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시인 김수영 교통사고로 사망
시인 김수영에게 4·19는 분기점이었다. 모더니즘으로 출발해 설움·비애 등의 소시민적 정서를 표현하던 시(詩)세계가 이 때를 전후해 현실참여 쪽으로 완연히 기울었다. 물론 그 전에도 술만 마시면 자유당과 이승만을 욕했지만 아직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좌절과 미완이었지만 김수영에게 4·19는 언제나 꺼지지 않는 횃불이었다.
분단상황도 지울 수 없는 아픔이었다. 김수영 자신이 6·25 때 의용군으로 끌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났었다. 황혼무렵이면 발걸음이 명동의 전주집이나 은성 부근을 서성거렸지만 그는 언제나 원고료를 꼬박꼬박 집에 가져간 철저한 생활인이기도 했다. 한때는 양계로 가족을 부양하기도 했다.
1968년 6월 15일 늦은 밤, 김수영은 문단의 지인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뒤 귀가하던 중 갑자기 덮친 버스에 치였다. 이튿날 오전 9시경 병원에서 숨졌다. 47세였다.
[1976년] 남아공 소웨토에서 대규모 흑인폭동
← 1976년 6월 16일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교외에 있는 흑인 거주구역 소웨토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교외에 있는 흑인거주지역 소웨토에서 1976년 6월 16일 폭동이 일어났다. 이날 백인정권의 언어정책에 항의하는 흑인학생 약1만여명이 경찰 300명과 충돌, 최소한 6명이 사망했고 14명이 부상했다.
소웨토봉기는 백인정부가 아프리칸스(네덜란드계의 현지 공용어)를 정규 교과과목으로 채택하려는 데 대해 반대시위를 벌이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 13세 흑인소년이 사망함으로써 발생했다. 학생들은 아프리칸스로 수업을 진행하는 정부의 방침에 반발, 수주간에 걸쳐 수업을 보이콧해 왔다.
폭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년간 남아공 전역으로 확산됐으며 이 기간중 사망자수만 575명에 달했다. 아프리카 비동맹제국과 스웨덴, 파나마 8개국은 이 사건의 원인은 남아공 인종정책에 있는 것으로 판단해 유엔안보리에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폐지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유엔안보리는 5월 19일 만장일치로 이 안을 채택했다.
[1977년] 물리학자 이휘소 의문사
1977년 6월 16일 세계적인 물리학자 이휘소가 미국 콜로라도 주 국립과학연구소에서 열린 초청강연에 참석차 가는 도중 의문의 자동차 사고를 당해 42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휘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 제조책임자였던 핵물리학자 오펜하이머가 아인슈타인·페르미보다 더 뛰어난 과학자로 극찬한 한국 출신의 물리학자였다. 주로 소립자 물리학의 쿼크와 참 이론, 약작용과 전기장·자기장 작용을 통합하는 게이지 통일장이론을 다루면서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활동했다.
사고 당시 이휘소는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과 더불어 시작된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 독자개발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소문도 나돌아 의문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1963년] 최초의 여자 우주비행사 탄생
← 2002년의 발렌티나 테레슈코바
1963년 6월 16일 소련 바이코니르에서 세계 최초의 여자 우주비행사인 발렌티나 테레슈코바가 탑승한 보스토크 6호가 발사되었다. 보스트크 6호는 71시간 동안 지구를 48회 선회한 뒤 6월 19일 지상에 착륙했다.
테레슈코바는 야로슬라블에 있는 타이어 공장과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다. 그녀는 조종사 훈련을 받지는 않았지만, 취미로 낙하산을 탔었기 때문에 1961년 우주비행사 계획에 선발되었다. 같은 해 11월 3일 테레슈코바는 우주비행사인 A. G. 니콜라예프와 결혼했다.
1962년 소련 최고회의의 현역 의원, 1968년 소련 여성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그녀는 레닌 훈장을 2회 받기도 했다.
[1902년] 매클린턱 Barbara McClintock 출생
1902년 6월 16일 태어남 / 1992년 9월 2일 죽음
매클린턱은 1983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유전학자이다. 코넬대학교에서 1927년 식물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주리대학교의 교수직을 거쳐, 1942년 이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뉴욕에 있는 콜드하버스프링 연구소에서 일했다. 1940~50년대에 옥수수 종자의 색변이 관찰을 통해 유전정보가 염색체상의 특정 위치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이러한 전위가 유기체의 생장에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뒤이어 그녀는 전위인자들에 관한 중요한 연구들을 진척시켰으나, 그 결과들은 당시의 통념과 반대되는 것이었으므로 인정받지 못했다. 크게 낙심한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하지 않았고 강의도 그만둔 채 연구에만 전념했다. 분자생물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1970년대에 들어서서야 그녀의 연구가 유전자의 기능 및 구성을 밝히는 데 중요하다고 인정받기 시작했다. 1983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상을 단독 수상하는 기록을 남겼다.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소떼와 함께 방북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이른바 '통일 소' 5백 마리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분단 이후 민간인이 정부관리의 동행 없이 판문점을 통과하기는 처음이었다.
정주영 씨는 북으로 출발하기 전 '평화의 집'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번 방북이 개인의 고향 방문이 아니라 남북한 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주영 씨는 7박 8일 동안의 방북 기간에 고향인 강원도 통천군 노상리를 방문해 친척들을 만난 뒤 대북협력사업 지역인 금강산과 원산 등을 둘러봤다.
정 씨는 또 금강산 관광사업과 남북한 합작 자동차공장 설립 등의 사안에 대해 북한 측과 합의를 하는 등 남한의 대북 창구 역할도 해냈다.
[2002년] 전화기의 발명자로 안토니오 메우치를 복권시키는 결의안이 미국 하원 통과
전화기의 발명가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Bell, Alexander Graham, 1847~1922)이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이민자 안토니오 메우치(Meucci, Antonio, 1808~1889)라는 사실을 미국 하원이 표결을 통해 마침내 인정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7일 '전화기와 관련된 역사를 새로 쓰게 됐다'며 이같이 보도하고, 이번 표결 결과에 이탈리아인들이 매우 기뻐하고 있다고 전했다.
가디언지 보도에 따르면 미국 하원은 16일 메우치가 발명해 1860년 뉴욕에서 시연됐고 당시 현지 언론에도 보도된 '텔레트로포노(Teletrofono)'가 최초의 전화기이며, 벨은 메우치의 자료를 입수해 16년 뒤에 특허를 받아낸 데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메우치 사후 113년 만에 인정했다.
그동안 벨의 자서전과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메우치의 사연을 아는 여러 세대의 이탈리아인들과 마찰을 빚어왔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메우치는 전기충격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 소리가 구리선을 통해 흐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 본격적인 기술개발을 위해 1850년 뉴욕으로 향한다.
그는 특히 몸이 마비된 아내를 위해 침실과 자신의 작업실을 연결하는 시스템을 개발, 1860년에 공개 시연회를 열었다. 이 기계를 보다 정교하게 고친 그는 영구 특허신청에 필요한 250달러가 없어 1871년 1년짜리 임시 특허를 신청했다. 그러나 그는 제품 상용화를 위한 재정적 후원자를 찾지 못했으며, 3년 뒤에는 임시 특허조차 갱신하지 못했다.
그러자 메우치와 연구실을 함께 사용하던 벨은 1876년 특허를 내고 웨스턴 유니언 전신회사와 계약을 맺어 큰 돈을 벌며 유명인사가 됐다. 메우치는 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 재판은 승리를 눈앞에 둔 메우치가 1889년 숨지면서 중단됐다. (부산일보 2002)
[1894년] 근대올림픽 부활을 결정한 국제스포츠회의 개최(16~23일, 소르본느대학)
← 쿠베르탱
쿠베르탱은 스포츠야말로 프랑스뿐만 아니라 온세계 청년들의 희망이라고 믿고 1889년 ‘프랑스 스포츠연맹’을 조직하였다. 그는 이와 더불어 올림픽이라는 스포츠 제전을 통해 세계의 청년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여 우정을 나누게 한다면 이는 곧 세계평화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후 여러 차례 올림픽 부활을 제창해 오다가 드디어 1894년 6월 16∼23일까지 열린 국제스포츠회의에서 쿠베르탱의 올림픽 제의는 유럽 각국 대표들로부터 만장일치로 찬성을 얻었고, IOC(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국제올림픽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쿠베르탱의 건의에 따라 그리스의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Dimitrios Bikelas)가 초대 IOC 위원장이 되었고 쿠베르탱은 사무총장에 머물렀다. 이들은 제1회 대회를 1896년 유서깊은 아테네(Athenae)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1762년]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출생
정약용은 17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鬐)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그밖에
2005년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폐막(평양)
2004년 김천고보 세운 영친왕 보모 최송설당 별세
1997년 금융감독원 신설 발표
1996년 ‘북청사자놀음’ 예능보유자 변영호씨 별세
1992년 미소정상회담,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I) 합의
1989년 조치훈 명인, 본인방 획득
1984년 캐나다 수상에 존, 터너 선출
1983년 교황 요한바오로2세 모국 폴란드 방문
1983년 소련, 안드로포프 국가원수로 선출
1980년 KBS TV과외 ‘가정고교방송’ 방영개시
1977년 브레즈네프, 소련 국가원수로 선출
1977년 핵물리학자 이휘소 박사 의문사
1977년 로켓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 사망
1973년 소련 브레즈네프 제1서기 방미
1972년 제1회 소년체전 개막
1972년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실무회의,본회의 의제확정, 합의문서교환
1971년 의료파동 발생
1968년 시인 김수영 교통사고로 사망
1967년 브라질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실험에 성공
1966년 장창선선수, 세계아마 레슬링대회서 금메달
1963년 소련 우주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슈코바, 세계최초로 여성 우주비행에 성공
1960년 일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방문 취소
1956년 국내 최초 TV방영 시작
1956년 적십자사, 납북자 신고 접수
1954년 고 딘 디엠, 베트남 수상에 취임
1954년 제5회 월드컵 스위스서 개막
1947년 제1회 유엔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 상해서 개막
1944년 프랑스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 사망
1940년 프랑스 페탱 내각, 독일에 항복
1932년 로잔배상회의 (독일의 배상액 절하)
1924년 중국, 황포군관학교 개교. 교장 장개석
1920년 멕시코의 대통령(1972-82) 로페스 포르티요 출생
1917년 제1회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1910년 페루의 대통령(1968-75) 벨라스코 알바라도 출생
1903년 미국 포드자동차사 설립
1902년 이상재 등 개혁당사건에 관련되어 구속
1901년 손문, 일본에 망명
1840년 아편전쟁 발발(양력 7월 18일)
1583년 스웨덴 역사상 가장 유능한 총리로 불리는 악셀 옥센셰르나 출생
1232년 고려,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