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은 뭘까를 우리에게 묻는 영화 - <유스>를 보고
결혼 12년차, 아이들(아들과 딸)을 맡아준 분으로 인해 아내와 나는 오랜만에 둘만의 영화시간을 즐겼다. <레버넌트>는 잔인해서 아내의 목록에서 삭제되고, 물망에 오른 <그날의 분위기>는 미안하지만 내가 한국 멜로 영화를 영화관에서 돈내고 보기를 아까워해서 제꼈다. <이웃 집에 신이 산다>가 낙찰될 뻔 했으나... 늦은 시간에 그것도 오후 4시50분에 1번 상영하는 이유로 아이들을 좀 더 일찍 데리러 가야하는 현실적인 이유로 지워진 후에 낙찰된 영화가 <유스>였다.
<배트맨>시리즈에서 집사 역으로 익숙한 마이클 케인, <저수지의 개들>, <스모크>의 묵직한 하비 케이틀, 이름으로 관심이 가져지는 레이첼 와이즈, 보는 내내 누구인지 궁금했던 폴 다노, 그리고 잠시 잠깐 나오지만 포스 작렬 제인 폰다까지. 이 영화로 이름을 알게 된 작가 감독이라 이름 붙일만한 파올로 소렌티노. 그의 다른 작품 <그레이트 뷰티>가 무척 궁금하다. 배우들의 연기와 스위스의 한 호텔에서 펼쳐지는 장관과 풍광은 눈에 넣기에 포만감을 주었다. 그곳에 가고 싶게 만드는 장면 장면들과 여차하면 등장하는 다양한 음악과 귀에 속속 꽂히면서 내게 해석을 강요하는 대사들, 그리고 퓨전 장르의 뮤직 비디오까지. 영화는 내게 질문을 걸어왔고, 해석을 강요했으며, 궁금증을 유발했다. 다양한 미장센들로 배치한 이미지들은 장면과 장면 사이, 대사와 대사 사이에서 울림을 남겼다. 그래서 영화 이후에 일어나는 파문이 지워지지 않는 영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봤을까 궁금해서 오랜만에 영화평을 뒤적거리며 찾아 보게 되는 영화였다. 그리고 감독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영화, 울림이 있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내게, 아니 영화를 보는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너무나도 많은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그 질문을 한마디로 하자면 젊음은 뭘까 정도! 늙은 노인네 둘이 스위스의 한적하고 고급스런 호텔에서 모든 서비스를 받으며 지내는 가운데 던지는 질문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과연 예술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이며, 늙음(죽음)이란 무엇이고, 젊음(살음)이란 무엇일까? 영화보는 내내 왜 감독은 영화제목을 '유스'라고 정했을까 곰곰 생각케 되었다. 이는 마치 최근 본 알랭 드 보통의 책 <불안>의 다른 버전 같이 느껴져서 한참을 숙고하게 만들어주었다. 은퇴한 지휘자 프레드 밸린저(마이클 케인 분), 마지막 유작을 준비하는 영화 감독 믹 보일(하비 케이틀), 프레드 밸린저의 딸이자 비서이면서 이혼을 당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나서는 레나 밸린저(레이첼 와이즈 분), 로봇 연기자로만 인식되는 것에 대해 고민하며 새 캐릭터를 구상중인 헐리우드 배우 지미 트리(폴 다노 분). 이들이 엮어내는 늙음과 젊음의 이야기와 정서, 그 아우라 속에서 영화는 진정 젊음이란 무엇인가를 오히려 내게 묻는 듯했다. 또한 관객들에게 과연 무엇을 보고 계신가요라고 우리의 해석능력을 시험하는 듯했다. 나의 삶은 '유스'인가?
'유스'는 열정이다. 영화의 팜플렛에 찍힌 문구처럼 '끝나지 않을 아름다운 순간들'이 바로 '유스'(젊음/청춘)다. 그래서 영화는 그 젊음의 열정을 늙은이의 시선으로 다양하게 보여준다. 또한 자신의 늙음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과정으로서 또 다른 '생의 열정'(유스)을 보여준다. 그 과정 속에서 발견하는 다양한 육체의 향연은 이미지의 향연이며, 그 정점은 젊은 유니버스 여인의 나신이다(혼탕하는 유럽의 문화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젊음은 곧 육체이며, 생생함이고, 인생 가운데 최고의 구경거리(!)이며, 가장 제기발랄한 순간이고, 끝나지 않을 아름다운 순간의 발로이다. 그러하기에 나이듦은 엄연한 현실이며, 우리를 틀지워서 최고의 호텔에 머물지만 생의 열정은 사그라들게 하고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편견이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젊음을 추구하는지 모르겠다. 프레드가 극구 거부하던 여왕 앞에서의 자신의 18번곡 심플송의 지휘를 맡아하는 장면은 또 다른 젊음의 발산이다. 그래서 영화는 희망적으로 끝난다. 반대편에 서 있는 듯한 영화 감독 믹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쩌면 그가 깨달은 생의 욕구 가운데 표출되는 또 다른 열정은 아닐까 싶다. 유작을 준비했던 그가 깨달은 것은 우리의 삶이 결국에는 모두 엑스트라이다라는 것, 이야기를 만들던 그가 젊은 친구들과 시나리오 작업을 진행하면서 마지막 말로 하고 싶었던 얘기는 감정은 우리가 가진 전부다라는 어쩌면 허무한 결말의 삶으로서의 발로(!)인지도 모르겠다. 허무함의 끝은 죽음뿐이다. 그것이 그가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열정(?)인지도 모르겠다. 적극적인 죽음에의 욕망말이다(물론 영화가 무산되고 자신의 작품이 형편없다는 브렌다의 대사이후에 찾아든 그의 인생의 허무의 순간에 대한 리액션). 영화는 음악에 있어서도 지휘자 프레드가 아이의 바이올린 심플송 연주에 맞춰서 비닐을 부비는 소리에서부터 소들의 방울소리와 새들의 소리를 지휘하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 조수미가 등장하는 심플송까지. 그러한 생의 열정은 아내만이 불러야하는 곡에서 자신의 편견을 깨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젊음으로 나아가는 자리이다. 무기력에 빠졌던 딸 레나는 무서워하던 등반에서 새롭게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을 만들어가고, 캐릭터 작업을 위해 무미건조하게 관찰자로 있던 지미 트리는 한 소녀의 알아봄으로 각성되어 두려움과 열정 가운데 새로운 선택(열정)을 하게 된다. 그가 연기하는 히틀러 캐릭터는 과히 숨막히는 장면이기도 했다. 열정은 나이와 상관없으며, 젊음은 나이듦 가운데서도 우리의 생에 대한 열정, 아름다운 자연 풍광, 내가 살아왔던 일생과 일에 대한 욕구, 그리고 또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삶이다. 그래서 프레드의 담당의가 했던 질문과 답은 이 영화의 질문에 대한 감독의 대답처럼 들렸다. "이 문을 열고 나가면 무엇이 있을까요?" "뭐죠?" "젊음(유스)이죠!" 그렇다. 문을 열고 나가는 것... 새로운 시작을 하는 힘, 그 속에 또 다른 아름다움이 깃든다. 그래서 창작은 살아있는 자의 몫이다.
젊은은 뭘까를 묻는 영화 앞에 나는 대답한다. 젊음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자의 그 무엇이다라고. 그가 젊었든 늙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진정한 젊음은 우리 속에서 무언가를 새로이 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다. 이 영화는 그 열정을 우리에게서 꺼집어내도록 독려한다. 삶의 산란한 아름다움 앞에, 우리의 무기력함 앞에, 선택은 우리에게 놓여있다. 준비되어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걱정할 것도 없다. 젊을 때는 모든 것이 가깝게 보이지만 나이가 들면 모든 게 멀게만 보인다는 것은 편견이다. 두려움을 깨치고 열정을 선택하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부터 지미 트리처럼 잘 훔쳐라!(그의 히틀러 연기는 그가 호텔에서 만났던 이들의 삶을 잘 훔친 것이다^^) 새로운 아름다움, 젊음은 단순한 나이도, 육체만도 아님을 묵상하도록 돕는 이 영화, 괜찮다. 우리 속에 답이 있다. 두려움보다는 열정을 선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