문 시마다 등록진료비는 개인이 부담한다. 다른 의료기관에서 의료서비스를 받으면 본인 부담을 한 후 기업체로부터 상환 받는다.
이 경우 부양가족은 의료비의 50%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종업원 8인 이하의 개체경제나 종업원 8인 이상의 사영경제 노동자들은 전혀 노동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기타 외국 합작 및 외국자본 단독투자 기업은 노동보험 혜택을 받고 있다. 이것은 국유기업이나 집체소유제 노동자는 노동보험의 강제가입 대상이 되고 있으나 그 외는 노동 보험에 가입하도록 장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b) 농촌지역
문화혁명 이후 농촌사회를 유지해 왔던 CMS(협진의료체계, Cooperative Medical System)는 경제개혁과 함께 붕괴되었고 1980년 이후 농촌의 지역정부는 기본적인 보건의료를 제공하기 위한 조직을 지역마다 갖추게 되었다(Feng Xueshan, 1995).
1979년도까지는 농촌지역의 의료는 CMS가 잘 유지해 왔으나 1980년 이후 개인책임과 개인지불이 강조되면서 1990년에는 농촌 주민의 5.4%만이 CMS의 햬택을 받고 있다.
그 나머지는 개인지불을 하고 있다. 약 30%의 village가 민영보험을 시작하여 집체이익금으로부터 재원을 충당하고 있다. 도시지역에서 출발한 민영의료보험은 농촌집체사업장이 가입하는 것을 허용한 지역도 있다. 농촌지역에서도 공무원이나 기업노동자는 공무원고용보험이나 노동보험의 혜택을 받고 있으나 그 수는 10%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다양한 재원 조직에도 불구하고 1994년 현재 71%가 넘는 대다수의 인구는 본인 부담으로 의료를 제공받고 있다. 이유는 도시 주민은 어떤 형태로든 한 가지의 의료보험에 가입하고 있어 도시 주민의 13%정도가 개인 지불을 하는 반면 농촌의 81% 농민이 의료비를 직접 지불하고 있기 때문이다.
⑥ 제약산업
중국은 1978년 경제개혁 및 개방정책을 시작으로 경제체제의 변화를 시도하여 1978년부터 1994년에는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9.8%에 달하게 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가운데 의료비는 급속하게 상승하게 되었고 특히, 의약품비의 증가율은 의료비 상승을 훨씬 상회하게 되었다.
이것은 질병양상의 변화와 행위별수가제에 따른 의료기관들의 이윤동기 및 노령인구의 증가가 원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소규모 농촌 병원은 임상 약제능력이 없으며 현지 약사도 없고 많은 경우 약초를 이용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의약품 정책의 개혁을 시도하고 있는데 의약품의 생산, 분배, 이용, 행정 등에 걸친 포괄적 개혁을 시행하고 있다. 기존의 중앙통제공급체계(push system)를 시장중심의 수요체계(pull system)로 전환하여 분배망의 변화를 시도하였고, 병원이 제약회사나 소매상인으로부터 의약품을 직접 구입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환자들이 의약품을 구입하는 것이 용이하여 의약품의 남용 문제가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아 있고, 저질 의약품 생산이라는 부작용에 직면하고 있다. 또한 농촌 의료기관에서는 서비스 질이나 비용 문제와 더불어 의약품 남용이 증가하여 정부의 규제와 감독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3. 중의학의 현황 및 발전
1). 중의학사업과 정책의 변천사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 이후 중국공산당과 인민정부는 중의약사업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중의와 양의를 단결시키고 중의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정책을 펼쳐 중의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등 건국 후 중의학 사업은 신속한 발전을 이루어 왔다.
(1) 중의학의 발전시기
1949-1966년은 중의학사업의 발전시기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전까지는 국민당 정부의 중의학 말살정책에 의해 중의학 발전에 많은 제한이 가해지고 있었다. 실제로 1929년 국민당 정부 제1차 중앙위생위원회에서 <廢止舊醫 以掃除醫事衛生之障碍案(폐지구의 이소제의사위생지장애안)>의 결의 통과시킴으로써 중의학 교육학교의 설립을 불허, 신문잡지에 중의학 소개 금지, 중의사의 법정 전염병 치료예방 행위 금지, 중의사의 5년 내 양의사로의 전업 등의 규정을 발표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모택동 주석은 전통의학을 말살시키려는 국민당의 착오적인 주장을 비판하고 중의사업을 발전시키는 길이 몇 억 인구의 건강보건사업을 수행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지적하였다. 1950년 8월 전국위생사업워크숍에서 중서의결합을 국가 위생사업 지침의 구성부분의 일부로 채택하였다.
1954년 10월 20일 《인민일보》에서는 사론을 발표하여 사상을 통일하고 중의에 대한 인식을 제고해야 하며 중의를 경시하고 부정하는 관점을 바꿔야 하며 중의학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54년에 위생부에서는 중의사(奚)를 설립하여 부장관급이 중의관련 전반사업을 관리하게 하였다.
각 성, 시, 자치구의 위생청 아래에는 중의처를 설립하고 시, 현위생국 아래에는 중의과를 설립하였다. 이렇게 하여 중앙에서 지방까지 중의관리 행정망이 이루어졌다. 1955년 12월에는 중의연구원을 설립하였고 1956년 9월에 북경, 상해, 광주, 성도에 중의대학을 설립하였다. 1958년 모택동 주석은 ?중의약은 위대한 보물창고 이며 이를 발굴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고 지시하였다.
이런 적극적인 중의약 발전정책 아래 전국에서는 약 30만명의 중의약 종사자들이 국가소유 중의약 관련기구에 취직하게 되었다. 1966년까지 전국에서는 22개의 중의약대학을 설립하였고 중의약 고급인력 5,600명을 양성하였다.
중의약 교육의 질을 보증하기 위하여 2차례나 전국의 중의 전문가를 소집하여 통일된 교재를 편성하는 한편 중의약 고적과 유명 중의들의 경험들도 정리하였다. 중약재의 생산, 공급, 판매에 대해서도 관리를 강화하였다. 중국공산당과 정부의 지대한 관심과 지원 하에 중의약 사업은 놀랄 정도의 발전을 가져왔다.
(2) 중의약 사업의 저조기
1966-1978년 문화대혁명시기에 중의약사업은 저조기에 빠져들었다. 중의약 사업이 선명한 정책 하에 건전하게 발전하고 있는 와중에 문화대혁명의 타격을 받게 된 것이다. 중의사업은 봉건 미신이라는 공격을 받게 되었고 많은 중의약 기구가 폐쇄되고 전국의 중의약 대학은 10개소 남게 되였다. 중의병원은 330개소에서 129개소로 줄었고 중의약 종사자들은 30%가 감소하였다.
(3) 중의약 사업의 회복시기
문화대혁명으로 저조기에 빠졌던 중의약 사업은 점차 회복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박해를 받던 중의약 종사자들의 다시 직장에 복귀하였고 중의약 인재들도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지위와 명예도 회복되었다. 중의약사업의 인력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시를 통해 1만 명의 인재를 각 중의약기구에 충원하여 중의약 사업은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다.
1982년 《전국중의병원, 고등중의교육워크숍》에서는 당의 중의관련 정책을 확실히 집행하고 중의의 의료, 교육, 연구에 있어서는 반드시 중의의 특색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85년 8월《전국 중의사업과 중서의결합워크숍》에서 위생부는 현대의약과 전동의약을 발전시킴 있어서 중의와 서의를 동등한 위치에 놓아야 한다는 헌법 규정을 마련하였다.
한편으로 중의약은 중국 의료위생사업의 큰 장점이기 때문에 계승 발전시켜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선진적인 과학기술과 현대화적 수단으로 발전시켜 서로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4) 중의약사업의 새로운 발전시기
중국공산당의 지원 아래 중의약사업은 신속한 회복과 발전을 하게 된다. 전국의 현급 이상 중의원은 1978년의 171개에서 1179개로 증가하였고 중의약 종사자는 32만명으로 늘어났으며 중의원의 병상은 8.5만개에 달했다.
또한23개의 중의대학을 설립하여 중의약 교육은 일정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시(?)급 이상 중의학연구소는 46개소로 늘어 났으며 종합병원 및 전문병원의 95%이상은 중의과를 개설하였다.
중국중의약회, 중국중서의결합회, 각성시분회와 전문학회가 설립되면서 중의약 교육, 과학연구, 의료등 각 분야 사업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1986년 중앙정부는 중의약 사업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서 국가중의약관리국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고 위생부 부장관이 국장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는 중의약사업과 관리를 위해서 조직적 기초를 마련한 것이었다. 중의전문가들의 경험과 기술을 전수하기 위하여 1990년 6월 13일 국가인사부와 국가중의약관리국이 연합하여 《긴급처치를 취해 중의약 전문가들의 학술경험을 계승하기 위한 결정》을 반포하였다. 중의약관리국은 전문적인 기구를 설립하여 이 사업을 추진하였다.
2). 중의학의 전반적인 현황
(1) 중의 인력과 의료기관
의료인력과 의료기관의 수적이 비교에 있어서 중의와 중의 병원은 서의와 서의 병원에 비해 그 수가 적은 편이다. 2002년 현재 서의와 서의 병원은 각각 110만명, 11,000개소인데 반해 중의와 중의 병원은 각각 34만명과 2,700개소 이고, 외래 진료건수를 의미하는 외래량에 있어서도 전체 외래량 43억건 중에서 중의 외래량은 10억 건에 지나지 않는다(표6, 표7).
또한 보건사업에서 중의가 차지하는 비중은 25% 정도이고 중서의결합을 종합하면 33%정도가 된다. 이러한 특징들은 환자들이 우선적으로 서의사를 찾는 의료행태와 일차적으로 관련이 있으나, 국가 차원에서 중서의결합과 중의학의 세계화를 정책기조로 삼고 발전시키면서 점차로 그 수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구분 |
중의사 |
중의학 기사 |
서의사 |
인력 |
34만명 |
66만명 |
110만명 |
* 자료: 중의학 연구원 정보관리연구소 내부자료, 2002
구분 |
중의 |
서의 | |||||
중의병원 |
병상수 |
외래량 |
서의병원 |
위생원 |
위생실 |
외래량 | |
개수 |
2,700 개소 |
27만개 |
33억건 |
11,000 개소 |
40,000 개소 |
11만개 |
10억건 |
* 자료: 중의학 연구원 정보관리연구소 내부자료, 2002
(2) 급변하는 중의제도
중국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의대를 졸업하면 국가에서 다 직장을 배정해 줬지만, 지금은 스스로 직장을 찾아야한다. 또한, 5년제 중의대를 졸업하고 나면 1년 간의 임상실습을 거친 후에 의사면허 시험을 봐야한다. 하지만 실습기간에도 ‘의사’라는 호칭을 쓰고, 급여도 받으면서 일을 한다.
중국에서 의사의 직급은 주원(主院)의사, 주치(主治)의사, 주임(主任)의사, 조리(助理:3년제 과정 수료자)의사로 나눠져 있다. 전에는 본과 5년제를 졸업한 사람은 의사(醫師)라고 했고, 3년제를 나온 사람은 의사(醫士)라고 했는데 지금은 달라져 다 같이 의사(醫師)로 통일하였다.
5년제를 나온 경우를 직업의사(職業醫師)라고 하고 3년제를 나와 아직 직업의사 시험을 보지 않은 경우를 조리의사(助理醫師)라고 부른다. 조리의사도 직급에서 차이가 있고 급여에서 차이는 있으나 대외 진료실에서는 혼자서 독립자적인 판단에 따라 진료를 할 수 있다.
입원실 같은 곳에서는 직급이 높은 사람의 지시를 받는다. 전문학교 3년제 과정을 나온 사람은 큰 의원에는 들어오기가 어렵고, 지방에서 일을 많이 한다고 한다. 의학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지금은 5년제 과정에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지방으로 가면 아직 3년제 전문학교 과정도 적지 않다다.
(3) 중의약산업
중의학 산업에 있어서 산업 인력은 전적으로 개인차원의 교류를 통하여 형성된다. 화교 이민자들이나 한국의 유학생들, 소수의 외국인들이 전통의학 시술을 연마한다. 3,000개의 중의약 공장에서 생산하는 약재는 5억 달러의 수출 실적을 보이는데 이중 생약제가 97%, 정제가 3%를 차지한다.
반면, 침구재료의 생산에 있어서는 생산시설과 기술이 열악하여 거의 생산하고 있지 않고 고급재료의 경우 일본에서 대부분을 생산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약 6,700여 개의 제약기업이 있는데, 2000년 기준으로 중약 제약기업의 수는 약 1,100여 개소에 달한다. 중약제제의 생산량은 500억 RMB로 전년대비 31% 성장하였다. 주요 시장은 중국내 이며 주로 노인성 질환, 만성병, 난치병 및 보건약품 시장 등에 응용된다.
저급한 제품의 중복 생산을 막기 위해 중약품종 보호제도를 실시하고 있으며, 중성약은 순수 중국제품으로 타국의 특허를 침범하지 않기 때문에 WTO 가입 후에도 가장 영향이 적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생산 중인 화학 원료약은 1,400종, 제제약은 4,000여종, 중성약(中性藥, 한약과 양약을 가미한 형태의 약)은 품종을 기준으로 할 때 약 8,000여 종에 달한다.
화학원료약 생산량은 2000년 기준으로 43만 톤으로 원료약의 세계 2대 생산대국이다. 그 중 페니실린 등 항생제 및 비타민 등은 이미 세계 최대 생산 수출국이 되었다. 의약 생산 총량은 가격을 기준으로 하여 2,332억 RMB(34조원, 280억불)이다. 한국의 6조원(50억불)과 비교하면 막대한 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중의학 교육제도
중의학은 중국의 우수한 과학문화 유산으로 수천 년 동안이나 흥성하였고 근대 실험과학의 도전 앞에서도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이는 중국 중의학이 독특한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하고 설득력 있는 임상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역대로 중의학의 교육과 인재양성을 중시하였고 지속적인 교육개혁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중의학이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 중의학 교육의 발전현황
① 건국전의 중의교육
중의학 교육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의학교육제도를 설립하였다. 고대에서 중의약 인력을 양성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부자상전과 사도상전, 혹은 이 양자를 결합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서 교육하는 것이었다. 국가에서 의료인력 양성을 시작한 것은 남북조 시기였고 당? 송 시기에 들어서서 의학교육은 더욱 발전하였다.
서기 624년에 당나라는 태의서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의료기구이면서도 교육기구이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5개 과로 나누어서 공부를 하였는데 《속문》과 《신농본초경》은 필수과목이었고 월, 계(貼), 년으로 시험을 보게 하였다.
태의서 내에는 약원이 부설되어 있었는데 학생들이 배운 지식을 실천하는 장소였다. 태의서는 행정, 교학, 의료, 약공 4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와약 을 동등하게 중시하였고 규모가 방대하였으며 시험이 엄격하여 세계에서 처음으로 일정한 모양을 갖춘 중의학교라고 불 수 있었다.
송(?)나라 때에는 태의국을 설치하여 전문적으로 의학교육을 책임지게 하였다. 이때에는 교육과 의료를 분리시켜 의학교육을 독립적으로 발전시켰다. 원(戟)나라 시기에는 전쟁이 빈번하여 영토의 확장에 따라 외국과의 문화교류를 촉진하였다.
명나라와 청나라에 이르러 중의학은 계속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명나라 자연과학의 발전과 청나라의 도서사업의 발전은 명나라와 청나라시기에 중요한 발명과 창조로 나타났다.
② 건국 후의 중의교육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정부는 중의약 사업의 발전과 인력배양을 중시하였다. 건국초기에는 전국의 각성, 시에는 중의 단기 연수학교와 중의학교를 설립하였다. 1956년에 처음 설립한 4개 중의대학으로 시작하여 지금까지 대만성 외에는 모두 30개 성, 시, 자치구에 27개 중의약 대학교와 3개 전통의약 학교를 설립하였다.
30개 중의대학중, 위생부 소속 대학교는 북경중의약대학이다. 중의약관리국에 직접 소속되어 있는 학교는 북경중의약대학, 광주중의약대학, 북경침구골상학원이 있다. 의과대학이나 중의약 인재의 양성에 있어서는 정규적인 고등교육(대학교), 중등교육(전문대학)과 졸업후의 평생교육, 야간대학, 방송통신대를 통한 독학 등 여러가지 형식이 있다.
정규적인 중의약 대학교에서의 인재양성은 박사, 석사, 학사, 전문대생등 4개의 층을 이루고 있다.
중의교육은 40년의 발전을 거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앞에서 얘기한 27개 중의대학 외에 1990년에 이르러 13개 의대에서는 중의, 중약학과를 개설하였다. 중등중의약대학과 중의약전문학교가 71개, 87개의 중등위생학교에서 중의, 중약, 침구와, 민족의학 등 학과를 설치하였다. 1978년 이후 중의학의 대학원 교육도 많은 성과를 이루고 있다.
지금 20개 중의대학과 5개 중의학 연구기구에서 석사연구생을 배출하고 있다. 박사연구생은 18개학과에 50개 전공 분야가 있으며 석사연구생은 22개학과에 230개 전공분야가 있고 중서의 결합 연구생은 75개의 전공분야가 있다.
17년을 거쳐 모두 석사 연구생과 박사 연구생을 2500명을 배출하였다. 중의학 교육기구의 교사는 8천 여명이 있으며 그중 교수, 부교수급 강사가 2042명으로 전체의 25.4%를 차지한다.
중의학 평생교육사업에 있어서도 방송통신대와 야간대학이 38개, 재학생이 1.5만 명이고 졸업생이 4만 명에 달한다. 약 1/3의 중의학 대학교는 외국유학생을 받아들이고 있다. 세계위생기구가 중국에 설립한 국체침구훈련센터에서는 120개 나라를 위해서 2천 여명의 침구인재를 양성하였다.
세계위생기구의 의뢰를 받아 중국에서는 국제침구고시위원회와 시험센터와 국가시험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세계 각 나라에서 시험에 합격한 자에게는 합격증서를 발급하고 있다.
4). 전통의학으로서의 침술
침술은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많은 과학적 연구가 이루어진 전통의학 중의 하나이다. 중국에서는 중서결합의는 물론이고 현대의학만을 전공한 서의도 침술을 사용할 수 있어 치료수단의 사용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침술을 전통의학의 핵심 의술로 하여 발전시켜온 동북아시아 지역 중에 가장 일찍이 의료제도를 정비한 나라가 중국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1) 침의 기원
원시 자침도구(刺鍼道具)로써 석기(石器)는 폄석(?石), 즉 돌침이라고 한다. 『소문?보명전형론』(素問?寶命全形論)에서는 「폄석(?石)은 크고 작은 것으로 만들었다」고 하고, 5~6세기 무렵의 전원기(全元起)의 주(註에)는 「폄석(?石)은 고대의 외과치료법(外科治療法)인데 그 이름은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침석(鍼石)이고, 다른 이름은 폄석(?石)이고, 또 다른 이름은 참석(?石)이지만 사실은 같은 것이다. 예전에는 주철(鑄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돌(石)로 침(鍼을) 만들었다」라고 했다.
폄석(?石)을 질병치료에 응용한 것은 원시시대에 광범위하게 사용된 석기(石器)의 특징과 같다. 중국의 원시시대(原始時代)는 또한 태고적부터 1만년 전까지의 구석기시대와 1만년 전에서 4천년 전까지의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로 나눌 수 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첨상석기(尖狀石器)와 괄삭석기(刮削石器)종류의 타제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하여 옹양(癰瘍)을 찔러서 째고 농혈(膿血)을 빼 내었다. 이와 같은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서 석기(石器)로 찔러서 치료하는 응용범위도 점차 확대되어 갔다.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에 이르러서는 갈아서 정교(精巧)한 석침(石鍼)을 만드는 기술을 터득하여 마침내 전문적인 의료기구(醫療器具)인 폄석(?石)을 생산함과 동시에 더욱더 폄석(?石)의 용도가 발전되었다.
돌침에 대해서 중국의 고서 산해경에는 “고씨(高氏)의 산에는 옥이 많고 그 아래에는 돌침 많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고씨는 시조가 고주몽인 고구려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폄석이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송평동 패총에서 뼈침(骨鍼)과 함께 구석기 시대 유물로 발굴되었다. 또 산동성(山東省) 일조현(日照縣)에 있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말기의 무덤 속에서도 순장(殉葬)한 폄석(?石) 두 자루가 발견되었다.
산동성 일조현에서 발굴된 폄석은 길이가 8.3㎝의 것과 9.1㎝의 것으로, 뾰족한 끝은 삼릉추형(三稜錐形)과 원추형(圓錐形으)로 나누어지며, 이것들은 피를 빼고 경기(經氣)를 조화시키는데 상용되던 것이었다.
내몽고(內蒙古) 다륜현(多倫縣)에 있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유적지에서는 한끝은 납작하고 호형인(弧形刃) 농양(膿瘍)을 절개하는 데 사용할 수 있고, 다른 한 끝은 사릉추형(四稜錐形)으로 피를 빼는 데 사용할 수 있는 4.5㎝ 길이의 폄석(?石)을 한 자루 발견한 적이 있다.
폄석 실물(?石實物)의 발견은 자침(刺鍼) 기원이 원시시대(原始時代)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밝혀주는 증거(證據)가 되고 있다.
(2) 침(뜸)의학의 성립
지금으로부터 4천여년 전(前)인 기원전 21세기부터 중국은 하은시대(夏殷時代)로 진입하여 기원전 476년까지는 하(夏), 상(商), 서주(西周), 춘추(春秋) 등의 몇몇 나라를 거치게 되었다. 3천여 년 전에 상대(商代)의 갑골문(甲骨文) 속에는 침구에 관한 상형문자가 있었다.
석기시대를 막 지나 청동기시대로 접어들어 금속의침(金屬醫鍼)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한편 폄석도 여전히 병을 치료하는 주요기구로 남아 있었다.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철학사상이 이 시대에 발생하였다. 의학영역에 있어서도 인체(人體)와 천지(天地)의 상응적인 관념이 나타났고, 맥(脈), 혈(血), 기(氣), 정(精), 신(神), 오성(五聲),
중국역사연대표 | |||||
시대구분 |
기원년대 | ||||
先史時代 |
-B.C.21세기 | ||||
夏 |
B.C.21세기
-B.C.16세기 | ||||
商 |
B.C.16세기
-B.C.11세기 | ||||
周 |
西周 |
B.C.11세기
-B.C.771년 | |||
東周 |
B.C.770년
-B.C.256 | ||||
春秋 |
B.C.770년
-B.C.476 | ||||
戰國 |
B.C.475년
-B.C.221 | ||||
秦 |
B.C.221년
-B.C.207 | ||||
漢 |
西漢 |
B.C.206년
-A.D.24 | |||
東漢 |
魏 |
220-265 | |||
蜀 |
221-263 | ||||
吳 |
222-230 | ||||
晉 |
西晉 |
265-316 | |||
東晉 |
317-420 | ||||
南
北
朝 |
南朝 |
宋 |
420-479 | ||
齊 |
479-502 | ||||
梁 |
502-557 | ||||
陳 |
557-589 | ||||
北朝 |
北魏 |
386-534 | |||
東魏 |
534-550 | ||||
北齊 |
550-577 | ||||
西魏 |
535-556 | ||||
北周 |
557-581 | ||||
隋 |
581-618 | ||||
唐 |
618-907 | ||||
五代 |
後梁 |
907-923 | |||
後唐 |
923-936 | ||||
後晉 |
936-947 | ||||
後漢 |
947-959 | ||||
後周 |
951-960 | ||||
宋 |
北宋 |
960-1127 | |||
南宋 |
1127-1279 | ||||
遼 |
916-1125 | ||||
金 |
1115-1234 | ||||
元 |
1271-1368 | ||||
明 |
1368-1644 | ||||
淸 |
1644-1911 | ||||
中華民國 |
1911-1949 | ||||
中華人民共和國 |
1949成立 |
오색(五色), 오미(五味), 육기(六氣), 팔풍(八風) 등에 대해서 초보적인 인식이 생겨났다.
중의(中醫)의 기초이론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기원전475?221년)에서 진(秦:기원전221~207년)과 서한(西漢:기원전 206?서기 24년)까지는 중국의 봉건사회제도(封建社會制度)가 수립되고 다져지는 시기였다.
철기(鐵器)의 응용범위가 확대됨에 따라서 폄석이 금속의침(金屬醫鍼)과 함께 쓰여지는 단계를 거쳐 점차 금속의침(金屬醫鍼)으로 대체되었다.
자침(刺鍼)을 의료에 활용하는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침구학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영추』(靈樞)에 따르면 당시의 금속의침(金屬醫鍼)에는 9종류의 서로 다른 형상과 용도의 침이 있었는데 「구침」(九鍼)이라 칭했다고 한다.
1968년 하북만성(河北滿成에) 있는 서한유승(西漢劉勝)의 무덤(기원전 113년)에서 4개의 금침(金鍼)과 5개의 손상된 은침(銀鍼)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우리들에게 고대 구침(九鍼) 원형(原形)의 일부분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 시기의 의가(醫家)들은 모두가 여러 가지 의료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기원전 5?4세기의 의학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편작(扁鵲:秦越人)은 임상각과(臨床各科)에 능통하여 폄침(?鍼), 화구(火灸), 탕액(湯液), 안마(按摩), 열울(熱蔚) 등을 응용한 각종 치료법으로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여 주었다. 일찍이 자법(刺法)으로 병세가 위독한 태자(太子)를 그가 구해주었다는 기록이 사서(史書)에 실려 있다.
기원전 2세기의 저명한 의학가(醫學家) 순우의(淳于意)는 침뜸과 약치(藥治)에 능통하였다. 『사기』(史記)에는 그가 치료해 준 25명에 대한 진료기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4명은 침구치료를 한 것이다.
전국시기(戰國時期)에는 의약학에 대한 집대성을 시작하였고, 침구학술과 유관한 저작도 나타났다.
1973년 장사시(長沙市) 마왕퇴(馬王堆) 3호(三號) 한묘(漢墓)에서는 경맥(經脈)이 기재되어 있는 두 가지 백서(帛書)가 출토되었는데 모두 선진시대(先秦時代)에 편찬된 것으로 경락이론(經絡理論)의 초기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족비십일맥구경』(足臂十一脈灸經)과『음양십일맥구경』(陰陽十一脈灸經)이라는 이 유물은 현존하는 최초의 경맥학설(經脈學說) 문헌이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황제내경』(黃帝內徑)은 황제(黃帝)의 이름을 빌린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서한시대(西漢時代)까지의 의학이론(醫學理論)저서로서, 『영추』(靈樞:원명은 『九卷』혹은 『黃帝鍼經 』)와 『소문』(素問)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선인들의 문헌을 모아 정리한 바탕 위에서 음양(陰陽), 오행(五行), 장부(臟腑), 경락(經絡), 경혈(經穴 : ?穴), 정신(精神), 기혈(氣血), 진액(津液), 오지(五志), 육음(六淫) 등으로 기본이론을 삼았다.
여기서는 침뜸이 주된 의료기술이며, 무신론관점(無神論觀點), 전체관점(全體觀點), 발전?변화의 관점, 인체와 자연계의 상응적(相應的) 관점에서 인체의 생리(生理)와 병리(病理) 그리고 진단(診斷)의 요령과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원칙을 논술하였으며, 침구학(鍼灸學)의 기초이론을 세웠다.
『황제81난경』(黃帝八十一難徑)과 『명당공혈침구치요』(明堂孔穴鍼灸治要) 등의 서적도 이 시기에 나타났는데, 역시 침구기초이론과 관계되는 저서이다.
의정제도(醫政制度)도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뚜렷이 확립되었다. 무(巫)와 의(醫)가 분명히 구분되었으며, 무관(巫官)과 의관(醫官)의 직무도 나뉘어졌다. 『주례』를 보면 의관의 직을 의사(醫師), 식의(食醫), 질의(疾醫: 現 內科醫師), 양의(瘍醫: 現 外科醫師), 수의(獸醫)로 나뉘어져있다.
동한(東漢:서기25?220년)과 삼국(三國:서기220?265년)시기에 도 중국의 의약학은 진전을 거듭한다. 많은 유명한 의학자들은 모두 침구의 연구를 매우 중시하였다.
동한(東漢) 말기 화타(華?)의 침구에서는 취혈을 적게 하되 정확하게 함과 동시에 침감(鍼感)의 전도(傳導)에 매우 주의하였다고 한다. 그는『침중구자경』(枕中灸刺經)이라는 저서도 남겼다. 이시기 유명한 의학자 장중경(張仲景)의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에서도 역시 여러 차례 자구(刺灸), 소침(燒鍼), 온침(溫鍼)등의 방법과 침약결합(鍼藥結合)을 주목하며, 변증시치(辨證施治)를 제시하였다.
이미 침구학의 기초이론(基礎理論)이 있었으나 경혈(經穴)의 명칭과 위치는 여전히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 의견(意見)의 일치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감숙성(甘肅省) 무위현(武威縣에)서 출토된 동한의간(東漢醫簡)에는 뜻밖에 족삼리(足三里)의 혈위(穴位)를 「슬하5치」(膝下五寸)라고 정하였다.
화타(華他)가 취하는 배유혈(背兪血)은 모두 「협척(挾脊)에서 1치(一寸) 떨어진 곳」이며 제혈(諸穴)의 부위와 명칭도 다른 책과 차이가 매우 크다.
『소문』(素問), 『황제침경』(黃帝針經), 『명당공혈침구치요』(明堂孔穴鍼灸治要)등 황제(黃帝)의 이름을 빌린 3권의 저서마저도 체제가 이룩되지 않은 채 오랜 세월동안 전해 내려오면서 이미 빠지거나 착오가 난 부분이 많았다.
사정이 이러하여 위진(魏晋)의 저명한 의학자(醫學者)인 황보밀(皇甫謐)은 위(魏)의 감로(甘露:서기256?260년)에 황제의 이름을 빌린 앞의 세 저서의 침구내용(針灸內容)을 모아서 그 중복된 부분을 제거하여 『침구갑을경』(鍼灸甲乙經)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편찬하였다.
모두 349혈이 수록되어 있고, 12권 128편으로 나뉘어졌으며 장부(臟腐), 기혈(氣血), 경락(經絡), 경혈(經穴), 맥진(脈診), 자구법(刺灸法), 임상각과병증(臨床各科病症)의 침구치료의 순서에 의하여 편찬됨으로써 비교적 완전한 체계를 갖춘 하나의 침구전문서가 이루어져 후세(後世)의 침구학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전란은 진(晋:서기265?420년)과 남북조(南北朝:서기420?581년) 시기에도 계속됐다.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도 대부분의 의술자들은 침뜸을 장려하고 응용에 편리하도록 하여 일반 사람들도 대략적인 뜸 치료법을 알게 되었다. 진대(晋代)의 명의(名醫) 갈홍(葛洪)은 『주후구졸방』(?後救卒方:후에 『?後備急方』으로 개칭)을 편찬하여 의약지식을 보급하였는데 그 중 대부분이 침뜸치료법이었다.
진말(晋末)에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까지의 서희일족(徐熙一族)은 역대에 걸쳐서 의술(醫術)에 능하였고 서추부(徐秋夫), 서문백(徐文伯), 서숙향(徐叔向) 등은 모두 침뜸 역사상 유명한 인물들이다. 이 시기에 침구전문서적(鍼灸專問書籍)이 현저히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언측도』(偃側圖)와 『명당도』(明堂圖)등과 같은 침구경혈도(鍼灸經穴圖)도 출현되었다.
중국의 침뜸술 서적이 한반도로 전해진 시기도 남북조시대 말경이다. 중국 진무제 천가(서기 564년-天嘉 5년)에 중국 강남의 오(吳)나라 사람 지총(知聰)이 내외전, 약서, 침구명당도(鍼灸明堂圖) 등을 가지고 고구려로 들어가서 침뜸의술을 전한 기록이 남아 있다. 지총은 그 후 일본으로 갔다고 문헌으로 전해진다.
전문 침뜸시대
수(隋:서기 581?618년)와 당(唐:서기618?907년)은 중국 봉건사회(封建社會)의 경제(經濟)와 문화(文化)가 번영한 시기이다. 진(秦) 나라 시대부터 구비되어 오던 의관제도(醫官制度)는 수당시대부터 전문과로 완비된다. 전문과(專門科)로 발전한 침뜸분야에는 「침사」(鍼師)와 「구사」(灸師)를 두기 시작했다.
수나라의 의관제도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당나라에는 태의서(太醫署)에 령(令) 2인(從7品下), 승(丞) 2인, 의감(醫監) 4인, 의정(醫正) 8인(종 9품하), 부(府) 2인, 사(史) 4인, 주약(主藥) 8인, 약동(藥童) 24인, 약원(藥園師) 2인, 약원(藥園生) 8인, 장고(掌固) 4인, 의생(醫生) 40인, 의공(醫工) 100인, 전약(典藥) 2인, 의사(醫師) 20인, 안마생(按摩生) 15인,
중국의학의 전문과 발전 | |||||||||||||
당(唐) => 원(元) | |||||||||||||
鍼灸科 |
醫科 |
按摩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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呪禁科 | ||||||||||
鍼灸科 |
大方脈科 |
小方脈科 |
雜醫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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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骨科 |
金瘡腫科 |
眼科 |
口齒科 |
風科 |
咽喉)科 |
産科 |
祝由科 |
禁科 | |
당(唐)대에 침구과. 의과, 안마과, 주금과로 4개과 이던 것이 송(宋)대에는 9개과였다가 원(元)대의 분과는 13개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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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마공(按摩工) 16인, 침생(鍼生) 20인, 침공(鍼工) 20인, 금주생(禁呪生) 10인, 금주공(禁呪工) 8인을 두었다.
침뜸를 전문으로 하는 정부관서의 의료인이 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태의서(唐太醫書)는 의약교육(醫藥敎育)을 관장하였으며, 4개의 의학전공과 하나의 약학전공(藥學專攻)으로 나누어졌다. 그 체계는 각 과별로 박사(博士), 조교(助敎), 사(師), 공(工), 생(生)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침구(鍼灸)에 있어서는 침박사(鍼博士) 1인에 침조교(鍼助敎) 1인, 침사(鍼師) 10인, 침공(鍼工) 20인, 침생(鍼生) 20인 씩을 배치했다. 침박사(鍼博士)는 침생(鍼生)의 교육을 맡았는데, 경맥(硬脈)과 경혈(經穴), 부침활삽삼후(浮沈滑颯三候)와 구침(九鍼)을 위주로 보사법(補寫法)을 가르쳤다.
수에서 초당(初唐)까지의 저명한 의학자 견권(甄權), 손사막(孫思邈) 등은 모두가 중의각과(中醫各科)와 침뜸에 정통하였다. 당정부(唐政府)는 정관년(貞觀年:서기627?649) 기간에 견권 등의 사람들에게 『명당도』(明堂圖)의 교정작업을 진행시켰다.
손사막이 엮은 바 있는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과 『천금익방』(千金翼方)등의 서적에는 전대(前代) 각가(各家)의 침구치병경험(鍼灸治病經驗)이 광범위하게 수록되어 있다. 손사막은 또한 『명당삼인도』(明堂三人圖)를 그렸다. 그 중 12경맥은 5색으로 만들었고, 기경팔맥(奇經八脈)은 녹색으로 만들었으며, 3인의 경혈은 모두 656으로 이루어져 역사상 최초의 채색경락경혈도(彩色經絡經穴圖)가 만들어졌다.
이 밖에 당(唐)대의 양상선(楊上善)이 엮은 『황제내경명당』(黃帝內徑明堂―7세기)은 황제명당(黃帝明堂)의 학술내용을 정정하여 더욱더 발전시킨 것이었다. 왕도(王燾)가 편찬한 『외대비요』(外臺秘要:서기752年)는 제가(諸家)들의 뜸법을 대량 수록하였다.
이 시기에는 또한 전문병(專門病)을 대상으로 한 저서도 나왔다. 가령 당대(唐代) 최지제(崔知悌)의 『골증병구방』(骨蒸病灸方)에는 노병(노病)의 뜸치료법을 전문적으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서기 862년 이전에 간행된 『신집비급구경』(新集備急灸經)은 중국 최초로 나무판에 인쇄를 한 의서(醫書)이며, 급증(急證)의 구치료법(灸治療法)을 전문적으로 다루었다.
5대(五代:서기907?960년), 요(邀:서기916?1125년), 송(宋:서기960?1279년), 금(金:서기 1115?1234년), 원(元:서기 1206?1368년)의 시기에 인쇄술(印刷術)의 광범위한 응용으로 의약학문헌의 축적이 촉진되었고, 의약학의 전파와 발전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유명한 침구가(鍼灸家) 왕유일(王惟一)은 북송정부(北宋政府)의 지지 아래 황제명당(黃帝明堂)을 다시 고증하여 교정하였으며, 경혈의 위치와 소속경맥(所屬硬脈)을 수정하였고, 경혈의 주치병증을 보충하여 서기 1026년에 『신주동인수혈침구도경』(新鑄銅人?穴鍼灸圖經)을 편찬하였는데 조각하여 비석에 새겨 정부에서 공포하였다.
서기 1027년, 왕유일(王惟一)은 두 개의 동인모형(銅人模型)을 만들어 외부에는 경락경혈을 조각하였고, 내부에는 장부(臟腑)를 넣어, 교학(敎學)과 침구사(鍼灸師) 시험용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업은 경락경혈이론과 지식의 통일을 촉진시켰다.
남송(南宋)의 침구가(鍼灸家) 왕집중(王執中)이 엮은 『침구자생경』(鍼灸資生經)은 임상경험을 중시하여 민간경험(民間經驗)을 포괄함으로써 후세에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원대(元代)의 저명한 의학자 활수(滑壽)는 경락순행(經絡循行)과 그 경혈의 관계를 고증하여 교정한 『십사경발휘』(十四經發揮:서기 1341년)를 저술하여 더욱 더 경락경혈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에는 침뜸에 능한 명의가 아주 많았고, 저서 또한 대단히 풍부하였다. 어떤 의가(醫家)들은 황제명당(黃帝明堂)의 기초에서 어느 한 방면의 이론과 기술의 발전에 치중하기도 하였다. 『소아명당침구경』(小兒明堂鍼灸經), 『비급구법』(備急灸法), 『옹저신비구경』(癰疽神秘灸經) 등의 서적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침뜸이 각과(各科)에서 깊이 있게 발전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남송(南宋) 초기의 석홍(席弘)은 대대로 모두 침구(鍼灸)를 전업(專業)으로 하며 특별히 자법(刺法)을 강의하고 연구하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에 두재(竇材)가 엮은 『편작심서』(扁鵲心書)에는 소작구법(燒灼灸法)을 극구 존중하였는데 그 법은 소작통(燒灼痛)의 방지와 함께 전신마취로까지 진행되고 있다.
당시에 양개(楊介)와 장제(張濟)는 직접 시체의 해부를 관찰하여 얻은 해부학의 지식으로 침구취혈을 지도하기를 주장하였다. 금(金)나라 시대의 하약우(何若愚)와 금원(金元)의 명의 두한경(竇漢卿)은 모두 자오유주법(子午流注法)을 존중하여 시간에 따라서 취혈하는 것을 제창하였다.
송나라 시대의 의학교육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태의국 9과에 학생수는 300인인데, 대방맥(大方脈: 現 內科) 120인, 풍과(風科) 80인, 소방맥(小方脈: 現 小兒科) 20인, 안과(眼科) 20인, 창종겸절양(瘡腫兼折瘍科) 20인, 산과(産科) 10인, 구치겸인후과(口齒兼咽喉科) 10인, 침구과(鍼灸科) 10인, 金?兼書禁科 10인”이라고 했다. 풍과가 80인인데 비하여 침구과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침과 뜸을 포함한 별도의 전문분야로 나뉘어 져 있었고, 민간에서 널리 쓰이고 있었다.
침구학술은 명(明)나라 시대에 고도로 발전하여 유명한 의학가도 더욱 많아지고 연구도 더욱 심도있고 광범위하였다. 명대 초기의 진회(陳會), 중기의 능운(能云), 후기의 양계주(楊繼州) 등은 모두 전국에 이름난 침구학자들로서 침구학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명대 침뜸에서 특기할 사항으로 첫째로 전(前) 시대의 침구문헌을 광범하게 수집?정리한 것이다.
『보제방?침구문』(普濟方?鍼灸門:서기1406년), 서봉의 『침구대전』(鍼灸大全:15세기), 고무의 『침구취영』(鍼灸聚英(서기:1529년), 양계주가 개인의 경험을 총결한 기초 위에 다시 관련 문헌을 증보하고 수집한 『침구대성』(鍼灸大成:서기1601년), 오곤의 『침방육집』(鍼方六集:서기1618), 장개빈의 『유경도익』(類經圖翼:서기1624년)은 모두 역대 침구문헌의 서적을 정리한 것들이다.
다음으로 자침수법(刺針手法)의 연구이다. 단식수법의 기초 위에서 20여종의 복식수법으로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법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학술논쟁을 전개하였으며, 왕기의 『침구문대』(鍼灸問對:서기1530년)는 바로 논쟁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세째로 뜸법은 뜸쑥심지를 사용한 소작구법(燒灼灸法)에서 애권(艾卷:뜸쑥두루말이)을 사용한 온열구법이 나온 것이다. 14세기에 애권구법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약물을 첨가한「뇌화침법」(雷火鍼法)과 「태을침법」(太乙鍼法)이 생겨났다.
넷째로는 역대에 경혈에 속하지 않는 침구부위에 대해서 「기혈」(寄穴)로 정리를 하였다는 것이다.
청(淸)나라 시대에는 개국에서 아편전쟁까지의 시기(서기 1644?1840)에 의료인들은 약을 중시하고 침을 경시하여 침구의 발전이 별로 없었다. 18세기에 오겸(吳謙) 등의 사람들은 왕의 명령으로 가결(歌訣)과 삽화를 위주로 한 『의종금감?자구심법요결』(醫宗金鑑?刺灸心法要訣)을 편찬하여 실용에 적합하게 했다.
『침구봉원』(鍼灸逢源)을 엮은 이학천은 변증취혈과 침과 약의 병용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361개의 경혈을 완전히 열거하여 놓았다. 이밖의 저술도 많았지만 그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청왕조는 서기 1822년 ‘자침화구(刺針火灸)는 임금의 명령이 아니고서는 연구할 수 없다’며 태의원의 침구과(鍼灸科)를 없애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침뜸의학의 발전에 장애가 생겼으나 침뜸 자체의 경제성과 간편함 신속함 등으로 여전히 일반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민간에 뿌리를 내려갔다.
침뜸의학의 연구는 다른 시대와 다름없이 계속되어 근 백년동안에 침뜸 관련 의학 저술이 140여 건에 달했다. 특히 신해혁명이후에 간행물이 많았다. 1931년에는 승담안(承淡安)이 중국침구연구사를 창립하자 이를 본받아 각지에서 속속 침구학술단체들을 설립하여 침뜸 의학의 지식을 보급해 나갔다.
(3) 침술의 교육제도
중국의 침술 교육제도는 그 대상에 따라 본과과정과 전문과정 및 연수과정으로 나뉘어 진다. 본과 과정은 학위과정으로서 졸업후 의사가 되려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졸업시험을 통해 졸업장과 학위증을 받는다.
3학년 1학기까지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2학기부터는 병원에서 수업과 임상실습을 병행하게 된다. 졸업을 하면 중의사 학위증을 갖는데 중의전공 중의사, 침구전공 중의사 등과 같이 전공 과목별로 세분화되어 표기된다. 그 외에도 본과과정에서는 전문의제도와 7년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2000년 졸업생부터 의무적으로 전문의 시험을 쳐야 하는데 본과 과정을 마치고 1년의 임상실습과정(인턴) 후 이론시험(과목 수 10 ~ 17)을 쳐서 전문의(전문개업의사)가 된다. 중국인들은 이 시험을 치르고 있고, 외국인도 시험을 칠 자격은 있지만, 아직 외국인 대상 시험은 실시되지 않고 있다. 본과 7년 과정은 졸업 증서에 7년 과정이라 명시된다.
일반 학부에 대학원 과정이 추가된 것이다. 마치면 학사 및 석사 학위를 가진다. 입학하기는 5년 과정보다 어렵고, 교육의 강도도 더 높다. 박사 학위에 뜻이 있는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7년 과정에 지원한다.
침구 전문과정은 특별 연수 과정으로서 졸업 후에 수료증을 지급 받는데 개업은 하지 못한다. 중의학 전공 3년, 침구학 전공 3년, 추나학 전공 3년 과정이 있다. 이미 의사 자격이 있는 서양의사나 취미로 침구를 배우려는 사람 등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전문 과정을 마친 후 병원에서 시용기(試用期) 1년을 마치면 개업 보조 의사고시에 응시할 수 있다.
개업 보조 의사가 되어 병원 등에서 2년 간의 임상 실습을 거치면, 개업의사 자격 고시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연수과정은 세미나 과정으로서 중의 내과학 , 중약학 ,침구학 ,추나학: 1개월~1년 과정이다. 졸업후에는 수료증을 발급하는데 중국인들이 이 과정에 참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유럽계 의사들이 세미나 목적으로 과정을 거치거나, 그 외의 외국인들이 세미나목적으로 배우고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국 침구 교육제도의 또 한가지 특징은 국가가 명노의(名老醫)를 지정하여 제자를 둘 수 있게 하고 제자로 뽑히면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사승제도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3년 동안 명노의(名老醫)가 임상활동을 하는 것을 하루 종일 따라다니면서 기록한다.
그 기간의 임상 기록을 책으로 편찬한 것이 제자의 논문이 된다. 이 과정을 마치면, 제자는 학위를 따는 것이 아니라 한 등급을 승진한다. 예를 들어, 주치의는 부주임으로 승진한다.
중국에서 의사가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자학고시(검정고시)를 거치는 것이다. 고졸 이상이 응시할 수 있는데 직장에 다니면서 야간에 공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년에 원하는 과목에 응시할 수 있다.
전 과목에 통과하면, 3년제 전문 과정을 나온 의사로 취급받아 1년 동안의 임상과정을 마친 후 보조 의사가 된다. 보조 의사는 그 후 병원에서 2년 동안 임상과정을 거처 5년제 본과를 졸업한 의사로 대우를 받게 된다.
5). 중국 침술의 현황 및 발전
중국이 전통의학의 핵심으로 발전시켜온 침술은 그 기초를 두고 있는 원리가 서양의학과는 확연히 달라 의과학적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NCAHF(National Council Against Health Fraud)에서는 침술의 효과를 기대, 암시, 반대자극, 시술자의 조건 그리고 다른 심리학적 기전에 의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견서를 내놓기까지 하였다. 즉, 침술의 효과는 거의 대부분이 암시와 위약효과(placebo effect)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침술의 신경?화학적 작용기전에 관하여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임상연구들에 따르면 침술이 신경관련질환, 호흡기질환, 소화기 질환 뿐 아니라 정서적인 장애와 같은 다양한 영역의 질환치료에도 효과적이라고 보고하고 있다(Ka Kit Hui, 1998).
미국 국립보건원은 특히 수술 및 화학요법 치료에 의하여 야기되는 메스꺼움과 구토, 그리고 치과 수술 후의 통증에 침술이 효과적임을 보고하고 있으며, 중독, 중풍, 두통, 월경통, 테니스 엘보우, 근육통증, 골관절염, 허리통증, 천식, 섬유근육통, 팔목터널증후군 등과 같은 질환에도 부가적인 치료법으로나 수용 가능한 대체의료로서 혹은 각각의 질환에 대한 포괄적인 관리수단의 하나로 침술이 포함되는 것이 유용하다고 보고 있다(NIH, 1997).
또한 미국 UCLA 대학의 동서의학 연구소도 최근의 임상적 경험과 연구결과에 의거하여,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환자관리를 위하여 침술이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의학적 상태를 제시하였고, 침술이 약품 및 수술요법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특히 유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Ka Kit Hui, 1998).
현재 미국에서는 디스크 환자는 물론 마약중독자, AIDS 환자 등의 치료를 위해 침술을 이용하고 있고, 세계보건기구는 100여 개의 질병에 대해 침술의 치료효과를 공인한 상태이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침술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중국 자체 내에서도 침술의 과학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1) 침술의 효과와 비용
중국의 침술은 현대의술과 더불어 가장 활발하게 쓰이는 치료법으로서 전통의학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전통의학에 의존하는 비중이 큰 1차의료 영역에서 비용-효과적인 의료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노인인구의 증가와 의료비 상승이라는 당면과제 해결에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중국 침술의 객관적인 효과와 비용을 분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중의학과 서양의학을 동시에 섭렵하고 있는 의사들이 중의학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종합해 본다면, 비용-효과 측면에서 침술로 대표되는 중의학의 가치를 가늠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박송림(2002)의 연구에서는 중의학의 효과와 비용에 대한 의사들의 주관적인 평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연구 조사는 2000년 8월 20일부터 2000년 8월 27일까지 북경 중서의결합병원(350병상), 북경 안정병원(서의병원, 500병상), 북경 서원병원(중의병원, 550병상)의 의사들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중의사 42명, 서의사 47명, 중서결합의 12명으로 총 101명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이 생각하는 중의, 서의, 중서의결합 의료에 따른 효과와 비용을 나타내 주고 있다.
우선 특정 질병에 대해서 이들이 생각하는 가장 효과적인 의료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장염, 간염, 위암, 자궁암, 당뇨, 치매, 고혈압, 중풍, 천식, 위궤양, 불임증, 부인병, 퇴행성 관절염 등 13가지 질병에 대해 인식도를 조사하였다.
<표8>에서 보듯이 일단 중서의결합은 각 질병별로 고르게 효과 있는 치료라 인식되고 있어 중의학의 과학화 등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에 힘입어 중서의결합에 높은 신뢰도를 보이고 있다.
중의학은 간염과 중풍, 불임증 과 부인병 및 퇴행성관절염 등의 질환에서, 서양의학은 위암, 자궁암, 고혈압 등의 질환에서 각각 효과 있는 치료법으로 꼽히고 있다.
이것은 의료인들이 이미 효과를 인정받은 몇가지 질병과 예방과 건강증진,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만성질환 및 노인질환에 대해서는 중의학의 효과를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표8> 각 질병별 효과가 가장 좋은 의료 형태
구분 |
중의학 |
서양의학 |
중서의결합 |
별차이없음 |
모르겠음 |
계 |
장염 |
14 (13.9) |
42 (41.6) |
40 (39.6) |
2 (2.0) |
3 (3.0) |
101 (100.0) |
간염 |
34 (33.7) |
16 (15.8) |
47 (46.5) |
2 (2.0) |
2 (2.0) |
101 (100.0) |
위암 |
3 (3.0) |
44 (44.0) |
47 (47.0) |
5 (5.0) |
1 (1.0) |
101 (100.0) |
자궁암 |
1 (1.0) |
42 (42.4) |
49 (49.5) |
5 (5.1) |
2 (2.0) |
99 (100.0) |
당뇨 |
4 (4.0) |
28 (27.7) |
65 (64.4) |
2 (2.0) |
2 (2.0) |
101 (100.0) |
치매 |
25 (25.0) |
13 (13.0) |
56 (56.0) |
4 (4.0) |
2 (2.0) |
101 (100.0) |
고혈압 |
8 (7.9) |
24 (23.8) |
66 (65.3) |
1 (1.0) |
2 (2.0) |
101 (100.0) |
중풍 |
33 (33.3) |
7 (7.3) |
56 (56.6) |
2 (2.0) |
1 (1.0) |
99 (100.0) |
천식 |
11 (11.0) |
26 (26.0) |
60 (60.0) |
2 (2.0) |
1 (1.0) |
101 (100.0) |
위궤양 |
12 (12.0) |
32 (32.0) |
54 (54.0) |
1 (1.0) |
1 (1.0) |
101 (100.0) |
불임증 |
37 (37.8) |
16 (16.3) |
42 (42.9) |
2 (2.0) |
1 (1.0) |
98 (100.0) |
부인병 |
30 (30.0) |
24 (24.0) |
43 (43.0) |
1 (1.0) |
2 (2.0) |
101 (100.0) |
퇴행성관절염 |
38 (38.0) |
7 (7.0) |
44 (44.0) |
4 (4.0) |
7 (7.0) |
101 (100.0) |
대상 의료기관의 의사들이 생각하는 예방 및 건강증진에 가장 효과적인 의료는 중의인 것으로 41.6%의 비율을 보였다. 특히, 서의로서 중의학이라고 대답한 비율도 29.8%로서 서양의학이라고 대답한 비율이 23.4%보다 높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표9).
노인질환에 가장 효과적인 의료의 측면에서는 중서의결합 의료를 52.5%로 가장 많이 꼽고 있다(표10). 그 다음은 중의학으로 35.6%에 해당되고 서양의학은 9.9%에 그쳤다. 노인질환에 있어서도 역시 서의도 서양의학보다 중의학의 중요성을 더 크게 인정하고 있다.
<표9> 예방 및 건강증진에 가장 효과적인 의료
구분 |
중의학 |
서양의학 |
중서의결합 |
별차이없음 |
모르겠음 |
계 |
중의 |
21 (52.4) |
3 (7.1) |
16 (38.1) |
0 (0.0) |
1 (2.4) |
42 (100.0) |
서의 |
14 (29.8) |
11 (23.4) |
21 (44.7) |
1 (2.1) |
0 (0.0) |
47 (100.0) |
중서결합의 |
6 (50.0) |
1 (8.3) |
5 (41.7) |
0 (0.0) |
0 (0.0) |
12 (100.0) |
계 |
42.2 (41.6) |
15 (14.9) |
42 (41.6) |
1 (1.0) |
1 (1.0) |
101 (100.0) |
<표10> 노인질환에 가장 효과적인 의료
구분 |
중의학 |
서양의학 |
중서의결합 |
별차이없음 |
모르겠음 |
계 |
중의 |
21 (52.4) |
1 (2.4) |
19 (45.2) |
0 (0.0) |
1 (2.4) |
42 (100.0) |
서의 |
14 (29.8) |
9 (19.1) |
26 (55.3) |
1 (2.1) |
0 (0.0) |
47 (100.0) |
중서결합의 |
4 (33.3) |
0 (0.0) |
8 (66.7) |
0 (0.0) |
0 (0.0) |
12 (100.0) |
계 |
36 (35.6) |
10 (9.9) |
53 (52.5) |
1 (1.0) |
1 (1.0) |
101 (100.0) |
만성질환과 급성질환의 경우 두 질환 모두 중서의결합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의견이 가장 많은 가운데 중의학과 서양의학과 서양의학만을 떼오 놓고 볼 때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의료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표10>에서 보듯이 만성질환에 중의학과 서양의학이 효과적이라 대답한 의사들의 비율이 각각 38.4%, 8.1%로서 중의학이 효과적이라는 것이 지배적이었고, 급성질환에 있어서는 각각 7.9%와 61.4%로서 서양의학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압도적이었다.
만성질환은 서양의사들도 중의학의 효과를 지지하고 있고, 급성질환은 중의사들도 서양의학의 효과를 지지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표11, 표12).
<표11> 만성질환에 가장 효과적인 의료
구분 |
중의학 |
서양의학 |
중서의결합 |
별차이없음 |
모르겠음 |
계 |
중의 |
22 (53.7) |
1 (2.4) |
17 (45.2) |
0 (0.0) |
1 (2.4) |
42 (100.0) |
서의 |
10 (21.7) |
7 (15.2) |
26 (55.3) |
2 (4.3) |
1 (2.2) |
47 (100.0) |
중서결합의 |
6 (50.0) |
0 (0.0) |
6 (66.7) |
0 (0.0) |
2 (0.0) |
12 (100.0) |
계 |
38 (38.4) |
8 (8.1) |
49 (49.5) |
2 (2.0) |
0 (2.0) |
101 (100.0) |
<표12> 급성질환에 가장 효과적인 의료
구분 |
중의학 |
서양의학 |
중서의결합 |
별차이없음 |
모르겠음 |
계 |
중의 |
4 (9.5) |
24 (57.1) |
13 (31.0) |
0 (0.0) |
1 (2.4) |
42 (100.0) |
서의 |
4 (8.5) |
33 (70.2) |
9 (19.1) |
1 (2.1) |
1 (2.2) |
47 (100.0) |
중서결합의 |
0 (0.0) |
5 (41.7) |
7 (58.3) |
0 (0.0) |
2 (0.0) |
12 (100.0) |
계 |
8 (7.9) |
62 (61.4) |
29 (28.7) |
1 (1.0) |
0 (1.0) |
101 (100.0) |
한편, 진료비 부분에 있어서는 중의학의 치료비용이 가장 저렴하다고 생각하는 응답자의 비율이 43.6%로 가장 높았다. 그 다음으로 중서의결합으로 27.7%였고 서양의학이 7.9%로서 가장 비용부담이 큰 의료라고 인식되었다(표13).
<표13> 진료비가 가장 싼 의료
구분 |
중의학 |
서양의학 |
중서의결합 |
별차이없음 |
모르겠음 |
계 |
중의 |
18 (42.9) |
2 (4.8) |
15 (35.7) |
3 (7.1) |
4 (9.5) |
42 (100.0) |
서의 |
19 (40.4) |
5 (10.6) |
10 (21.3) |
7 (14.9) |
6 (12.8) |
47 (100.0) |
중서결합의 |
7 (58.3) |
1 (8.3) |
3 (25.0) |
1 (8.3) |
0 (0.0) |
12 (100.0) |
계 |
44 (43.6) |
8 (7.9) |
28 (27.7) |
11 (10.9) |
10 (9.9) |
101 (100.0) |
전체적으로 보면,
중국의 의료인들은 예방, 건강증진, 만성질환관리와 영역에서는 서양의학보다 중의학이나 중서의결합이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가하고 있었고, 치료비용에 있어서는 전반적으로 중의학의 치료법을 더 저렴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중의학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신뢰도 역시 높아서 질병발생 한 후 양의보다 중의를 먼저 찾는 비율이 농촌 지역에서 35%, 도시지역에서는 25%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또한 치료에 대한 환자 만족도 역시 비교적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문 환자들을 183명을 대상으로 한 박송림(2002)의 연구에서는 환자들은 의료인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서결합 의학을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중의학을 선호한다고 응답한 환자의 비율은 68.5%로 66.6%의 비율을 보인 서양의학 보다 높게 나타나(표14), 환자들의 선호도와 만족도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표14> 의료이용자의 각 의료형태에 대한 선호도
분류 |
중의학 |
서의학 |
중서결합의학 |
남자 |
67.9 |
67.3 |
79.1 |
여자 |
69.1 |
65.9 |
81.7 |
계 |
68.5 |
66.6 |
80.4 |
(2) 침술의 발전현황
근래 수 십년 동안 중국 정부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침술을 찾아내고 새로운 침술을 개발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와 같은 노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학술대회의 개최이다. 중국의 학술대회는 일종의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된다. 군 단위에서 도 단위로, 도에서 다시 전국 규모로 이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치료법과 뛰어난 의사가 발굴된다.
의술에 대한 중국인들의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침술의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현재 중국 의사들은 각종 난치병과 소아 신경질환에도 침술을 사용한다. 뇌성마비, 자폐증, 성장장애 등의 질병에 침술을 활용하고 있는데 효과가 매우 뛰어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한국을 비롯한 외국의 젊은 부모들이 아이의 치료를 위해 중국으로 향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또한 침술의 단독시술 외에도 침술과 더불어 물리치료를 병행하여 치료효과를 높이는 등 전통의학인 침술과 현대의학을 접목시키는 작업도 발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침술 발전의 현황과 여기에 기여하는 학술대회의 역할과 현대의학과의 접목에 관한 몇가지 사례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멧돼지강모치료법
최근 중국 침술의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치료법은 ‘멧돼지강모경혈매장법’이라고도 한다. 멧돼지의 강모를 인체의 경혈에 뭍어 두어 체내에 박힌 침이 사람의 혈을 자극하여 질병을 치료하게 된다.
금속침 대신 강모를 사용하게 되면 금속침이 오랫동안 깊이 경혈을 자극할 수 없는 약점을 보완하여 난치병에 대해 금속침으로는 얻을 수 없는 지속적인 자극효과를 보게 된다. 멧돼지강모를 침으로 선택한 이유는 다른 털에 비해 멧돼지강모가 침으로서 길이와 굵기가 적당하며 단단하고 유연성이 좋아 체내에 장기적으로 머물면서 자극을 줄 수 있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시술방법이 금속침과 다른 점은 털을 미리 주사바늘 안에 넣어 둔다는 것이다. 즉, 강모침이 들어가 있는 주사바늘을 경혈에 찌른 후 주사바늘이 일정한 부위가지 들어가면 주사바늘은 빼고 강모침을 일정 부위까지 밀어 넣는다.
인체 밖에 노출된 부분은 밴드를 이용해서 고정시킨다. 멧돼지강모침치료법으로 치료한 4,000명 임상 예와 15,000번의 시술을 종합한 결과 장기 치료 유효율이 80% 이상에 달했고, 치료시간이 절약되었으며 치료효과가 빨라졌다. 특히, 거동을 못하는 환자와 병원이 멀어 매일 치료를 받지 못하는 농촌 환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치료법에 관련된 30여 편의 논문이 흑룡강성내외 의학잡지 및 국제세미나에서 발표되었다.
중국에서는 중의사든 서의사든 중서결합의사든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모든 의료수단을 이용할 수 있다. 서의도 침술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허용될 뿐 아니라 멧돼지강모침치료법에서 보듯이 중의도 주사기와 같은 서양의학의 의료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
이 치료법은 침술과 현대의학을 접목시켜 획기적인 치료법을 개발한 예로서, 양방과 한방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의 이원화 체계가 의술의 발전을 제한하고 있고 의료서비스의 개방화 시대에 경쟁력 확보에 열세를 보이게 되는 일편이라 할 수 있다.
② 대상포진 치료 등심구(燈心灸)
대상포진을 치료하는 등심구라는 직접구로 치료를 하는데 침으로 화상을 치료하는 것과 그 치료방식과 낫는 과정이 비슷하다. 가장 먼저 환자들이 느끼는 것은 통증이 없어진다는 것이고 다음으로 붓기가 빠진다는 것이다.
등심초라는 한약재 끝에다 땅콩기름 같은 식물성 기름을 묻히고 불을 붙인 다음 포진부위를 몇 군데 설정하여 그 둘레로 네군데씩 피부에다 불을 살짝 갖다 대는 식으로 치료한다.
이렇게 하면 통증이 바로 줄어들고 약 1개월 동안 10회 안에 대부분 대상포진이 다 낫는다는 것이다. 등심초를 쓰는 이유는 재질이 부드러울뿐 아니라 기름을 잘 흡수하고 가볍고 빨리 타며 환자의 몸에 접촉해도 불쾌하지 않기 때문이지 등심초의 약재 성분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고대 문헌에는 깨기름을 등심초에 묻혀서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데 지금은 땅콩기름이나 옥수수기름을 쓰기도 한다. 환자의 몸에 데었을 때 피부가 그을리며 쓱 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 때 효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진다.
Our Lukang Korea experience of natural produ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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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 conscience clear and will allow
your lungs and house to breathe freely.
4. 중국의 WTO 가입과 중의학의 세계화 전략
1). 중국의 WTO 가입과 서비스협상
1978년 시작된 중국의 개혁 및 개방은 점진적이고 지속적 개혁으로서 사회주의 체제의 골격을 유지하면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중국경제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공적 소유체제의 유지와 시장의 자원배분기능이 양립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따라서 아직도 중국경제의 골격은 여전히 국유 기업에 의해 유지되며 이들 부문은 국내외의 경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이러한 양면적인 개혁정책은 급진적인 변화의 페이스를 조절하는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급속한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인한 대량실업의 발생과 그로 인한 사회불안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혁이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국유 기업의 독점적 구조와 비효율성은 중국경제발전의 발목을 붙잡는 가장 큰 장애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중국정부도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1997년 전인대에서 국유 기업의 사유화와 공사화를 위한 개혁안을 채택하고 이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국유 기업의 사유화는 필연적으로 대량실업의 문제를 야기하게 될 것인데 근본적인 해결책은 사유기업의 활성화를 통한 신규고용의 창출일 것이다. 중국정부는 WTO 가입을 이러한 변화를 위한 큰 계기로 삼고자 하였고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수출증대를 통한 자국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세계무역의 기본기구에 가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해서 1986년 GATT 가입신청서를 제출한 이래 중국의 WTO 가입은 1990년대 초 우루과이라운드협상의 타결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천안문사태로 인한 미?중 관계의 악화와 미?중간 무역불균형의 시정 등 정치?경제적인 여러 요인으로 인하여 지연되었다.
그러던 중 미국이 지난 99년 11월 15일 중국과 극적인 타결을 이룸으로써 가입이 성사되게 되었다. 결국, 중국은 아시아 금융위기와 내수경기 침체로 부진에 빠진 국내경제를 활성화시키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무역불균형을 이유로 한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을 회피하기 위하여 WTO가입을 서둘렀던 것이다.
종전의 GATT체제 하에서는 주로 공산품의 시장개방만이 추진되었으나, WTO 체제에서는 공산품뿐만 아니라 농산물, 서비스상품 등 국제적으로 거래되는 모든 상품의 시장개방이 추진되고 있다. 도하아젠다 협상을 통해서 상품무역은 물론이고 서비스 무역 나아가 무역관련 지적 재산권까지를 규율하는 부속 협정이 이루어 고 있다.
서비스협상의 대상은 보건의료를 포함해서 서비스 관련 전 업종을 대상으로 하며, 서비스의 공급 형태에 따라 mode1,2,3,4의 네 가지로 구분하여 협상을 하게 된다. 각각의 내용은 <표15>와 같은데 그중에서 mode3과 mode4가 주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이다.
<표15> 서비스협상의 구분
구분 |
공급형태 |
내용 |
mode 1 |
국경간 공급
(cross-border supply) |
한국간에서 다른 국가로 공급되는 서비스이며 원격진료나 의료자문 등이 이에 해당된다. |
mode 2 |
해외소비
(consumption abroad) |
한 국가의 개인 또는 기업이 다른 나라에서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해외진료 등이 해당된다. |
mode 3 |
상업적 주재
(commercial presence) |
외국의 기업이 다른 국가에서 자회사나 지사를 설립하여 서비스를 공급하는 것이며 해외 의료기관 설립, 합작병원 투자, 실버타운 등 복지시설 투자 등이 해당된다. |
mode 4 |
자연인의 이동
(movement of natural persons) |
어떤 국가의 자연인이 다른 국가로 이동하여 서비스를 공급하는 것으로 의료인력이나 의료기관 경영진의 이동 등이 해당된다. |
2002년 10월 WHO 도하개발아젠다 국가간 협상에서 중국이 한국에 제출한 보건의료 서비스 분야의 양허요청안을 살펴보면 한방과 치과를 포함한 전 분야에서 개방을 요구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 의사와 합작병원 및 클리닉 설립을 허용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아울러 한국에 대하여 원격진료(mode1)와 환자간 이동(mode2)은 완전 개방을, 의료인 교류에 있어 의사, 치과의사는 2년간 개업을 허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중의학의 세계화를 수 십년 동안 추진해 온 중국이 한국의 전통의학 분야에 대해 전면적이고 강력한 개방을 요구하고 특히 전통의학의 교육분야에 대해서도 개방을 강력히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의학의 세계 진출 의도를 엿볼 수 있고 특히, 교육분야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비스 무역의 자유화는 소비자에게 보다 많은 선택의 기회와 저렴한 양질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국가마다 자국내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자국 서비스의 해외 진출을 통해 경제적 성과를 달성하는 기회로 삼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WTO 가입 이후 양약의 수입은 100억$, 중약의 수출은 10억$의 실적을 올림으로써 90억$의 적자를 감수해야 있다. 의료분야에서 이러한 적자를 타개하기 위해 전통의학의 교육분야와 전통의술 및 중의약 산업의 세계화 전략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2). 중의학의 세계화 전략
(1) 중의학의 정책방향과 기조
집권당의 정책기조에 따라 중의학의 말살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중국정부는 중서의 결합이라는 대원칙 하에 중의학의 발전전략 수립에 힘을 쏟아 오고 있다.
그 정책방향과 기조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중국의 모든 의학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현대의학과 전통의학을 동일한 위치에서 상호 발전시키고, 이것을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다른 나라에 비해 전통의학 자원확보가 잘 이루어지도록 한다.
둘째, 중?서의학을 고수한다. 이것은 마오쩌뚱의 일관된 지도사상으로서 당과 정부의 방침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중서의 결합의 특징은 사호전이 과정의 규율을 마련하고 중의학을 중요한 위치에 둔다는 것이다.
셋째, 중의학과 중약을 결합하고 서로 협조 발전시킨다. 중약제의 보호 및 발전 및 중약 정제의 법제 경험과 기술에 대한 보존과 발전을 꾀한다. 중약제제 약물의 대량생산체계를 갖추고 중약사업관리를 한층 강화시킨다.
중의학 정책방향과 기조 하에 정책의 실행 전략으로는 의료기관의 내부체계 강화, 중약재 현대화 작업, 중의학 교육개혁, 과학기술 연구발전, 대외교류 합작의 발전 등의 전략을 체택하고 있다.
중의 의료기관의 세분화된 관리와 시범 의료기관의 건설을 계기로 의료의 질을 향상시키고 중의의 특징과 우세함을 내세웠으며 정체적인 의료서비스 기능을 개선하여 중의학의 진단과 치료, 다양한 질병에 대한 임상 능력과 과학적 관리 등의 방면에 더 많은 발전을 이루게 하여 한방의료기관의 역할을 더 한층 발휘하였다.
농촌 중의사업 강화와 중의 의료서비스 범위 확대를 강조하였다.
또한 중의학의 세계화 전략은 이론의 세계화, 민간차원의 학술교류를 증진, 정부 대 정부 차원의 협약을 강화 등 세 가지 기본 방향을 가지고 추진되고 있다. 이미 정부차원에서 법률, 제도, 교육, 연구, 약재의 상품화 등 전 분야에서 시스템을 구축해 오고 있으며 1995년 ‘95계획’에서는 중의약 산업 전략을 수립한 바 있다.
세계 50여 개국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여 중의이론을 보급하고 있고 실제로 미국의 한의대는 대부분 중국에서 이론서를 수입하고 있다. 면허제도를 정비하여 경쟁력을 확보하고 교육과정을 정비하는 등의 교육투자를 확충하고 있으며 양의병원에 중의과를 개설하고 전문중의병원 개설을 시도한 바 있다.
(2) 중의학 교육의 개혁
① 교육사상 변화, 교육개념 갱신
교육 사상을 변화시키고, 교육 관념을 새롭게 함으로서 해결해야하는 과제들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단편적인 전공 교육관을 변화시키고, 학생들에게 진행하는 종합소질 교육을 중시하는 사상을 수립한다.
둘째, 답습해온 교육관을 바꾸고, 학생들의 창조 정신과 창조 능력을 배양하는 사상 수립을 강화한다.
셋째, 천편일률적인 교육관을 바꾸어, 인재에게 가르침을 펴는 것을 확립하고, 학생의 개성을 발전시키는 사상을 격려한다.
넷째, 전통적인 일차적 교육관을 바꾸어, 적극적으로 발전하는 계속 교육을 수립하고, 중의약 인원의 평생 교육 체계를 건립 완성하는 것이다.
② 교육개혁의 심화
a. 새 시대 적응에 필요한 중의약 인재 양성 모델 구축
인재 양성 모델은 교육자가 만든 지식, 능력, 소질 구조와 이런 종류의 구조를 실현하는 방식이다. 중의약 교육은 장차 기초가 견고하고, 지식이 풍부하고, 능력이 강하고, 소질이 높은 중의약 인재의 총체적 요구에 따라 학생의 지식, 능력, 소질 구조를 조정하여 소질 교육을 강화하고, 지식을 전수시키며, 능력을 향상시키고 소질을 제고하여 융합하여 일체가 되는 것이다.
b. 교육 내용과 과정 체계 개혁
교육 내용과 과정 체계의 개혁은 인재 배양 모델의 개혁의 시작점이고 현재 교육 개혁의 중점이다. 과정 체계를 구축할 때, 중의약 기본지식과 기본 기능이 중점이 되도록 확립하고, 동시에 적극적으로 현대 과학 기술과 현대 의약학 지식을 흡수하고, 특히 당대 과학 기술 발전 추세의 신지식과 성과를 반영하도록 유인한다.
c. 교육 방법과 교육 수단의 혁신
토론식교육, 연구식 교육 등 현대 교육 방법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학생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을 강화시킨다. 창조능력과 독립적으로 분석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우고, 학생의 개성과 재능의 전반적인 향상을 촉진한다. 동시에, 현대교육기술을 교육영역에 끌어들여, 교육수단을 혁신하고, 점차로 중의약 교육수단과 방법의 현대화를 실현하고, 교육의 질을 향상시킨다.
③ 교육구조의 우월화
각 단계에서는, 중의약의 고급 인재와 학술 기술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속도를 가속해야 하고, 농촌에서 중의약 실용형 인재를 많이 육성해야한다.
④ 교육 체제 개혁 추진
중의약 교육 체제 개혁의 중심은 “조정, 공동건설, 합작, 합병”의 방침에 따라, 교육 관리 체제 개혁을 추진하고, 교육 자원의 합리적 배치와 적절한 이용을 실현한다. 중의약대학교는 장차 개혁을 통하여, 단과 대학교가 진행하는 교육의 한계성을 타파하고, 학교간의 합작 교육과 사회 참여 교육을 추진한다. 학과 교류 혹은 문과?이과?공과?의과 등의 다수 학과의 참여를 유도한다.
(3) '전국통일고시'를 통한 교육제도의 개혁
최근 중국은 중의학 교육제도에 관련해서도 개혁을 단행하고 있다. 중의학 교육에 없어서는 안될 통일교재가 여러 판의 수정을 거쳐 제6판을 사용하고 있고, 의사자격 취득에 간한 제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즉, 1999년부터 ‘전국통일고시’를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① 전국통일고시의 배경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의사의 자격은 각 의과대학을 졸업하는 동시에 부여되었으며 근무지도 정부가 배분하였다. 그러나 양의사, 중의사건 모두 「면허증」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의사(醫師), 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의사(醫士)로 불러 구별하였다.
醫師와 醫士는 단지 교육수준에 의한 분류일 뿐이었으며 의료행위에 있어서는 둘간의 차이가 없었다. 또 양의사와 중의사는 자기의 의학체계를 위주로 진료를 진행하면서 기타 의학체계의 진료방법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양의사는 탕약의 처방을 금지하는 등 병원의 자체 규정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통일되지 않은 의사자격에 대해서 통일고시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실제로 계획을 추진한 적도 있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중지된 바 있다.
최근 중국전통의학계에서는 정부가 진행하는 개혁? 개방의 정책에 부응하고, 시장경제원리를 응용하는 세계의 흐름에 편승하기 위하여 근무지의 분배관리를 폐지하게 되였다.
1997년 6월 26일 「중화인민공화국집업의사법(中華人民共和國執業醫師法)」이 통과 되였고 1998년 5월 1일부터 「중화인민공화국집업의사법」이 실행되었다. 이에 의하여 1999년에 처음으로 양의사, 중의사의 전국통일고시가 시행되었다.
② 전국통일고시의 목적
첫째로는 전국 의사들의 수준을 통일하자는 것이다. 실기는 각 지역의 병원에서 교육받게 되지만 이론지식은 전국통일고시를 보기 때문에 의사의 이론수준이 동등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는 분배관리를 취소하고 경쟁을 촉진함으로써 의사의 유동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이론성적이 나쁜 의사는 탈락하고 열심히 일하는 의사는 자유롭게 직장을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③ 전국통일고시의 방법
자격시험은 크게 실천기능시험, 종합필기시험 두 단계를 거쳐서 진행된다. 중의사의 실천기능시험은 매년 4-6월에 각 지역의 3급갑 이상의 병원에서 진행한다.
출제와 평가의 권한은 각 병원에 부여된다. 응시자에게는 진단, 변증논치, 중의내과, 중의외과, 중의산부인과, 중의소아과, 중의침구과, 중의안과, 중의이비인후과, 중의안마과, 중의피부과, 중의항문과, 중의골상과 등의 영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진단과 감별진단 및 변증논치의 능력 등이 요구된다. 이 시험을 합격하지 못한 자는 필기시험의 응시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시험과목은 표에 제시한 것과 같으며 각 과목의 출제비율과 범위는 매년 실제정황에 따라서 결정한다. 합격여부의 판결수준도 매년 실정에 따라 변하며 의사수가 많이 필요할 때면 합격수준을 하행 조절한다. 합격률은 대략 90%정도 수준이다. 시험결과는 시험 진행 2개월 후에 공개되며 합격자에게는 증명서가 발급된다.
④ 기득권자에 대하여
여러 종류의 기득권자가 있지만 통일적으로 시험을 보게 하고 불합격자에게는 단 한번의 기회만 주게 되어 있다. 즉 응시자에게 있어서는 두 번의 기회만 있는 것이다. 1997년 이후 졸업생은 무조건 시험에 응시해야 하며 원 병원근무자는 병원에서 그의 시험응시여부를 결정한다.
또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그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중의사에 대해서는 합격수준에 못 미친다해도 그의 임상실력을 고려해서 최종합격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1999년에는 약 30만명이 시험에 응시하였으며 2000년에는 27만명이 시험에 응시하였다. 감소한 원인은 1999년에는 기득권자가 많이 시험에 응시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4) 교육제도를 활용한 세계화 전략
중국은 다양한 교육제도를 통하여 내국인의 전문인력을 양성함으로써 중의학 발전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외국인들 대상으로 한 연수과정을 개설하고 중의학원을 설립하여 중국의 침술을 세계로 전파시키는 한편 외화획득에도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일종의 세미나 과정인 연수과정 안에는 침구학, 중의내과학, 중약학, 추나학 등 다양한 과목이 개설되어 있고 기간도 1개월에서 1년까지 다양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유럽 및 미국계 의사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우리나라 한의사들도 많이 다녀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경, 광주, 상해, 남경 등에 있는 중의학원에는 중국의 전통의학을 배우려고 온 외국 유학생들이 넘쳐난다. 탕약술인 중의약을 교육하는 북경중의약대학에는 10개 국가에서 단체 유학을 와 있고 북경, 남경, 상해의 3개 국제침구배훈중심5)에는 120여개 국가에서 학생들이 들어와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침술시험으로 국제침구수평고시와 NCCAOM이 있다. NCCAOM은 미국 내 사립단체인 NCCA(National Commission for Certification of Acupuncturists)에서 실시하는 시험이고 국제침구수평고시는 1989년 중화인민공화국 국가 중의약 관리국이 비준한 2개의 고시중심 가운데 하나인 국제침구고시중심에서 실시하는 침구전문시험을 말한다. 매년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 수많은 외국인들이 국제침구수평고시를 치르기 위해 중국을 찾고 있다.
2002년부터는 중국내의 정규 의과대학을 졸업한 외국인에 대해서도 1년간 관련기관에서의 사전실습 등 일정한 요건을 갖춘 경우 의사고시 응시자격(임상, 중의, 치과분야)을 부여하고 있다.
이에 앞서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개업의사법’, ‘의사자격고시임시규칙’ 등에 의거하여 중의학을 전공한 학력을 가진 외국 출신자의 중국 의사자격 취득에 관련된 일련의 상세한 규정을 제정하여 각 성과 자치구, 직할시 위생국, 중의약관리국, 대외공관, 공안국 등에 통지한 바 있다.
이러한 법규의 정비를 통해 외국인이 중국에서 교육, 임상실습, 연수교육을 합법적이고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는 각종 규정을 명문화함으로써 늘어나고 있는 외국 유학생들에게 의료업무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고, 중국의료시장의 대외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조치는 실질적으로 1천여 명에 이르는 한국 유학생들과 유학을 희망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겠냐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조치는 중의대를 졸업한 사람에게 한국의 한의사 국가시험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 원인 중 하나인 수업연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고, 자국에서 교육을 받았더라도 외국인의 경우 의료기관을 개설하거나 취업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조항을 스스로 먼저 개선함으로써 상대국인 한국에 형평성 있는 조치를 요구할 수단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즉, 일련의 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한국에 들어온 학생들이 한의사 면허시험의 응시자격을 요구하였을 때 중국의 이번 조치로 그동안 한국에서 시험응시를 불허한 명분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5) 중의약 담당기관의 조직개편과 기능강화
중의학의 세계화 전략의 일환으로서 세계 전통의약 시장의 선점을 위한 중국 정부의 움직임에 본격적으로 가속이 붙은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위생부 산하 중의약관리국, 중의연구원과 정부가 운영하는 유일한 중의약 공급회사인 중국약재집단공사의 조직을 개편하고 담당기능을 한층 강화하는 한편 중의들에 대한 대대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함으로써 2005년 한국 등 외국의 의료시장 진출을 겨냥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① 중의약관리국
국장이 차관급인 위생부 산하기관으로서 중의학의 세계화에 대한 장기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중국 정부의 최상급 기관이며 사실상 독자적인 행정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다. 한국의 보건복지부 한방정책관실과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지만 인력?행정 운영시스템 전반에 대한 영향력은 막강하다.
중의약관리국 산하에는 1실?4사(司)가 운영되고 있으며 실과 사 아래에는 15명의 처장이 포진해 있다. 특히 WTO 협상은 4사 중의 하나인 국제합작사에서 담당하고 있는데, 이 곳에서는 아시아-아프리카, 유럽?오세아니아, 세계종합 등 3개 처로 나뉘어져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② 중의연구원
북경 소재 위생부 직속 기관으로서 1955년 12월에 설립되었으며 의과학 연구를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WHO와 공동으로 임상?침구?중약 분야의 연구체계를 구축하는 등 세계 의학계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2002년 현재 연구원은 총 3,824명으로 연구원 외에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300여 명의 인력을 양성하고 있는 엘리트 집단이다.
특히, 분야별로 별도의 센터를 두고 중의학의 수출을 위한 연구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중의연구원이 지향하고 있는 중의약 분야의 연구목표는 중의약의 안정성, 유효성, 표준화를 위한 기초작업을 완벽하게 다져나가는 것 등이다.
연구원의 부원장 4명이 담당하는 분야도 세분화 되어 있어 국제교류와 협력, 병원설립 및 지원, 중의약의 산업화, 산학연구 등을 각각 담당하면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중의연구원 부속 4개 병원과 6개 연구소는 중의사들이 임상과 기초의학 분야에 탄탄한 이론적 바탕이 될 수 있도록 보조하고 있다. 세계화를 위해서는 계량화와 현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학화를 추구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부속병원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광안문병원의 경우 중서의 결합체계를 갖추고 환자를 진료한다. 이 병원에서는 전통의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환자의 80%를 중의학으로, 나머지 20%는 중서의 결합 방식으로 치료한다. 대부분의 환자를 한방으로 치료하는 이유에 대해 중의연구원장은 크게 3가지를 들었다.
암을 중의학으로 치료할 경우 방사능?화학치료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고 환자의 원기회복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고, 특히 환자 삶의 질 향상은 빼놓을 수 없는 중의학의 장점이라고 강조하였다.
중의연구원은 중의학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마련하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일정 금액의 수수료를 받고 외국의사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중의학을 교육시키는 체계이다.
이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외국인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마련할 계획이다. 중의연구원은 현장 교육이야말로 중의학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③ 중국약재집단공사
중국정부가 운영하는 중약재 생산?개발?판매회사로서 1955년 설립 이래로 꾸준하게 판매망을 확장해 오고 있다. 자회사로는 운남성약재회사, 흑룡강성약재회사 등 전국적으로 21개소가 있으며 2001년 인건비와 경상비로 집행된 예산은 2,000억원, 약재판매 총액은 1,200억원 규모로 매년 매출신장을 이룩하고 있다.
공사 측이 관심을 쏟고 있는 분야는 품질 좋은 약재 생산, 절편형식의 약재 개발, 과학기술?정보?국제관계 선도 등인데, 좋은 한약재를 공급하기 위해 지역별 약재 생산단지를 지정해 품질향상에 나서고 있다.
(6) 중성약(中性藥)의 세계진출
중국은 중성약에 대해서 세계가 인정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여 식품이 아닌 의약품으로 수출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추진 중에 있다.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최대의 중성약 제조업체인 ‘천사력집단’에서는 중성약을 효능?효과 표현이 가능한 의약품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약과 중성약과의 차이를 객관화하는 연구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천사력집단은 중성약의 세계진출을 위해 서양 의학적 방식의 연구를 통한 질병치료 증명, 표기방식의 국제화, 자본주의 국가 기업과의 자본합작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중 자본합작 등을 통한 세계진출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당아욱꽃
5. 맺음말
중국의 WHO 가입에 온 세계가 관심을 갖는 이유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갖고 있는 매력과 동시에 경쟁국으로서의 잠재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중국은 핵무기를 갖고 있는 나라인 만큼 기술수준이 일반 사람들 생각보다 훨씬 높고, 기술의 성장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저가의 공산품 시장은 물론이고 고기술 시장가지도 급속히 잠식해 들어올 것이라는 것은 무리한 추측이 아니다.
하물며 전통의학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이론을 가지고 이미 세계 한방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중국이 전통의학의 과학화와 세계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개방화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주변국들이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정부차원에서 중의약 산업전략을 추진하여 왔고 총리들이 직접 나서서 국제 세일즈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약재의 규격화 문제와 관련 국제기준의 달성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쳐 왔는데, 지난 2000년부터는 국제 규격에 대비해 중약에도 GMP, GAP, GSP등의 제도를 도입하였고 2004년까지 이를 시행하지 않는 업체는 퇴출시킨다는 방침은 중국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2005년 의료시장의 개방은 한국의 한방의약 분야에 상당한 타격을 줄 것으로 전문가들은 진단하고 있다. 질적 경쟁보다 가격경쟁과 물량공세가 관건이 될 한약재 시장의 타격은 기정 사실로 되어 가고 있고 이로 인해 생산농가는 물론이고, 한방약재를 생산하는 제약사, 한약유통업자들의 피해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다양한 교육제도와 전문인력의 양성으로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중의 인력과 중서의결합이라는 제도적 우월성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대응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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