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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기도로 세운 나라(장드보라)
(누가복음 17:1-8)
1. 대한민국은 기도로 시작된 나라입니다.
대한민국 국회는 5월 10일의 선거에서 선출된 의원들로 처음 개원한 날은 1948년 5월 31일이었습니다. 일컬어 제헌국회라고 합니다. 그 날 오전 10시에 중앙청 중앙 홀에서 시작 되었던 회의에서 맨 처음 행한 절차가 임시의장을 선출하는 순서였습니다. 임시의장은 국회의원 중 최고령자가 맡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임시의장으로 뽑힌 이승만 박사가 의장석에 등단하자 국회의원 일동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승만 임시의장은 독특한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의 말로 역사적인 사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본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감리교회의 장로님이셨던 이승만 임시의장의 이 발언에 따라 국회의원이면서 목사이셨던 이윤영 의원이 단상으로 올라가 간결하면서도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윤영 의원은 기독교 목사의 신분으로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분이었습니다. 기도는 국회의원 전원이 기립한 가운데 드려졌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일이 기적이라 할 것이 대한민국이 세워지게 되면서 처음 뽑힌 국회의원들 중에는 종교와 사상이 실로 다양하였기 때문입니다. 종교로 말하자면 기독교, 불교, 유교 및 민족종교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있었고 사상적으로는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자유민주주의자 등이 골고루 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함께 일어나 고개를 숙여 대한민국의 건국을 감사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것이었습니다. 실로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세울 때에 맨 먼저 기도로부터 시작한 일이 어찌 기적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이윤영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복을 주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정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 없을 줄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하옵건데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 평화를 이루어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와 인과 용과 모든 덕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서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내딛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김진홍 목사님은 이 기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기도 첫 부분의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게 된 부분은 마치 출애급기를 다시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하며 그때 이미 분단 된 조국의 통일과 자주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에 이르러서는 ‘아멘’을 함께 드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리고 민생의 도탄이 길면 길수록 악한 세력 공산주의가 확대될 것이란 부르짖음은 지금까지 멈출 수 없는 기도가 되고 있다. 당시 제헌국회의원들이 그 어려운 여건 중에서도 이 나라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 위에 세워 주었기에 그를 기반으로 삼아 이 나라가 이 만큼이나마 살아가게 된 것임을 생각할 때 깊은 감회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이 기도에 중요한 세 가지의 소원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남북통일, 둘째는 민생의 복락, 셋째는 세계의 평화입니다. 우리나라의 국회는 물론 새 정부도 이런 목표를 가지고 출발한 것입니다. 특히 셋째인 ‘세계평화’라는 목표는 우리나라 같은 작은 나라로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소원이요, 분수도 모르고 하는 기도하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2. 지금은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1)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성도들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① 『남북장성급회담 북측 단장은 지난 4월 10일, 남측에 통지문을 보내 “심리모략 행위를 중지하기 위한 납득할만한 대책을 강구하고 그에 대해 공식 통고하지 않는다면 우리 군대는 해당한 결정적인 조치를 곧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이날 보도했습니다. 북측 단장은 통지문에서 북측의 여러 차례 경고에도 불구하고 “남측이 반공화국 심리 효과를 높이기 위해 우리 체제를 비난하는 불순한 삐라와 추잡한 녹화물, DVD삐라까지 대량 살포하고 있고, 여기에 동서해 지역 북남관리구역을 통행하는 남측 인원들도 적극 가담하고 있다”고 말했다.』
②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잠수함의 어뢰로 우리 초계정 천암함에 발포하여 침몰시켜 놓고, 자기들이 하지 않은 척하면서, 이제는 뻔뻔하게 대북 삐라 살포행위를 막아달라고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무엇을 가장 무서워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어떤 무기보다도 삐라를 무서워합니다. 삐라에는 진실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는 본래부터 거짓 위에 세워졌습니다. 어둠을 좋아하고 거짓말을 만들어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짓을 끊임없이 자행했습니다. 그래서 북한 백성들을 전부 소경이요, 귀머거리요, 벙어리가 되게 하였는데, 이제 탈북자들이 남한에 와서 보고 듣고 깨달은 사실들, 곧 북한에서 배웠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깨달아서 그것을 밝혀 이제는 더 이상 속지 말자고 하여 만든 삐라를 통해 북한의 백성들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게 되니까 그것이 가장 두려웠던 것입니다.
2) 이 영적 전쟁에서 우리는 기도로 승리해야 합니다.
① 북한이 먼저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6.25가 그랬고,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를 보내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 대통령을 암살하려던 일이 그랬고, 이틀 후인 1월 23일 푸에블로 호와 승무원 83명을 나포한 사건도 그러했습니다. 1974년 광복절 기념행사장에 문세광을 보내 박 대통령을 저격하였으나 육영수 여사가 죽었던 일이 그러했고,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도끼만행사건’이 있었는데, 이것도 그러했습니다.
1983년 10월 9일에는 버마의 아웅산 국립묘지에 폭발물을 장치하여 우리 대통령을 죽이려고 했던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천만다행히도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에 폭발하였기에 대통령은 화를 면했지만, 아까운 각료 17명이 죽었습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1987년 11월에는 우리의 KAL기를 폭파하여 귀국하던 중동근로자 승객들을 다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금강산에 관광 간 사람을 붙잡아 놓고 괴롭힌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습니까? 그러다가 현 정부 들어와서 북한은 2008년 7월 11일 새벽에 금강산 관광에 나섰던 박왕자(53) 씨를 북한군 초병이 박 씨의 등 뒤에서 총을 쏴서 죽였던 일도 있었습니다. 2009년 9월 6일 임진강 상류 황강댐의 물을 예고 없이 방류했는데, 이로 인해 남한 임진강 수위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강가에 천막을 치고 자던 우리 국민 6명이 익사했습니다. 그러나 6.25도 남쪽에서 먼저 쳐들어왔던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무장공비들의 일은 남한에서 조작한 것이라고 하고, KAL기 사건도 남한의 자작극이라고 떠듭니다. 박왕자 씨를 이렇게 죽여 놓고도, 한 마디도 사과할 줄 모르는 악한 놈들입니다.
적이 아무리 강하고 악랄해도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니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하나님의 편이 아니라 마귀의 편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귀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깁니까? 한국 교회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편이 되기 위하여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저렇게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진짜로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 만민을 위하여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집이기에 하나님이 책임을 져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3) 기도는 우리를 진리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무서운 것입니다.
① 기도는 하나님과 내가 일 대 일로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이루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누가 기도하겠습니까? 기도하면 응답이 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나날이 믿음이 자라갑니다.
② 또한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대화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하나님도 그를 사랑하십니다. 기도를 많이 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강하게 임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복을 주십니다.
1) 운동시합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것은 역전승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그렇게 됩니다. 마귀가 더 강하고 다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겁쟁이들은 마귀에게 얼른 굴복하고 의를 배반합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나중에는 일제에 굴복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마 24:13)고 말씀하셨습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고난을 당할 당시에는 너무도 고통스럽고 원망스럽기도 하겠지만, 나중에 지나고 보면 그것이 놀라운 복이 되었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국민이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로 세운 대한민국 선교한국 국민으로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며 감사를 잃지 않고 늘 깨어 기도하는 삶 살기 원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진리의 사람을 되게 하는 능력있으니 기도에 힘쓰며 전념하는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을 더욱 사모하며 진리를 따라 살길 원합니다!
41. 선민의 글자(1) - 훈민정음 (장드보라)
(신명기 9:9-10)
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야를 산에 거하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네게 주셨나니 그 판의 글은 하나님이 친수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1. 글자의 중요성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 온 세례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소리’이고, 예수님은 그 소리의 본체이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가 중요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실 때에 돌판에 친히 써 주셨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서 5:5-6에 보면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였는데 벨사살이 자기의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왔던 금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여 왕이 그의 귀인들과 왕후들과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그 금은동철 목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보았습니다. 이에 왕이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의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치더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이 글을 읽지도 못했는데, 다니엘이 읽고 해석을 하지 않았습니까?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바르신, 곧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런가 하면 예수님도 간음 중에 잡혀온 여자를 심판하실 때에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이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구약의 왕이었던 벨사살은 죽었고, 신약의 죄인이었던 그 여인은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이 글자를 쓰시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일어납니다. 마치 왕이 죄수의 판결문에 싸인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는 사형으로, 누구에게는 무죄 석방으로 결정됩니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십계명을 하나님이 친수로 쓰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도 죽느냐 사느냐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고, 글자입니다.
2. 훈민정음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글자입니다.
1) 글자는 크게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로 나눕니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만드시고 반포하실 때에 그 서문에 한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의 말소리가 중국의 것과 달라서 문자끼리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도다. 내가 이것을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히게 하여 매일 사용함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이 우리 백성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도 진실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글을 만들려고 했을 때에 신하 중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미 좋은 글자가 있는데, 왜 다른 것을 만들려고 하느냐? 아무리 좋은 것을 만든다고 해도 한자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들 수 있겠느냐? 또 우리가 만일 한자를 버리고 다른 글을 쓴다면 중국의 미움을 받게 되지 않겠느냐? 우리는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공연히 글자를 새로 만들자고 하여 지금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것이냐?”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묵묵히 밀고 나갔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왕을 따랐습니다. 마침내 위대한 글자를 만들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의 첫 번 시험이 무엇이었습니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떡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자녀들을 공부시키기는 해도 그 목적이 돈에 있고 세상 명예와 권세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마귀의 유혹이요,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얼마 전 고국의 이어령 교수가 한국 교회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읽었는데, 그는 한국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는 일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이는 일에 더 열심이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습니다. 선교사라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구제 사업에 더 바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택해야 합니다. 빵이 아니라 글을 택하는 것입니다. 문화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의식주의 문제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과 사명을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문화민족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① 세상에는 힘의 종류가 많습니다. 육체의 힘, 무기의 힘, 돈의 힘, 권력의 힘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가장 큰 힘은 문화의 힘입니다. 로마가 그리스를 무력으로 점령하였지만, 오히려 로마는 그리스에게 문화적으로 점령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로마가 유대나라를 점령하였지만, 유대인들은 라틴어를 쓰지 않고 그리스어를 썼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계에서 제일가는 글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친수로 십계명을 써 주셨습니다. 글자를 영어로 letter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3:6-7에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보배를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정말 귀중한 것은 알아보지 못하여 천대하고, 하찮은 것을 오히려 귀하게 알고 사랑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백성에게 주신 것은 가장 좋은 글자요, 그 글자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성경을 더욱 사랑함으로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3) 하나님이 왜 이런 엄청난 복을 주셨을까요? 세계에서
① 우리의 사명은 세계복음화가 아닙니까? 온 세계에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쉽고 좋은 글자를 주셨고, 복된 말씀을 주셨습니다.
②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손가락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로 기록된 책입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 더욱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의 글자 한 자, 한 자를 잘 살펴보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깊은 뜻이 살아나고 깨달아집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을 때에 드디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나타나고 그 큰 은혜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③ 우리 민족은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기도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말씀을 더욱 사랑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세계에 선교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세계에서 제일가는 글자를 주시고 이렇게 복을 주셨습니다.
4) 큰 것을 받으면 작은 것들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곧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어서 큰 것을 구할 줄 모르고 작은 것만 달라고 기도하고, 그 작은 것을 위해 목숨을 걸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결국에는 모든 것이 허무한 것으로 끝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큰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값진 것을 알고 그것을 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주시면 무엇을 내려주실까요? 금은보화입니까? 아닙니다.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신 28:12)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때를 따라 내려주시는 비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귀한 말씀을 통해 오늘날 한글을 배우고 사용하기까지는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것이라 하셨는데 떡을 구했던 어리석은 죄를 회개하며 이제는 썩어 없어질 떡을 구하며 사는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갈급한 심령으로 더더욱 말씀 사모하며 말씀의 은혜단비를 구하며 사는 자 되길 소망합니다!
복음통일의 그날을 위하여 말씀으로 먹고 사는 자되어 어디를 찔러도 말씀만 터져나오는 복된 삶으로 인도하옵소서! 아멘!!!
42. 선민의 글자(2) 한자 (장드보라)
(고린도전서 14:10-12)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1. 표의문자인 한자도 실은 우리 고유의 글자입니다.
1) 강호 동양학자로 한국CEO연구포럼 연구위원장인 김종희 님을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한자는 한국의 문자’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한자’라고 쓸 때에는 중국 한나라를 뜻하는 한수 한자를 쓸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름 한자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한자는 너무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① 우리가 보통 한자라고 말하는 것은 중국의 한나라 때(BC 202~AD 5)에 만들어진 글자란 뜻이 아니라, 은나라에서 만든 갑골문이 발전해온 것을 한나라 대에 이르러 자기의 글과 글자로 삼았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은나라란 동이족이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으므로, 한자란 중국의 한족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님이 확실합니다.
환웅천황은 우리 한민족의 시조이며 치우 역시 한민족입니다. 고대 한민족의 활동영역은 한반도와 만주를 거쳐 산동 지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현재 산동성 제남 부근에 많은 인물이 태어났습니다. 순임금도 제나라 시조가 된 태공망 여상도 모두 우리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한자를 썼습니다. 또한 단군 임금님은 나라를 세우며 국호를 한자로 조선이라 지었습니다. 이후 오랜 세월 한 민족은 한자를 사용해 왔습니다.
2) 한자는 중국 한족만의 문자가 아니고 고대에 우리 민족의 역사와 생활과 문화와 철학이 녹아있는 우리의 생활문자입니다.
글자는 본래 고조선의 역사와 더불어 생긴 것이며 뜻은 나무에 칼로 금을 그어서 말을 대신할 수 있도록 부호문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갑골문자이며 죽서, 죽간으로 남겨진 것입니다. 이 글자를 글이라고 그대로 발음하는 민족도 우리 한민족뿐입니다.
3) 한국은 소리글 훈민정음과 뜻글 한자를 보유한 문화강국입니다.
또 한자를 한자라고 할 중요 이유는 중국 등 한자를 사용하는 여러 나라와는 달리 우리만의 읽고 소리 내는 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의 70%가 한자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발음법이 중국이나 일본과 다릅니다. 또한 중국은 간자, 일본은 약자라 하여 획수를 주려서 간략하게 새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글자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나라는 대만과 우리나라뿐입니다. 우리에게는 한글이 있어서 의사 표현에 불편함이 없기에 한자를 약자로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자는 약자로 만들면 그 본래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그대로 두어야 의미가 고스란히 보존됩니다. 또한 옛날의 우리 조상들이 써놓은 책들도 어려움 없이 읽고 해석할 수 있으니, 이것은 우리의 큰 장점입니다.
2. 한자의 특징을 살펴봅시다.
1) 한자의 가장 큰 특징은 표의문자라는 점입니다. 표의문자란 그림문자인 회화문자나 사물의 특징을 그대로 본떠 그린 상형문자와 같이 시각에 의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는 문자입니다. 따라서 글자의 모양만 보면, 나타내고자 하는 뜻을 직접 알 수 있는 글자입니다. 한자는 글자를 하나하나 모두 읽지 않더라도 눈으로 한번 훑어보면 문자의 뜻을 대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자수가 너무 많고, 형태가 복잡하여 기록하거나 읽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단점도 있지만, 한자가 표의문자로서 갖는 장점으로는 조어력 함축성 상징성 기억력 추리력 지각력 등이 표음문자에 비하여 훨씬 뛰어나다는 점은 놀라운 장점입니다.
2) 한자의 둘째 특징은 단음절어라는 것입니다. 즉 한자는 각각의 글자가 하나의 음절로 되어 있는데, 영어와 같은 표음문자의 단어가 다음절어인 것과 구별됩니다.
3) 한자의 셋째 특징은 고립어라는 점입니다. 한자는 어순이나 문장의 전후 관계에 따라서 그 뜻이 달라질 뿐, 글자 자체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3. 한자가 우리의 구원과 어떻게 상관 됩니까?
앞에서 한자의 일반적인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제가 성경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한자에는 놀라운 특징이 더 들어 있습니다. 곧 어떤 사물을 글자로 표현할 때에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이유나 원리에서 철학적인 의미, 또는 신학적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싱가폴의 중국인 C. H. Kang이 중국이 아직 공산화되기 전 기독교병원 선교사로 있을 때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실을 밝힐 수 있는 문제와 씨름하다가 배 선자가 노아의 여덟 식구가 탄 배로 분해됨을 발견하고 연구 시작했고, 미국의 병리학자 E. R. Nelson 박사는 한자의 기원에 창세기의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연구를 시작하여 두 사람이 함께 「창세기의 재발견」이라는 책을 써서 52개의 한자를 창세기 내용과 연관시켜 풀이해 놓았습니다.
1) 한자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나 섭리가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2) 한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비밀이 가득하게 들어 있습니다.
3) 글자 하나하나에도 이런 심오한 의미가 들어 있다면 성경에는 얼마나 놀라운 진리와 비밀이 들어 있겠습니까? 이 깨달음이 우리를 십자가 진리의 깊은 세계로 인도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글자 하나하나를 연구해 볼 때에 옛 사람들의 철학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창조신학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글자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했습니다. 그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비록 배우기가 좀 힘들다고 해도 우리가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돈도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 학문의 세계는 어떠하겠습니까? 힘들여 배운 것일수록 더 큰 가치와 유익을 주지 않겠습니까? 실은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편하게 사는 사람은 인생의 가치가 적습니다. 어렵게, 고난을 많이 받으면서 산 사람이 나중에 큰일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눈에 보이는 분으로 나타나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마치 우리가 말하려는 것을 글자로 쓴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옛조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한자의 깊은 뜻을 알게 되니 감사합니다.
배우기 어려운 한문일지라도 잘 배워 한자의 깊은 의미를 잘 알아가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주시는 말씀을 더욱 깨달아가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도 저에게 참 소망이 되시며 구원이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셨으니 그분을 더욱 의지하며 살아가길 결단하며 비록 약하고 부족하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43. 솔롱고스의 민족(장드보라)
(창세기 37:1-4)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비가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몽골은 우리나라를 몽골말로 ‘솔롱고스의 나라’라고 합니다. 몽골은 다른 국가들처럼 ‘코리아’나 ‘조선’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몽골은 한국에 대해 독자적인 이름을 사용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롱고’가 ‘무지개’니까, 솔롱고스는 ‘무지개’ 또는 ‘해 뜨는 곳’, ‘아름답다’ 등을 뜻합니다. 몽골에게 있어서 한국은 ‘무지개의 나라’요, 한국 민족은 ‘무지개 민족’이며, ‘해 뜨는 나라의 민족’이고, ‘아름다운 민족’입니다.
1. 솔롱고스는 하나님의 언약을 뜻합니다.
1) 홍수로 심판하신 후에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다시는 이렇게 큰 홍수로 온 인류를 멸망시키는 심판은 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무지개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신호요, 위에 계신 하나님이 타락한 땅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상징이었습니다(창 9:13-16).
무지개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겠다는 놀라운 은혜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무지개가 7개의 빛깔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3색으로 보았고, 중국은 5색이라고 보았습니다. 기독교 미술은 무지개를 삼위일체에 맞게 3색이라고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과학자 뉴턴은 무지개를 11개 색으로 보았다가 그 뒤 5개 색으로, 1704년 「광학이론」 책에서는 7개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곱 빛깔과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관계일까요?
일곱이란 숫자에 대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의 표식이며, 어원적으로 ‘맹세하다’와 동일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일곱은 ‘맹세’ 또는 ‘계약’과 상호 혼용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21:29-31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손에서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서 아브라함이 이 우물을 판 증거를 삼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역시 일곱과 언약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또한 무지개가 하나님의 약속을 표징하는 것은 맹세를 뜻하는 빛깔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곧 일곱 빛깔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맹세를 생각하게 됩니다.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렀어도 하나님이 하신 이 약속을 우리가 후대에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창세기 9장에 무지개 언약이 나오는데, 11장에는 노아의 후손들이 이 약속을 잊어버리고 바벨탑을 쌓게 되지 않습니까? 인간들은 너무도 빨리 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반역을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잘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약속을 따라서 복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고, 그 약속을 따라서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솔롱고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민족임을 나타내줍니다.
1) 야곱이 요셉을 지극히 사랑하여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아들들에게는 이런 채색옷을 입히지 않은 것입니다. 이 옷은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고, 나아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는 채색옷, 색동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 옷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색동옷을 입은 민족이고, 이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3. 솔롱고스 민족이란 곧 제사장 민족을 뜻합니다.
옛날 대제사장이 입었던 옷인 에봇 역시도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짠 것이었습니다(출 28:4-6). 우리가 삼원색이라고 하는 노랑, 빨강, 파랑 외에 자색을 더 추가했습니다. 그런데 에봇 위에 매는 띠 역시도 동일한 실로 짰으며, 판결 흉패 역시도 동일한 실로 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출 28:8,15).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대속죄일마다 여러 가지 색실로 수놓은 이 에봇을 입고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의 옷에 이미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은 모든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누가 온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이렇게 색동옷을 입혔던 것입니다.
4. 솔롱고스는 해가 뜨는 나라를 뜻합니다.
1) 솔롱고스가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이니까, 솔롱고스의 나라는 “해가 뜨는 나라”가 됩니다. 실제로 우리 조상들은 아라랏산에서 내려온 후 해가 뜨는 곳을 찾아 동방으로, 동방으로 옮겨와서 드디어 동해에 이르러 멈추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동방의 해 뜨는 곳에 사는 민족으로 불리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시성(詩聖)이라 하는 인도의 타고르가 한국에 남긴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특히 말세에는 대환난이 일어나게 되고, 온 세상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캄캄하게 됩니다. 그때에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에 임하십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을 21세기의 태양이라고 선전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태양으로 임하실 것을 마귀가 먼저 알고, 엉뚱하게 김일성을 내세워 21세기의 태양이라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태양은 백성들에게 빛을 주지도 않고, 따뜻함을 주지도 못하는 가짜 태양이요, 실은 암흑 덩어리가 아닙니까? 이제 진짜 태양이 우리 위에 떠오르게 됩니다.
2)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나타낼 때 무지개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무지개로 오셨습니다.
① 곧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전을 구약, 예수님 이후를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옛 약속은 노아와 맺으신 것이고, 아브라함과 맺으신 것이며, 모세와 맺으시되 이스라엘 민족과 맺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새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 모든 인류와 맺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말세에 우리 민족을 택하셔서 이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5. 우리 마음속에 무지개가 있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언약을 가집시다.
① 옛 언약은 언약궤 안에 있습니다. 곧 십계명입니다. 지켜 행하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는 민족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버리면 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백성이 됩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을 보세요. 그들에게는 양극화 현상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노벨상을 가장 많이 탄 자랑스러운 백성들이지만, 동시에 히틀러에게 600만 명이나 학살을 당하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던 유랑민족이었으며, 지금도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는 가장 불행한 백성들이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버렸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악인들이 되었기에 스스로 저주의 길로 들어섰던 것입니다.
② 그러므로 우리는 각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악행을 그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판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항상 주님과 동행해야 하겠습니다.
③ 하나님의 언약이 육신을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나셨는데, 그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 언약을 주셨고, 우리에게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을 때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심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2) 진리의 사람들이 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먼저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성령을 체험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면서 살아갑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배워야 하지 않습니까? 음식을 만드는 것도 잘 배워야 합니다. 운동도 잘 배우고 열심히 연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섬기는 것도 더욱 잘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 와서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아가 날마다 감사하면서 삽시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자꾸 생깁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주위에 우리보다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깊이 깨닫고 더욱 큰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솔롱고스의 민족임을 알게 되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인 무지개가 나의 마음안에도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이 땅에 무지개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사는 성도로써 마땅한 삶이 무엇인가 날마다 상고하며 아버지의 뜻안에 살아가는 자로 세워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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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등으로 하셨습니다. 천국에도 일등으로 ... 힘들어도 주님께 영광돌리세요.
네 자녀들 주님께서 길러주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