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세례요한의 죽음의 역설적인 교훈(지은혜)
(마가복음6:17-29절 말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마가복음6:17-29절 말씀을 주제로 하고 있다.
마가복음 6장은 헤롯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 부터 침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침례 요한은 불의에 대해서는 권력의 힘도 개의치 않고 직언과 비판을 서슴지 않고 투쟁했다. 이것은 그의 소명 의식에서 발동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3)
이러한 침례 요한의 행동에 대한 헤롯의 첫 반응은 침례 요한을 옥에 가두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볼 때 마가는 침례 요한의 투옥처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유대 사가 요세푸스는 요한이 베레아 지방에 속하며 사해 동쪽에 위치한 요새 푸마케루스 산성의 감옥에 갇혀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마가는 요한의 투옥 이유가 여자를 위한 것이였다고 전한다. 즉 헤롯이 헤로디아를 위해 침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한편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요한이 감옥에 갇힌 이유 가운데 또 다른 이유가 그가 민중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헤롯이 정적을 제거할 목적으로 투옥 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의로운 메시아의 선구자이자 그 시대정신으로 끝내 불의한 정치 집단의 희생 양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마가는 헤로디아와 헤롯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헤로디아의 악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또한 헤롯의 선함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침례 요한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강조하고자 했을 뿐이다.
즉 요한으로 부터 공격 받은 헤롯이 직접 요한을 가리켜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고백을 함으로써 요한의 의로움이 크게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 본문에서 말하려고 하는 내용은 의인이 얼마나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의인은 악인들에 의해 처참히 죽임을 당한다.
헤롯은 소녀의 춤 때문에 요한을 죽이는데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귀인들은 요한의 죽음에 대해 한마디의 말도 없이 침묵한다.
헤로디아는 딸의 춤의 대가로 요한의 목숨을 요구한다.
많은 경우 의인이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도리어 의인은 보통 사람보다도 못하게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의인이 이렇게 보통 사람보다 죽임을 당해도 그는 악인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두려움으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롯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을 들었을 때 자신이 목베어 죽인 요한이 다시 살아났고 생각 했던 것이다.
귀한 은혜의 말씀 감사합니다.
46. 바다야 잔잔해 져라.(지은혜)
(마태복음8:23-27절 말씀)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8:23-27절 말씀을 주제로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호수에 돌발적으로 일어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심으로 자연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권세를 나타내 보이신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잘 살펴보면 마가복음4:35-41절과 누가복음8:22-25절에 기록된 사건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대자연의 질서를 다스리시는 참 주인이셨다.
마태복음에서 이 기록은 이들 복음서와는 다른 각도에서 기록되었는데 그것은 첫째로 이 사건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도의 교훈과연결 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에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마태는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풍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큰 지진이 바다에 있었다고 기록한다.
셋째로 마태는 큰 지진으로 인하여 바다에 큰 파도가 일어나 제자들이 탄 배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한 행동을 믿음의 각도에서 기록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배에 탄 것은 예수님께서 배척한 두 제자의 모습과 정 반대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또한 그들이 큰 지진으로 인해 격렬한 풍랑과 마주 했을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해 달라고 외친 것도 역시 제자들이 가져야 할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적인 믿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도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는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믿음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불안과 걱정을 극복하지 못하는 적은 믿음이라고 볼 수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님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는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하지만 아직도 주님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여전히 성숙해야 할 적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배를 침몰시키려는 파도와 폭풍우를 말씀으로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앞에서 제자들은 놀라 그가 하나님 그 자신이심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거센 파도와 폭풍우를 잠재울 수 없다는 고백이었고 이는 예수님의 절대적 권위를 보이는 동시에 창조주에 대한 자연계의 능동적이고 즉각적인 순종이 강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자연계를 지배하는 것은 구약적 배경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시편89:9, 107:25-30)
마태복음에서 "지진"이란 단어는 풍랑사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하여 등장하는데 첫번째 지진은 예수님께서 배에서 주무시고 계실 때, 두번째 지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직후에, 세번째 지진은 예수님의 부활 직전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여 큰 지진이 있기 전에 배에서 잠을 자고 계시던 예수님이 잠에서 일어나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후에 이방 땅으로 성공적으로 가시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이방 땅으로 전파 되게 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귀한 은혜의 말씀 감사합니다.
47. 왕 보다 앞서서 달려가자.(지은혜)
(열왕기상18:41-46절 말씀)
18장에 나타난 아합의 성격은
첫째: 아합은 18:17절에서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하는 자여"라고 부르고 있지만 엘리야에게 적극적으로 적대적인 모습을 취하지는 않는다.
둘째: 18장 하고 19장 그 어디에도 아합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이려 했다는 내용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언제나 이세벨이다 라고 기록되어 잏다. 아합은 주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여호와 종교대신 바알종교를 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당당히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아합에게 있어서 종교는 자신의 세속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아합이 만약 여호와의 종교가 자신의 성공을 보장해 준다면 그것을 택하였을 것이고 반대로 바알종교가 자신의 성공을 보장해 준다면 바알종교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볼 때 아합이 정말 엘리야를 죽이고자 했다면 엘리야는 아합과의 첫 대면부터 결코 안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아세라 선지자들 혹은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홀로 상대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대결 자체가 불가능 할수도 있었다. 다음으로 대결 후 엔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도 아합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 가서 기도한 것과 아합에게 먹고 마시라고 말한 것 등은 전부 시내산 언약의 장면 곧 모세가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과 장로들이 산 중턱에서 언약의 식사를 한 것(출24:9-11)과 상응한다.
결국 엘리야가 아합에게 먹고 마시기를 권한 것은 여호와의 언약의 식사를 상징적으로 권한 것이다.
사실 여기에서 잘 살펴보면 18장의 오든 사건을 목도하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 진 것을 목도한 아합은 엘리야가 앞의 종교 대결에서 기도를 한대로 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18장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아합의 반응은 막연하고 짝이 없고 기가 막힌다.
그리스도인들의 몸이 불의 제단에 바쳐진 향기로운 번제물이 될 때 일반 백성들은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믿게 된다.
엘리야의 부흥운동은 방황하던 백성들과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운동이었고 야웨 하나님께 다시금 굴복하도록 초청하는 강력한 영의 시위였다.
또한 온 백성이 회개하여 자기 삶을 쪼개서 맛보는 장대 비 부흥은 어떤 부흥사도 가져다 줄 수 없는 대부흥이요, 그리고 어떤 영적 지도자도 염매를 독점할 수 없는 진정한 하나님으로 부터의 부흥이다.
귀한 은혜의 말씀 감사합니다.
48. 라마나욧과 같은 교회(지은혜)
(사무엘상19:19-24절 말씀)
라마나욧은 "라마의 선지자 학교"란 뜻이다.
라마는 다윗의 출발지인 "기브아"에서 북쪽으로 약 32km정도 떨어진 곳으로 사무엘의 고향이자 그의 활동 중심지이다.
라마나욧은 말씀이 충만한 교회였다.
또한 위로가 충만한 교회였다.
다윗은 미갈의 도움으로 사울은 피하여 도주할 수 있었으나 그러나 이스라엘 영토내에 있는 한 그의 목숨은 사울의 처분에 달려 있음이 분명했다.
사울은 그 당시에 온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절대 귄력자였고 3천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다윗을 찾아 죽이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이 사무엘이 있는 라마나욧을 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 부은 하나님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삼상16:13)
라마나욧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 사무엘이 있고 말씀과 안식과 위로가 있는 곳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안식과 위로를 줄 수 있는 곳이 그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그 누구도 믿을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마나욧 교회 처럼 안식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본장 23절과 24절을 보면 나욧은 은혜가충만한 교회였다.
사울은 라마나욧에 다윗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보내었는데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이 예언을 하게 되었다.
사울을 피해 도망하며 지내던 다윗은 더 이상 피할곳도 없는 절제절명의 위기 속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완벽하게 구원을 받게 되었다.
성령의 역사는 강팍하고 살인적인 사울의 심령 상태를 완전히 녹이고 불태워 버렸기 때문에 라마나욧에서 사울 왕 같은 사람까지도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지금 현시대 교회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사울의 전령병들과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예언을 한 것처럼 이런 은혜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특히는 우리 모두가 다 진리의 말씀과 교회를 통해서 변화 되어야 한다.
귀한 은혜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