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공민학교(高等公民學校)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거나 나이가 취학에 적합하지 않아
중등과정기회를 눃쳐버린 자를위해
중학교 교육 과정을 실시하는 학교
30일 재생기간 만료
가사뮤비
내가 태어난 환경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 이다
내가 1952년 에 태아나 이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도 우리섬엔 전기도 없는 섬 이었다
내가 철들 무렵 우리 동네에 특별한 학교가 생겼는데 이학교가 고등공민학교 다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못했다
공부를 잘하거나 아버지가 능력이 되는 가정집 아이들 은 여수로 중학교 유학을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럴만한 가정환경이 못되었다.
당시는 중학교도 입학시험에 응시를 하여 합격을 해야 중학교를 갈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성적도 남들처럼 특별나지도 않고 근본이 잘난 두뇌가 아니어서
중학교에갈 생각도 안했다.더구나 내 아버지는 전형적인 어촌 어부였는데
그렇게 가족이 흡족할만큼 소득도 많치 않았고 해마다 보릿고개 걱정해야했다
그래도 나의 부모님은 동내 학교에는 보내고 싶어 하셨고
결국 난 입학시험 안봐도 되고 학비도 거저다 싶은
우리동네 고등공민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우리동네 학교의 태생은 이렇다
우리 섬 엔 6개 크고 작은 마을이 있었고 우리섬엔 초등학교가 3개 마을에 있었는데
초등학교를 졸업 후 해마다 여수로 진학을 하지 못하고 마을에 주저앉은 청소년들이 늘어가자
그러한 마을 미래를 걱정하시던 마을 유지 분들과 동네 선후배 및 어르신들께서 뜻을 세워
가장 큰 동내 이고 섬 중앙에 자리 잡은 마을인 우리 동네에 학교를 세우고 야학을 가르쳤다
학교는 해방후 625 전쟁이 끝나고
일본순사들이 상주했던 폐허가 된 일본경찰이 쓰던 기와집 내무서 를 보수하여
임시 학교를 개설하였다. 처음엔 여수 유학생들이 방학때나 또는 여수등지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어부가되고 농부가 되어 사시던 분들이 진학 못한 동네 후배들을 모아 중학과정을 기르쳤다.
그러다가 전남도청에서 학교인가를 내주었는데 그 명칭이고등공민학교 이었다. 인가는 내주었어도 한동안은 교사가 부임해 오지 않아
예전처럼 마을 어르신들과 선배님 들 께서 계속 가르쳤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여수 상급학교 진급이 어림도 없었다
경제적인 능력은 아에없고 실력 자체가 안됐으니까 그때는 시험을 쳐서 합격해야 가는데 제데로 배운 실력이 없어 시험을 본다는건 무리 였지만
나는 실력 자체가 안되었기 때문애 여수로 유학을 못가고
부모님 따라 영영 농사나 짖던지 좀있다가 선배들처럼 도회지(도시)로 취직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나를 우리동네 고등공민학교에 등록을시켜주었다
그렇게 하여 나는 요행인지 천행인지 중등과정을 공부하게 되었다
처음엔 선생님도 없고 우리동네 어르신들 또는 형님들이 선생님 이었다
그런데 생소한 교육과정은 나를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영어 라는 언어와 이상한 문자들이 뒤석여 깜깜이 내용들이 가득한 수학이라는 책은 아에 3년동안 나는 까막눈 이었고 시험은 언제나 선생님께서 베풀어주신 기본점수40정이 전부였다
그나마 학교생활3년 중에 1년 반은 학교신축 한답시고 오전3시간 공부하고 나머지시간과 오후시간은 학교터 딱기 /벽돌 나르기 등의 노력동원으로
세월을 보내고 그렇게 세워진 학교에서 1년 반을 공부하여 졸업을 했지만
정식 중힉교 인가 혜택을 아쉽게 도 획득 하지 못했다. 나는 우리졸업생을 끝으로 고등공민학교라는 명칭은 끝이 나고 우리 밑에 졸업생부터는 정식명칭 초도중학교 제1회 원년 졸업생이 되었다
학교 짖느라 2년을 중노동을 했는데 중학과정을 정식졸업장을 획득하지 못한게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졸업장이 대수가 아니었음을 살아가면서 느끼며 감사하게 되었다
자나 놓고 보면 그 3년의 세월이 그렇게 허송만은 아니었음을 살아가면 서 감사하게 되었고 그래도나는 영어중에 나는 할수있다 (yes i can) 나는 소년이다 (I am a boy)는 확실히 쓰고 읽을수 있었다 영어 글자체 4가지는 쓸수있게 배우고 졸업 하였는데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몇자를 제외하곤 지금은 다~까목었다.3~4너명 빼고는 그것도 몰르는 급우들이 많았다
처음 고등공민학교 입학 할때는 학생수가 29명 이나 되었다 우리섬에 마을이 우리동네 본교마을 을 포합 6개마을이어서 모두 우리 동내로 걸어서 통학을 하였는데 처음 고등공민학교 입학 할때는 학생수가 29명 이나 되었다 당시 학비는 입학당시 1분기수업료가 800원 였으나 졸업당시는 1860원이 1분기 수업료 였는데 그것도 부모님들이 끝까지 졸업시킬 능력이 안되셔서 여러친구들이 중도 자퇴하고 최종 졸업생은 겨우 9명 이 졸업하였다
20명의 학우들이 졸업장을 득하지 못했다는건 지금생각해도 참으로 안타깝고 아쉽다
나는 졸업장을 득한 9명이 될수있게 하여준 부모님께
살아오면서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부모님은 내 흔적들은 잘 관리해주셨다 아버님게서 물려주신 내 졸업 앨범 속 흔적들을 정리 하면서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상장 통지표등 도 다 모아두었는데 모두 누렇게 되어 다 버리고 졸업장과 상장 몇 장을
포토샵에서 서툰솜씨로 하얗게 복원하여 만들어보았다
이젠 이런것들이 나 죽고나면 이 지구 상에서 마지막이 될것이다 요즘 세대들은 자신의 흔적들을 쉽게 망각 한다
잠시나마 김용환 님과 함께
같은 호흡으로 추억여행을 해보았습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선배님의 삶을 어느 정도는 공감할 것 같습니다~~
저는 70년생으로 전북 군산에서 자랐는데,
당시에도 인근 섬마을에 고등공민학교가 있었으며
그때는 중학교 학력이 인정되어 검정고시 없이 고등학교에 진학했었습니다.
추억이 담긴 감동적인 글과 졸업장 등을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