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로이터통신[Reuters] 2011-11-23 (번역) 크메르의 세계
키우 삼판, "시하누크도 데려와라"
Khmer Rouge leader asks why Cambodia's ex-king not in d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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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CCC/Reuters) 키우 삼판 피고인이 수요일(11.23) '제002호' 사건 본심재판 3일째를 맞아 ECCC 법정에 출두해있다. |
기사작성 : Prak Chan Thul
(Reuters) -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의 국가수반이었던 키우 삼판(Khieu Samphan, 80세) 피고인은 수요일(11.23)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국제법정'(ECCC) 공판에서의 진술을 통해 1970년대에 발생한 '대량학살'에 개입했다는 고발을 부인하면서, 때때로 자신들의 동맹자였던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전 국왕은 어찌하여 피고인석에 앉아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유엔(UN)이 후원하는 ECCC 법원은 월요일(11.21)부터 '킬링필드'(Killing Fields) 정권의 고위 지도자들이었던 키우 삼판 피고인을 비롯하여 누온 찌어(Nuon Chea) 및 이엥 사리(Ieng Sary) 피고인에 대한 [본심] 재판을 개시했다. '크메르루주' 정권은 1975년 4월부터 1979년 1월까지 캄보디아를 통치하면서 많게는 220만명까지의 인명을 희생시켰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이들 피고인들에게는 반-인도주의 범죄, 전쟁 범죄, 대량학살의 혐의가 적용되어 있다. 이러한 범죄들은 캄보디아를 거대한 강제노동 수용소로 만들면서, 그 국민들이 고문, 기아, 질병, 과로로 처형되거나 사망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한 키우 삼판 피고인은 ECCC 법원이 서적들과 신문 기사들에서 발췌한 '전설들'을 끌어모아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이 공산당 정권에서 지도자로 성장하긴 했지만 그러한 죽음들을 통제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의 공산주의는 전세계 수백만명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안겨다준 하나의 운동이었다. 내가 당시 진정으로 바랬던 바는 내 조국을 위해 최선의 경험을 쌓게 되는 것이었다." |
중국이 후원한 '크메르루주' 정권은 '브라더 넘버 원'으로 불렸던 폴 포트(Pol Pot)가 이끌었다. 이 정권은 1975년에 미국이 후원한 론 놀(Lon Nol) 장군 정권을 쓰러뜨렸는데, 론 놀 역시 그보다 5년 전에 쿠테타를 일으켜 시하누크를 실각시킨 바 있다. '크메르루주'는 정권을 잡자마자 근대성과의 전쟁을 선언하고, 도시와 읍내들에서 사람들을 강제이주시키고 화폐와 시장을 철폐시켰다.
키우 삼판 피고인은 진술을 통해, 미국의 폭격기들이 1969년부터 1973년 사이에 캄보디아 영토 내에 융단폭격을 가해 당시의 캄보디아가 '인간 생명의 주요한 재앙'에 직면해 있었다면서, 미국이야말로 캄보디아를 불안정하게 만든 주범이라고 비난했다.
'크메르루주' 정권이 주창한 '영년'(零年, year zero) 정책은 사회개조와 순수한 농업국가를 건설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었지만, 생명력을 불어넣기보다는 20세기에서 가장 어두운 한 장을 장식하고 말았다.
키우 삼판 피고인은 자신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19번의 정책결정 회의들 중 14번만 참석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대량학살과 관련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말을 두 차례나 하면서, "나는 내게 적용된 혐의의 범죄들과 관련하여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괴물은 아니다"
앤드류 케일리(Andrew Cayley) 국제 공동검사는 이번주 재판부에 대해 발언하면서, 법원이 80대가 된 늙고 병든 피고인들에 대해 동정적인 감정에 유혹받아선 안 된다면서, 이들이 바로 동포인 캄보디아인들을 "살해하고, 고문하고, 테러를 가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역사가들은 키우 삼판이 1950년대 캄보디아 출신 파리 유학생들로 이뤄진 작은 그룹에서 선도적인 지식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의 유학생들은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었고, 이후 귀국하여 훗날 '크메르루주'가 되는 게릴라 운동의 핵심을 이뤘다.
키우 삼판 피고인은 지난 2004년에 출판된 저서를 통해, 자기 자신이 정권 내부에서 사실상 볼모와 같은 존재였다면서, 어떠한 만행에 대해서도 몰랐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 책이 출판된지 3년 후에 과거 크메르루주 반군들의 강고한 요새였던 태국 국경의 빠일른(Pailin, 파일린)에 있던 자택에서 체포되어 수감됐다.
키우 삼판 피고인은 법정진술에서, 검사들이 기소한 바대로 만일 자신이 대량살인을 목격했다고 한다면, '크메르루주' 정권에서 짧게나마 국가주석을 맡았던 시하누크 전임 국왕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기소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하누크 공은 1993년에 다시 국왕으로 복위했고, 지난 2004년 퇴위한 바 있다. 키우 삼판 피고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찌하여 시하누크 상왕은 피고인석에 데려오지 않는단 말인가? 검사님은 내가 시하누크 국왕과 동반해서 노동수용소들을 방문했을 때, 우리의 눈앞에서 노동자들의 목 뒤를 곡괭이나 총알로 살해하는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
키우 삼판 피고인의 변호인인 자크 베르제스(Jacques Verges) 변호사는 나치 전범인 클라우스 바르비(Klaus Barbie)와 같이 욕을 많이 먹는 인물들을 변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베르제스 변호사는 법정이 론 놀의 쿠테타 이후 발생한 1970년대의 정치적 상황 및 캄보디아에 대한 미국의 융단폭격, 그리고 태국과 베트남의 영토적 주장 등을 고려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들. 캄보디아가 겪은 이러한 고통을 간단히 말해보자. 인간은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괴물'(monster)은 아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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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ECCC/Mark Peters) 키우 삼판 피고인의 변호인인 자크 베르제스 변호사. 그는 주요 전범과 독재자 등,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인물들의 변호를 맡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
한편 '브라더 넘버 투'로 불리면서 크메르루주의 주요한 이념가로 활동했던 누온 찌어 피고인은 '화요일에 열린 재판'에서 모든 혐의를 부인하면서, 자신의 정파는 캄보디아를 식민주의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베트남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행동했다고 말했다.
3번째 피고인인 전직 크메르루주 정권 외부부장관이었던 이엥 사리 피고인은 수요일(11.23) 공판에서, 시작과 동시에 건강이 안 좋다고 호소하면서 자신의 진술원고를 읽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진술을 낭독할 것을 명령했고, 그는 휠체어에 탄 채 피고인석으로 나왔다.
이엥 사리 피고인은 자신이 이미 1996년에 시하누크 국왕의 사면을 받은 바 있다면서, 당시의 사면령은 국회에서도 승인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향후의 재판과정에서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12월5일까지 공판을 연기했다.
또 다른 피고인이었던 전직 크메르루주 정권 사회부장관 이엥 티릿(Ieng Thirith) 피고인은 '지난주에 내려진 결정'을 통해, 정신적 질병(치매)을 앓고 있어 재판을 받기엔 부적절하다고 인정됐다. 하지만 그녀는 검사들이 이의 제기에 따른 최종적 결정이 있을 때까지 구속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크메르루주 정권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의해 1979년 1월에 붕괴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폴 포트가 사망한 1998년까지 반군으로 남아 있으면서 국지전을 계속했다.
이번에 열린 일련의 재판들은 ECCC 법원이 2번째로 다루고 있는 사건이다. ECCC는 2005년에 설치된 이후 1억 5,000만 달러 정도의 예산을 사용했고, 재판 지연과 각종 사임 파동, 그리고 정치적 개입에 대한 고발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ECCC는 그 역사적인 첫번째 재판으로서, 작년에 '돗'(Duch)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크메르루즈 정권 당시의 보안감옥 교도소장 깡 껙 이우(Kaing Guek Eav) 피고인의 반-인도주의 범죄 혐의에 관해 본심재판(2심)을 했다. 법원은 1만5천명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에게 징역 30년형을 언도했지만, 현재 19년으로 감형하는 문제를 놓고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다. 최종 결정은 내년 2월로 예정되어 있다.
(기사작성: Alan Raybould 및 Jason Szep, 편집: Nick Macf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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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시, 오래 전부터 우리가 예상했던대로
이 사람들은 워낙 자신들 나름의 청년기들을 보낸 사람들이라서..
쉽게 승복 안 하네요... ;;;
까잉 껙 이우 피고인의 경우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네요..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인데 쉽게 인정하겠습니까.
그렇죠,,
요즘은 국제재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에 대해 새로운 고민이 생깁니다.
즉, 어떤 극단적인 정권이 들어서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거기서 발생한 인명의 희생이란 결과적 현상에 대해서만 재판하는 것이
크게 의미가 있을 것인가 .. 하는 생각 말이죠...
오히려, 하나의 정권이 그 출범 전과 이후에 있어서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는가에 대해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크메르루주의 경우,
이러한 역사적 현상이 아예 1950~1960년대에 발생했더라면
좀더 침착하게 접근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오히려 세계체제가 좀더 안정화된 이후인
1970년대에 발생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발전된 "상식"이 적용되면서,
오늘날 거대한 돈먹는 기계와 같은 재판이 되는건 아닌가도 생각하게 되네요...
이건 뭐..
차우세스크나 후세인, 카다피처럼
국민들에게 총칼을 겨누라고 명령한 정황에 대한 정보도 명확하지 않고 말이죠...
시간이 흐를수록 이 노인네들이 죽기 전에
좀더 상세한 진술이나 좀 있었으면 하는데
조금씩 나오긴 나오는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