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29-
울릉도의 교회들 이신웅
2020년 정초부터 시작하여 세계를 휩쓴 COVID-19의 팬데믹(pandemic)으로 외국여행을 할 수 없어서 은퇴장로님들이 울릉도를 찾아가기로 했다. 출발 일 주일 전부터 경상북도 몇 군(郡)에는 5인 집합금지 명령이 완화되어 8인까지 모일 수 있어서 극히 합법적으로 여행하게 되었다. 후포항까지 가서 하룻밤 자고 아침 8시 Seaflower편으로 울릉도에 들어갔다. 2시간 40분의 쾌적한 항해 후에 사동항에 도착했다. 한 시간 전에 멀미약을 먹었더니 멀미한 사람도 없다.
렌트한 차를 타고 저동항 근처의 펜션에 첵크인하고 관광을 시작한다. 울릉도를 찾은 것은 전혀 관광만을 위한 것이었는데 검색을 해보며 많은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인구 일만 명의 30% 이상이 기독교인이라는 통계가 있는 것을 보면 이 외딴 섬에 많은 전도자들의 노고가 쌓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자료들을 살펴보면 1906년 울진 행곡교회(침례교단) 김종희 전도사가 섬에 들어와서 전도한 일이 있는 것 같다. 울릉도의 첫 교회는 북면 나리에 있던 나리교회인데 1909년 영국성서공회 소속 매서인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전도하고 성경책을 파는 사람)이였든 삼척 부호 감리교회 김병두 씨가 나리에 정착하여 살며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1909년에 교회를 건축하고 대한예수회 독노회 경상대리회에서 설립 승인을 받았다. 1927년에 천부교회로 이름을 변경했는데 1942년 일제시대에 교회를 강제로 철거했다. 해방 후 1945년 9월, 천부리의 가옥을 매입하여 교회를 짓고 1974년에 천부제일교회로 이름을 변경했다. 현재 60여 명의 교인이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2009년 3월 8일 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통계에 의하면 현재 울릉도에는 군인교회 한 군데를 포함하여 36교회가 있다고 한다. 교회가 이렇게 부흥한 것은 조선조 말기부터 전도자들이 수십 시간 걸리는 뱃길을 찾아와서 전도했고 선교사들과 조사들도 관심을 갖고 찾아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관광을 한다. 군데군데 도로 확장 공사를 하여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북저바위, 죽도, 삼선암, 비경이다. 관음도를 연결하는 다리를 걷고 싶었지만 걷는 게 많아서 포기했다. 바닷가 길에서 정장로님이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먹인다. 갈매기들이 모여들어 장로님 말을 듣는 것처럼 보인다. 참새들에게 설교했다는 프란체스코를 생각했다. 장로님이 말했을 것 같다. “너희들은 욕심 부리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렴. 너희들의 날씬한 몸매, 기똥찬 날렵함과 자유로움, 널려있는 식사에 대하여 감사하렴.” 갈매기들이 설교말씀을 경청한다.
정말 가파르고 힘든 길을 운전하여 나리분지에 간다. 울릉도는 하나의 화산섬인데 칼데라 화구의 북쪽 부분이 무너져 분지를 만들고 있다. 울릉도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독특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음식점 하나를 제외하고 인적도 없고 오늘따라 관광객도 없다. 그곳에 나리교회가 있는데 잠겨있고 조용하다. 빈 마을을 서성이며 ‘너와집’도 보고 음식점에서 ‘오징어산채전’과 도토리묵을 사 먹는다.
천부의 송곳봉 아래에 있는 리조트에서 커피를 마시고 숙소로 돌아오며 천부 시내에서 천부제일교회를 찾아가서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울릉도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의 현재 모습이다. 110년 넘게 척박한 땅에 사는 주민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었던 곳이다.
나리분지
나리 너와 투막집
나리교회
천부 제일교회, 나리분지에 울릉도에서 처음 세워진 교회
울릉도 슈바이처 병원 저동 분원 자리에 세운 신흥교회
도동 공용 주차장과 울릉도 호텔 자리에 울릉도 슈바이처 병원이 있었다.
울릉도
다음날은 독도를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모든 배가 멎었다. 오늘은 시계 방향으로 섬을 돌며 구경하기로 했다. 나는 특히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이일선 목사님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우리가 의과대학교 초년생이었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꿈을 주는 분이었는데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여행 오기 전 여러 곳을 검색해보아도 정확한 정보가 없었다.
이일선 목사님(1922-1995)은 1945년 해방직후에 약수동에 신당제일교회(현 신일교회)를 개척했는데 슈바이처 이야기에 감동을 받고 서울의대에 입학하여 1955년 졸업하고 3개월간 (1958-1959) 가봉, 람바레네 슈바이처 병원에서 일하며 나병 치료에 대하여 연수받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개척한 교회가 1000명쯤 신도가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어도 1960년 6월 군사 쿠데타 직후에 울릉도에 들어와서 결핵환자와 나병환자를 치료해 성과를 올렸다.
슈바이처 박사도 동양에서 온 의사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던 모양으로 이일선 목사님이 후반부에 시련을 겪고 있을 때 그 고통을 나누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어렵던 시절 배낭을 메고 세계를 여행했던 김찬삼 교수가 람바레네 슈바이처 병원에 갔을 때 당신이 이일선 의사 다음으로 온 한국 사람이라고 했다는 것을 보면 이일선 목사님은 슈바이처 박사에게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도동에 셋방을 얻어서 울릉도 슈바이처 병원을 개원하고 60년대 초에 저동과 천부에도 분원을 개원했다. 그는 결핵환자와 한센병 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치료했고 1976년 통계에 의하면 결핵환자는 800명에서 300명으로, 한센병 환자는 68명에서 4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의 병원의 환자는 2/3는 무료 환자였다. 그는 환자진료뿐만 아니라 복음전도, 공중보건, 식생활 개선, 사회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의 활동은 한국교회, 기독교세계봉사회, 세계의료선교사와 그 후원자들이 도왔다고 한다. 조향록, 강원룡, 안병욱, 김형석 교수 등도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한국 기독역사여행 - 이일선 목사 편 참고)
1973년 일본 농촌의학회 참석차 떠난 날 척추 디스크 탈출이 발병되었으며 이어지는 교통사고와 다른 질병으로 울릉도 사역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도동 본관 건물을 90% 건축했을 때 마약을 팔고 있다는 모함을 받고 경주 지청에서 한 달간 상주하며 조사를 했고 나중에는 “죄송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의 이야기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기력은 떨어지고 실망하여 울릉도를 떠난 것 같다. 그는 1970년대 후반에 잊혀졌으며 1995년 2월 LA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우리 고장에도 농민 치료와 농촌위생에 헌신하며 평생을 바친 존경받는 의사 장로가 계신다. 그분의 업적은 전설적이지만 이루어놓은 의료, 보건, 사회사업은 이어지지 못하고 소멸하는 것을 볼 때 마음 아프다.
먼저 저동항, 이일선 박사의 저동 분원이 있던 곳에 간다. 수백 년 된 후박나무 뒤에 흰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교회가 있다. 신흥교회라고 한다. 검색한 자료에 의하면 이 교회 터가 울릉도 슈바이처 병원 저동 분원 자리라고 한다. 그의 꿈처럼 병원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영혼을 살리는 성전이 선 것이 감사한 일이다.
이어서 도동 공용 주차장에 가서 울릉도 호텔을 사진 찍었다. 자료에 의하면 이 호텔의 구관 건물이 병원 본원 건물로 지었던 것이라고 하고 그 뒤에 당시의 작은 건물들이 남아 있고 일부 건물은 공용 주차장의 일부가 되었다고 한다.
약수터 공원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망향봉에 오른다. 전망대에서 울릉도 최고봉, 성인봉이 보인다. 날이 좋으면 독도도 보인다는데 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독도 박물관에도 들러보고 통구미 몽돌해변과 파도치는 해안을 따라서 태하까지 다녀왔다. 울릉도의 비경을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울릉도에 기독교의 뿌리가 든든히 내려 꽃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 (2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