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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40 - 로마를 재통일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만든 테오도시우스 황제!
49대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375년에 급사하자 장남인 그라티아누스가 부친을
이어 로마 제국 서방 황제로 즉위해 서기 375년 11월 ~ 383년 8월 까지 제국의
서부를 통치하는데, 황제는 테오도시우스를 제국 동부를 다스리는 공동 황제로 선임합니다.
나이는 16세에 불과했지만 탁월한 역량을 발휘해 제국 서부의 방위를 굳건히 지켜냈고 통치에서도 준수한
능력을 보여줘 명군이 될만한 자질을 입증했으며, 379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삼촌 발렌스
황제가 전사하자 황제는 에스파냐로 전령을 보내 테오도시우스 1세를 동방 황제로 선임해 안정시켰습니다.
그러나 저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다신교 신자들이 많은 로마 제국 서부에서 기독교 친화 정책을
펼치다가 거센 반발을 야기했고 결국 383년 마그누스 막시무스에게 암살되는데, 1968년
제10회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프랑스 그르노블은 그라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도시가 조성됐습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마리나 세베라의 장남으로 359년 판노니아의
시르미움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딸 플라비아
콘스탄티아와 처음 결혼했고, 부인 사망후 다른 여자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의 탁월한 자질에 찬사를 모으니, 문인들과 교류하며 시를 잘 짓고 철학적 지식을 갖췄으며
웅변술이 뛰어났으며..... 병사들을 잘 대해주고 전술적 능력도 장군들과 비교해 손색이 없었으며,
또 창과 활을 잘 다뤄서 동물을 능숙하게 사냥했고,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으며 성정이 온화했습니다.
375년 11월 부친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에서 급사하니 황제로 추대되었는
데, 판노니아에서는 아쿼티우스와 막시미우스 장군이 그라티아누스의 동생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황제로 추대하자 그라티아누스는 내란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현명하게 대처합니다.
그는 이탈리아반도, 일리리쿰, 북아프리카를 메디올라눔에 자리잡은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영역으로 삼는데
동의했고 자신은 갈리아,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를 맡았는데 그럼에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어리다는
이유로 동생 영역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으니 나이 16세였지만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제국 서방을 장악합니다.
그라티아누스는 라인강을 도하해 갈리아에 쳐들어온 게르만족과 전쟁을 벌여 승전을 거두는 중에 378년초
고트족의 반란으로 곤경에 빠진 발렌스로 부터 구원 요청이 오자 프랑크족 출신 부하 프리게리두스
등에게 선봉대를 맡겨 동방으로 파견해 고트족을 저지하게 한후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뒤따라가기로 합니다.
그런데 라인강 유역 알레만니족이 침공했다는 소식에 군대를 돌려 아르겐타리아 근교에서 프랑크
족과 연합해 알레만니족을 격파했고, 이후 라인강 상류를 건너 알레만니족의 영역으로
진입해 촌락을 불태우고 전사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느라 발렌스를 제때 구원하지는 못했습니다.
378년 8월 9일, 그라티아누스가 구원하러 오는걸 기다리지 않고 고트족과 싸운 발렌스는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병력의 3분의 2가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전사했으니,
그라티아누스는 뒤늦게 발칸반도로 군대를 이동시켰으나 상황은 악화될대로 악화되었습니다.
다뉴브강 남부는 고트족 무리들에게 파괴되었고 제국의 권위와 군사적 위신은 땅바닥에 떨어졌으며,
그가 갈리아를 떠난 직후 게르만 족들이 또다시 갈리아 침략을 계획하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지니 그라티아누스는 혼자 이 난국을 감당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특단의 조치를 내립니다.
서기 379년 1월, 그라티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 장군을 동료 황제로 지명했으니
이는 다소 뜻밖이었는데, 테오도시우스의 부친 대 테오도시우스는
그라티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했을 때 반역자로 낙인 찍혀 처형되었기 때문 입니다.
대 테오도시우스는 북아프리카에서 군사적으로 성공했지만 행정장관은 그가 적과 내통한다고 황제에게
거짓 보고를 했는데,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갑자기 죽고 16세에 황제기 된
그라티아누스는 경험이 없었던지라 조사해 보지도 않고 역전의 용장에게 사형을 선고해 버렸던 것입니다!
2년후 그라티아누스는 모에시아 총독 시절 테오도시우스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고 로마군 내
테오도시우스의 명망을 고려해 그 만이 혼란에 빠진 동방을 맡을 적임자라고 판단
했으니, 그라티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와 만나 그의 아버지를 복권시킨후 동료 황제로 지명합니다.
테오도시우스는 서기 379년 1월 19일 도나우강 방위선인 시르미움에서 장병들에게 소개됨과 동시에
황제 즉위식 같은건 없었던 시절이라 바로 황제 임무를 시작했는데, 아직 기독교화 되기전이라
통치권은 신이 내려주는게 아니라 유권자인 시민이 통치를 황제에게 위임하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에게 뜻밖의 기회를 준 그라티아누스에게 보답했으니, 고트족과 일전을 벌여 미친듯이
날뛰던 그들을 저지했고 381년 고트족의 왕 아타나리크와 평화협정을 체결한후 트라키아 속주에
고트족을 이주시켰으며, 그라티아누스는 라인강 전선 경비를 강화했고 제국을 침략한 적들을 격파했습니다.
시인 아우소니우스는.... “전쟁과 문예에 능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명성을 거두셨으니, 두 겹의 제관을
쓰실 자격이 있다. 뮤즈 여신들의 도움으로 전쟁의 위협을 가라앉히셨고, 아폴로신의 도움으로
게타이족의 횡포를 억누를수 있었다. 약탈을 일삼는 사르마티아족 한 가운데서, 막사에서 보낸
수많은 전쟁의 경험과 휴식을 모르는 고귀한 손은 무기를 바꾸어 쥐시면서도 아름다운 시를 구상하신다.”
테오도시우스가 동방을 안정시키는 동안 그라티아누스는 라인강을 안정시킨후 종교 문제에서 미신적 관습을
금지하고 마녀 및 마술사들을 처형한다는 칙령을 반포했고 아리우스파를 비롯 이단 종파들을 금지했으며
메디올라눔 주교 암브로시우스 영향을 받아 로마의 다신교 숭배를 억제하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테오도시우스는 기독교도가 아니었지만 중병에 걸려 누웠을때 찾아온 테살로니키 주교에게 세례받았는데,
그리스인들은 쓸쓸한 저승의 존재르를 믿었고 로마인들은 죽으면 두 천사가 내려와 양쪽에서 부축해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으니 지옥은 기독교 때문에 처음 알게된 생소한 개념이긴 했지만 공포심은 컸습니다.
379년에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오랜 세월 로마의 신들을 모시던 최고 신관, 즉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에서 물러났으니 역대 로마 황제 중에 처음으로 거부한 것이며, 원로원의
반발을 무릅쓰고 승리의 제단 (Altar of Victory) 을 다시 폐쇄했으며 베스타 신전을 해체합니다.
382년 그라티아누스는 이교도 사제가 재산을 물려주는걸 금지했고 또 사제들의 특권과 면책권을 박탈했으며
이교도 사원들과 성소들은 몰수되고 수입은 황실 재산으로 전용된다고 선언하니 오랜세월 로마 다신교를
신봉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원로원은 승리 제단을 재건하고 베스타 신전을 복구시켜 달라고 청원합니다.
일부 기독교 관료들도 제국의 분란을 염려해 황제를 만류했지만 그라티아누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교회법을 따르지 않는 관료들을 처형한다는 칙령을 반포하기까지 했으니 이러한
급진적인 종교 정책은 다신교 신봉자들을 격분시켰고 자신의 명줄을 옥죄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에 따르면, 그라티아누스는 380년 무렵부터 타락했다고 하는
데.... 자신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신료들이 정치적 알력 끝에 축출된 뒤 간신배들에게
둘러싸인채 향락을 일삼았고, 사냥을 탐닉해 하루종일 사냥에 몰두하며 정력을 낭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냥은 고대 사회에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니라 군사훈련을 병행하고 친위 세력의 단합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니.... 당시 제국의 내정이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로 볼 때 그라티아누스가 정사를
게을리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급진적인 종교 정책으로 불만을 품은 로마군을 통제하지 못한건 분명합니다.
역사학자들은 그라티아누스가 방탕해져 군대를 통제하지 못해 반란이 일어났다기 보다는
친위 세력과 궁정 인사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기존의 장군들과 원로원
귀족들에게 충분한 포상과 후원을 제공하지 못해 불만을 키웠다는 것이 맞다고 지적합니다.
고대 사료들은 그가 알란족과 같은 이란계 기병들을 친위대로 중용하고 이들과 복장과 무기를
공유하며 사냥을 즐긴 점을 강조하는데, 이는 로마 병사들에게 황제가
자신들 보다 야만인 용병을 더 신뢰한다는 인상을 주었고 군 내부 불만을 크게 증폭시킵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 처럼 장기간 수도를 떠나 갈리아에서 생활하며 군사
활동에 집중했음에도, 아버지와는 달리 병사들에게 충분한 관심과
보상을 주지 못했고 궁정 정치에서도 경험 부족으로 인사 관리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영향을 받아 니케아파 기독교를 적극 후원하고, 국가가
전통적으로 유지하던 이교 제사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단했으며, 원로원에 있던 승리의 제단을
철거하는등 전통적 다신교 신앙을 고수하던 일부 원로원 귀족들의 반감을 샀고 군대의 충성심을 잃게 됩니다.
결국 383년에 다신교 신봉자들이 많았던 브리타니아 주둔군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그들은 마그누스 막시무스
를 황제로 옹립하고 갈리아로 침입하자...... 그라티아누스는 군대를 소집해 루테티아 파리시오룸
인근에서 반란군과 맞붙었는데, 그라티아누스는 마그누스를 제압할수 있을만한 병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르베르인 기병대등 여러 부대가 그를 배신하고 막시무스에게 돌아섰고, 결국 그라티아누스
는 300여명의 기병대만 이끌고 루그두눔으로 도주했는데, 루그두눔의 총독은 그를 매우
극진하게 대접했지만 막시무스가 보낸 암살자들과 협상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그라티아누스를 넘기는데 동의하니... 383년 8월 25일 루그두눔에서 암살당했는데 나이 24세였습니다.
그라티아누스가 선임한 테오도시우스는 로마 제국 50대 황제이자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로 대제로도
불리는데, 테오도시우스는 그리스어로 하느님이 (ο Θεος), 준 (δώ) 사람, 즉 하느님이 내린 사람이라는
뜻이니 스페인의 키우카(코카 Coca)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 최측근 무장이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1세 일가는 히스파니아 토착민으로 트라야누스 황제 처럼 조상이 이탈리아에서 이주해온 로마인
은 아니며..... 스페인의 카우카와 이탈리카 일대 토지들도 부친이 군에 복무하면서 받은 봉토였다고 합니다.
테오도시우스1세 집안은 부친 시절에 일어선 제국의 신흥 가문이며 대제도 전형적인 직업군인 장교였으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않았고, 성장과정 역시 지주나 유지 일가 자제들과 차이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복무한 부대를 돌아다니며 군 업무를 배웠으니 혈통과 고향이 이베리아반도일 뿐입니다.
368년 브리타니아가 색슨족과 스콧족등 대대적인 침공으로 위기에 처하자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장군과 함께 출전해, 약관의 나이에 공을 세우고 374년에 모이시아의 장관(Dux)
으로 부임해 도나우강 북쪽의 고트족과 반달족을 무마하는등, 순조로운
커리어를 쌓았지만 아버지가 반역죄 누명을 쓰고 처형되니 군에서 물러나 스페인으로 돌아갑니다.
378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동로마제국 황제 발렌스가 고트족에 대패하고 전사하자, 서로마 제국을
지키는데도 힘이 부쳤던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테오도시우스를 동로마 황제로 임명하니 모이시아
장관 시절 보여주었던 군사적 역량에, 로마군 내에 테오도시우스 일가가 명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테오도시우스는 붕괴직전의 동로마제국 야전군 재편성에 성공했고 야만족들을 이이제이 전술로 싸우게 만든후
상당한 수효를 포이데라티로 만들어 아군으로 부렸으며, 사산조와 뜨거운 감자 아르메니아 문제를 해결하니
즉 아르메니아에서 친로마파가 친사산조파에게 탄압받아 구원 요청 때도 묵살하는등 뛰어난 판단력을 보입니다.
380년까지 고트족을 비롯 게르만족과 전쟁에서 전과를 거두며 381년 고트족의 대왕 아타나리크
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트라키아 속주에 고트족을 이주시키니 동로마군에 고트족 출신
장군이 대거 기용되는데, 후일 "로마 약탈" 을 진두 지휘하는 서고트 족의 대왕 알라리크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동쪽 사산조 페르시아와 대립하는등 고트족에만 집중할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383년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푸르 3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제는
안정된 통치를 할수 있을것 같았는데..... 서로마 제국 황제 그라티아누스가
브리타니아의 군사령관 마그누스 막시무스에게 살해당하면서 다시 내전에 개입할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때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마그누스 막시무스와 타협해 그에게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의 영유를 인정하고, 대신 그라티아누스의 동생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다스릴수 있도록 보장하는 선에서 개입을 마무리합니다.
이후 387년에 동고트족을 크게 격파하면서 정세가 안정되고,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이탈리아를 침공
하면서 테오도시우스는 거병해, 388년 사바강에서 막시무스를 격파하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서로마 제국 황제로 추대했는데....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끝내 무력한 황제로 삶을
마쳤기 때문에 395년까지 7년간은 테오도시우스가 두 로마 제국을 함께 다스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테오도시우스는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는데 391년 행정법으로 상세한 내용을
규정했으니 로마 제국은 명실상부한 그리스도교 제국으로 변모하는데, 비그리스도인들은 공직 진출이
금지되었고 이단 종파의 탄압까지 하니... 이교도들의 불만이 다시 내전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392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테오도시우스에게 명받아 갈리아 방위를 맡겼던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
장군에게 살해되자 테오도시우스는 개입하는데, 아르보가스트는 이에 맞서 그리스도인을
가장한 이교도이자 문법 및 수사학 교수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그리스도교 탄압을 천명합니다.
대립 구도는 394년 9월 6일,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테오도시우스의 동로마 제국군이 반란군을 최종적으로
궤멸시키면서 끝났는데..... 또한 반란 진압에는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도움도 한몫 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내치에서도 율리아누스 이래로 발렌스도 계승했던 감세 정책을 계속 밀어
붙이는 한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가격통제 정책 등을 폐지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얻는 등, 당시로서는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쳐 경제 상태를 크게 호전시킵니다.
다만 일선 부대 지휘관으로서 근무할때 부대 관리나 군정, 군수, 보급 측면에서 대단한 능력을
보여 승진하긴 했지만, 소규모 부대 지휘관으로서 일선 지휘할때 부터 두각을
드러낸 명장이었던 카이사르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비교하면..... 군재는 한참 못미쳤습니다.
안티오키아 대주교가 세 사람이나 나와 치열하게 대립하자 테오도시우스가 결론을 내려 판결
을 내렸는데, 셋을 따르는 신자들 중 3분의 2는 당연히 테오도시우스의 판단에 불만을
품었고.... 그런 와중에 고트족과 전쟁 및 평화 비용으로 세금까지 늘어나자 불만이 증가합니다.
고트족과 유럽 전쟁의 비용을 안티오크 및 아시아 지역이 물었으니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게 당연
했는데, 즉위 10주년 기념 축제에 자발적인 헌금을 빙자한 특별세금이 한차례
더 부과되자 백성들이 관아에 탄원하니 범죄로 대하는 관리들의 태도에 분노가
폭발한 안티오키아인들은 황제 동상을 산산조각내 거리오 끌고 다녔지만 폭동은 결국 진압됩니다.
테오도시우스는 안티오키아 지위를 격하시키면서 토지, 특권, 세입 권리를 박탈하고, 고전적 그리스- 로마
도시문화의 상징인 목욕탕과 원형경기장, 극장을 폐쇄,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고문과 함께 심문했으며
재산을 경매에 붙였는데.... 다만 안티오키아의 플라비우스가 찾아와 자비를 간청하자 사면령을 내립니다.
이에 비하여 테살로니카에서는 정 반대의 잔인무도한 행동을 보여줬는데, 원인은 보테리크
라는 장군이었으니 그는 아름다운 미소년 노예를 소유했는데.... 콜로세움에서
전차를 모는 전사 하나가 이 미소년 노예를 건드리니 보테리크는 그자를 투옥하고 심문합니다.
그런데 이 전사가 스포츠 스타나 다름없었던지라 폭동이 일어났으니.... 정확히는 여러 차례 불만
이 쌓여왔다가 이 일이 빌미가 되어 폭동이 일어난 것인데, 이탈리아 전쟁으로 병력이
빠진 상황인지라, 보테리크와 부관들은 민중에게 살해당하고 토막나 온 거리에 끌려다녔습니다.
테오도시우스가 판결을 내렸는데 황제는 군중들에게 기념공연을 열어주겠다며 경기장에 모이게 하고는
거기서 사람들을 학살했는데, 두 아들 중 하나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 어느 상인이 있었지만
병사는 두 아이를 모두 죽였는데.... 이유를 물어보자 병사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답니다.
테살로니키 학살의 참상을 듣고 대노한 메디올라눔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메디올라눔을 방문해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러 가던 황제를 내쫓아버리자, 테오도시우스 1세는 남루한 옷을 입은채로
무릎을 꿇고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용서를 구했는데 후대의 카노사의 굴욕에 비견하기에는 무리 입니다.
그 직후인 395년 1월, 테오도시우스는 지병인 수종으로 50세도 안돼 사망하니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
와 호노리우스가 승계했지만 무능하기 이를데 없는 인물이라 권신들의 시대를 맞았는데, 황제의
질녀와 결혼으로 맺어진 혈연에, 실병력을 부릴수 있는 최고 사령관 (magister militum) 이라는
점에서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장군이 선두주자로 나갔고, 한동안 서로마에서는 그의 독무대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의 두 아들이 서방 황제와 동방 황제로 분할 통치제를 이어
나갔는데.... 후일 서방 로마가 오도아케르가 이끄는 게르만족 용병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때를 제국의 최종 분할로 여겨집니다.
물론 당대에는 최종 분할로 여기지 않고 "과거에 그래왔던 것 처럼" 아르카디우스가 동방 구역,
호노리우스가 서방 구역 담당으로 분담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으며 테오도시우스도
그걸 상정해서 유언하였고 그게 최종 분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395년에 눈을 감았습니다.
군사와 내치, 외교에서 두루두루 업적을 보였으며 통일 로마 제국의 실질적 마지막 황제로, 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사후 이런 황제를 다시 가지려면 마르키아누스(450년부터 457년까지 재위한 동로마
황제로 훈족에게 바치던 연공을 중단하고 군사력 증강에 힘썼다) 가 즉위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합니다.
테오도시우스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이교도를 탄압한 것인데, 군사와
내정 면에서 보통 이상의 뛰어난 통치력을 발휘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적극적으로 자기 의사를
관철한 유능한 군인 황제이긴 했으나 대제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바로 그리스도교 국교화 덕분입니다.
"3대제" 로 불리는 콘스탄티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중에서 덜 알려진 인물이고 업적도
두 황제들에 비해 못하지만, 테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티누스 처럼 처와 아들등 가족과 신하들을
죽이지도 않았고 유스티니아누스처럼 재정 붕괴나 재정 악화도 없는데다가 직언하는 신하들에게 관대했습니다.
반란 진압을 하는중에 자기가 박살낸 서로마 제국의 야전군의 재편성과 재건은 끝내 해내지 못한 점,
그의 두 아들 호노리우스- 아르카디우스 형제가 권력도 제대로 행사할 능력이 없는 암군
이었다는 점은 큰 그늘이지만 설마 자기도 한창때 병이 들어 죽을 것까지 예상할수는 없었다고 봅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명군으로 평가받으면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 결정적 이유는 그가 박살낸 서로마
야전군을 회복시키지 못한 것인데, 내전중에 치러진 프리기두스 전투는 서방 제국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으니 전투 결과로 헤르쿨리아니 야전군을 비롯한 서방의 정예부대가 소멸했기 때문입니다.
제국 서방이 만성적 경제 침체,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감소, 병역 기피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정예 야전군의 소멸은 뼈아픈 결과였으니, 테오도시우스 1세도 내전이 끝나고 제국 서방을 직접
통치하면서 서로마 야전군을 재건하려 했지만 수습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병에 걸려 사망해 버린 것입니다.
그는 후사를 맡긴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및 후대의 서방 황제들에게 큰 짐을 안겨주었고,
조선이 임진왜란때 황폐화 되어 대폭 줄어든 논과 밭등 경지 면적을 나라가
망할 때 까지도 회복하지 못한 것 처럼 서로마는 끝내 멸망할 때까지 극복하지 못합니다.
테오도시우스 사망후 11년 뒤인 406년 라다가이수스가 부족민 10만명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스틸리코가 리미타네이 부대와 노예 해방까지 시켜가며 박박 긁어모은 서로마 중앙군의 숫자는
겨우 15,000명에 불과했으니, 프리기두스 전투가 서로마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알만합니다.
고구려 연개소문의 못난 아들 남생과 남건, 남산 처럼 아들 호노리우스- 아르카디우스 형제를 제대로
된 후계자로 양성하지 못했던 것도 테오도시우스의 명백한 실책이니, 형인
아르카디우스는 18살이었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두 형제는 "호부견자" 라고 극도로 무능했습니다.
오히려 서로 종교적 갈등으로 으르렁거리느라 아르카디우스가 죽을 때까지 동- 서로마의 협동은 완전히
마비되었는데, 아르카디우스가 오래 살지 못하고, 아들인 후계자 테오도시우스 2세가 아르카디우스
와는 결이 다른 군주인 데다가 제위에 오래 있었다는 건 로마 입장에서 그나마 운이 좋은 일이었습니다.
손자의 업적인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나 테오도시우스 법전이 이 사람의 업적으로 오인되며, 신탁으로 유명한
델포이 신전을 폐쇄한 인물이기도 한데 델포이 신전의 예언자는 이때에 '모든 것이 끝났다' 고 선언했으니
신전 폐쇄 5년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었고 15년후 서고트족 알라리크에 의해 “로마 약탈” 이 일어납니다.
테오도시우스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웠다는 얘기도 있으니 광신적인 그리스도교 신자
들이 4세기 말에 파괴했을 거라고 보며 혹은 642년에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한 칼리프
우마르가 파괴했다고도 하고..... 또는 도서관 위치가 호수와 바다 사이에 있어
끊임없이 관리해 주지 않으면, 습기 때문에 파피루스로 된 문서가 쉽게 상했다고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