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군 가창면의 한 마을 회관에서 민족 최대 명절인 설을 맞아 고향을 찾은 가족이 마을 어르신들에게 세배를 하고 있다.
단상1- 설날 세배 갔다가 예절 교육 받은 사연
며칠 있으면 설날입니다. 설날 풍경이야 전국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 설날은 무척 설레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설날’인가?
어른들에게 세배가 끝나고 나면 또래끼리 짝을 지어 동네 노인들에게 세배하러 다니곤 했습니다. 어쩌다 백원짜리 하나 건네 주는 노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탕이나 떡, 과일, 쌀, 과자 등을 줍니다. 어떤 노인은 초등학생 꼬맹이들인 우리에게 술을 한잔 따라 주기도 합니다.
노인들 위주로 세배를 돌지만, 친구 부모님에게는 일단 제일 먼저 세배를 하곤 했습니다. 동네 친구 아버지 중에 깐깐하기로 소문난 분이 한 분 계셨습니다. 저와 세배를 다닌 친구 일행은 그 친구 집에 도착해서 안방 문을 열고 “세배 왔습니다”하며 우르르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친구 부모님을 모셔놓고 단체로 큰절을 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허전한 것 같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하고 새해 인사를 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따사롭던 분위기가 갑자기 썰렁해졌습니다.
깐깐한 친구 아버지는 우리가 일어섰다 앉기도 전에 “어른한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것이 아니야…” 하며 혀를 찼습니다. TV에서 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기에 그 말이 입에 배어 있던 차에 한명이 그 말을 하자 모두가 엉겁결에 따라 해버린 것입니다.
친구 아버지의 훈계가 이어졌습니다.
“어른한테 세배할 때는 그냥 절만 하는 것이 제일 좋고, 정 한마디 하려면 건강을 바라는 말로 하면 된다.”
세배하러 왔다가 우리는 꿇어앉은 채 친구 아버지의 예절 교육을 무릎이 아프도록 들었습니다. 안동식혜가 한 상 나왔지만, 숟가락을 갖다 댈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후 우리 할머니에게 세배 오는 동네 사람들을 가만 살펴보니 모두 그냥 절만 하고 가거나 간혹 “몸은 편찮은데 없냐”고 한마디 물을 뿐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그런 ‘불경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큰절을 할 때는 무조건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새해 덕담은 어른들의 몫이란 걸 배웠습니다.
덧붙이면, TV나 신문에서 어른 배우가 한복을 입고 절을 하면서 시청자나 독자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고 인사를 하는 것은 덕담 차원이 아니라, 언론사가 새해 인사의 한 방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된다고 봅니다.
새해 아침 일찍 일어나 제사를 지내기 전에 집안 어른들에게 먼저 세배를 합니다. 삼촌이 아무리 어려도 조카는 세배를 해야 합니다. 형제끼리도 세배합니다. 제사 후에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합니다. 특히 친구 부모님이 한동네에 살면 반드시 세배를 해야 합니다. 절을 받는 사람이 맞절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정해집니다.
세배를 차례 전에 하는 것이 “맞느냐 아니냐”하며 다투기도 하는데, 이는 지역과 집안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자란 곳에서는 반드시 차례 전 아침 일찍 어른들에게 세배부터 했습니다. 제사를 지내고 나서는 친척과 동네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녔습니다.
단상2- 안동식혜
안동식혜/ 이미지=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안동식혜는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의 하나입니다. 이 음식은 안동 문화권인 경북 북부 지방에만 맛볼 수 있습니다. 같은 문화권인 의성이나 예천 서부지방 등지에서는 거의 먹지 않는 것으로 봐서 ‘안동식혜’라고 이름 붙여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안동에서는 흔히 ‘식혜’라고 하면 이 안동식혜를 칭하는 것입니다. 타지방에서 식혜라고 부르는 것을 안동에서는 ‘감주(甘酒)’라는 별도의 용어를 사용해서 구분합니다. 따라서 안동지방에서는 식혜라고 하면 음료로도 개발된 그 식혜가 아니라, 바로 이 안동식 식혜를 말합니다.
안동식혜는 아무리 과식을 해도 배탈이 나지 않고 속을 편하게 해 줍니다. 맛이 매콤새콤하고, 독특해서 처음 먹는 사람은 이게 무슨 맛인가 하고 의아해하기도 합니다. 가장 큰 특징은 겨울철에 만들어 먹는다는 것과, 무채, 생강, 고춧가루가 기본으로 들어가고 그 외에 당근, 땅콩, 잣 등을 첨가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발효 음식이라 요구르트처럼 시큼하면서 삭인 맛이 납니다.
안동 지방에서는 설날 식혜를 만들지 않는 집이 없으며, 찾아오는 손님에게는 꼭 식혜를 대접합니다. 그 맛이 천차만별이라 세배를 다니며 집집마나 나오는 식혜 맛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입니다.
음식전문가들은 안동식혜가 발효 식품이라는 점에서 젓갈의 한 종류로 보기도 합니다. 경북 북부 내륙지방에서는 생선이나, 새우 등의 젓갈 재료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무 등 야채를 이용해서 젓갈을 담았다는 것입니다. 바다 음식이 얼마나 귀했느냐고요? 옛날 이쪽 지방 노인들의 소원이 새우젓에 밥한끼 먹어보는 것이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구한말 혹은 일제시대 중국 연변 지방으로 옮겨간 안동출신 후손들이 식혜를 만드는 것을 보면 매우 걸쭉하게 만들어 마치 죽처럼 보입니다. 현재 안동지방에서는 식혜를 이처럼 심할 정도로 걸쭉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경상북도 북부 지방은 음식 재료가 풍부하지 않고, 겨울이 길고 추운 곳이라 다른 지역에는 없는 독특한 음식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요즘 유명세를 타고 있는 ‘안동 간고등어’도 그 중 하나입니다. 젓갈도 구경 못할 정도로 생선이 귀한 동네에 웬 ‘간고등어’가 있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만 해도 생선 장수들이 등짐에 고등어 같은 생선을 지고 다니며 팔러 다녔습니다. 시골구석까지 운반하는 동안 생선이 썩지 않게 하려면 그저 소금에 팍팍 절이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눈이 푹 들어간 고등어를 무조건 ‘새물(싱싱한 생선)’이라고 우기던 생선장수 노인이 기억납니다.
옛날에 안동을 비롯한 경북 내륙 지역의 생선은 주로 영덕이나 울진 쪽의 산길을 통해 옮겨졌는데, 상하지 않게 내장을 빼고 소금에 푹 절였기 때문에 간고등어란 것이 탄생했습니다.
안동의 또 다른 음식으로 ‘헛제삿밥’이 유명합니다. 고향이 이쪽인 저도 처음에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음식인가’ 궁금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제사 때나 초상집에서 먹는 비빔밥에 몇 가지 제사 음식을 더하여 상품화시킨 것이었습니다.
제사 때 먹는 비빔밥은 고사리, 시금치 등의 나물을 넣고 고추장 대신 깨소금을 넣은 간장에 비벼서 먹습니다. 예전에 상갓집에 가면 무덤을 쓰는 동안 산에서 점심을 줄 때 반드시 이 비빔밥을 손님들에게 대접했습니다.
기타 경상북도 북부 지방 음식의 독특한 점으로 아래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교통이 발달한 요즘은 전국의 음식맛과 종류가 평준화되고 있고, 제가 요리를 잘 모른다는 것을 감안하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첫째, 명절이나, 제사, 초상이 났을 때 배추로 전(찌짐)을 만들어 손님을 대접합니다. 같은 경북 북부에서도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배추전을 먹습니다. 배추전은 한번 맛들이면 다른 전은 거의 먹지 않을 정도로 맛이 좋습니다.
둘째, 음식에 해산물을 거의 첨가하지 않습니다. 생선과 해산물이 워낙 귀해서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김치에 젓갈을 넣기 시작한 것도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당연히 된장국에 조개를 넣는 법도 없습니다. 대신 귀한 문어를 제사상에 많이 올렸고, 그 남쪽인 대구 지방에서는 상어(돔배기)를 많이 썼습니다.
셋째, 닭이나 돼지고기는 주로 ‘국’을 만들어 먹습니다. 고기가 워낙 귀한 음식이라 그냥은 잘 먹지 않고, 온 식구가 나눠 먹기 위해서 나물이나 토란 등을 많이 넣고, 얼큰하게 국을 끓여서 먹었습니다.
넷째,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만두를 거의 만들어 먹지 않습니다. 저는 누나가 여주로 시집을 가서 경기도 이북에서는 만두를 명절 음식으로 많이 해먹는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섯째, 음식이 대체로 맵고 짜다는 평가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요즘 식당에서 사먹는 우리나라 음식이 전반적으로 너무 달아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비빔밥도 너무 달고, 뚝배기 불고기는 거의 설탕물에 요리한 것 같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 외 도토리묵(꿀밤묵)을 먹을 때 채 썬 묵을 젓가락이 아니라 국물과 간장에 적당히 버무려 숟가락으로 떠먹는데, 밥을 말아 같이 넣어 먹기도 합니다. 이밖에도 유서깊은 종가집이나, 내려오는 경북 북부 지방의 전통 음식이 무척 많지만, 관련 지식이 부족해 소개를 할 수 없는 점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