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5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성령강림주일 * 홍지훈 목사
요한복음 14: 19-21
사랑의 힘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듯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당신과 나 둘이서 근심을 함께 나누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죠. 그렇게 당신과 내가 나누는 고통은 견뎌내기가 훨씬 가벼웠었죠. 내가 근심할 땐 당신이 날 위로하고, 당신이 슬퍼하면 나도 울었죠. 당신의 슬픔에. 내 인생의 기쁨인 당신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요. 하나님이 당신을 지키시고 내 곁에 있게 하소서. 우리 둘을 지키고 보호하여 주소서.”
이 내용은 카알 프리드리히 헤로세(Karl Friedrich Herrosee, 1764-1821)라는 독일 시인이 1795년에 쓴 <절절한 사랑>(Zärtliche Liebe, 섬세한, 부드러운)이라는 시입니다. 헤로세 시인은 사실 목사님이었습니다. 프랑스 개신교인 위그노 신앙을 가지고 독일 베를린 태어나서, 구동독의 오더 강가에 위치한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드레스덴과 베를린 등지에서 목회하였던 분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찬양시를 몇 개 남겼습니다. 그래서 이 시는 남녀 간의 사랑을 찬양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깊은 사랑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그다지 대단 할 것도 없어 보이는 <절절한 사랑>이라는 시가 이렇게 우리의 귀에 소개될 수 있는 이유는 1803년에 이 시를 가사로 곡을 쓴 사람 때문입니다. 바로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입니다.
베토벤이 이 시에 곡을 붙이면서 이 가곡의 제목이 <Ich liebe Dich>로 바뀌어서 전해졌습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등장한 노래여서 아마 교우 여러분들 중에는 이 가곡을 애창곡으로 삼았던 분도 계실 것입니다.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듯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당신과 나 둘이서 근심을 함께 나누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죠. 그렇게 당신과 내가 나누는 고통은 견뎌내기가 훨씬 가벼웠었죠. 내가 근심할 땐 당신이 날 위로하고, 당신이 슬퍼하면 나도 울었죠. 당신의 슬픔에. 내 인생의 기쁨인 당신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요. 하나님이 당신을 지키시고 내 곁에 있게 하소서. 우리 둘을 지키고 보호하여 주소서.”
구약성서 가운에 “아가서”라는 성경이 있습니다. 한자로 “바르다, 우아하다”라는 의미인 초오 아(雅)를 사용해서 “최고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영어로는 Song of Songs이고 독일어로는 Hoheslied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남녀 간의 사랑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아가서의 정통성을 의심한 사람들이 역사 속에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남녀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비유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제자의 관계를 사랑하는 사이로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주 오래전 저는 신학석사공부를 하는 동안에, 학비에 좀 보탤 요량으로 아가서 주석을 번역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가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가서를 맡은 것은 전체 성경주석시리즈 중에 남은 것이 그것 밖에 없어서였지만, 번역하면서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히브리 문학 작품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리고 그 신학적 의미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절절한 사랑> 역시 남녀 간의 사랑의 아름다움 속에 더 깊은 의미를 담았습니다. 좋을 때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근심, 슬픔, 그리고 기쁨도 같이 나누는 것이 사랑이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인 요한복음 14장은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어록을 모은 내용인데, 핵심은 예수께서 가시고 나면 성령을 보내준다는 것입니다. 성경 여기저기에서 성령에 관한 말씀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모아서 신학자들은 성령을 정의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성령이란 하나님의 영인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 신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성령의 사역으로 일어나는 일이 어떤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전서 12-14장을 기록하면서 성령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것을 “성령의 은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하면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동반되는데, 말씀, 치유, 기적, 예언, 영분별, 방언, 방언통역 등등이 열거되지요. 그런데 바울이 결론으로 말하는 성령의 은사 중 최고인 동시에 가장 기본인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말할 때 사랑을 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을 보겠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핵심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면 된다고 합니다. 바울도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율법주의에서 돌아서서 복음을 붙잡으라고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율법준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속에 들어있는 예수의 가르침 즉, 복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의 외적인 현상만 바라보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성령의 은사의 핵심인 “사랑”이 그들 속에 있는지 따져 물었던 것입니다. 만일 진정한 사랑이 그들 사이에 없다면, 온갖 성령의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닌 울리는 꽹과리와 같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설교 제목이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힘을 믿고 살고 있을까요? 진정한 사랑을 하는데 최대의 걸림돌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고받기”입니다. 내가 사랑한 만큼 반드시 돌려받겠다는 거래의 마음이나, 상대방이 내가 준 사랑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의심이 최대의 적입니다. 그런데 이 최대의 적은 평생 우리 마음을 떠나지 않고 괴롭힙니다. 우리의 모든 관계 속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신앙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준만큼 받으려는 마음이 너무 강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첫 번째 현상은 나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 보일 때입니다. 두 번째 현상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더 많은 하나님의 축복받기를 계산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것들이 “주고받기”의 전형적인 경우입니다. 세 번째의 경우는 “사랑의 방향”을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마치 물과 같아서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경향이 강합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려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나를 사랑하신 분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꼭 받아야할 만큼 사랑에 굶주린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저는 성령의 사역을 사랑으로 표현한 요한복음과, 성령의 은사 중 최고요 기본이 사랑이라는 바울의 말씀 속에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즉, 성령의 힘으로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진정으로 느껴본 사람은 이제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성령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만 보았습니다. 초현실적인 일만이 성령의 증거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다르게 말합니다. 성령의 기본은 사랑이고, 성령은 서로 사랑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거짓 사랑이 판치는 세상에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실천하게 만드는 능력이 성령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이 생기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서, 우리에게 주님을 드러내실 때에 가능합니다. 내가 사랑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사랑이 실천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눈을 뜰 때, 우리에게도 사랑하게 하는 힘이 생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고 성령의 은사입니다.
교우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2000년 전 오순절에 경험한 성령강림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날 사도 베드로가 했던 설교가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그의 설교는 예수의 부활승천 후에 지도자를 여읜 것 같은 슬픔의 공동체를 성령으로 일으켜 세우는 설교였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에게도 남겨진 것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가르침을 우리가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일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사랑의 공동체, 평화의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이란 개인적인 사랑과 더불어 공동체 안의 사랑도 중요하며, 온 세상을 향한 사랑도 중요합니다. 이 모든 사랑의 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오셔서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셨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안에 예수는 살아계셔서, 나를 사랑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제 예수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흘러넘쳐서, 사랑이 절실한 곳에 충만하게 되는 그날까지 사랑의 힘을 믿고 실천하는 평화목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