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누가 꾸민 음모인가?
(105인 사건과 교회 수난)
"평소 일본의 조선 합병에 불만을 품고 있던 불순한 배일 분자들이 1910년 11월,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도 개통식에 참석키 위해 신의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에서 신의주에 이르는 철도 기차역에 환영객으로 위장한 자객들을 분산 배치하였다가 기차에서 내리는 총독을 저격하려다 경찰 당국의 삼엄한 경비로 미수에 그치고 그 관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1912년 6월, 일제가 민족운동가 123명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혐의로 1심 재판에 회부하면서 밝힌 기소 내용이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열린 결심에서 그중 105명이 징역 10년부터 3년까지 형량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때문에 '105인 사건'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조작된 사건이었다. 일제 측은 이 사건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이라 불렀다. 그러나 '음모'를 꾸민 쪽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일제는 강압적으로 한국을 합병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남아 있는 항일 민족운동 세력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기독교 조직을 근거로 한 민족운동 세력을 '발본색원'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1년 9월, 정주에 살던 이재윤이란 잡화상을 조사하다가 교회와 기독교 학교를 중심으로 연결된 비밀결사 조직을 발견하게 되었다. 고구마 줄기 캐듯 은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07년 조직된 이후 은밀하게 세력을 확장해 온 선천, 정주, 곽산, 평양, 개성 중심의 이북 '신민회' 조직의 실체가 드러났다. 마침내 기회를 잡은 것이다. 1911년 10월 24일, 아침 기도회를 마치고 나오던 선천 신성학교 교사와 학생 27명을 체포한 것을 필두로 700명이 넘는 피의자를 체포하였다.
서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된 피의자 중 70% 이상이 평안도, 황해도 출신들이었다. 지역 배경이 그러했기에 대부분 장로교인들이었다. 감리교인으로는 당시 개성 한영서원 교장으로 있으면서 신민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던 윤치호를 비롯하여 협성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평양에서 전도사로 목회하고 있던 안경록, 하와이 농업 이민으로 나갔다가 미국까지 다녀온 후 평양에서 양말 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서기풍, 역시 하와이 이민을 갔다가 돌아와 서울에서 양기탁을 도와 <대한매일신보> 사무를 보았던 임치정, 평양 출신으로 원산에서 약방을 하던 조문백(일명 조영제)과 김응조, 평양에서 연초 제조업을 하고 있던 편강렬, 평양에서 약방을 하고 있던 정수현, 수안 광산회사 평양 지점에서 근무하던 옥성빈 등 9명이 확인된다.
사건 자체가 조작된 것이기에 증거라고는 피의자의 자백밖에 없었다. 그러니 일본 측이 꾸민 각본에 따라 피의자의 역할이 주어졌다. 누구는 연락을 맡고, 누구는 권총을 구입하고, 누구는 환영객 속에 숨어 있다가 역에 내리는 총독을 저격하고....하는 식이었다. 각본에 따른 역할을 시인하라고, 그 다음에는 일본에 충성을 약속하라고 강요하였다. 거부하는 피의자에겐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다. 당시 사건을 총지휘했던 조선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이시는 러시아까지 가서 제정 러시아가 식민지 폴란드인들에게 가했던 잔인한 고문 방법들을 배워 온 '고문 기술자'였다. 관처럼 생긴 독방에 가두고 세워 두기, 담뱃불로 맨 몸 지지기, 밥 굶기고 보는 앞에서 식사하기, 가죽 채찍으로 맨 몸 때리기, 비행기 태우기, 손톱 밑에 대침 꽂고 튕기기, 거꾸로 매달고 코에 고춧가루 물 붓기, 수염 뽑기, 발끝이 닿을 정도로 매달아 놓고 때리기 등 무려 72종에 달하는 고문 방법이 동원되었다.
자백이 늦으면 늦을수록 고문의 정도는 심해졌다. 자백한 사람에게는 일본에 충성할 것을 강요하였다. 거부하면 할수록 고문이 가해졌다. 사건 당시 열아홉 살 신성중학교 학생으로 체포된 선우훈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예수를 믿지 말구 일본을 믿어라. 하나님이 너를 건질 듯싶으냐?고. 그러나 나는 수정같이 맑은 마음으로 하나님 품에 안기련다. 이 괴로운 육신을 벗고 저 나라로 이제 곧 가고 싶다. 우도(고문을 담당했던 일본인 경찰)야! 너는 네 갈 길이 있고 나는 내 갈 길이 있으니 나는 십자가의 용사되어 불의와 싸울 것뿐이다. 죽고 사는 것은 내게는 벌서 문제가 안 된다. 나는 고요한 마음으로 결박을 지고 형장 아래 꿇어앉았다. 스테반이 돌탕에 맞아 죽을 때 바라보든 열린 문을 바라보면서 '이 영혼을 받으소서' 간절히 기도했다.
예예 개심 못하는 놈 때려죽이고
예예 개심 하는 놈은 살려 내어서
고관대작 부귀영화 누리게 한다.
예예 개심 할 수 없는 이 내 몸이니
형장 아래 결박 지고 꿇어앉아서
쳐 죽이는 모듬매를 기다립니다.
스데반이 바라보든 열린 저 하늘
내 주 예수 서신 것을 바라보면서
내 영혼을 받으소서 기도합니다."
[선우훈, <민족의 수난>, 1953, 시사통신사, pp.87-88.]
취조하는 경찰은 "하나님을 믿느니 일본을 믿어라"는 식으로 기독교인 피의자를 조롱하였다. 한말 이후 전개된 민족운동의 강력한 배우가 기독교였기에 기독교인 피의자에 대한 심문과 취조는 더욱 잔혹했다. 신앙의 힘이 아니면 견뎌 낼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이런 식으로 105인 사건에 연루된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와 순교의 신앙을 체험하였다. 이 사건을 '민족의 수난'이자 '기독교 핍박'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과 핍박을 통해 교회가 민족의 십자가를 지는 종교로 우리 민족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105인 사건'을 통해 민족의 수난 현장에서 십자가 체험을 한 9인의 감리교인들이 한국 교회사와 민족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결코 가볍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