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여름날 번개 치는 것처럼 느닷없이 발발한 난이 아니다. 그 징조가 무려 세 번이나 있었다. 임진왜란 82년 전인 1510년(중종 5년)의 삼포왜란이 있었고, 48년 전인 1544년(중종 39년)의 사량진왜란이 있었는 데 이번에 또 왜란이 일어났다. 어떤 사건이었을까?
강진 전라 병영성은 조선 제3대 태종 17년(1417년)에 축조된 성으로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라도 53주 6진을 총괄하는 육군의 총 지휘부였다. 이런 부대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불에 탔었고 그 이듬해인 1895년에 폐영되었다.
이것 말고 또 다른 기록은 없을까? 인터넷을 뒤지다가 ‘알아야 할, 지켜야 할 문화재’란 주제의 글을 찾았다. 거기에서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元績)이 을묘왜변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라는 것과 ‘원균, 곽재우, 이순신도 병영성의 병마절도사였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을묘왜변은 어떤 사건일까?
을묘왜변(乙卯倭變)은 임진왜란 37년 전인 1555년(명종 10년)에 일어났다. 대마도 등지의 왜인들이 배 70여 척에 분승하여 전라도 영암의 달량포(전남 해남군 북평면 남창(南倉)리)와 이포에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한 사건이다.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元績, ?~1555)은 장흥 부사 한온(韓薀),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을 동원하여 출전했다. 그런데 ‘성은 포위당하고, 식량은 떨어졌다.’라고 한다. 전쟁을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을까? 원적은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기보다는 ‘군민을 살린다.’라는 구실로 ‘군사들의 의립(衣笠, 옷과 삿갓)을 벗게’ 했다. 즉 무장해제했다는 말이다. 어처구니없는 대처다. 그 결과 지휘관 셋이 모조리 살해당하였고, 부대는 궤멸했다. 이 한심스러운 상황에 대하여 역사는 변명으로 일관한다.
“남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는 데 중앙의 군대가 파견되어야 할 정도로 당시 조선군은 병력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고, 왜구를 단속할 함선의 수 또한 많지 않아 왜구 퇴치에 어려움이 있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 이하 지방관의 무능함을 나무라는 따끔한 질책으로 들린다.
을묘왜란 이전에도 왜인의 침략이 있었다. 1510년 삼포왜란과 1544년 사량진왜란 등 두 번이나 된다. 그때 조정에서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당시 조선을 다스리는 왕은 제13대 명종이다. 제12대 인종이 재임 8개월 만에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인데 역사는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명종이 어린 나이(12세)로 왕위에 오르자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했다. ‘타고난 자질이 영명(英明)하고 성도(聖度)가 강정(剛正)’하며, ‘규문(閨門)이 법도가 있고 내정(內庭)이 엄숙’했던 문정왕후는 소윤 일파와 더불어 정국을 이끌어 감에 있어서 정사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가차 없이 내치는 등 단호한 면모를 보였다. 명종은 명색이 왕이었지만 모후의 그늘에 가려,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8년 만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 친정하게 된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대신들은 어떠했는가? 제12대 인종의 외척 윤임 일파의 대윤(大尹)과 제13대 명종의 외척 윤원형 일파의 소윤(小尹) 사이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암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리하여 1545년(명종 즉위년)에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사량진왜란이 일어난 그 이듬해이다. 그뿐만 아니라 을묘왜변 이후인 1547년(명종 2년)의 양재역 벽서사건(정미사화), 1549년(명종 4년)의 이홍윤(李洪胤) 역모 사건(이홍남 고변 사건) 등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으로 날을 지새웠다.
이러는 사이에 일본이 쳐들어왔다.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이 그것이다. 광주전남 충․의사 현창회의 자료에 따르면 이때 희생된 호남지역의 충․의사만 1,402위라고 한다. 그 피해가 얼마나 컸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조선의 병력이 얼마 되지 않은’ 것과 ‘함선의 수가 부족한’ 것 등이 을묘왜변의 참패 원인이다. 나라의 지도자는 그 원인을 겸허하게 따져야 한다.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내부 결속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침략 근성을 드러내고 있는 저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줄 수 있고, 철저하게 응징할 수 있고, ‘건들면 안 되겠구나.’ 하는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이게 바로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병영성의 병마절도사였던 이순신 장군의 말이 생각난다. 명량 해전을 앞두고 선조에게 올린 이순신의 장계가 가슴을 뛰게 한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은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민초에게도 할 일이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각자의 맡은 바 임무에 충성하는 것이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성경 말씀처럼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임무를 감당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600여 년 전, 태종의 명을 받아 병영성을 쌓으며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려 했던 병영성의 초대 병마절도사 마천목 장군의 충성심을 본받는 길이 된다.
삼포왜란, 시량진왜란 그리고 을묘왜변 등은 임진왜란의 전조 징조였다. 그러나 조선의 정부에서는 대비하지 않았다. 조정의 대신들은 권력다툼으로 일관했다. 이렇게 하는 경우 나라는 안정될 수 없고, 그것이 심해지면 내우도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