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란진항(於蘭鎭港)
대한민국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에 있는 어항이다. 1971년 12월 21일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으며, 관리청은 해양수산부 서해어업관리단, 시설관리자는 해남군수이다.연혁[편집] 어란진항은 바로 앞에 어불도가 외해의 파랑을 막아주므로 천연 항으로서의 어항 조건을 갖추고 있다. 주변이 다도해를 이루고 있어 수산자원이 풍부한 항으로 1976년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했으며 1986년 기본 설계를 실시한 후 1989년 기본시설을 완공하고 1999년 정비계획을 수립했다.[1]
어항 구역 : 본 항의 어항구역은 다음과 같다.
수역: 어란초등학교 동측 돌출부에서 어불도 동북단 돌출부를 연결하는 선과 어불도 서북단 돌출부에서 대안 육지(N50。E)를 연결하는 선을 따라 형성된 공유수면 육역: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1637-1 외 15필지
어란진항에는 다도해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땅끝전망대와 높이 10m 가량의 봉화대가 정상에 세워져 있다. 또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맴섬에는 기암괴석 틈으로 뿌리를 박고 서있는 소나무가 장관이다.[4]
어란리 만호비군[於蘭里萬戶碑群]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에 있는 조선 후기 어란만호
김성익, 최성륜, 김종희, 김종석 등을 기리기 위해 세운 5기의 비.
개설
어란포진(於蘭浦鎭)은 조선시대 수군을 지휘하던 만호가 머물던 곳이며, 조선시대 전라도 지역에 출몰하던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성곽으로 세워졌다. 어란포진의 위치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어란진항 일대이다. 송지면은 한반도 최남단에 있으며, 북쪽을 제외한 동·서·남쪽이 모두 바다와 닿아 있다. 조선 초기 어란량, 어란포, 어란포영으로 불렸으며, 주요 정박지에서 왜구를 방어하는 수군 기지로 역할이 변화되고 만호의 배치로 병선이 정박하게 되었다. 어란포의 규모를 가늠하여 볼 수 있는 성곽 형태가 일부 남아 있다. 조선 후기 김성익(金聲益)은 1765년(영조 41) 어란만호(於蘭萬戶)로 제수받았으며, 1766년 1월 9일 하직하였다. 최성륜(崔聖崙)은 1782년(정조 6) 어란만호로 제수받아 12월 3일 파직되었다. 김종희(金鍾熙)는 1858년(철종 9) 어란만호로 제수받았으며, 김종석(金鍾奭)은 1888년(고종 25) 어란만호(於蘭萬戶)로 제수받았다. 김□는 부임 시기를 알 수 없다.
건립 경위
어란리 만호비군(於蘭里萬戶碑群)은 1765년 어란만호로 부임한 김성익, 1782년 부임한 최성륜, 부임 시기를 알 수 없는 김□, 1858년 부임한 김종희, 1888년 부임한 김종석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건립되었다. 비문에 의하여 건립 시기는 알 수 있지만, 건립 주체는 알 수 없다.
위치
어란리 만호비군은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어란진항 내장리 마을회관 앞에 어란만호비 5기가 있다.
형태
어란리 만호비군의 재질은 돌이며, 지붕돌이 없는 형태이다. 비신(碑身)의 앞면에는 제목을 적고, 뒷면에는 비를 세운 일자를 새겨 놓았다. 어란만호 김성익 비는 좌대 위에 비몸을 세웠으며, 비의 몸과 머리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81㎝, 너비 44㎝, 두께 12㎝이다. 어란만호 최성륜 비는 좌대 위에 비몸을 세웠으며, 비의 몸과 머리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75㎝, 너비 41㎝, 두께 18㎝이다. 어란만호 김□ 비는 좌대 위에 비몸을 세웠으며 비의 몸과 머리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68㎝, 너비 46㎝, 두께 19㎝이다. 어란만호 김종희 비는 좌대 위에 비몸을 세웠으며, 비의 몸과 머리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89㎝, 너비 42㎝, 두께 18㎝이다. 어란만호 김종석 비는 좌대 위에 비몸을 세웠으며, 비의 몸과 머리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59㎝, 너비 41㎝, 두께 15㎝이다.
금석문
어란리 만호비군 중 어란만호 김성익 비는 앞면 가운데에 ‘행만호김공성익선정부망비(行萬戶金公聲益善政不忘碑)’라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뒷면에 ‘건릉 삼십이년 정해(乾陵 三十二年 丁亥)’라는 연기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정해년은 1767년(영조 43)으로 보인다. 어란만호 최성륜 비는 앞면 가운데에 ‘행만호최공성륜영세불망비(行萬戶崔公聖崙永世不忘碑)’라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뒷면에 ‘계묘 칠월 일(癸卯 七月 日)’이라 연기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계묘년은 1783년(정조 7)으로 보인다. 어란만호 김□ 비는 앞면 가운데에 ‘행만호김공□영세불망비(行萬戶金公□永世不忘碑)’라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판독할 수 없는 글자로 인하여 누구의 비인지 알 수 없다. 뒷면에 ‘도광 8년(道光 八年)’이라 연기가 새겨져 있다. 도광 8년은 1828년(순조 28)이므로 1828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어란만호 김종희 비는 앞면 가운데에 ‘행만호김공종희영세불망비(行萬戶金公鍾熙永世不忘碑)’라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뒷면에 ‘함풍 십일년 신유 삼월 일(咸豐 十一年 辛酉 三月 日)’이라 연기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함풍 11년은 1861년(철종 12)이므로 1861년 3월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어란만호 김종석 비는 앞면 가운데에 ‘행만호김공종석영세불망비(行萬戶金公鍾奭永世不忘碑)’라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뒷면에 ‘광서 십오년 기축 팔월 일(光緖 十五年 己丑 八月 日)’이라 연기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광서 15년은 1889년(고종 26)이므로 1889년 8월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현황
어란리 만호비군 중 어란초등학교 앞에 있던 5기의 만호비는 1994년 내장리 마을회관 앞으로 옮겼다. 비석의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비문도 다른 비석에 비해 크게 새겨져 있다. 또한 비문 역시 마모가 거의 없어 육안으로 확인하기 쉽다. 어란리 만호비군은 해남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어란리 만호비군은 조선 후기 어란진 만호의 활동상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각사등록(各司謄錄) 전라우수영계록(全羅右水營啓錄)」
목포대학교박물관, 『해남군의 문화유적』(전라남도 해남군·목포대학교박물관, 1986)
『해남지방 금석문대계』(해남군·동신대학교박물관, 2002)
『조선시대 수군진 조사』Ⅰ전라우수영 편(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1)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배가 정말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해남에서 가장 큰 항이 아닌가싶다.
넓적한 김배가 많은데, 해남과 진도사이에 위치한 만호해역(마로해역)으로 조업을
나가는 배들로 보인다. 김배에서 육상(운송차량)으로 김을 옮기기 위한 크레인이 많은것도
눈에 띈다. 김 철에는 바쁘나 현재는 조용한 편이고 이때를 이용해서 각종 공사가 진행중인듯하다.
어란포해전 [於蘭浦海戰]
1597년 10월 8일(음력 8월 28일)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어란포(於蘭浦,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앞바다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이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뒤에 벌인 첫 번째 전투로 《난중일기(亂中日記)》 등에 관련된 기록이 전해진다.
배경과 원인
명나라와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켰다. 그해 4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의 직위에서 해임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던 이순신은 5월 16일 사형을 모면하여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순신을 대신해 통제사가 되었던 원균(元均)이 8월 27일 칠천해전(漆川海戰)에서 크게 패하자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칠천해전에서 승리한 일본은 9월 26일과 10월 4일에 남원과 전주를 점령한 뒤에 충청도 방면으로 북상해갔다. 그리고 수군은 남해를 거쳐 서해로 북상해 곧바로 한강 하구로 진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발발과 전개과정
남해안 일대를 순시하던 이순신은 9월 13일 진주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사령장을 받고는 곧바로 순천부(順天府)로 향했다. 9월 18일 순천에 도착한 이순신은 낙안(樂安)ㆍ보성(寶城) 등지를 돌며 흩어진 병력과 무기 등을 수습했다. 당시 선조는 이순신에게 수군을 폐지하고 병력을 수습해 육상 전투에 참가하라는 조서를 전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수군 철폐를 재고해 달라는 장계를 조정에 보내 선조의 승인을 받았다. 9월 28일 장흥 회진면의 회령포(會寧浦)에 도착한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을 만나 그가 이끌고 있던 12척의 판옥선을 확보했다. 그리고 9월 30일 해남군 북평면의 이진(梨津)으로 진영을 옮기고, 10월 4일에 다시 해남군 송지면의 어란포로 이동했다. 그날 저녁 탐망군관 임준영(任俊英)이 일본군 함대가 이진에 이르렀다고 보고했다. 10월 6일 신임 전라우수사로 임명된 김억추(金億秋)가 1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이순신과 합류해 조선 수군은 모두 13척의 전함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어란포에 계속 머무르며 수군을 정비하였는데, 10월 8일 새벽에 일본군 선박 8척이 어란포로 접근해왔다. 이순신은 적선이 접근하도록 기다렸다가 반격을 가했고, 이른바 ‘땅끝’이라고 불리는 해남의 갈두산(葛頭山, 155m) 앞바다까지 적선을 추격한 뒤에 돌아왔다.
결과와 영향
50여 척에 이르는 일본군 함대가 뒤이어 접근해오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이순신은 그날 저녁 장도(獐島)로 진영을 옮긴 뒤에 10월 9일에 다시 진도 고군면의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일본군을 물리친 뒤에 10월 25일에는 해남군 문내면과 진도 둔내면 사이의 울돌목에서 벌어진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일본군 수군에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처럼 어란포해전은 규모가 작은 해전이었지만, 이순신이 칠천해전의 패배로 궤멸되었던 조선 수군을 수습해서 벌인 최초의 전투이자 승리이다. 이 전투와 벽파진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조선 수군은 서해로 향하던 일본 수군을 명량 해협으로 유인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022-08-29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