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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쓰는가
반이정 미술평론가
미술평론의 어느 길
시각 문화 > 동시대 미술
이미지 비평(가)이란 신조어가 문화계에 유행한 적이 있다. 아직 사장되지 않은 표현과 칭호지만, 인지도나 노출 빈도가 낮아서 굳건히 자리 잡은 표현은 아니다. 이미지 비평의 서구적 어원(영어)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시각 매체 기반의 소통체계에 관한 학제들, 즉 비디오 게임 만화 영화 인터넷 같은 뉴미디어를 탐구하는 문화연구와 연륜이 이보다 훨씬 긴 미술사 따위를 통합해서 다종의 시각 정보를 대등하게 다루려는 시각문화연구(Visual Culture Studies)에서 단서를 얻은 파생어처럼 보인다.
시각문화연구는 무릇 타당한 방법론이지만, 제도권 미술을 시각문화연구 혹은 이미지 비평의 대상 가운데 하나로 종속시키는 입장은 기존 미술인에겐 불편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대중문화보다 미술을 우월하게 바라보는 일반인의 인식도 클 게 분명하다.
동시대 미술의 수요는 적을 뿐 아니라 한정되어 있다. 바로 그런 대상을 언어로 풀이하는 일이 내 직업이다. 동시대 미술의 현주소는 동시대의 삶이나 교양과 하등 무관한 채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동시대 미술이 연루되어 대서특필되는 기사는 이권을 노리고 미술품을 뇌물로 이용한 범죄이거나, 비리에 연루된 미술인 보도거나, 근대기 화가의 위작 소송 등 이슈의 선정성 때문에 주목받는 때 말곤 빈도가 매우 낮다.
실재적 삶에서 유리된 동시대 미술의 존재감은, 외부세계로부터 스스로 고립시켜 안정적 지위를 보장받는 생존술이라는 역설이 자리한다. 제도 미술은 관의 지원으로 육성되고 존립한다. 거의 모든 대학이 미술학과를 개설했지만 정작 미학에서 수련한 이미지 교육이 졸업 후 어떻게 쓰일지 재학생 대부분은 알지 못한 채 4년을 다닌다. 국고지원으로 운영되는 초대형 미술 비엔날레가 한국에만 무려 3개 이상인데, 이런 미술 행사장은 교양 교육의 전당인양 소개되며 단체학생을 인솔한 일선 중고교의 격년 단위 방문지일 뿐, 자발적 참관의 동기부여를 주진 못한다.
동시대 미술의 규모와 실체는 제도적으로 보장받고 있지만, 큰 사이즈에 비해 동시대인과 교감할 여지는 작고, 외계의 호기심을 이끌지도 못한다. 따라서 미술인인 내 눈에 초대형 미술행사는 불가피한 행정이 허용한 웅장한 헛짓마냥 보이기도 한다. 실재적 삶과 교양에 영향력과 반응 모두에서 무력한 분야를 논평하는 나로선 탈출구가 필요했다.
모두에서 설명한 이미지 비평에 버금가는 작업을 미술 비평과 병행한 시점은 2005년 무렵이다. 제도 예술이 아닌 일상의 시각적 만화경을 논평 대상으로 삼았는데, 2005년부터 2007년까지 2년여 연재한 <사물보기>다. 부족함이 큰 이 연재에 시각문화연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 필요는 없다. 다만 일반적 미술평론가의 시선이 현재적 삶에서 유리된 백색 전시실(정방형 백색 멸균 공간이라는 자조적 의미로 ‘화이트 큐브’라고 업계에선 칭한다)에 고정되기 마련인데, 그런 예속된 관점에게 벗어난 계기였던 점에 의미를 두고 있다.
- 2005년 <사물보기> 연재 첫 회분. 여자 아이가 유독 분홍색을 선호하는 이유를 다뤘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8316
- 2007년 종료한 <사물보기> 마지막 연재물. 문양의 스테디셀러, 줄무늬를 다룬 글.
http://www.hani.co.kr/section-021122000/2007/03/021122000200703150651039.html
글 짓는 이의 형편
미술에 말과 글로 종사하는 이는 생계를 어떻게 유지할지 궁금할 것 같다. 선택지는 크게 세 종류다. 비평, 전시 기획, 강연. 나는 이 가운데 비평과 강연을 도맡았고 전시 기획은 거의 등한시 한 편이다. 그러나 이론 전공자의 졸업 후 희망은 비평이나 강의처럼 언어 서비스가 아니라, 전시 기획이 대세다. 그도 그럴 게 전시기획은 볼거리(미술품)를 대중 앞에 쏟아놓는 엔터테인먼트의 효과가 있다. 나는 이제껏 세 차례 전시 기획에 관여한 적이 있다. 개막한 전시회장를 바라보며 느낄 기획자의 뿌듯함이 무언지 경험할 수 있었다. 고요히 흐르는 강물이 비평이라면, 키 낮은 파도를 거느린 바다가 전시 기획에 해당될 것이다.
글로 사는 전업 필자의 대우도 궁금할 것 같다. 강연과 원고 집필로 산 10년이 내 안에 형성시킨 직업관은 소속 있는 직장인과 상이하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에 익숙하다. ‘일한 만큼 받는다’가 몸에 배어 있다. 고료와 강연료는 주최마다 편차가 있다. 하지만 말하고 쓴 대로 사전에 양자 간 합의한 액수를 지불 받는 점에선 같다. 사무실에 갇혀 반나절만 한가히 보내건, 야근에 떠밀리건 매달 손에 쥐는 월급이 동일한 인생과는 직업관과 가치관이 같을 턱이 없다. 더러 고료를 떼어먹는 저질 미술잡지도 ‘현존’한다. 무려 3년 치 수백만 원대 고료를 받지 못한 적도 있다(잡지사 대표를 면담한 후에야 겨우 돌려받았다). 해서 재정적으로 불안정하고 윤리적으로 파탄 난 일부 미술잡지와는 거리를 두는 대신, 일반적 독자와 필자 사이를 매개하는 주간지나 일간지에 주로 글을 쓰기로 했다.
박봉과 부당한 처우에도 필자가 누릴 자부심은 있을까? 다른 분야의 노동 결과물에 비해, 언어가 도구인 필자는 투명도 높은 자기 고백을 결과물에 투영할 공산이 높다. 장점이기도 단점이기도 하다. 가령 아이폰의 외형과 기능으로부터 제품 디자이너의 성향을 가늠할 순 없다. 야구선수의 스윙 자세로부터 선수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역시 어렵다. 하지만 사유가 언어로 재현된 원고에는 필자의 자의식이 담긴다. 이런 성질 때문에 글 쓰는 일은 양극화된 두 종류의 인간형을 깎아 세운다. 신뢰도 높은 강직한 인간과, 언어를 방패삼아 허영심과 위선을 은닉하는 ‘말 다르고 인품 다른’ 이중인격 인간.
필자 이력 : 예술론에서 시론으로
미술 비평과 더불어 제도 미술 바깥의 시각문화까지 다루는 글을 꾸준히 쓰자, 시평(時評) 연재 제안이 들어오더라. 시론을 부탁한 일간지 편집자는 내 전공 관련한 문화 비평을 기대한 것 같다. 그렇지만 부족한 안목이라도 정치 사회 현안을 기고하고 싶었다. 혹은 정치 사회 이슈에 관해 그 방면 칼럼니스트와는 편차가 큰 미학적 시점으로 삽입하고 싶었다. 역부족이었지만 내 바람이 반영된 원고는 2010년 상반기부터 영화 주간지 <씨네21>에 연재 중인 ‘반이정의 예술 판독기’이다. 아래는 관련 연재물이다.
- 일본 쓰나미처럼 현재적 재앙들을 시각문화 연구하듯 성찰한 글이다.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3031&article_id=65613
- 무바라크의 실각을 통해 세계 정치 지도자의 실추와 도상파괴를 연결시켜 본 글.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3031&article_id=65273
- 2010년 6.2 지방 선거운동의 풍경에서 현실 미술의 무력감을 빗대 본 <경향신문> 칼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5311805055&code=990000
미술비평, 시각문화 평론, 거기에 시론까지. 이 셋을 혼합하거나 병행하는 필진은 국내에서 흔치 않다. 순수예술 종사자가 시사 현안을 두고 정치적 언질을 내놓는 걸 한국사회가 불편해해서 일 것이다. 사정이 이리 된 배경에는 전공 분야를 꼭 해당 전공자에게 일임하려는 문화 관행이 우리나라가 유독 강해서다. 이런 완고한 시각이 미술(비평)을 현재적 삶과 격리시키는 부정적 공감대를 발전시킨다. (‘예술 따로 현실 따로’ 같은 강경 이분법을 신봉하는 이들이 꼭 “미술은 원래 어렵다”며 투정한다.)
모든 비평이 그렇듯 미술비평도 미술과 동시대 삶이 어떤 연관을 맺는지 염두에 두고 접근할 때 제대로 보이며, 제대로 말하게 된다. 가까운 예로 키치라는 미학 용어를 들까한다. 싸구려 예술을 칭하는 이 용어는 이발소에 걸린 유화 그림에 빗대어 ‘이발소 그림’과 동격으로 통한다. 하지만 그런 틀에 박힌 정의로는 키치의 존재론과 폐해는 파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발소 그림으로 키치 전체를 규정하는 건 싸구려 예술의 박제화된 정의에 그치기 때문이다.
즉 키치가 어째서 감상자의 미감뿐 아니라 감상자의 삶에 해로운지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다시 말해서 ‘이발소 그림 = 키치’라는 편의적 규정은 삶과 유리된 정의다. 더구나 오늘의 이발소엔 그런 그림이 걸려 있지도 않으며, 이발소를 찾는 동시대 방문객의 수도 예전과 다르다. 키치의 예시를 위해 주변에서 찾기도 힘든 회화 한 점을 지목하는 것보다, 리모컨만 조작하면 볼 수 있는 아침 일일연속극의 스토리 전개의 신파와, 선거 기간 입후보자가 내거는 캐치프레이즈를 예로 드는 편이 적합하다. 방송 가운데 뜬금없이 끼어드는 공익광고야말로 전형적인 키치다. 감정 과잉으로 어떤 구호에 공감을 유도하려는 전술이 바로 키치여서다.
이처럼 일상에 뿌리내린 키치를 예로 들어, 키치의 사악은 현장감 있는 해설을 얻을 수 있다. 키치는 왜 해로울까? 키치를 반복해서 접촉하면 감상자의 미감이 몰 취향해지는 건 물론이지만, 더 큰 위험은 감상자 개인이 싸구려로 전락될 수 있다는 점이다. 비평가 헤르만 브로흐의 지적처럼 키치를 양산하는 주체는 바로 키치인간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키치에 에워싸인 인간 역시 키치로 실추될 수도 있다.
키치예술이 감상자의 미감을 몰 취향하게 타락시키는 건 키치의 작은 위험에 불과하다. 키치가 초래할 가장 험상궂은 위험은 키치에 무감해진 인간이 정치적 판단의 순간에도 싸구려 감수성에 호소하는 키치를 선택하게 되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낡은 정치 구호에 호소하는 감상주의에 쉽게 동요되는 유권자라면 공약을 남발하는 정치인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키치가 초래할 불행은 키치를 선택한 개인을 뛰어 넘어 그가 속한 공동체가 떠안게 된다.
다시 미술비평을 하면서 시평을 병행하는 이유를 정리하면 이렇다. 예술이 삶과 관계하는 국면을 파악하면, 실재 삶과 동떨어진 미술을 신뢰하지 않게 되더라. 더불어 제도 예술을 넘어 삶과 관계하는 시각문화에도 눈뜨게 되어 미술 비평에 예속되지 않는 이미지 비평을 낮은 수준에서 수행하게 되었다.
그 다음 단계는 자연 생의 부조리를 초래하는 대상/현상이 눈에 띄면, 분야 불문하고 비평 주제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시론과 예술론을 병행하게 된 사연이다. 그 해석 능력은 아직 미숙하지만 시론과 예술론이 양립될 때, 양자 모두가 더 잘 보일 수 있다고 본다. 미술, 시각정보, 사회. 이 셋을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하고 대등한 논평 주제로 간주하는 건 자연스런 귀결이다.
타깃 독자층 설정 (광신자에겐 독설을, 중간지대 정서엔 호소를)
예술론에서 시론까지 모든 원고의 설득 대상은 누구여야 할까? 유능한 논객도 정반대편 미감과 정치관의 소유자를 되돌려 앉히긴 불가능에 가깝다. 도발적인 센 글은 통쾌하지만 반대 진영을 오히려 결집시키는 역효과를 낳곤 한다. 이런 경우 집필의 목적은 필자와 뜻을 같이하는 불특정 독자 사이의 연대감 확인 너머엔 아무것도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미술비평가로 등단 후 강도 센 글을 꽤 썼다. 화단에는 낡은 비평 관행이 있는데 반동 심리에서 쓴 것이다. 제도 정치판의 여당 야당처럼, 미술도 당파적/미학적으로 크게 분리되어 있다. 그런 구조는 전시 리뷰에 반영된다. 전시회는 작가와 친분 있는 필자에게 맡기는 관행이 자리 잡았다. 당연히 센 논조의 지적이 도출되지 않는다. 미술잡지마저 전시를 개최한 작가에게 리뷰를 맡길 비평가를 추천받아 청탁한다. 작가를 불편하게 만든 원고 때문에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다.
화단을 지배하는 고요한 적막은 등단 초기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독설을 남발하는 게 능사는 아닌 것 같다. 언제나 설득 상대는 비평 당사자나 그의 추종자가 아니라, 중간에서 길 잃고 우왕좌왕하는 불특정 다수다. 예술론이건 시론이건 마찬가지다. 특정 가치를 종교처럼 숭배하는 집단에게만 독설이 필요하다. 말과 글로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고, 필자와 그들 사이에 화해 가능성도 매우 낮을 경우. 중간지대 정서에 호소하는 센 글을 써야 한다.
예를 들면 연평도 포격 사건과 연예인 현빈의 입대까지 겹치면서, 급기야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까지 해병대를 특종 보도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세속에선 제대한 해병대 집단이 사회에서마저 군기를 잡으려는 문화가 자주 포착되던 터였다. 나는 타협불가의 대상과의 무의미한 대화보단 질타를 결정했다.
- 해병대 공화국(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312126485&code=990000
집필 방향에서 추가로 고민한 게 있다. 대상의 문제만 짚고 넘어갈 게 아니라, 그가 향후 개선될 가능성이 열린 대상이라면 보완책도 나란히 제안하자는 것이다. 당장 돌려세울 순 없더라도 비판 대상과 협의 가능한 중간지대를 마련하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런 보완책의 제시도 글 짓는 이의 몫이므로.
뉴미디어 시대 앞에서
매스 미디어가 정보 흐름을 지배하는 시대에 지면 위에 존재감을 의탁하는 전업 필자의 운명은 어찌 될까. 미디어만 새로 갈아탔을 뿐 내용은 달라질 게 없다는 식으로 가벼이 넘길 문제 같진 않다. 소통의 방향과 품질을 재조정하는 게 뉴미디어의 기능이다. 글과 말이 재현되는 방식이 구조적으로 변하고 있다. 강연과 원고가 재현되는 방식의 변화상은 테드 TED*와 킨들북이 바로미터가 될 만하다.
(*TED: 1984년 창설된 국제 컨퍼런스로, 기술(Techonolgy)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디자인(Design)의 이니셜을 딴 명칭. 인터넷 사이트 ted.com을 통해 세계 지식인들의 창조적 아이디어에 관한 토론을 무료로 방청할 수 있다.)
‘전파할 가치가 있는 생각들’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테드TED 컨퍼런스가 설립된 건 1980년대지만 오늘의 형태로 글로벌 네트워크를 타고 포괄적 강연물의 공유 공간으로 인식된 건 2000년대 중반 이후이며, 개인 정보통신 기기로 직접 강의 정보를 실어 나른 건 고작 2009년부터다.
TED 명 강의가 무료 시청이 가능하다는 점, 20분 내외 분량에 압축된 고밀도 정보패키지를 취하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런 강연에 숙달된 절대다수 청취자들이 필자가 종래 감당한 그리고 향후 담당할 독자/청취자다. 기존의 논조를 고수하는 주장을 지면/온라인 매체에 전과 같이 기고하면 별 탈 없을까? 아마 당장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필자는 서서히 도태될 것이고, 경우에 따라 스마트폰 등장으로 기존 휴대폰이 일시에 퇴물 신세가 된 것 마냥, 예상보다 신속하게 중앙무대로부터 퇴출될 수도 있다.
지면/온라인에 기고하고 종이 다발을 묶은 단행본으로 자기 성과를 쌓던 전업 필자에게 하드웨어 업체와 대형 유통사가 합작으로 킨들북을 내놓는 오늘의 정황도 주시할 풍경이다. 산적한 이미지가 연구 대상인 (미술)비평가는 지면에서 모니터로 정보를 전환하는 독서시장의 정황으로부터, 독자의 취향과 가치관의 변화도 동반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독자는 평면적인 이미지 삽입(말 그대로 도판)과 해설이 덤으로 덧붙은 기존 미술책 포맷을 마뜩치 않게 여길 테고, 그것을 뛰어넘는 콘텐츠와 형식을 바랄 지도 모른다. 이미지 해설 제시의 노하우마저 동시대적이어야 한다.
위기 해방 = 자기 점검 장치 + 틈새시장 개발
전업 필자는 소속처가 없다. 위계질서 밑에 놓일 기회가 적다는 뜻이다. 이는 활동과 사유 반경의 자유를 의미하지만 자신을 점검할 견제 장치의 부재를 뜻하기도 한다. 한 조직의 수장이 비리 혐의로 붕괴되는 장면을 방송으로 무심히 볼 일이 많다. 조언할 비서나 참모진도 있었겠지만, 수장의 무소불위한 권력을 제어할 순 없었을 게다. 개인이 망가지는 과정은 대개 이렇듯 단순하다. 자기제어 불능.
수행비서가 따로 없는 전업 필자는 점검 장치를 둬야 한다. 비서 대행은 블로그 같은 개인 미디어나 스마트폰이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겠다. 제 입과 손으로 토해낸 글과 말의 궤적을 온라인에 쌓아두는 건 매우 중요하다. 공개 열람이 가능하도록 열어두는 게 관건이다. 가상공간에 쌓인 무형의 자기 성과물은 과시 목적이 아니라 필자의 현주소를 가늠하는 잣대로 쓰일 것이다.
의기 왕성한 시절 수줍은 패기도, 용감무쌍한 시절 진솔한 독설도 시간을 거슬러 스캔하듯 확인하고 점검할 수 있다. 유독 진솔한 필자라면 지난 글을 돌아보며 자신의 현주소를 차갑게 반추할 가능성이 높다. 쌍방향 소통 매체를 비서 대용으로 쓴다면, 제 글에 대한 외부 반응이나 여론의 추이까지 살필 수 있다. 여론의 추이에 필자가 동의하느냐 않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대세의 방향성을 살핀 필자가 홀로 고립된 필자에 비해 유리한 여건에서 관찰 대상을 바라보고 말할 수 있다.
소재 고갈로 고민하는 필자에게도 한마디. 개인이 놓인 불리하고 진부한 여건들이란 것이 있는 법이다. 단점을 역 활용하는 자세. 그것은 필자가 아닌 모든 생활인에게 미덕이다. 되돌릴 수 없는 불리한 조건마저 생산적으로 연결시키는 관점을 내면화한 필자는 그렇지 못한 필자가 경시한 하찮은 소재를 틈새시장의 화두로 끌어올릴 수 있다.
두 말 않는, 정치적으로 바른, 일관된
2백자 원고지 8매 내외(A4용지 한 매 안쪽)는 보통의 칼럼 분량이다. 미술 원고도 대개 비슷하다. 따라서 내 필자 이력은 ‘A4용지 1면 마감’에 숙달되어 왔다. 예술론과 시론을 동일한 분량에 맞춰 써온 이력으로 인해, 내 글은 긴 호흡보다 짧은 호흡 속에 내용을 압축하는 형태를 띠곤 했다. 제 글을 자평하는 건 수줍지만 내 글은 밀도가 높고 빈틈이 적은 편이다. 때문에 빨리 읽히는 장점은 있지만, 여백이 적어 인색하고 차갑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원고지 50매 이상의 장문 집필 시 애먹는 까닭은 단지 써야 할 분량이 늘어서가 아니라, 단문의 밀도를 장문 속에 고스란히 유지하려는 관성 탓이다. 내 글은 행간에 호흡이 개입할 여지가 적다. 이런 집필 버릇은 강연에도 반복된다. ‘용건만 간단히’는 내가 강연과 집필, 그리고 개인 간 대화에서도 고집하는 태도다. 장광설은 내겐 어울리지 않는 옷이다.
자의식이 강한 필자를 지향한다면, 덕목 두 가지쯤은 이행했으면 한다. 시론이건 예술론이건 모두 해당된다. 정치적 올바름을 진정으로 지키는 것, 논지 전개의 자기 일관성을 지키는 것. 이 둘은 가장 소중한 필자의 윤리라고 나는 믿는다.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자는 덕목은 예술론에서 곧잘 딜레마와 만난다. 예술의 정치적 발언을 불편하게 여기는 항간의 정서는 완강하다. 그러니 조형물에서 정치 메시지를 읽어내려는 평문도 불온하게 쳐다보려 든다. 그래도 읽힌다면 그대로 써야 한다.
명문은 아니었지만, 포괄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는 작가와 전시에 지면의 많은 부분을 할애해왔다. 바른 취지를 지향하는 작가와 전시를 꾸준히 주목한 결과 중 일부가 아래 연결하는 원고다. 때론 공동체 일원이어서 불편해질 수 있었지만 불의를 저지른 동료미술인의 고발은 일선 기자가 아니라 공동체(미술계)의 평자가 비판하는 게 도리에 맞다.
- 입시 미술교육을 조롱하는 우회적 제도 비판의 취지가 강한 전시회의 서문:
http://blog.naver.com/dogstylist/40121596521
- G20 낙서 사건 관련 칼럼 (Hook)
http://hook.hani.co.kr/archives/16194
- 사진가 노순택 리뷰(카메라타)
http://blog.naver.com/dogstylist/40103933456
- 여성주의 미술인 윤석남 리뷰(씨네21)
http://blog.naver.com/dogstylist/40056763706
- 한젬마 대필 & 이원일 표절 사건 칼럼(시사저널)
http://blog.naver.com/dogstylist/40032772255
논지 전개의 일관성을 위해서라도, 상대하기 버거운 주제와 대상을 우회하면 안 된다. 싸운 경험이 쌓이면서 자기 논리도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토대가 생긴다. 금전적 이해나 인간관계의 이해 문제가 걸린 청탁은 거절하라. 그게 후환도 적고 나중에 말을 바꾸지 않게 된다. 말을 여러 번 바꾸며 위험을 모면하면, 높은 지위에 올라설진 몰라도 평론가 직함 모양으로 달고 있는 꼴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 “당시 글을 읽었을 땐 속상했지만, 없는 말을 한 필자는 아니었다.”는 인상을 비판 대상과 독자에게 꾸준히 줘야 맞다.
고밀도와 스토리텔링 갖춘 미술 양서를 지향
폭로성 문서가 아닌 한, 글의 파괴력은 길지도 굵지도 않다. 이런 현실을 자주 접하면서 필자 스스로 존재론적 무력감과 자괴감을 느끼게 될 때가 많다. 자기 글과 말이 개선과 변화를 견인하는 실행파일이 못 됨을 깨달아서다.
문학 연극 영화 같은 시간예술과 달라, 미술은 서사 전개에 취약하고 미숙하다. 한방에 모든 걸 거는 현대 미술의 배포는 작품 감상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스토리텔링에 취약한 미술을 장광설로 풀거나 필자 개인의 관념적 유희에 빠져드는 일이 곧잘 있는데 이는 복잡한 내용물의 난이도를 더욱 꼬이게 만든 꼴이니, 비평의 본분에도 맞질 않다. 현장 미술 평론의 절대 다수는 비평 대상의 난해함을 능가하는 언어유희와 관념주의의 뭉치다.
전문가 그룹에 한정되어 있기 마련인 미술평론(시장)의 협애한 지평을 교양 독자 일반으로 확장할 포부라면 대중 특강과 교양 미술서에 눈을 돌리는 게 되리라.
나도 일간지에 연재한 글을 묶어 2006년 엉겁결에 미술교양서 한 권을 낸 적이 있다. 내 이름을 달고 출간된 첫 책인데 배움이 컸다. 그 책은 출간 당해와 이듬해 수차례 서평전문가의 추천으로 올해의 책에 추대되거나 TV방송에 소개되며 호강했다. 괜한 자랑 늘어놓으려는 게 아니다. 내가 낳은 책이지만 내 마음속에서 지향하던 양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정도의 책이 출판시장에서 과대평가된 데에는 한국 미술교양 시장의 척박함과 미술이론 전문가 그룹의 무관심과 불성실을 들 수 있다. 내가 배운 교훈의 실체는 그것이다.
시중에 나도는 미술교양서의 자가당착 중 하나는 ‘독자 눈높이에 맞춰, 쉽게 읽히는 책’이라는 도그마다. 쉬운 설명은 필자의 유능한 기술이다. 그렇지만 그건 내용 전달의 절차의 문제이지 목적이어선 교양서의 본분 자체를 저버리는 꼴이 된다. 미술교양서를 집어들 독자건 집필할 저자건 방향을 잡을 편집자건 명심해야 한다.
‘현대미술은 교육받은 교양인의 견지로는 너무 어려운 경지에 왔다는 사실’을. 현대미술인 뒤샹의 표현을 빌리면, 고차원적 이해로만 얻어지는 지적 쾌락을 주는 것이 현대미술이 되었다. 동시대인이 동시대 미술을 이해 못한들 문화적 패륜이 아니듯 동시대 미술은 ‘제한적 선택지’임을 인정해야 옳다. 동시대 미술책은 생산과 소비 모두에서 양극화 되어 있다.
자칭 학자 집단이 생산한 글은 학회지나 미술전문지에 실린다. 결코 많이 읽히지도 않으며 영향력도 무의미한 수준이다. 그 정반대편에 비전문가가 다수 포진된 미술교양서 시장이 있다. 심지어 연예인 조영남이 기초적인 사실 관계마저 확인 않고 마구 집필하는 게 한국 미술도서의 주소다. 교양 독자층을 위한 미술책이 ‘현대미술 어려울 거 하나 없다!’는 식으로 호객하는 건 위험하고 무책임하다(조영남이 지은 미술책이 그런 식이다).
비문과 저자의 허영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미술 전문 이론가의 비평에 괴리감을 느끼기 때문에 교양 독자층이 싸구려 키치 교양서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 동시대 미술과 동시대 미술 독자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미술계에 종사하는 이론가 그룹(미술평론가/미술사가)이 미술교양서를 지향한다면, 정보의 밀도와 비율을 높이되, 읽는 재미를 전적으로 배려하는 집필이 되어야 한다. 격도 갖추고 내용도 갖춘. 물론 그런 미술책은 집필하기 어렵다. 싸구려 미술책에 친숙해 있는 독자 다수를 감안하면, 시장성마저 검증되지 않았다.
때문에 그런 양서는 한국 미술도서 시장에선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데, 현대 미술에 관한한 백지에 진배없는 취약한 독자층을 현재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구체적 해법을 명시할 순 없지만, 스토리텔링에 취약한 동시대 미술에게 스토리텔링의 옷을 입혀 풀이하는 것도 한 해법일 게다. 스토리텔링의 옷으로 소설을 입을지 만화를 입을지 혹은 제 3의 형식을 입을지는 필자가 적정 판단할 문제다. 그 누구도 시도 않으면 향후 3년 내 내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