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수필 장작패기 외 3편
장작패기
손광성
장작을 패는 일만큼 남성적인 노동도 드물지 싶다. 힘이 든다는 점에서 그렇고 위험이 따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해서 장작을 패는 일만은 언제 나 남자들의 몫이었다. 그렇다고 힘으로만 되는 일도 아니다.
훌륭한 요리사는 한 달에 한번 칼을 갈고 서툰 요리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칼을 간다. 이치를 알고 일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다. 장작을 패는 일도 그렇다. 경험 위에 약간의 안목과 요령이 필요 하다. 아니면 도낏날을 버리기 쉽다. 심하면 제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경우 도 없지 않다. 장작을 패려면 우선 도끼를 볼 줄부터 알아야 된다. 도끼라고 다 같은 도끼가 아니다. 볼이 얇고 날이 넓은 것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볼이 두텁 고 날이 좁은 것이 있다. 볼이 얇고 날이 넓은 것은 나무를 자르는데 편 리하도록 되어 있다. 산판山坂에서 벌목할 때 주로 이런 도끼를 쓴다. 서양 도끼와 비슷하다. 볼이 두텁고 날이 좁은 것은 나무를 쪼갤 때 쓴다. 날이 좁아서 나무의 결을 파고 드는데 유리하고 볼이 두터워서 쐐기 역할 을 하기 때문에 나무가 잘 쪼개진다. 장난감같이 작은 도끼도 있는데 이 것은 부엌에서 불쏘시개를 만들 때 쓴다. 모양에 따라 용도가 달라진다는 말이다. 나무도 그렇다. 종류에 따라 패기 쉬운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참나무와 낙엽송은 자르기는 어려워도 쪼개기는 쉽다. 대쪽처럼 갈라진다. 소나무는 무른 편이어서 자르기도 쉽고 쪼개기도 쉽다. 밤나 무나 대추나무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대추나무 방망이란 말이 있을 정도이다. 나무의 건조 상태도 문제이다. 갓 베어낸 생나무는 물러서 좋지만 시원스럽게 쪼개지는 맛이 덜한 것이 흠이다. 생나무라고 해도 언 것 은 수월하다. 도낏날을 받자마자 제풀에 놀라서 갈라지고 만다. 그러 나 광산에서 쓰던 갱목같이 물을 많이 먹어 거죽이 썩은 나무는 종류 에 상관없이 패기에 힘이 든다. 겉은 스펀지처럼 무르지만 속은 옹이 처럼 단단해서 한 번 도낏날을 물면 놓지 않는다. 갈라질 때도 통쾌한 맛이 적다. 꼭 패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피하는 편이 현명하다. 이미 썩은 것은 그대로 썩게 하라. 이것이 경험자의 첫 번째 충고 이다. 이제까지 말한 것은 작업에 대한 전망을 내리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장작패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도끼를 옆에 세워두고 우선 모탕부터 살펴야 한다. 모탕은 도끼를 보호하기 위한 받침대이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단 단히 고정되는 것이 안전하다. 말하자면 뿌리째 파낸 나뭇등걸 같은 것이 안성맞춤이란 이야기이다. 그러나 모탕이 잘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 위에 나무토막을 잘못 놓으면 만사 헛수고가 되고 만다. 헛수고 정도가 아니라 낭패를 보는 수도 없지 않다. 도낏날이 닿는 순간 나무토막이 옆으로 몸을 피하면 서 정강이를 걷어찰지도 모른다. 아니면 튕겨오르면서 손등을 깨물거 나 이마를 받아 버리든가, 심하면 아예 코를 으깨버리는 수도 있다. 나무를 깔보지 말라. 나무가 당신을 깔볼까 두렵다. 경험자의 두 번 째 충고이다. 나무토막을 놓을 때는 결과 모양을 잘 살핀다. 아무리 작은 나무라 도 밑동은 단단하고 질기다. 나무토막은 굵은 쪽을 자기 앞으로 오도 록 놓는다. 나무의 종류에 관계없이 지켜야 할 원칙인가 한다. 그래야 잘 쪼개진다. 소나무처럼 옹이가 크고 많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어떤 힘에도 굴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있다. 나무의 경우 도 마찬가지이다. 나무라고 해서 모두 도끼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그럴 경우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다.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되면 언제고 유능한 외교관처럼 한 발 물러서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슬그머니 마당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가 화분 받침대 로 쓰거나, 아니면 걸터앉는 의자로 사용하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여름 밤 같은 때 나무토막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별을 쳐다 보는 장면 같은 것을 상상해 보자. 번잡한 세상살이에 이만한 여유와 낭만이 또 어디 있겠는가. 경험자의 세 번째 충고이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요령만 터득하고 나면 장작 패기도 그렇게 고달픈 노동만은 아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즐거운 운동이 될 수 도 있다. 서양 사람들은 장작 패기 시합도 한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 령 이승만李承晩박사는 일요일이면 경무대 뒤뜰에서 장작을 팼다. 그것이 그의 취미요 스포츠였다.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나무토막을 마주하고 섰을 때의 그 팽팽한 기 장감, 두 다리로 버티고, 두 손은 도낏자루를 움켜쥔다. 그리고 잠시 침묵의 순간이 흐른다. 이제 호흡을 고르면서 서서히 도끼를 들어올 릴 차례다. 이때 도끼의 높이가 머리 위에서 멎느냐, 아니면 그 이상 까지 가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공격하려는 너무토막의 부피와 강도 에 비례한다. 그러나 너무 긴장한 나머지 어깨에 무리한 힘이 주어지는 일이 있 어서는 아니 된다. 경직된 어깨로는 표적을 제대로 맞출 수가 없다. 도끼의 높이가 가장 높이 올라갔을 때 도낏자루를 잡은 손에서 힘을 빼야 한다. 다시 말하면 도끼가 잠시 허공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도낏자루를 잡은 손이 느슨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훌륭한 검객劍客은 칼을 가볍게 잡는다고 들었다. 칼은 새와 같아서 너무 꽉 잡으면 질식하고 너무 느슨하게 잡으면 날아간다. 도끼도 마찬가 지다. 그리고 도낏날이 나무토막에 닿는 순간, 모든 힘은 하나의 접점에 모아져야 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대부분의 경우 응집되지 않은 힘은 힘이라고 할 수가 없다. 경험자의 네 번째 충고이다. 드디어 떨어지는 도끼의 무서운 파괴력. 완강하게 버티던 나무토막 이 일도양단一刀兩斷 둘로 갈라진다. 날카로운 파열음은 가라앉은 주변 공기를 격동시키며 벼락치듯 하늘을 가른다. 몇 십 년 또는 몇 백 년 동안 나무속에 갇혀 있던 인고의 침묵이 드디어 경악한다. 정복자의 기쁨이라고나 할까. 한마디로 통쾌하다. 그 뒤를 따르는 송진 냄새의 저 신선함. 이 건강한 남성적 향기에는 향락적인 인상도 관능적인 자극도 없다. 그것은 살아 있는 숲의 체취 요 승자에게 바치는 축배의 향기다. 아니, 그것은 어떤 성소聖所에서 스며나오는 신비로운 향기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 다. 고대 이집트의 사원寺院에서 아침마다 송진을 태웠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잠시 과거로 돌아가 제관祭官이 된 기분으로 도낏자루에 몸의 무게를 의지하고, 눈을 감은 채 그 향기의 물살에 몸을 맡겨보 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일상에서 오는 모든 대립과 갈등은 그 부드 러운 향기 속에 용해되어 나가고, 우리는 비로소 마음의 평온을 찾게 될 것이다. 햇볕에 번들거리는 청동빛 어깨, 온 세계라도 움켜쥘 듯한 단단한 주먹, 그리고 상기된 이마 위에 흐르는 구슬땀. 이 건강한 땀이 우리 의 육체를 정화시킨다. 눈물이 우리의 마음을 정화淨化 시키듯이.
나에게 건강한 하루를 달라. 어떤 제왕의 영광도 일소에 부치리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까지 손수 처리하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 다. 그러나 나는 꽃을 가꾸는 일과 장작을 패는 일만은 돈으로 해결하 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런 것까지 양보하기에는 인생에 주어진 기쁨 이란 그리 많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험자인 나의 마지막 충고이다. 6・25 직후 겨울만 되면 나는 거의 매일 두 시간씩 장작을 패야 했 다. 아직 구공탄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그동안 몇트럭의 통나무가 나 의 손에 의해서 장작이 되어 나갔는지 모른다. 지금은 나의 팔이 지난 날의 그 힘과 탄력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의 그 기쁨과 활기만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 장작이 패고 싶다.
아름다운 소리들
소리에도 계절이 있다. 어떤 소리는 제철이 아니면 제 맛이 나지 않는다. 또 어떤 소리는 가까운 곳에서 들어야 하고 다른 소리는 멀리서 들어야 한다. 어떤 베일 같은 것을 사이에 두고 간접적으로 들어야 좋은 소리도 있다. 그리고 오래전에 우리 곁을 떠난 친구와도 같이 그립고 아쉬운 그런 소리도 있다. 폭죽과 폭포와 천둥소리는 여름에 들어야 제격이다. 폭염의 기승을 꺾을 수 있는 소리란 그리 많지 않다. 지축을 흔드는 태고의 음향과 ‘확’하고 끼얹는 화약 냄새만이 무기력해진 우리의 심신에 자극을 더한다. 뻐꾸기며 꾀꼬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폭염 아래서는 새들도 침묵한다. 매미만이 질세라 태양의 횡포와 맞서는데,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 힘찬 기세에 폭염도 잠시 저만치 비껴 선다. 낮에는 마루에 누워 잠을 청해 본다. 야윈 잠결. 문득 지나가는 한줄기 소나기. 파초 잎에 듣는 빗소리가 상쾌하다. 밤에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물가를 거닌다. 달이 비친 수면은 고요한데, 이따금 물고기가 수면 위로 솟았다 떨어지면서 내는 투명한 소리. 그 투명한 음향이 밤의 정적을 지나 우리의 가슴에 가벼운 파문을 던진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언제나 이처럼 절실한 것을. 흔들리는 아지랑이 속으로 아득히 비상하는 종달새의 가슴 떨리는 소리는 언제나 꿈, 사랑, 희망과 같은 어휘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상아빛 건반 위로 달리는 피아노 소리는 5월의 사과꽃 향기 속으로 번지고,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는 나른한 졸음에 금속성의 상쾌함을 더한다. 이런 소리는 초여름의 부드러운 대기 속에서 들을 때 더 아름답다. 대체로 청각은 시각보다 감성적이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 호소하는 힘이 크다. 때로는 영적이며 계시적인 힘을 지니기도 한다. 향기가 그러하듯 소리는 신비의 세계로 오르는 계단이요,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는 안내자가 된다. 그만큼 소리와 향기는 종교적이다. 신자가 아니면서도 성가가 듣고 싶어서 명동성당에 들어가 한참씩 차고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독경소리가 좋아서 출가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다. 성가는 나의 마음을 승화시키고 독경소리는 나의 마음을 비운다. 가을 하늘처럼 비운다. 나는 특히 사람의 소리를 좋아한다. 파발로티의 패기에 찬 목소리를 좋아하고, 휘트니 휴스턴의 소나기 같은 목소리도 좋아한다. 그녀는 그래미 상 시상식에서 한꺼번에 여섯 개의 트로피를 안고 화면 가득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는 나나 무스쿠리의 목소리와 케니 지의 소프라노 색소폰 소리를 좋아한다. 애수에 어린 그런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는 내 나이를 잊고, 내 차가 낡았다는 사실을 잊고, 젊은이처럼 빗속을 질주할 때가 있다. 개 짖은 소리와 닭 울음소리는 멀리서 들어야 한다. 대금 소리와 거문고 소리도 마찬가지다. 그림자가 비친 창호지 저쪽에서 들려오거나, 아니면 저만치 떨어진 정자에서 달빛을 타고 들려올 때가 제격이다. 적당한 거리는 베일과 같은 신비스러운 효과를 낸다. 그런 간접성, 그것이 아니면 깊은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국악인지도 모른다. 음악뿐이겠는가. 그림도 그렇고 화법話法도 그렇다. 산수화를 그릴 때는 안개로 산의 윤곽 일부를 흐리게 함으로써 비경秘境의 효과를 얻는다. 같은 지령적 언어라도 완곡어법을 우리는 더 좋아한다. 새소리를 들을 때도 그렇다. 온전히 깨어 있을 때보다 반쯤 수면상태에서 들을 때가 행복하다. 풀잎에는 아직 아침 이슬이 맺혀 있고, 아침 햇살은 막 퍼지려고 하는데, 창문 틈으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그 청아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지난밤의 악몽에 시달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새소리로 열리는 새 아침은 언제나 새 희망 속에 우리를 눈뜨게 한다. 봄이 꽃과 새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낙엽과 풀벌레의 계절이다. 낙엽이 굴러가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잠들 수 없는 긴 밤과 텅 빈 가슴을 마련한다. 누구였더라? 가을밤에는 은하수에서도 풀벌레 소리가 드린다던 사람이. 그러나 문득 이 모든 소리를 압도하는 하나의 소리가 있다.
빈 방, 창 밖에는 밤비 나리고 어디선가 산과山果 떨어지는 소리
빈산에 떨어지는 산과 한 알이 문득 온 우주를 흔든다. 존재의 뿌리까지 울리는 이 실존적 물음을, 천 년 전에는 왕유王維가 들었고 지금은 내가 듣고 있다. 이런 소리는 빈 방에서 혼자 들어야 한다. 아니면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겨울은 무채색의 계절. 자연은 온통 흰색과 검정으로 수렴된다. 하지만 소리는 그렇지 않다. 겨울에는 겨울만이 내는 소리가 있다. 싸락눈이 가랑잎에 내리는 간지러운 소리와 첫눈을 밟고 오는 여인의 발걸음 소리. 이런 소리는 언제나 나를 향해 오는 것 같다. 얼음장이 “쩡”하고 갈라지는 소리와 지축을 울리는 눈사태의 굉음과 굶주린 짐승들의 울부짖음. 이 모든 소리는 겨울이 아니면 들을 수 없다. 눈이 많이 오는 나의 고향에서는 아름드리 원목을 실은 기차가 가파른 함경선 철로 위를 오르지 못해서 밤새 올라갔다가는 미끄러지고, 다시 올라갔다가는 또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런 날 밤은 언제나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도 기차는 올라갔다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고.......... 그러나 아침에 깨어서 나가 보면 기차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소리 가운데는 언제 들어도 좋은 소리가 있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도마 소리와 반쯤 졸음 속에서 듣는 속삭임 소리가 그렇다. 병마개를 따고 첫 잔을 따를 때 술병에서 나는 소리처럼 듣기 좋은 소리도 드물다. 그것은 가난한 시인에게도 언제나 “꿈, 꿈, 꿈”하고 노래한다. 그리고 여인의 치맛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조용히 미닫이가 열리는 소리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찾아 올 이도 없는 빈 하숙방에서 책을 읽다가 가끔 이런 환청에 놀라 뒤를 돌아다보던 그런 날도 있었다. 그리고 한때는 우리 가까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그래서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그리운 소리들이 있다. 다듬이 소리, 대장간의 해머 소리, 꿈 많던 우리들에게 언제나 “떠나라! 떠나라!” 외쳐대던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 목이 잠긴 그 소리가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가. 그리고 울긋불긋한 천막과 원숭이들과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외발자전거를 타던 난쟁이가 있던 곡마단의 나팔소리. 나의 단발머리 소녀는 아직도 아득히 높은 장대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데, 내 머리칼은 벌써 반이나 세었다. 안개 낀 어느 항구의 썰렁한 여관방에서 홀로 듣던 우수 어린 무적霧笛 소리와 한 떼의 갈가마귀들이 빈 밭에서 날아오를 때 내던 무수한 깃털이 부딪히는 소리와 하늘 한 복판을 유유히 지나가던 기러기의 아득한 울음소리. 이제 이 모든 소리들이 그립다. 돌이킬 수 없는 유년의 강물처럼, 우리 곁을 떠나 버린 옛 친의 다정했던 목소리처럼 그렇게 그리운 것이다.
물소 문진
내 책상 위에 물소 문진文鎭이 하나 있다. 청동으로 만든 것인데, 소의 아랫도리가 보이지 않는다. 강물에 잠겨 있기 때문이리라. 어찌 보면 작은 섬도 같고 또 어찌 보면 가지를 반으로 쪼개서 도마 위에 엎어 놓은 것도 같다. 입을 약간 벌린 채 목을 오른쪽으로 틀어서 살짝 들고 있다. 뒤미처 오는 송아지를 재촉하고 있는 것일까. 초승달처럼 잘 휘어진, 크고 긴 두 개의 뿔은 끝을 뒤로 향하고 있다.
“댁을 공격할 의사가 없거든요.”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분명 우리의 한우는 아니다. 중국 양쯔 강이거나, 메콩 강 지류 어디쯤에 사는 물소다. 왼쪽 엉덩이 위에 S자형으로 올려놓은 꼬리가 잔뜩 긴장하고 있다. 귀찮게 구는 파리 떼를 혼내주려고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몸뚱이가 젖는 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마지막 자존심만은 적시고 싶지 않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 물소는 중국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데, 등에다 아이를 태우고 강을 건너는 광경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이 문진도 그러니까 중국에서 만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등에 타고 있어야 할 아이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아이의 소지품만 있다. 챙이 넓은 밀짚모자와 그 밑에 멜빵이 달린 가방 하나. 신발은 보이지 않는다. 50년대 우리처럼 그곳 아이들도 맨발로 사는 모양이다. 가방은 우리가 어렸을 때 메고 다니던 것과 비슷하다. 물론 가죽은 아니고 무명이나 삼베로 만든 듯한, 그래서 김치 국물이나 풀물이 든 자국이 몇 군데쯤 얼룩져 있을 법한 그런 가방이다. 모자와 가방이 있는 걸 보면 근처 어디쯤에 녀석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 혹시 강가 모래밭에서 다른 아이들과 씨름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버드나무에 기대서 풀피리라도 간드러지게 불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소더러 혼자 강을 건너게 내버려 둘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녀석은 대체 어디로 잠적한 것일까? 있을 만한 곳은 한 군데, 그러니까 물속밖에 없다. 그렇다면 소를 타고 강을 건너던 녀석이 강물 중간쯤에 이르자 물속으로 풍덩 뛰어 들었다는 말인가? 모든 정황을 고려할 때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다. 굳이 서둘러 집에 가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날씨는 덥고 기분은 꿀꿀한 데다, 일찍 가 봤자 귀찮게 잔심부름을 시키거나 아니면 동생을 돌보라고 할 것이 뻔한데 말이다.
“땡땡이치는 거지 뭐”
녀석은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지금 물속 어디쯤을 신나게 잠영潛泳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물살에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부릅뜬 눈, 작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두 개의 귀여운 볼때기. 아마 입술은 조가비처럼 굳게 다문 채 헤엄을 치고 있으리라. 마치 수족관을 들어다 보고 있을 때처럼 녀석의 모습이 환히 잡힌다. 겨우 소지품 두 가지를 보여 주고서 나에게 이런 정황을 상상하게 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아이를 생략하지 않고 쇠잔등 위에 앉혀 놓았더라면 어떠했을까? 나의 상상력은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시선이란 보이는 사물에 쉽게 얽매이는 법. 그러니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어찌 다 거두어들일 수 있었겠는가. 숨기고도 드러낸 것보다 더 잘 드러낸 장인匠人의 절묘한 의장意匠에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 마치 동양 미학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산수화에서 산사山寺를 그릴 때 고지식하게 절집 전체를 다 그리는 바보는 없다. 길이 다하는 지점에 일주문一柱門 하나만 그려 놓고 시치미를 뗀다, 저 울창한 숲속에 산사가 있다. 지금은 녹음이 우거져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귀를 기울여 들어 보라. 솔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독경소리 사이사이로 청아한 풍경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렇게 우긴다. 그런데 이런 억지가 도무지 밉지 않다. 구차스러운 설명을 뛰어 넘는 저 경쾌한 비약. 상쾌하다 못해 통쾌하다. 이런 비약은 때때로 우리에게 정직한 일상을 가볍게 초월하는 쾌감을 준다. 인사동에서 처음 보는 순간 녀석은 이미 나의 것이 되어 있었다. 아니다. 나는 이미 녀석의 것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리라.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이 문진으로 화선지를 눌러 놓는다. 화선지 한 귀퉁이에 놓인 물소를 보고 있으면 긴 화선지 한 장이 그대로 장강長江이 되어 넘실거린다. 작열하는 남국의 태양 아래 은빛으로 빛나는 물비늘을 헤치며 물소 한 마리가 나를 향해 천천히 헤엄쳐 오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면 잠시 붓을 멈춘다. 그리고 눈을 반쯤 감고 놈을 바라보곤 한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물속을 잠영하던 아이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푸푸’거리며 화선지를 찢고 불쑥 내 앞에 솟구쳐 오를 것만 같다. 햇볕에 가무잡잡하게 그을린 녀석이 숨을 몰아쉬면서 내뿜는 시원한 물보라! 아, 이럴 때 내 옷은 속수무책으로 흠뻑 젖고 만다.
두 번째 서른 살
인생은 어느 나이나 다 살만하다고 한다. 스물은 스물대로 좋고 예순은 예순대로 좋다는 이야기다. 일흔과 여든은 어떨지 모르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예순까지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같은 고기라도 부위에 따라 맛이 다르고 네 절기도 사람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함이 각기 다르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인생의 황금기는 서른 살이니라” 어떤 사람은 이팔청춘을 찾지만 아무래도 나이 열여섯은 너무 어리다. 두근거리는 가슴 하나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감탄사 하나로 된 문장 같아서 느낌만 있고 주어가 없다. 거기에 비하면 스물은 눈부신 나이다. 가슴은 뜨겁고 피부는 생기가 넘친다. “술 없이도 취하는 나이” 그것이 스무 살이다. 그러나 병 없이도 앓는 나이가 또한 스무 살인가 한다. 이 질풍노도의 계절은 불안과 위험을 동반한다. 문장으로 말하자면 주어와 서술어만 있고 목적어가 없는 문장이다. 옛날에는 열다섯부터 관례冠禮를 올렸다. 요새는 스무 살이면 성년으로 친다. 그러나 나이 스물로 성인成人이 되기는 아직 이르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생에 대한 깊은 통찰까지겠는가. 육체적 성년은 어떨지 모르지만 한 인격체의 성년으로는 함량 미달일 수밖에 없다. 공자나 예수 같은 성인들조차 그들의 20대는 완전히 괄호 속에 묻혀 있다. 공자가 스스로 ‘섰다’고 말한 것은 서른 살 때다.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서른에 침례를 받고 비로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세계 명작 소설의 대부분이 그 작가의 30대에 이룬 성과라는 사실이다. <좁은 문>, <페스트>, <전쟁과 평화>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모두 그러하다. 인생 40은 어떨까? 그것은 내리막길이다. 실제로 배가 나오고 머리가 벗어지며 요통을 호소하고 그리고 돋보기를 쓰기 시작하는 나이가 바로 마흔이다. 말하자면 빨간불이 켜진다는 이야기다. 카사노바의 정력도 마흔 살부터는 날개가 꺾인 새가 되어 더듬거리기 시작했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내가 나의 나이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한 것도 서른아홉에서 마흔으로 넘어가던 해였다. 마흔이 된다는 것이 마치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두렵고 허망했다. 섣달그믐날 저녁 나는 친구들을 불러 술잔치를 벌였다. 명동에서 시작한 것이 무교동을 거쳐 신촌에서 끝났다. 그러고는 신정 연휴 동안 내내 앓아야 했다. 숙취 때문만은 아니었다. “젊음이여, 그대 마침내 떠나는구나” 독일 시인 횔덜린은 서른에 자신의 청춘과 이렇게 이별했다. 그는 그후 40년을 더 살았지만 정신 착란으로 아무도 의식하지 못한 삶이었다. 그는 청춘이 다했다는 사실이 슬펐고, 나는 생의 절정으로부터 미끄러져 내려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아무튼 그후 쉰 살이 되고 예순 살이 되어도 마흔이 되던 해 같지는 않았다. 서른 살은 물론 인생의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다. 서른 살은 분명 가을이다. 그렇다고 낙엽이 지는 계절도 물론 아니다. 서른 살은 그러니까 늦여름과 초가을이 만나는 그 어름의 어디쯤이다. 초록빛 사과가 비로소 붉어지고 과육은 부드러워지며, 신선한 맛과 달콤한 과즙이 고이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이때다. 내가 만일 연애를 한다면 나의 상대는 결코 스무 살은 아닐 것이다. 아직 열리지도 않은 과일이 익기를 기다릴 만큼 젊지도 않지만 그럴 만한 인내심도 나에게는 없다. 여자 나이 스물이 물오른 5월의 꽃나무라면, 서른 살은 열매가 가득 열린 가을나무라 해도 좋다. 이제 더는 남자가 두렵지 않은 나이. 자신이 박자에 맞추어 스텝을 밟을 줄 아는 나이, 그것이 여자의 서른 살이다. “그녀의 춤추던 시절은 끝났다”는 말은 그러니까 서른 살을 두고 하는 말은 분명 아닐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미로의 비너스는 분명 서른 살 여인의 몸매를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나리자도 마찬가지였다. “인자한 모성의 구현상”이라는 이 여인도 분명 서른 살임이 틀림없었다. 완숙한 인격의 깊이에서가 아니라면 어디서 저 신비로운 미소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빈치가 말하고자 한 여성다움이란 것에 대해 무언의 공감을 보내면서 나는 잠시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도교에서 말하는 ‘불로장생’이란 몇 살의 상태로 그렇게 오래 산다는 뜻일까? 신선도神仙圖에 나오는 노인의 상태로인가? 아니면 푸른 20대의 젊음으로서인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다. 포박자包朴子에 의하면 그것은 서른 살이라고 했다. 팽조彭祖라는 사람이 800 살을 살았지만 그는 언제나 30대였다는 이야기다. 영원한 서른 살.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황금기는 서른 살이라는 말이다. 신선도의 늙은이는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상의 문제일 뿐이지 심신이 그처럼 늙어 버린 노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몸과 마음으로 삼천갑자를 산다고 상상해 보자. 그건 추복이라기보다 차라리 형벌일 것이다. 나는 가끔 교지 편집부 학생들로부터 이런 앙케트를 받을 때가 있다. “선생님 앞에 ‘젊음의 샘’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마다 나는 같은 대답을 한다. “나는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 자신에게 주의시킬 것이다.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어린애가 되어서 내 손자와 함께 기저귀를 차는 그런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스무 살로 돌아가 젊은 날의 고뇌와 방황을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도 않다. 더도 덜도 말고 서른 살이 될 만큼만, 포도주잔을 기울이듯이 아주 조금씩 그렇게 마실 것이다.” 요새는 인생은 육십부터라고들 말한다. 소피아 로렌은 그녀의 예순 번째 생일을 맞은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세 번째 스무 살을 맞게 된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재치 있는 대답이다. 그녀의 황금기는 스무 살이라는 이야기다. 만약 그 기자가 실수로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면 나는 분명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두 번째 서른 살을 맞게 된 것이 자랑스럽다” 서른은 모든 문장 성분을 제대로 갖춘 완결된 문장이다. 마음에 단물이 고이고 향기가 그윽해지며 때로는 곱게 단풍이 드는 나이, 조용히 떨어지는 꽃잎에도 잔잔한 파문으로 대답하는 호수의 수면 같은 나이, 그것이 서른 살이다. 서른 살은 고매한 철학보다 유행가의 가사가 때로는 진리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는 나이다.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었고 신선들도 잃고 싶지 않았던 그 영원한 서른 살. 나는 지금 두 번째 서른 살을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