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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 / 창조절 열셋째주일
시편 90:3-7
창조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기’가 시작됩니다. 창조절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통해서 주시는 메시지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도시에 살다 보니 조금 무뎌졌는가 봅니다. 그 아쉬움을 담아 오늘은 시편 90편의 ‘풀’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 깨우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 신비한 꽃을 피우는 달개비
지난 주간에 갑작스러운 한파에 제법 멋지게 자랐던 원예종 달개비가 일부 얼어버렸습니다. 달개비의 생명력은 강인해서, 꺾인 마디는 흙냄새만 맡아도 뿌리를 내고 뿌리가 흙에 닿으면 부지런히 한 개체가 됩니다. 지난봄, 한 줌을 얻어다 열심히 번식을 시켜서 많아지긴 했지만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내년 봄이면 얼어 터진 줄기 사이, 그 어딘가 생명의 기운이 남아있는 마디에서 연록의 새순을 피워낼 것이며, 여름이면 꽃을 피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닙니다. 게다가 아직도 얼지 않은 달개비화분이 남았습니다. 서리가 내린 뒤 시들어버리는 것이 들풀의 삶이며, 그것이 끝이 아니라 이듬해 봄이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것이 들풀의 삶입니다.
■ 김수영 시인의 『풀』
김수영 시인의 『풀』은 3연으로 되어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연은 2연이 아닌가 싶습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그런데 저는 1연이 더 좋습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김수영 시인의 ‘풀’은 그가 죽기 보름 전인 1968년 5월 29일 쓴 유작시입니다. 고등학생이었던 1980년 6월, 국어 선생님이 김수영 시인이 죽은 달이 6월이라며 ‘풀’을 낭독한 후에 ‘동풍(東風)’에 의미에 대해 숨죽여 설명해 주신 것이 기억에 납니다. 이 시의 배경이 1960년대였기 때문에, 외세나 독재정권이 동풍이며, 부패한 정권에 대항하는 이들의 의지가 ‘풀’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시험 볼 때는 김수영 시인의 ‘풀’은 나올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험에 나오지도 않을 시를 왜 구구절절 비장하게 이야기했는지는 나중에 알았습니다.
달개비 사건을 겪은 후, 시편 90편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김수영 시인의 ‘풀’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고, ‘동풍’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성서도 그렇지만 시를 해석할 때 일괄적으로 시대적인 배경이나 사회적인 상황만 접목하면 본래 텍스트가 가진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텍스트’에만 집중하는 것도 시나 성서를 읽는 좋은 방법입니다.
■ 동풍(東風)
저는 ‘동풍’을 ‘긍정적인 시련’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무의 뿌리가 넓어지는 이유는 바람에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균형을 잡으려니 넓어지는 것이죠. 제주도 해안가에는 나뭇가지들이 육지를 향해 자라납니다. 바람이 너무 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뿌리는 어디를 향해 있을까요? 바다를 향해 있습니다. 균형을 잡기 위함입니다. 또한, 나무의 뿌리가 깊어지는 이유는 가물 때문입니다. 깊은 땅속에 있는 물을 끌어 올리려면 뿌리가 더 깊어져야만 하는 것이지요. 나무가 단단해지는 이유는 추위 때문입니다. 추위에 얼어 터지지 않으려고, 물을 다 내보내고 목마름을 참아가며 조밀한 세포조직을 가지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바람이나 가물이나 추위는 나무의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 시련’입니다. 올해 운 좋게도 목양실에 있는 난화분에서 꽃대를 많이 올렸습니다. 비결은 제가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갈증이 난으로 하여금 꽃을 피워 후손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을 조성한 것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난은 너무 부지런하면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설령 운 좋게 뿌리가 썩지 않고 살아있어도 이파리만 무성해지거나 이파리만 커져서 난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실하게 됩니다. 나무나 난 모두 ‘시련’으로 상징되는 ‘동풍의 시간’을 보낸 뒤에 자신을 피워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풀’은 바람에 흔들리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시련의 늪을 기어가는 기쁨’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불어로 ‘쥬이상스(Jouissance)’라는 단어가 있는데 ‘기쁨’으로 해석되지만, ‘시련의 늪을 기어가는 기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풀은 운명적으로 바람, 비, 흐린 날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동풍’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 운명 앞에서 풀은 ‘먼저 눕지만 먼저 일어나고, 먼저 울지만 먼저 웃는 것’이지요.
■ ‘풀’과 시편 90편
시편 90편의 말씀은 ‘존재와 존재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즉, 인간과 하나님을 대비시켜서 하나님은 무한의 존재이며, 인간은 유한의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확증하면서, 인간은 티끌 같은 존재요, 밤의 한순간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은 유한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표면적으로 읽으면 ‘인생무상, 삶의 회의’ 혹은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이야기하는 시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텍스트에는 반전의 묘미가 충만합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요, 죽음을 향해서 가는 존재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유한과 죽음이라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으로 ‘풀’이 피할 수 없이 맞이해야만 하는 ‘동풍’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피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죽음(유한성)을 인식하는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갑니까? 유한의 존재이므로 매 순간을 소홀히 헛되게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하나님께 내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김수영 시인은 하이데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니 ‘풀이 바람(동풍)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자신을 ’초연하게 내맡김‘으로서 ’쥬이상스의 기쁨‘으로 승화해간다는 것이 ’풀‘이라는 시가 담고 있는 의미일 것입니다. 삶이 어떻든 시련은 누구에게나 다가오기 마련이지만, 바람이 불어와 풀이 쓰러져도 뿌리는 여전히 살아있듯이, 사람도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동풍‘을 없앨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다가오는 시련을 없앨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 빈 들, 광야의 시간
이 고난과 시련으로 상징되는 시간이 성서에는 ‘빈들의 시간’ 혹은 ‘광야의 시간’으로 등장합니다. 모세가 출애굽의 지도자로 사용되기 전 40년을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도 40년 광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윗 역시도 양 떼를 돌보며 빈들의 시간을 보냈고, 세례 요한도 ‘빈들’에서 머물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세상으로 나와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로 나가셨고, 결단의 순간마다 빈들로 나가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 빈 들, 광야의 시간은 고난의 시간이요 시련의 시간이었으나 모두들 그 시간을 통하여 새로운 결단을 합니다. 이 빈들의 시간, 광야의 시간은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주의 시간도 아니며,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려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빈들의 시간은 인간의 허장성세가 모두 사라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로 나가셨고, 위기의 순간마다 한적한 곳인 빈 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광야의 시간은 한 번 지나가고 나면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 계속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있는 한 ‘빈들의 시간’ 풀이 운명적으로 바람, 비, 흐린 날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이 필요한 것입니다. ‘동풍’처럼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풀처럼 ‘먼저 눕고 먼저 일어나고, 먼저 울고 먼저 웃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김수영 시인의 ‘풀’에 등장하는 그 ‘풀’은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입니다. 바람이 불어서 누운 것이 아니라 ‘바람보다 먼저’. 바람이 불지 않아서 일어선 것이 아니라 ‘바람이 불어도’, 바람이 불어서 운 것이 아니라 ‘바람보다 먼저’, 바람이 다 지나가서 웃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부는 중에도’ 웃는 것입니다.
■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90편의 말씀에 등장하는 ,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는 풀’과 같은 인생이니 허무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하루가 ‘천 년 같으며(4)’ 그 천 년이 만년이 될 것 같이 길지만, 반드시 소멸할 수밖에 없는 존재(7)가 피조물 인간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과 우리의 삶이 유한하여 티끌로 돌아가게 하신다(3)는 말씀은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생입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은 ‘깨지기 쉽다, 약하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인간이 자신이 깨지기 쉬운 존재, 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약한 존재요, 유한의 존재요, 죽음을 향하여 가는 존재라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이요,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분되는 복입니다.
바람은 언제나 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바람은 불어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맞이하는 모든 날은 초연하게 맞이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내맡기는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을 너무 피곤하게 살지 마십시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다 동풍에 흔들리는 풀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한없이 기쁜 날에는 그날조차도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동풍이 부는 날이 있을 것임을 기억하시고 겸손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이와 관련된 신앙 에세이*
東風(동풍)
김수영 시인의 『풀』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동풍’을 겨울바람(冬風)으로 착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겨울바람 정도는 되어야 고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나중에서야 ‘한겨울에 무슨 풀이 있겠는가?’ 생각하며 다시 보니 ‘동쪽에서 부는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동풍의 반대말은 ‘서풍(西風)’이고, 서풍은 하늬바람이며 갈바람(가을바람)이니 동풍은 ‘봄바람’ 정도가 되겠지요. 그제야 김수영 시인의 『풀』이라는 시가 그림처럼 머리에 그려졌습니다.
그런데 이 시가 참으로 의미 있는 것은 바람이 불면 풀이 눕는 것이 아니라 바람보다 빨리 눕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서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낀다는 점이지요. 풀은 눕든 일어서든 울든 웃든 바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주체적으로 움직인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동풍’을 뿌리를 든든하게 하는 긍정적인 시련으로 바꿔갑니다.
나무가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는 이유는 바람 때문입니다. 바람에 자꾸만 흔들리니까 그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으려면 뿌리가 깊어야 합니다. 나무의 뿌리를 깊게 하는 또 하나는 가물입니다. 땅속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려야 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또한 뿌리를 깊게 내리는 것이지요. 결국, 바람과 가물이 나무의 뿌리를 깊게 하는 것입니다. 난(蘭)의 꽃을 피우려면 너무 부지런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적당한 갈증과 추위가 있어야만 하는데, 너무 따뜻하거나 수분이 늘 충분하면 이파리만 기형적으로 자라고 꽃대를 올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적당한 무관심이 오히려 그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적당한 무관심, 이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동풍,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바람입니다. 피할 수 없는 바람이라면,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프랑스어 ‘시련의 늪을 기어가는 기쁨’이라는 뜻의 ‘쥬이상스(Jouissance – 기쁨)’입니다. 동풍 앞에 서 있는 여러분, 동풍 앞에서 당당하여지기 바랍니다.*
첫댓글 어제는 교회를 가다가 눈이라는 동풍을 만나 집으로되돌아 오기도했습니다 서울이 넓은가봐요 오늘 말씀감사합니다
바람잘날 없다는 말같이 인생은 시련과함께 살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은혜안의 오늘 하루 그리고 또 하루가 중요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늘 힘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