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해동고40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병주
우리는 위대한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자유, 평등, 우애(박애는 잘못된 번역임을 알아두자.)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당대 프랑스인들은 혁명을 지키기 위해 유럽의 전제군주들과 맞서 싸웠고 그 과정에서 자유, 평등, 우애의 정신이 퍼졌고 프랑스의 패배 이후에도 그 정신의 씨앗이 자라는 것을 막을 수 없어 수많은 빨갱이(?)들이 생겨나 결국 오늘날의 사회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머 여기까지가 우리가 대충 알고 있는 이야기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이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의 국기인 삼색기
우리에겐 흔히 자유, 평등, 우애를 상징하는 3가지 색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파리를 상징하는파랑과 빨강의 2색기 사이에 왕실의 백색기를 넣어
파리와 왕실의 돈독한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것이라고한다.
프랑스 혁명을 보는 체계적인(?) 관점으로 이중혁명이라는 관점과 정치혁명이라는 관점이 있다. 정치혁명은 프랑스의 강화를 위한 정치체제 개혁을 위한 혁명이었다는 관점이고, 이중혁명은 정치와 경제 양면을 중심으로 사회 전체를 바꾸는 과정이었다는 관점이다. 어느 쪽이건 계획되고 예정된 혁명이라는 소리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은 다르다. 필자의 관점은 프랑스인들 아니 유럽인 모두의 수많은 뻘짓들이 점철된 결과 우연히 혁명에 다다른 ‘행운 혁명’이라는 관점을 제시하겠다.
1.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언제나 가난이 문제다. 가난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머 어쨌든 체제도 무너졌다. 프랑스가 가난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어떤 이유들이었을까?
먼저 심각한 부익부 빈익빈이었다. 우리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듯이 인구의 2퍼센트밖에 안 되는 귀족들이 전체 부의 80퍼센트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들 내에서도 고위 귀족들이 부를 거의 독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고위 귀족들은 오늘날로 치면 소위 고액 체납자들이었다. (귀족들에게 세금을 안 매긴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형태로 세금이 계산되기는 했다. 집행이 안 돼서 문제였지.) 당시엔 경제적 평등이란 개념도 없었으니 재산 많다고 누진세를 때리는 건 아니었다. 즉 오늘날에 비하면 많은 재산에 비해 세액은 매우 낮았다. 그렇다면 단순 계산으로 과세 대상의 80퍼센트가 조세 회피를 한다는 의미다. 일부는 내겠지만 결국 국가는 기본적으로 20퍼센트의 과세만으로 운영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래도 프랑스는 유럽에서도 부유한 나라라서 20퍼센트 플러스 귀족들의 찔끔찔끔 알파만으로 국가재정을 꾸려갔다. 대단하다면 대단한 나라였다.
제목: 이 놀이가 곧 끝나리란 희망을 가져야 하겠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나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 이런 식의 운영은 파탄을 예정하고 있다. 단순한 돈의 문제를 넘어 누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언제까지고 인내하겠는가. 재정이 부족한 국가와 왕실, 세액의 대부분을 부담해야하는 비귀족 납세자들. 귀족 빼고는 모두가 불만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니 사실은 귀족도 불만스러워했다. 귀족들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현상유지에 급급했던 국가재정이 프랑스에 장기적으로 입힌 가장 치명적 손해는 해군에 투자할 여력을 잃게 만든 것이었다. 영국은 이미 1756년에서 1763년 사이에 벌어진 7년 전쟁에서 강력한 해군력을 보여주었다. 프랑스는 해군력 증강의 필요성을 절감했지만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었다. 투자할 돈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이때부터 이미 벌어지기 시작한 차이를 프랑스는 따라잡지 못했고 최종적으로 1804년 영국에게 제해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된다.(트라팔가 해전의 패배)
이러한 현상유지도 1776년부터 발생한 미국의 독립전쟁에 프랑스가 무리하게 참전하면서 무너지게 된다. 7년전쟁 때 당한 거 복수해주겠답시고 끼어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 안 그래도 항상 위기였던 재정이 이젠 아예 끝장이 났다. 미국 독립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 독립군은 프랑스의 ‘풍~성한 지원’덕분에 대부분이 개인화기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잘 무장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혁명 직전 프랑스군은 4, 5명당 1정의 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의 소비에트 러시아군이 생각난다.) 여기까지가 당시 프랑스가 겪던 재정 위기로 톡하고 건드리면 와장창 무너질 상황이었다. 머 이렇게 프랑스의 재정은 거덜났지만 북아메리카식민지의 실지로 인해 영국도 엿 먹은 거 만큼은 확실하다. 쌤쌤인가?
루이 16세의 부왕(父王)인 루이 15세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며 사치를 줄일 것을 간언하는 신하에게
“내가 죽은 뒤 혁명이 일어난들 나랑 무슨 상관이오?”라는
명대사를 남겼다는 분이시다.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것은 1781년, 프랑스 혁명의 시작이 되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은 1789년이다. 이상하다. 그러면 그 8년간 텅텅 빈 프랑스의 국고는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조금 전까지 프랑스의 국고가 바닥이 났음을 이야기했다. 답은 세금을 받아서 살았다.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20퍼센트에 대한 과세와 귀족층들이 어쩔 수 없이 내는 일부분의 세금으로 지냈다고. 그런데 그 세금마저 뚝 끊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1787년과 1788년 잇따라 프랑스 전역에 대흉작이 든 것이다. 농업공황으로 국민들은 세금은 고사하고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1770년대 프랑스를 여행했던 한 영국인이 이곳이야 말로 농민들의 낙원과도 같다고 감탄했었다. 그런데 이 때 프랑스를 다시 방문한 그는 지옥을 보았다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상황에서 정치권인 귀족들은 무엇을 했는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띵가띵가 놀고만 있었다. 아니 놀기만 했으면 다행이었다. 상황을 더 개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경기가 나빠지면 대기업을 비롯해서 부자들이 사회적 투자를 늘려야 경기가 다시 좋아진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대기업이나 부자들은 불황일 때를 이용해서 오히려 구조조정과 투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당시의 귀족들도 똑같았다. 농업공황으로 국민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 그 틈을 타서 더욱 축재를 하였다.(저주 받을 넘들!) 주로 쓴 방법이 고리대금업과 파산한 농민들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이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말만 노블리스 오블리주지 지배층이 개념말아 먹은 건 똑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허구한날 베르사유에선 연회나 열고 앉아서 놀고 있으니... 이 흥겨운 잔치 속에서 딱 한 명 속이 타들어 가는 사람이 있었으니 국왕이었던 루이 16세였다. 어떤 이들은 그를 두고 ‘좀 모자란 사내’라고 혹평을 하기도 하지만 그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의 왕국이 개판 오분 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기아상태에 빠진 일반 국민들에 대한 징세를 피하고 귀족들에게 징세를 함으로써 이 상황을 타개해 보려고 하지만... 될 턱이 있나?‘모자란 사내’란 별명이 붙은 건 귀족 즉, 기득권층에게 세금을 걷어보겠답시고 덤벼든‘만용’때문이 아닐까?
루이 16세
왕조말기 즉위했더니 뭘 해도 결국 뻘 짓으로 끝나던 인간이다.
결국 국민들한테‘빵집주인’이라는모욕적인 별명을 들으며 죽어야 했다.
화려한 베르사유의 궁정에서 이젠 귀족이 왕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왕이 귀족들을 달래기에 바빴다. 왕의 자존심에 열 받지만 어쩌겠는가. 거기에다 더욱 훼방을 놓는 것은 왕비인 앙트와네트였다. 이 외국인 왕비는 왕실의 편이 아니라 귀족의 편에 서서 사사건건 남편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나중엔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베르사유 궁정에서 왕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왕이라고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2.
한편 베르사유 바깥에서는 기근이 계속된다. 기근에 허덕이던 국민들이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에 분노했다는 말은 잘못된 사실이다. 베르사유는 별천지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요즘으로 치면 보안지역으로 일반인 접근금지구역인 셈이다. 들어와 보지도 못하는데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상을 어떻게 보겠는가? 가끔씩 보는 으리으리한 귀족들이 행차를 보고 ‘귀족 나리들은 잘사는구나’라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행차 옆에 따라붙어 구걸 좀 해서 돈푼이나 좀 얻는 걸로 끝이었다. 어느 정도로 사치스럽게 사는지 일반인들은 알 길이 없었다. 알았으면 벌써 뒤집어졌다. 다만 막연히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잘산다더라’,‘임금님은 귀족들만 챙겨준다더라’라는 식의 뜬소문만 퍼졌다. 루이 16세로서는 참 억울한 소리다. 귀족들만 챙겨준다니...
위기가 아슬아슬해져서 왕이 더 이상 인내하기가 어려워지는 때가 되자 귀족들이 협상 테이블에 나온다. “세금을 걷고 싶으시면 국민에게 뜻을 물어 봅시다.” 이른바 삼부회의 소집이었다. 삼부회에서 세금에 대한 안건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귀족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제안이었다. 그것은 삼부회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 세 개의 신분으로 이루어진 의원단이 삼부회를 구성하는데 제1 신분은 성직자, 제2 신분은 귀족, 제3 신분은 자유인이다. 자유인은 보통 평민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표현이다. 자유인은 왕이나 귀족은 아니지만 엄연한 자기 자신의 주권자이다. 이 시기에는 인구의 98퍼센트를 대표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나오기는 했지만 자신을 스스로 처분할 수 없는 노예나 농노와는 전혀 다른 인텔리 계급이다.
삼부회의 표결 방식은 우리의 국회 방식과는 다르다. 표는 딱 3표. 각 신분별 의원들이 모여서 하나의 의견을 모아서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다. 즉 삼부회는 3장의 표로 의결을 하게 되는 제도였다. 그런데! 귀족들은 2개의 표를 이미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엔 성직자=귀족이었다. 특히나 고위 성직자로 갈수록 절대적인 공식이었다. 이런 이유로 무슨 안건이 나오든 삼부회 내에선 2:1로 귀족파가 이기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단 삼부회가 열리면 정말 세금 문제만 논의하고 폐회하겠는가? 프랑스에선 왕이라 할지라도 삼부회에 대해선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다. 귀족들의 완벽한 꼼수였다. 루이 16세도 이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쉬운 쪽은 루이 16세였고 결국 귀족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트와네트
오스트리아의 공주인 그녀는 프랑스왕실의 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인이었으며 프랑스왕실을 견제하기 위해귀족 측에 서 있곤 했다.
부부간의 금실도 좋은 편도 아니었으며 굉장한 바람둥이었다.
나중에 국민들에겐 ‘포주’라는 경멸적인 별명이 붙기도 했지만연인을 맺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로맨틱한 취미도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적인 의도도 크게 깔려 있었지만 말이다.
덤으로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스파이이기도 했다. 앞으로 자주 나올 분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리하여 1789년 5월 5일 삼부회가 열리게 되었으니 귀족들의 대승리였다. 삼부회라는 것 자체도 1614년 이후 처음 열리는 것이었다. 이른바 귀족혁명이었다. 귀족들은 자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이라는 단어는 귀족들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어디서 주워들은(?) 인문주의 철학은 있어서 자기들 딴에는 혁명을 했답시고 말이다. 자신들에게 곧 밀어닥칠 재앙은 모르고...
삼부회는 신분마다 정원이 300명씩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3 신분의 정원은 600명으로 늘어났다. 실제로 뽑힌 건 그보다 조금 더 많은 624명이었다. 그리고 제1, 2 신분은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한 숫자인 247명, 188명만이 선출되었다.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정한건지 인구 비례를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숫자지만 어차피 의원 개개인이 아니라 신분별로 한 표만 행사하는 거니 그 숫자는 별로 의미가 없기도 하다.
삼부회가 개원하자 귀족들은 즉, 제1, 2 신분들은 개원 전 한껏 부풀었던 기대와는 달리 심상치 못한 분위기를 느꼈다. 제3 신분 의원들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분위기가 심히 흉흉한게 뭔 일을 벌일 태세다. 불안불안해 하면서 안건을 논의하기 위해 의원단이 각자의 회의실로 들어가려 할 때 제3 신분 의원단이 태클을 걸고 나섰다. “우리 같은 회의실 씁시다.” 잉? 먼솔? 저것들이 정신이 나갔나?
같은 회의실을 쓰자는 건 무슨 소리냐? 간단히 말해 1인 1표제를 하자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2대1이 아니라 435대 624의 대결이다. 절대로 해선 안 된다. 게다가 내부에선 반란까지 일어났다. 하급 성직자 및 하급 귀족 출신 의원들이 제3 신분에 동조하고 나선 것이다. 중소 하청업체들이 대기업에게 반기를 들었다고나 할까? 고위 귀족들은 괘씸했다. 그래도 귀족이라고 이 자리에 끼워 줬는데 감히 배은망덕(?)하게도 우리를 배신하다니! 평소엔 같은 귀족 취급도 안해주다가 이럴 때만 신의를 찾는다.
삼부회의 개회식 모습. 화려한 옷을 입은 제1, 2 신분과는 달리
제3 신분은 모두 검은색 옷만을 입고있다.
제3 신분 즉, 자유인들은 1인 1표제를, 귀족들은 신분별 1표제를 주장하느라 삼부회는 시작도 못하고 한 달을 끌었다. 처음에는 온 국민의 관심을 받으며 시작한 삼부회였건만 시작도 못한 채 정치 불신만을 안겨주고 있었다. 귀족들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왕에게 달려간다.
“폐하 원하시는건 모두 드릴테니 제발 저넘들 좀 쫓아내주세요.”
삼부회를 강제로 폐회시켜 달라는 소리다. 언제는 자기들이 졸라서 삼부회를 열어 놓고는 이제는 폐회시켜 달란다. 그래도 루이 16세로서는 나쁠 거 없었다. 지금껏 귀족들이 개기는 탓에 얼마나 돈 걱정하며 살아왔는데 무지렁이 몇 놈(?) 쫓아버리는 일로 그것이 해결된다니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여기서 루이 16세의 한계가 드러난다. 그 역시 전근대의 전제 군주였던 것이다. 제3 신분 의원들은 결코 무지렁이가 아니며 각자가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그저 수많은 신민들 중 하나로만 비쳤던 것이다. 그에게 신민이란 그저 돌보고 때로는 얼러야 할 어린아이 같은 존재에 불과했기에 그들의 의사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결국 루이 16세는 강제로 회의장을 폐쇄함으로써 귀족들의 요구를 수용하였으나 제3 신분 의원들은 해산하지 않았고 버텼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야외농성을 할 수도 없는 일,(사실은 딱 사흘했다. 6월 17일에 쫓겨나서 20일에 경기장에 들어갔다.) 근처의 ‘므늬 플레지드 궁’의 ‘죄드폼’(테니스랑 비슷한 경기라는데 필자는 해본 적도 구경한 적도 없어 그 이상은 모른다. 아시는 분은 댓글 좀...) 경기장으로 가서는 자기들끼리 새로운 의회를 꾸릴 것을 결의 했다.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다.(테니스 코트의 서약은 테니스 코트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비드의 그림을 보면 정말 감명적이다. 어쩜 저렇게 멋있을수가! 하지만 현실에선 어땠을까? 유럽인들은 한국인들과는 달라서 털이 많다. 며칠만 면도를 안해도 산적이 따로 없다. 사흘간 야외농성하다가 들어왔을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씻지도 않고 당연히 면도도 안했다. 후즐근한 옷에 땀냄새를 풀풀 풍기며 산적들 700명이 경기장에 모여 있는 느낌일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결코 멋진 모습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테니스 코트의 선서
엄청나게 멋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사흘만에 노숙을 끝낸 사람들이었다. ㅜㅠ
어쨌든 이렇게 자기들끼리 의회를 차린 것이 국민의회다. 회의장에서 쫓겨난 지 일주일 만이었다.(죄드폼 경기장에 가서도 혹시나 다시 불러줄까 싶은 미련에 나흘간 더 죽치고 앉아있었던 것이다.) 결국 루이 16세가 반응을 보였다. 귀족파 의원들에게도 국민의회에 참석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귀족파랑 비귀족파랑 싸움붙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젠 비귀족파의 승리였다. ‘국왕폐하 만세’어쨌든 국왕이 입장을 바꾼 덕에 이겼으니까...
3.
베르사유에서 정치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프랑스의 전국농촌지역에선 괴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귀족들이 농민들을 마구 학살하고 다닌다는 소문이었다. 이른바‘대공포’라는 소문으로 프랑스 혁명이 성공한 것은 바로 이 헛소문 때문이었다. 전국의 농촌지역을 휩쓴 이 헛소문 때문에 농민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누가 믿냐 싶지만 당시 사람들은 진지했다. 전근대시대 기사들이 보급을 위해 마을을 약탈하고 파괴하는 일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었다. 당시에는 귀족이 마을을 몰살시킨다는 말이 평민들에겐 농담이 아니었던 시대였다. (충격과 공포를 아느냐 그지 깽깽이들아)
진압되는 중세의 농민반란
“어차피 죽을건데...”라는 생각에 우후죽순으로 반란이 일어났고, 프랑스는 무정부 상태에 빠지다시피 했다.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약 2500~2700만 정도로 추산된다. 이중에서 80퍼센트 정도가 농촌 인구였다. 이 엄청난 숫자를 누가 감히 막아서겠는가? 이 엄청난 농촌 봉기를 맞아 루이 16세는 대책을 강구한다. 외국 용병을 고용해서 베르사유로 불러들인 것이다.(응, 이게 먼 소리?) 국왕으로서의 사태 수습은 포기하고 반란이 저절로(?) 잦아들 때까지 베르사유만을 방어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국왕이란 작자도 최후의 순간에 자기 자신의 보신만을 도모했던 것이다. 세상은 이런 곳이다. 그러니까 자칭 대한민국의 국부께서도 위급 상황이 되자 한강철교를 끊고 자신 혼자 도망가셨지 않았는가?
외국인 군대가 파리를 지나간다는 소식에 파리시민들도 공황에 빠졌다. 당시 파리 또한 치안상태가 불안했다. 앞서 말했듯 ‘대공포’로 인해 농촌 지역이 엉망이었으므로 도시인 파리에 식량이 제대로 공급될 수 없었고 파리는 오랫동안 식량 부족 상태에 빠져있었다. 파리에서는 연일 식량 폭동이 일어났으며 민심은 흉흉했는데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식량 폭동은‘폭동’을 일으킨 군중이 강도짓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식량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인이나 부자들이 주로 대상이 되는데 그들의 집에 쳐들어가서는 흠씬 두들겨 패주고는 자기들이 생각하는‘정당한 가격’에 멋대로 식량을 사간다.‘반(半)강도짓’이긴 하지만 아주‘강도짓’은 아니다. 사실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물건들을 사재기하여 원성의 대상이 되고 있던 이들인 경우가 많았으니‘강도’가‘반강도’짓을 당했다고 보는 게 맞다.
어쨌건 상황이 안 좋은데 군대가 파리근처에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니 “5.18 진압하듯 파리로 쳐들어 오는 거 아닌가?” 시민들은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분개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못 먹었던거 하며 이래저래 쌓였던 것들도 한꺼번에 같이 폭발했을 것이다. 결국 시민들은 파리의 병기창을 습격하여 무장한 뒤 대포까지 끌고(그런데 대포알은 안 가져간다 ) 7월 14일 그 유명한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시키기 위해 행진했다.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둘러싸고 공격을 하려는데 대포가 안 쏴진다. 쏘는 방법도 모르거니와 대포알을 안 가져왔으니 당연하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총이나 대포가 총알 또는 대포알을 발사하여 적을 살상하는 것임을 몰랐다. 바스티유를 향해 쳐들어온 거의 모든 사람들은 창으로 무장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무기는 총도 대포도 아닌 창이다.(필자도 수업 듣다가 처음 알았다.) 바스티유 감옥은 매우 견고하고 높은 요새였다. 원래는 중세의 정치범 수용소였지만 그땐 감옥으로써의 기능은 거의 없어져 수용하고 있던 범죄자라곤 3명밖에 없었다. 절도범 2명이랑 사기꾼 1명이 갇혀있었다. 그냥 파리내에서 왕의 위엄을 과시하는 그런 장소로써 요새의 기능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외국의 군대가 파리까지 쳐들어올 일도 없는 이상 그 역시 무용지물이었다. 하지만 그 무용지물인 기능도 이 때는 쓰일 때가 왔다. 당시 약 60만 명에 이르던 파리 시민들이 모두 몰려갔어도 수비대가 성벽 위에서 위협 사격 한두 번이면 혼비백산해서 흩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뻘짓으로 인해 뒤바뀐다.
바스티유의 수비대 사령관 드 로네는 군인이라기보단 이상을 추구하는 인문주의자였다. 이성철학을 신봉하는 사람으로 모든 인간은 이성적 존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노로 흥분해서 무장까지 한 채 바스티유로 몰려온 군중들도 말이다. 그는 이성적으로 분노에 차있던 군중들을 설득한답시고 문 열고 나갔다가 혁명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열린 문으로 몰려든 군중들에 의해 그의 부하들이 그의 뒤를 이었다.(이래서 상관은 잘 만나야 된다.) 그리고 바스티유에 갇혀있던 절도범 둘과 사기꾼은 혁명의 영웅으로 기록되게 된다. 쩝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하는 시민들
그들은 대포를 끌고 가긴 했지만 포탄은 가져가지 않았다.
과정이야 어찌됐건 바스티유가 무너진 것은 변함없는 사실. 이 일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프로이센 북부의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에 살고 계셨던 철학자 칸트 선생께서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 2주 후에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너무 놀라서 평생 딱 두 번 빼먹었다는 오후 3시 공원 산책을 빼먹었다고 한다. 참고로 나머지 한 번은 죽었을 때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은 바스티유 함락보다 칸트 선생이 공원 산책을 빼먹었다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이 앙시앙레짐, 즉 전제군주의 통치를 이제 끝내려는 신호탄이 될 것인가? 전 유럽의 정치권과 지성들이 주목하였다. 정작 본인들은 홧김에 벌였을 뿐 별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어떤 이들은 개혁주의적인 재무총감이었던 네케르의 파면이 시민들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귀족들이 전혀 양보할 생각이 없음을 그의 파면으로 드러내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이것이 바스티유의 함락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높으신 분들의 정치싸움과 이유도 알 수 없이 눈앞에 다가온 외국인 군대 둘 중 어느 쪽이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했겠는가? 오늘날과는 달리 국민들의 절대다수가 문맹인 시대, 그리고 아직 자기가 정치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없던 당시 파리 시민들에게 재무총감이 뭐 하는 자린지 네케르라는 사람이 뭔지 알 이유가 없었다.
어머나, 내가 그렇게 인기가 많았어? 프랑스왕실의 재무총감 네케르.
삼부회에서 귀족파와 비귀족파 간의 조율을 잘못한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지만
바스티유 습격이 그의파면 때문이라고 여긴 루이16세 덕에 10일 만에 복직됐다.
홧김에 일을 저질러 모두의 관심을 받긴 했지만 그 이후에 파리시민들에겐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그나마 그들의 브레인(?)들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삼부회에 참여한다고 베르사유에 간 뒤로 함흥차사였다. 하지만 브레인이 없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고 수비대를 죽였으니 파리는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래서 사람들은 일을 저지르기 전에 감정을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해본 뒤 행동할 필요가 있다.) 살기 위해선 곧 쳐들어올 왕의 진압군부터 막아야 했다.
4
1편에선 열 받은 시민들이 바스티유를 함락시킨 것까지 이야기 했다. 하지만 분노가 조금 가라앉으면 후회가 밀려온다. 왕의 군대가 반란을 진압하러 올 테니까. 파리 시민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아놔, 첨에 바스티유 가자고 했던 넘 누구야?”, “너지?”, “아니 너잖아?” 지들끼리 책임 떠넘기기를 하면서 운명의 시간을 기다리는데... 시간이 지나도 왕의 진압군이 오질 않는다. 불안해하던 시민들 또다시 이판사판으로 돌변한다. 베르사유로 돌진~! 한 것이다. 아줌마들이 중심이 되어 행진을 벌였는데. 역시 아줌마들이란 무섭다. 그들은 일단 가 보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라는 근거 없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갔다. 아예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정도가 아니라. 판단력 자체가 없어졌다. 베르사유로 가 봤자 ‘나 죽여줍쇼’ 밖에 안 된다. 길에서 군대가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면 전원 몰살이다. 하지만 이미 판단력 상실한 아줌마들 베르사유로 향한다. 근데 또 기적이 일어났다.
베르사유 행진
저 아줌마들 팔뚝 좀 보소 ㄷㄷ
왕이 그들을 따라 쫄래쫄래 파리에 나타난 것이다. 군대를 보내어 파리를 진압하기는커녕 그 반대였다. 왕이 직접 파리 시민들을 달래러 왔다. ‘착하지~우쭈쭈~’ 왕이 백성들 앞에게 직접 새로운 시장을 임명하고(좀 더 정확히는 파리의 국민 방위군 대장을 임명하고), 봉기자들은 봉기를 끝내고 집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런 다음 파리시에 있던 튈리르 궁전에 아예 눌러 앉아버린다. 국민의회 역시 베르사유에서 파리시로 자리를 옮겨 잡는다. 시민들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왕과 같이 온 국민의회 의원들이 왕을 설득해 준 건가? 어쨌든 죽을 일은 없어졌다.
어찌된 노릇일까? 정말 국민의회 의원들의 노력 덕분일까... 으음... 쬐끔은 그 사람들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군대가 왕의 말을 안 듣고 개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놓고 개기기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갑자기 밀린 월급(프랑스 식으로는 주급)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돈 안 주면 개길 수도 있다는 암묵적인 시위였다. 여기서 당시 유럽의 봉급제도와 생활상을 살펴보고 지나가자. 당시 유럽의 정규직(?) 노동자들은(예컨대 군인 같은) 주로 주단위로 급여를 받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하루벌이로 돈을 받아 살았다. 혁명이 일어날 무렵에는 실업자가 넘쳐났다. 덤으로 물가는 상승하는데 임금은 그렇지 못했다. 파리의 경우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임금은 20~25수 정도였다. 예전에는 하루 빵값이 10수 정도였으나 물가폭등으로 가격이 50퍼센트나 뛰었다. 그리고 나머지 돈으로 방값도 내고, 땔감도 사고, 옷도 사 입어야 하고, 음료도 사야했다. 혹시 음료를 사 마시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한다면 유럽은 수질이 나빠서 내쳐럴미네랄워터를 그대로 처마실 경우 심한 배탈이 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빵값이 뛰었는데 다른 물가라고 안 올랐겠는가. 서민이랑 하층민들만 죽어나는 세상이었다.
이야기를 되돌려 루이 16세의 베르사유로 돌아가자. 군대가 개기니까 파리의 반란을 진압할 수가 없다. 파리반란의 진압은 커녕 베르사유에서 또 다른 반란의 분위기가 무럭무럭 일어나고 있다. 돈 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한다면 앞에서 누누이 말했듯이 국왕은 돈이 없다. 돈을 구걸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가 이 지경까지 왔다. 돈 주기로 한 귀족파 인간들도 어쩔 수 없이 한 배를 타긴 했지만 그들도 당장은 돈이 없었다. 그들의 재산의 대부분은 역시 토지였는데 대공포로 인해 농촌 지역이 무정부 상태라 자신들의 재산이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제 완전히 똥망이다. 결국 루이 16세가 선택한 방법은 국민의회와 타협하는 것이었다. “파리반란 진압 좀 해줘.ㅜㅠ” 왕이 제3 신분이 주도하는 국민의회에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들이라면 파리시민들을 설득해서 반란을 가라앉힐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 벌써 해산해 버리고 국민의회에 흡수되어버리긴 했지만 맨 처음 삼부회가 열렸을 때만 하더라도 찬밥신세였던 제3신분 의원들이 국왕의 ‘부탁’을 받는 입장으로까지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이 노숙자들(?) 대박 출세했다. 국왕의 부탁을 받는 입장으로까지 업그레이드 된 국민의회에게도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국왕의 부탁을 들어줄 방법이 없었다.(하긴, 지들도 갑자기 어디서 돈을 만들어 오겠냐)
루이 16세는 자존심까지 굽혔건만 또 ㅂㅅ같은 놈들 믿다가 당했다. 처음은 귀족들 그 다음엔 군대, 이번엔 국민의회. 정말 지지리도 상대를 보는 눈이 없는 인간이다. 하긴 조금이라도 믿을 상대를 제대로 골랐다면 혁명이라는 상황까지는 겪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왕이 직접 반란분자들을 진압이 아닌 설득하러 나선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왕이 반란자들한테 “반란 좀 그만둬주세요”하고 빌었다.
미국독립전쟁에도 참여해 두 세계의 영웅이라는 멋진 별명을 달고 계신 라파예트 경
멋모르는 시민들은 “휴우”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국민의회 의원 중 한명인 라파예트가 파리의 국민방위군 사령관이 되고 국민의회는 그 위세가 당당해졌다. 숟가락 제대로 얹었다. 루이 16세로선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파리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신세가 되었다. 베르사유로 가봤자 반겨줄 놈들은 돈 달라며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를 군대 밖에 없으니까. 돈으로 산 충성, 돈이 없으면 곧바로 배신당한다. 오늘날에도 비일비재하지 않는가? 물질만능주의시대에 반드시 명심해 두어야할 것이다.
루이 16세는 파리에서 피난처를 구하긴 했지만 그것은 또한 파리에서 반연금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왕공귀족들만 있던 별천지 베르사유와는 달리 파리의 튈레르 궁전은 한발자국만 나가도 하층민들이 우글거린다. 국왕의 체통에 어떻게 함부로 나돌아다닌단 말인가. 국왕의 꼬라지가 우습게 됐다. ㅜㅜ
5.
한편 위세가 당당해진 국민의회는 뭘 하고 있었을까? 일단 권력을 잡았는데 파리 빼고는 전국이 반란상태니 할 수 있는 게 없다. 먼저 반란을 잠재우기위해 나름 머리를 짜냈다. 그래서 짜낸 방법이란 것이 전국에 포고령을 내려서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묻는 것이었다.(몰라서 묻냐?) 그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대답들이 이구동성으로 ‘봉건제 때문에 못 살겠다’란다. 도대체 그 봉건제가 뭘 가리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국민회의에서는 일단‘봉건제의 폐지’를 선언하고 봤다. 결과는 기똥차게 좋았다. 반란이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으로 봉건제가 폐지되었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때 폐지된 ‘봉건제’가 수상하다. 각 동네마다 봉건제라고 말하는 내용이 다르다. 어떤 곳에서는 방목지를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것을 봉건제라고 하고, 어떤 곳에서는 소금세를 두고 봉건제라고 이야기한다. 또 다른 곳에서는 귀족이 평민을 때려도 처벌받지 않는 것을 두고 봉건제하고 한다. 이쯤 되면 도대체 봉건제가 구체적으로 뭘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결국 당시의 사회적 모순들을 두고 그냥 무턱대고 봉건제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살기 힘든 이유가‘이게 다 노무현 아니 봉건제 탓이다’였던 모양이다. 참 생각 없는 말이긴 해도 편리하긴 하다.
사실 이 시기 사라진 경제 제도는 장원제다. 장원제는 그때까지도 남아있었다. 형식적인 농노해방은 이전에 이루어졌으나 농민들은 신분이 농노에서 소작민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옛 영주였던 귀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귀족들은 정치적으로는 더 이상 그 지방의 독자적인 군주가 아니었으나 여전히 경제적으로는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시피 하였다. 1편에서도 프랑스 국부의 80퍼센트가 귀족과 교회의 것이라고 말했지 않은가. 소작민들은 여전히 옛 영주들의 장원에서 지대를 내고 일을 해야 했으며 때로는 무상으로 일을 해줘야하기도 했다. 안 그러면 먹고 살 방법이 없었다. 해방? 자유로운 계약? 시장원리? (애덤스미스는 1776년에 이미 국부론을 발간했다.) 그 지역의 땅은 모두가 한 사람의 것인데 먼 개 풀 뜯어 먹는 소린가. 이러한 장원제 역시 봉건제의 하나로 고발(?)당했다. 예를 들면 일요일에도 일을 시켜서 예배를 못 보러 간다는 불만도 접수되었던 것이다.
어쨌건 허울뿐이지만 봉건제는 없앴다. 봉건제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국고는 여전히 텅텅 비어있었다. 베르사유에서 돈 달라고 버티는 넘들 말고도 전국에 있는 모든 군대가 돈을 못 받고 있었다. 아니 군대뿐 아니라 모든 공무원(?)들이 돈을 못 받고 있었다. 게다가 급료 말고도 지불되어야 할 돈들은 엄청나게 많다. 그런데 여전히 돈은 없으니 국민의회에서 돈을 어떻게 마련해야할지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쯤 되자 켕기는 게 많던 귀족들은 벌써 눈치 까고 외국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멍청하게 있다가 타겟이 되서 재산도 뺏기고 목숨도 뺏기면 자기만 ㅂㅅ이다.
이렇게 도망간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했지만 이걸로도 도저히 해결이 안 될 정도로 프랑스의 재정은 막장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이때 국민의회 의원 중 탈레랑이라는 주교님께서 아이디어를 내셨다. 이 아이디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안자인 탈레랑 주교님 본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살짝 하고 넘어가자. 이 시리즈를 어디까지 쓰게 될지는 모르지만 한두 번은 더 나오실 분이기 때문이다.
희대의 풍운아, 말썽꾼 탈레랑
탈레랑 주교님의 본명은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이다. 귀족집안 태생으로 젊었을 땐 군인으로도 잠깐 살았다. 그런데 오늘날 같은 군바리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시 사관학교가면 군사훈련보다 제왕학이나 귀족으로서의 예법을 더 많이 배웠다. 간단히 말해 이분은 젊었을 적 ‘군인놀이’를 했었다. 직업은 군인놀이였지만 그 외의 이력은 정말 화려했다. 마약, 간통, 살인, 절도, 사기, 도박, 패싸움(그러다 부상으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되셨다.) 등등 세상에 안 해본 나쁜 짓이 없다고 할 만큼 방탕하게 살았다. 그래놓고는 나중에 성직자가 되어서는 삼부회 때엔 제1 신분 의원이 되어 참가했다.(세상에 저러고도 성직자가 되다니...) 그래도 머리는 굉장히 비상해서 이분이 프랑스의 역사를 바꾼 아이디어를 여러 차례 내셨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는 언제나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들이었다. 먼저 삼부회 때 신분별 1표 투표가 아니라 의원수별 투표라는 아이디어를 제3 신분에게 가르쳐 주신분이 이분이다.(잘 모르겠으면 1편을 보시라). 덕분에 삼부회가 박살이 났다. 앞으로도 몇 번 더 사고치실 분이니 꼭 기억해 두자. 사실 이 분의 기행과 사고의 일대기를 일일이 쓰자면 어찌나 많은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글을 쓸 수도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번에도 프랑스를 두 동강이 낼 아이디어를 내놓으시려한다.
탈레랑 주교님이 내놓은 아이디어는 2개였다. 하나는 교회 재산의 국가관리(라고 쓰고 몰수라고 읽는다.)이고 또 하나는 성직자들의 교황청이 아닌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였다. 첫 번째 아이디어는 너무나도 서글픈(ㅜㅜ) 국고 사정을 모두들 잘 알고 있었기에 사실상 만장일치로 통과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두 번째 안은 시작부터 엄청난 반발을 몰고 왔다.
첫 번째 안을 실행해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봤더니 프랑스 전체자산의 5분의 1에 달했다나 뭐라나. 여기까진 주교님의 아이디어가 잘 먹혀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몰수한 재산들의 처리가 문제였다.
몰수한 교회재산 중 토지를 담보로 국채를 발행했는데(1789년 10월) 이것이 아씨냐 지폐(프랑스어: Assignat)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국채 즉 채권이면 채권이지 지폐는 또 머란 말인가? 조금 진도를 나가자면, 원래는 아씨냐 국채였다. 나중에 갚기로 했었는데 훗날 혁명전쟁이다 머다 해서 돈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갚을 때가 되자 프랑스의 재정이 또 거덜나 있었다. 그러자 프랑스 정부는 갚기는커녕 도리어 더 많은 아씨냐를 발행했다.(니들이 미국이냐!) 그러자 아씨냐의 가치가 똥값이 된다. 프랑스 정부는 그런 짓을 몇 번 하더니 최후에 가서는 못 갚겠다며 배째라 해버렸다. 모라토리엄 선언을 한 것이다. 대신에 가치가 없어진 아씨냐를 돈으로 사용하게 했다. 명목 가치의 30분의 1로 말이다. 근데 실제로는 400분의 1로 거래되었다고 하니 경제를 걸레짝으로 만드는 전형적인 사례다. 아씨냐 가치의 폭락은 살인적인 물가 상승을 불러왔고 온 국민들은 생활고에 빠졌다.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또 써먹는 이 썩은 개그) 그 중에서도 특히나 연금생활자들이 크게 몰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앞장서야할 힘 있고 돈 많은 지도층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빈곤층으로 몰락한 이들이 센강(파리를 지나는 강이다.)에 투신 자살하는 동안 물가 상승을 이용한 투기로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지배층은 똑같다는 불변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
그 놈의 아씨냐!!
이번엔 탈레랑 주교님의 두 번째 아이디어를 들어보자. 두 번째 아이디어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성직자들에게 교황청이 아닌 프랑스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 재산 몰수로 성직자들은 먹고 살 게 없다. 그 대신 국가에 대해 충성 맹세를 하면 국가에서 성직자들을 일종의 공무원으로 인정하고 봉급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미친 짓’이었다. 그때까지 프랑스 인들의 정신적 지주는 교황이었다. 통장관리 아니 십일조에 있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교황청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지만(이걸 갈리카니즘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카톨릭은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로마 교황청을 추종하고 있었다. 그러한 카톨릭 교회가 프랑스에서 가진 위세는 어떠하였는가? 일부 특구도시(?)지역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프랑스인들이 독실한 카톨릭 신자들이었다. 아니 독실하다는 말은 좀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오늘날과는 달리 그 당시는 신앙이 선택 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프랑스 인들은 자신들이 카톨릭인 것은 인간이기 위한 당연한 조건으로 생각했으며 신의 존재를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숨 쉬는 것과 같은 일을 도와주시는 분이 신부님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향배를 결정지은 것은 귀족 힘도 부르주아지의 힘도 아니다. 평민들이 보통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하급성직자들의 힘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평민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무지렁이였기 때문에 뭘 몰랐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신부님부터 찾았다. 우리나라에서 마을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일단 훈장님한테 쫄래쫄래(?) 달려갔듯이 말이다. 물론 그 영향력은 훈장님의 100배쯤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평민들은 신부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특히 농촌지역일수록 더 그랬다.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인구의 약 85퍼센트가 농촌 인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신부님’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삼부회 때 이 신부님들은 국민의회 쪽을 편들었다.(응 왜?) 자기들도 성직자면서 어째서 제1 신분을 지지하지 않았는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유가 나온다. 1편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하급성직자인‘신부님’들께서는 귀족대접을 못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귀족파를 지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교단의 부패에 굉장히 불만이 많았다. 당시 하급 성직자들 중엔 거지가 많았다고 한다.(신부님이 거지? 레알?) 카톨릭은 십일조를 모두 상부에 올려 보낸 뒤 나중에 필요한 돈이 분배되어 내려온다. 그런데 심각한 부패 때문에 하급 성직자들의 봉급까지 도중에 착복되는 상황이었다. 굶어죽을 수는 없고 결국 구걸해서 먹고 살았다. 평민들이 보기에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어쨌건 그 상황에서 신부들이 어느 쪽을 지지할 지는 뻔하다.
루이16세 가족이 파리에서 살았다고 하는 튈르리 궁
지금은 파괴되어 사라지고 없다.
프랑스 혁명에서 하급 성직자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는 잘 알았다. 탈레랑 주교님의 두 번째 아이디어로 인해 이 절대적 영향력을 지닌 하급 성직자들이 두 개의 패로 갈렸던 것이다. 찬성파와 반대파로. 성직자들의 분열은 당연히 프랑스 국민들의 분열을 가져왔다. 신부님의 정치적 의견이 찬성이면 투표할 필요도 없이 그 마을사람들은 모두 찬성이고, 신부님 의견이 반대면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반대다. 신부님들을 포함한 성직자들의 의견이 갈라섰다는 것은 프랑스 전체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는 나름 우여곡절(?)은 있어도 모두가 하나의 위대한 프랑스 혁명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이 분열하여 이때부터 혁명파 반혁명파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반혁명파의 대두는 두고 두고 혁명의 화근이 되거니와 반혁명파와의 싸움을 오히려 기회삼아 출세한 이들도 있으니 그 중 한명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야기는 나중의 이야기. 지금은 아직 1789년이다.
6.
어쨌든 소요를 가라앉히고 재정 문제를 쓱삭 해결한 국민의회는 제헌국민의회로 이름을 바꾸고 헌법을 초안하기 시작한다. 먼저 프랑스 인권선언부터 해놓고 그에 벗어나지 않도록 기초하였다고 하는데 어째선지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입헌군주제, 기회의 평등, 금권 정치 등이 그 골자였다. 특히 금권 정치가 굉장히 노골적이어서 애당초 참정권 자체가 재산이 있어야만 주어졌는데 약 430만 정도만이 참정권을 가졌다고 한다. 전편에서 말했듯 당시 프랑스 인구는 2500~2700만 사이였다. 그리고 그 430만 중에서도 50만 정도만이 피선거권을 가졌다. 권력이 귀족에서 상위부르주아로 옮겨갔을 뿐 삼부회 때에 비해 참정권의 확대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은 힘 있는 자들의 ‘자유와 권리’를 바랐을지 모르나 모두의 ‘평등과 우애’는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평등과 우애’는 이후에 벌어질 우여곡절과 투쟁의 산물이다. 안타깝게도 혁명은 가난하고 핍박 받는 자들의 것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속물적이었던 1791년 헌법의 법전
이때의 헌법초안에서 또 한 가지 특이점은 이 당시의 입헌군주제는 ‘입헌’이라고 해서 오늘날의 영국과 같은 시체나 다름없는 군주제를 생각하면 곤란하다. 당시의 프랑스 헌법 초안은 재정을 비롯한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왕의 권한을 예전 못지않게 보장하고 있었다. 오히려 재정 같은 부분은 의회에서 담당해 주었기 때문에 이전처럼 막장으로 치달리는 것을 막아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1791년 6월에 있었던 한 중대한 사건 때문에 이 초안은 폐기되어 버리고 만다. 이건 3편에 얘기하겠다.
어쨌건 이 헌법을 발효시키기 위해 1791년 10월에 선거를 통해 의회가 구성되었다. 이것이 입법의회이다. 상하원이 없이 단원제로 구성된 전 국민의 대표(?)인 입법의회가 발족하자 가장 먼저 한 것은 각자의 정당을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의회의 좌석은 지정석이 아니었다. 그래도 암묵적으로 의원들이 앉는 곳들이 정해져 있었다.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 하는 의원들끼리는 같이 앉았으며 항상 앉는 자리에 앉았다. 왕당파는 오른쪽에 앉았고 혁명파는 왼쪽에 몰려 앉았다. 여기서 우파와 좌빨(?)의 개념이 나왔다. 또한 아래쪽인 연단 가까운 곳에 앉은 의원들은 평원당, 저 멀리 위쪽에 앉은 의원들은 산악당이라고 불렸다. 산악당 의원들은 과격파들이 많았으며 나중에 공포정치를 하게 되는 자코뱅당 또한 좌파 산악당이었다. 참고로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적 사상과 정당의 이합집산의 다양성은 오늘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다. 좋게 말하면 역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철새들의 나라였다(이인제 형, 여기 친구들이 많아.)
정치권에서 헌법을 만들고 입법의회를 발족시키는 동안에도 프랑스의 국내외에선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1790년 7월 14일에는 파리 연맹제가 열렸다. 상 드 마르스 공원에서 있었던 이 연맹제는 프랑스 국민들의 대단합을 위해 열린 것으로 무려 20만이나 되는 사람이 참가했다고 한다. 국왕까지 행차하여 참가자들을 격려한 이 대행사는 프랑스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일으키는 의식이었다. 이것은 또한 20세기에 있을 나치의 뉘른베르크 집회의 원형이기도 했다. 주교들은 엄숙한 예식에 따라 프랑스의 영광을 빌었고 참가자들은 수십만 명의 인파속에 묻혀 스스로를 잃은 채 그 장엄함에 고개 숙이고 환희에 빠졌으며 자신이 위대한 프랑스의 작은 부품이 되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모두들 너나 할 것 없이 국뽕을 시원하게 한 사발씩 들이킨 것이다. 유효성이 입증된(?) 연맹제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열렸으며 프랑스인들은 점차 자유와 평등을 비롯한 천부인권을 생각하기보단 군주가 없어진 뒤에도 그를 대신하는 또 다른 지배자인 ‘국가’에 복종해가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되어갔다.
오늘날의 상 드 마르스 공원.
여기서 프랑스인들을 국왕의 신민에서 국가의 노예로 개종시키는 세례의식인 연맹제가 열렸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우애라는 민주주의의 보편적인 원칙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반대로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국가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등을 잉태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선 앞으로도 계속 만나게 될 것이다.
8월에는 봉건제의 상징 중 하나로 여겨지던 십일조가 폐지되었다. 오랜 세월 프랑스인들에게 아니 모든 기독교도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던 중세적인 세금이 적어도 프랑스에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여기서 얼핏 착각하기 쉬운 부분이 있으므로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당시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이 십일조의 폐지를 바랬고 폐지를 기뻐했는가라는 점이다. 당시의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십일조를 부담스럽게 여긴 건 사실이었지만 폐지를 요구하지도 폐지되었다고 환호하지도 않았다. 십일조는 그들이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었으며, 독실한 카톨릭이었던 그들이 폐지를 요구할리도 기뻐할리도 없었다. 그들은 십일조를 세금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세금이라고 여기는 것은 오늘날의 관점이다. 그러고 보면 요즘에도 교회에 아낌없이 재산을 갖다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정신수준이 이 시대의 사람들과 비슷한 모양이다.
다음 해인 1791년 3월에는 결사와 연합의 자유를 금지하는 법안이 만들어 졌다. 어처구니 없게도 프랑스에선 혁명으로 인해 노동운동을 비롯한 각종 사회운동은 그 뿌리부터 잘려나가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후 일어나는 프랑스의 노동운동들은 하나같이 당시로선 불법이었다.(결사의 자유가 없었으니까) 구시대의 경제 제도를 파괴하여 자유로운 경제적 활동을 촉진하기 위한 법이라고 주장했지만, 경제적 강자인 고용주들만 행복하고 경제적 약자인 피고용자들에겐 고통스러운 법이었다. 고용주와 피고용자들은 개개인으로 계약했고 이 경우 피고용자가 압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처음에는 피고용자들만이 아니라 고용주들 또한 결사와 연합을 만들 수 없었지만 나중에는 고용주들에겐 결사단체를 만들 특권이 부여됐다.(웃기지 않은가? 데모할 권리를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에게 주다니!) 그리고 이 법은 거의 백 년이나 철폐되지 않고 지속됐다. 혁명은 이번에도 역시 힘 있는 자들을 위한 자유는 확인했지만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평등과 우애는 외면했다. 세상이란 게 이렇다.
그러던 중 1791년 6월 어느 날 시민들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큰 마차를 보았다. 지체 높고 돈 많은 사람이 커다란 마차를 타고 나들이를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마차의 주인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부럽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누구는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사치스럽게 살고 있다며 혀를 찼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마차의 주인이 자신들의 임금님일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앞서 얘기한 제헌헌법초안을 날려먹고, 프랑스 역사가 군주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사건, 바렌느 배신 사건의 시작이었다.
엑박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