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금산 무주 산청 <그 옆으로 마산 창원 진주 가는 길>통영 거제..그리고 산달도..
[기행기/記行 記]
산달섬 그 부근엔 청마가있었네.
2008. 7. 31
말로만 듣던 무주 덕유산을 지나 산청 휴게소에서 어름같이 차거운 물로 세수를 한 후 천천히 통영 거제로 들어섰다.
생전 처음으로 가보는 남해의 잔잔한 수면이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약간의 흥분된 여정을 차분히 가라 앉혀주었다.
이은상의 가고파 노래가 은은히 귀에 들리는 듯 하는 통영을 살짝 옆으로 끼고 거제대교를 건넜다.
임진년 애끓던 충무공의 호령소리가 들리는 견내량 대첩의 물보라가 일던 곳이 가까이 바라다 보였다.
거제대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약 20여분 섬 길을 돌아가면 방하리가 나왔고 방하리 4거리에서 왼쪽 청마로를 따라 산방산이 멀리서 반겨주고 있었다.
그 4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산달도로 가는 선착장이 눈에 들어왔다.
거제도가 아기같이 꼭 안고 있는 산달도, 넉넉한 물결 차오른 다도해의 풍광은 차라리 거대한 바다 호수였다.
그래서 산달도는 호수 가운데 만들어 놓은 꽃동산이었다.
수십만 평을 일구어 놓은 굴 양식장은 망망한 남해의 푸른 목장이었고 산달섬은 하루 종일 바다에서 일하다가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 목동들의 안온한 휴식처였다.
산달도를 잠시 알아보면 주소는 경남 거제시 거제면 법동리로 면적 2.97㎢, 해안선길이 8.2㎞, 인구 137명(2006)이다.
거제도와 한산도(閑山島) 사이의 거제만(巨濟灣) 한복판에 위치한다. 삼봉(三峰)이라고 하는 3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봉우리들 사이로 철 따라 달이 떠 산달도라고 일컬어졌다고 한다. 1470년(조선 성종 원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수영(水營)이 있었다. 일주도로 해변을 돌아가며 띄엄 띄엄 세워놓은 가로등의 불빛이 가득 차오른 밀물위로 거울같이 어리고 있을 뿐 산달섬의 밤은 바다 속같이 조용했다.
산달섬에 도착한 다음 날인 8월1일 10시 20분,
산달도를 떠나 폐리선으로 둔덕면 방하리에 있는 청마 유치환 문학 기념관엘 가고자 남해 물결을 다시 갈랐다.
사실 목월 동탁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많이들 말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친일이라는 설왕설래 때문인지 청마 작품에 대해서는 요즘 좀 잠잠한 편이였다.
그러나 청마 기념관으로 가는 도로를 문인의 이름을 따서 "청마로(靑馬路)"라는 길 알림표를 세워놓았음을 보고 마음이 벅차왔다. 문득 김유정 역이라든지 이효석 마을이 생각났다.
먼 훗날에 내가 태어난 내 고향 가는 길도 "가촌 길(佳村路)" 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을런지...
기념관 가기 전에 앞 쪽을 바라보면 참으로 유별나게 높이 솟아있는 돌산 산방산이 보였다.
꽃다운 산, 산방산(山芳山)인 것이다.
건축한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2층으로 된 산뜻한 기념관이 서있었고 건물은 청마의 조용한 고향 동네 한복판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마당가에 세워 놓은 몇 개의 시비 옆에 있는 청마의 전신 동상은 안경을 벗고 나서서 금방이라도 입을 열고 무어라고 시론을 말하려는 듯도 하였다. 마당 옆에는 350년 된다는 11m 높이의 굳건한 팽나무가 시인이 태어난 방하리 마을과 시인의 남은 유혼을 밤낮으로 지켜주고 있었다.
청마 유치환은
1908년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507-5번지에서 출생했다.
11세까지 한문을 공부했고
바로 일본으로 유학했으며
1926년 동래중학교 5년 편입 후
1927년 연희전문학교를 수료했다.
1931 문예월간 제 2호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1937년 당시 정지용의 시에 감동했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발간했다.
서울특별시,
부산광역시,
경상북도
문화상 및 예술원 공로상을 수상했다.
1957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경주여중고,경주고,경남여고 교장을 거쳤다.
1967년 부산남여상 교장 재임시 부산 좌천동에서 교통사고로 향년 60세로 별세했다.
청마는 일종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이념으로
그는 인성의 공허를 뛰어 넘어 새로운 초월의 세계를 추구하며 탐구해 가는 이상향의 시인이었다.
6.25.당시 종군 문인이었고 그는 원고를 많이 고치는 시인으로 되어있다.
사진 속에 있는 것으로 그가 만났던 사람은
김춘수,서정주,김상옥,이상,김정숙(목포 제자), 김달진 시인 등이었다.
그의 시 몇 편을 적는다.
그리움.
유치환.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쎈 오늘도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행 복
유 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이 보다 행복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강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에게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양귀비 꽃인지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 하였네라.
- 시집 "행복은 이렇게 오더라" 에서 -
그 문학 기념관 옆에 있는 생가(生家)는 산방산의 정기를 듬뿍 받고 있었다.
선조때부터 파놓은 굴 우물 물은 아직도 많이 고여 있었다.
기념관에서 약 2km 떨어진 왼편 산 중턱에 그의 묘지가 있었다.
해풍이 불어오는 솔밭에서 자기의 묘소를 찾아오는 길손에게 지나간 옛 유명 시인이 무어라고 말해주고 있기에 충분했다.
목숨.
파슬 파슬 불꽃이 어디고 옳아 타듯이
지금 저 하루살이 꽃 망울 위에 붙어 타는 것이여
싸늘한 재만을 남기고는
불꽃이 온데 간데 없어지듯
그날 나의 덩치만 두고 내게서 가버릴 것이여.
청마.
- 이 시는 유치환의 무덤 앞에 있는 시비의 시임-
그 묘지 옆으로는 "춘신/春信" ..꽃등인양 창 앞에 심어놓은 한그루 ...의 시비(손자가 봉헌한 것임) 와
행복 , 바위, 낮 달, 울능도, 동백 꽃,등의 시 비가 그의 초월적 시 정신세계를 향한 열정을 조용히 그러나 거울같이 맑게 나타내 주고 있었다.
부인과 함께 한 묘지에서 바라본 전방은 멀리 남해의 푸른 물결이 언제나 그리운 듯 눈만떠면 바라보이는 그러한 위치에 영원히 잠들어 있었다.
청마 유치환,
청마는 비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고
서울에서도 멀리 떨어진 남해의 거제섬 한적한 곳에 그의 숨결이 잔잔히 남아 있지만
한 시대 한 시인이 아루러준 우리의 정서는 지금도 동백꽃처럼 언제나 피고 지리라 여겨졌다.
2008.8.3.
가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