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 - 1733)
병와 이형상 자화상
효종4년 5월 23일 인천(仁川) 죽수리(竹藪里) 소암촌(疏巖村)에서 태어났다. 11세에 〈독동사기(讀東史記)〉를 짓고, 12세에 성균관에서 <<서경(書經)>>을 강독할 때 <기삼백장(朞三百章)>을 산술(算術)로 풀이하였다. 17세에 송지규(宋之奎)의 딸 은진송씨(恩津宋氏)와 혼인하고, 19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20세에 모친을 모시고 인천으로 돌아가고, 25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가족과 함께 자연도(紫煙島)로 갔다.
숙종16(1690)년, 29세에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분속되고 〈승정원일기초(承政院日記抄)〉를 찬하였다. 30세에 시의(時議)를 거슬려 율봉(栗峰) 찰방(察訪)이 되고, 형 이형징(李衡徵)이 무옥(誣獄)으로 하옥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32세에 부정자(副正字)가 되고, 병와(瓶窩)라고 자호(自號)하고 〈병와기(甁窩記)〉를 지었다. 33세에 정자가 되어 봉상시(奉常寺) 직장(直長)을 겸하고, 호조 좌랑이 되어 동지사(冬至使)의 세폐포(歲幣布) 규정을 바로 잡았으며, 병조 좌랑, 정랑이 되었다. 34세에 광주(廣州) 경력(經歷)이 되고, 이현석(李玄錫), 이현조(李玄祚) 등과 교유하고 〈한중팔영(閑中八詠)〉, 〈차두보팔애시(次杜甫八哀詩)〉를 지었다. 35세에 성주(星州) 목사(牧使)가 되어 의사(義士) 이사룡(李士龍)을 제향하는 충열사(忠烈祠)를 짓고, 독용산성(禿用山城)을 수축하고, 「유원총보(類苑叢寶)」 1권을 지었다. 37세에 금산(錦山) 군수(郡守)가 되어 덕유산(德裕山)의 산적(山賊)을 소탕하였다. 38세 6월, 청주(淸州) 목사(牧使)가 되어 청주(淸州)가 당론(黨論)이 극심하여 이를 화해시켰고, 9월,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부임하여 기민(飢民)을 구제하고, 왜인(倭人)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독진(獨鎭)의 설치와 구송사(九送使)의 폐지를 건의했으나 시행되지 않았으며, <<정와담총(井蛙談叢)>>을 지었다. 40세 7월, 오위장(五衛將)이 되어 서울로 돌아오고, 10월, 양주목사(楊州牧使)가 되었다. 41세에 전정(田政)으로 인해 파직되었고, 〈세력(世曆)〉, 〈계첩(稧帖)〉을 지었다. 42세에 환국(換局)으로 조정이 바뀌자 노모를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갔다. 44세에 <<강도지(江都誌)>> 2권을 지어 소(疏)와 함께 조정에 올리려 했으나 하지 못하였다. 45세, 모친상을 당하고, 〈동지문답(冬至問答)〉을 지었다. 47세, 경주 부윤으로 부임하여 기찰(譏察)하니, 운주산(雲住山)에 발호하던 토적(土賊)이 스스로 해산하였으며, 부내(府內)의 사찰과 음사(淫祠)를 헐고 학궁(學宮)을 세워 유학을 장려하였다.
숙종 26(1700)년, 48세 3월, 사직하고 영천(永川) 호연정(浩然亭)에 은거하고, 4월에 여헌 장현광이 머물렀던 영천 입암(立巖)을 여행하고,〈성고요(城臯謠)〉, 〈성고구곡십절(城臯九曲十絶)〉, 〈성고칠탄(城臯七灘)〉, 〈구곡만팔기(九曲灣八起)〉 등의 시가(詩歌)를 지어 심회를 풀었다. 50세에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하여, 삼성사(三姓祠)를 짓고 신당(神堂)과 사찰(寺刹)을 헐어버리는 등 음사(淫祀)를 혁파하였다. 51세에 제주에 유배된 오시복(吳始復)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삭탈 관작되어 영천(永川)으로 돌아왔다. 53세에 영광군수(靈光郡守)가 되어 당습(黨習)을 타파하는 데 힘썼다. 54세에 사직하고 영천(永川)으로 돌아왔다. 55세에 별호를 ‘순옹(順翁)’이라 하고 〈순옹설(順翁說)〉, <<가례혹문(家禮或問)>>을 지었다. 58세에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사우(祠宇) 중수(重修)로 인해 상주(尙州)로 이거(移居)하였다. 59세에<<악학편고(樂學便考)>> 4권을 찬(撰)하였다. 63세에 상주(尙州)에서 다시 영천(永川)으로 돌아왔다.
영조 4(1728)년, 76세에 무신란(戊申亂)(少論 李麟佐)이 일어나자 가선(嘉善)으로 오르고 경상하도(慶尙下道) 소모사(召募使)가 되었으나, 도백(道伯) 황준(黃璿)이 무고(誣告)하여 적당(賊黨)과 내통한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국문(鞫問)을 받고, 6월, 석방되었으며, 인천(仁川)의 조카 집으로 옮겼다. 영조 9년 11월 30일, 81세에 과천(果川) 객사(客舍)에서 졸하였다. ‘성리대전초(性理大全抄)’, ‘경서류초(經書類抄)’를 만들었으나 마치지 못하였다.
영조 35(1759)년에 광주(廣州) 우산(牛山)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영조 50(1774)년 손자(孫子) 이만송(李晚松)이 문집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李象靖의 跋, 刊記). 정조 20(1796)년 윤필동(尹弼東)의 추천으로 청백리(淸白吏)로 선록(選錄)되었고, 순조 29(1829)년 제주(濟州) 영혜사(永惠祠)에 추향(追享)되었다.
병와는 뛰어난 학식에도 불구하고 남인(南人)이라는 한계로 요로(要路)에 오르지 못하고 외직을 전전하였으나 저자는 이를 통해 도리어 많은 저술을 남기고 또 자신의 저작을 정리할 여유를 갖게 되었다. 특히 48세 이후 한적한 남인의 고장인 영천에 호연정(浩然亭)을 짓고 은거하면서 저작과 강학에 몰두하여 <<영양록(永陽錄)>>, <<경영록(更永錄)>>, <<지령록(芝嶺錄)>> 등의 시문집과 예학, 성리학 관계 저술을 남겼으며, 졸하기 직전까지 <<성리대전초(性理大全抄)>>, <<경서유초(經書類抄)>>를 작업하고 있었다고 한다. 유고 142종 326책이 전하고 있다. 문집에만도 3,886편의 시문이 실려 있다.
남인이면서도 당론(黨論) 조정에 앞장선 병와는 질서를 위하는 예학과 더불어 화합을 위한 악학(樂學)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또 성리학적 유교의 입장에서 민중의 신앙을 이단으로 강하게 배격하는 입장을 취해 경주와 제주 지역의 민간 신앙을 엄금하는 조치를 취하고 유교 교육을 통해 유교적인 사회 건설에 힘썼다.
박세당(朴世堂)이나 퇴계(退溪)의 예설(禮說)을 많이 인용하며 지지하였으며, 사칠론(四七論)을 논한 〈답정달삼(答鄭達三)>이 있고, <<자집고이의(子集考異議)>〉(1730)에는 우리나라 선유(先儒)들의 학설에 대해 비판을 가한 15편의 짧은 논(論)으로 서경덕(徐敬德), 유성룡(柳成龍), 정개청(鄭介淸), 권근(權近), 이수광(李睟光), 노수신(盧守愼), 장현광(張顯光), 남효온(南孝溫),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등의 설이 실려 있다.
병와는 예(禮)와 악(樂)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리나라 악곡(樂曲)에 매우 깊은 관심을 기울여 <<악학습령(樂學拾零)>>, <<악학편고(樂學便考)>> 등을 저술할 만큼 악학에 조예가 깊었다. <<병와집>>의 3-4권에는 악부만 실려 있는데 일명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으로 불리는 <<악학습령>>에는 저자가 수집한 한글 시조 1,000여 수가 수록되어 있다. 〈차익재잡영(次益齋雜詠)〉을 보면 우리나라에는 아악(雅樂)이 없어 악부(樂府)를 짓기가 힘들다는 논의에 대해 우리나라의 성음(聲音)을 살려 오음(五音)에 맞추어 지으면 된다는 저자의 견해가 나타나 있다. 주로 이제현(李齊賢), 강희맹(姜希孟), 이만부(李萬敷)의 운에 차운해 지은 것이 많다. 〈차익재잡영(次益齋雜詠)〉에서 각 제목의 아래 소주(小註)에 있는 심원춘(沁園春), 대강동거(大江東去), 수조가두(水調歌頭), 옥루지(玉漏遲) 등은 모두 사패(詞牌), 즉 가락을 지칭하는 사조명(詞調名)이고, 장지성도(將之成都), 과화음(過華陰), 망화산(望華山) 등이 바로 익재(益齋)의 악부(樂府) 제목이다(金成愛, <<甁窩集>> 해제).
인장 23과(果), 호패 9점, 거문고 1점, 홀(笏) 1점, 玉笛 1점, 칼(칼집 포함 2점), 표주박 2점, 청옥 벼루(상자 포함) 1점, 추구통(抽句筒) 1통(죽첩 1,270개), 화살 9촉, 입영(笠纓, 갓끈) 5개(상아 1, 옥 1, 호박 1, 흑옥 2), 관자(貫子) 4개(옥 2, 호박 2) 등 병와의 유품 12종 59점이 1982년 8월 7일 정부가 중요민속자료 제119호로 일괄 지정하였다.
또 <<선후천>>, <<악학편고>>, <<악학습령>>, <<강도지>>, <<남한박물>>, <<탐라순력도>>, <<둔서록>>, <<복부유목>>, <<정안여분>>, <<동이산략>> 등 10종 15책의 저서가 1979년 2월 8일 보물 제652호로 지정됐다. 후손 이수길의 <<병와 이형상의 삶과 사상>>(세종출판사, 2009)이 있다.
조선후기 흥해군(興海郡)의 향리로서 여항(閭巷)의 시인으로 유명하던 농수(農叟) 최천익(崔天翼; 1712-1779) 진사가 10세 무렵 병와(70세 무렵)가 큰 스승이라는 소문을 듣고 호연정으로 찾아가서 배움을 청하였다. 농수가 용모가 단정하고 경서의 뜻을 잘 이해하자, 병와가 크게 경이롭게 여기며 말하였다. “경향 각지에서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이 아이는 세상의 인재이다. 무슨 뜻으로 신동이 궁벽한 시골 바닷가에 태어났는가?”(<<農叟集>> <行狀>).
8)甁窩記 병와기
支而子賦性凡魯。都不曉世間物態。且其素性弛緩。靡合世用。以故人多賤之。而亦不以爲厭。嘗僦城西之數間草屋。供槐院(29세 승문원)仕。以其母與兄之寓於鄕故。居常懸𨀣 跡其心而仍其扁曰支而窩。
지이자(支而子)는 품성이 범상하고 둔하여 도무지 세상의 물정을 모르고 그 품성이 느릿하여 세상에 쓰이지 못하므로 사람들이 많이 천시하지만 또한 싫증을 내지 않는다. 일찍이 한양도성의 서쪽에 몇 칸의 초가에 살며 승문원(承文院)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어머니와 형이 고향에 계시므로 거처에서 늘 발돋움을 하고 그 마음을 따라 갔기에 편액을 지이와(支而窩)라고 하였다.
於甲子暮春(32세 1684년 3월)之昔。手老子道德經。頭溫(公警-誤錄字로 보임-역자)睡枕。偃息床間。困倦而臥。夢與一老翁相接。翁曰。支而駭矣。盍改以甁。余作而徵其實曰。窩有方尋之堗。袤而衾之。可臥四五人。周而席之。可坐十餘人。談者只希聖賢。來者不問淸濁。有容受而無違拒。有似乎甁之量焉。斯可以扁吾窩者乎。曰。否。
갑자년 3월에 손에 <<노자도덕경>>을 들고 머리에 사마온공(司馬溫公-司馬光)의 경수침(警睡枕, 둥근 나무 베개)을 베고 책상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피곤하여 누웠다. 꿈에 한 노인과 마주 하였는데 노인이 “‘지이(支而)’라는 것은 해괴한데 어찌 ‘병(甁)’으로 고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일어나서 ‘병’자로 하는 이유를 생각하여 말했다. “움집에는 사방 한 길(尋)의 온돌방이 있어서 이불을 펴고 네댓 사람이 누울 수가 있고, 둘러앉으면 열 명 넘게 앉을 수가 있으며, 대화는 다만 성현의 말씀을 나누기를 바라고, 방문자는 행실이 맑고 탁한 것을 묻지 않으니 받아들임에 거부함이 없어서 병의 국량과 닮았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내 움집을 병으로 편액 하십니까?” 하니, 노인은 “아니다”고 하였다.
窩有揷架牙籤。對之頓覺神豁。讀之益復味甘。親友之講文者。以此而啖之。兒曺之餒學者。以此而餉之。含英者心醉。咀華者志泰。有唱和而勤酬酢。有似乎甁之酒焉。斯可以扁吾窩者乎。曰。否。
제 움집에는 서가와 상아 표찰이 있으니 마주하면 문득 정신이 깨어나고 시원해지며, 책을 반복하여 읽으면 감미롭습니다. 글을 강론하는 벗은 이것으로 먹이고, 배움에 굶주린 어린이는 이것으로 배부르게 하며, 문장의 아름다움을 머금은 자는 심취하고, 문장의 묘미를 음미하는 자는 뜻이 태평하여, 시를 주고받으며 수작하는 것은 병에 들은 술을 마시는 것과 닮았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나의 집을 병으로 편액 하십니까?“라고 하니, 노인은 ”아니다.“고 하였다.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농욱한 글에 푹 젖어들고, 그 묘미를 머금고 씹어서 문장을 지어내니, 그 글이 집에 가득하다.〔沈浸醲郁 含英咀華 作爲文章 其書滿家〕”
窩有西南二竅。皆可樞戶者。而猶嫌其煩。膠其西而牖其南。闢而邀之。入者不患無門。闔而守之。出者必稟主裁。操縱在我。送迎隨心。言語而欲愼者。似乎甁口之易守。斯可以扁吾窩者乎。曰。否。
“움집에는 서남쪽 두 구멍이 있으니 모두 문을 달수가 있으니 그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서쪽은 막고 남쪽을 문으로 만들어 열어서 맞이하매 들어오는 사람이 문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고, 닫아서 지킴에 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주인의 허락을 받으니, 조종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보내고 맞이함을 마음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말을 신중하게 하는 것은 병의 주둥이를 지키기 쉬운 것과 닮았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나의 움집을 병으로 편액하십니까?”고 하니, 노인은 “아니다.”고 하였다.
窩有容物之量。而不足以扁吾窩。窩有代酒之物。而不足以扁吾窩。窩有守口之戒。而不足以扁吾窩。窩果何扁乎甁耶。其亦有待於甁。而有足以扁吾窩者乎。
“움집이 사물을 받아들이는 국량이 있음에도 움집을 병으로 편액하기에는 부족하고, 움집이 술을 대신하는 물건이 있음에도 움집을 병으로 편액하기에는 부족하고, 움집이 입을 지키는 경계가 있음에도 나의 움집을 병으로 편액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하시니 움집은 과연 무엇 때문에 병으로 편액 하시는지요? 그 또한 병에 의탁하여 나의 움집을 편액하기에 충분한 것입니까?”고 하고 노인에게 물었다.
甁於陶器中。爲物最微。見之者不取。聞之者不貴。質甚陋而用甚狹。主人之才。似乎近之。
體有大小。量有淺深。多不滿一斗。小僅容數升。如人之食量有限。要之滿腹而止耳。不可强而過之。主人之智。似乎近之。
병은 질그릇 가운데서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이니 보는 사람은 가지려 하지 않고, 듣는 사람은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질박하여 심히 누추하고 쓰임새가 심히 협소하여 움집의 주인인 저의 재주와 닮았습니다.
器局頗深。不至淺露。形形者色色者。味淡者臭薰者。紅友綠茗之停蓄其中者。只可以隨注隨見。不可以窺闖覘空。則雖不敢自擬於城郭之深。亦所髣髴而不欲輕淺者也。
그릇의 국량은 자못 깊어서 얕음이 드러나지 않고, 다양한 모양의 것, 다양한 색이 있는 것, 맛이 담박한 것, 냄새가 향기로운 것, 술과 차를 그 가운데에 담아 놓은 것은 따라보고 눈으로 보아야 알 수가 있고, 비었는지 엿볼 수가 없으니 비록 스스로 성곽의 깊음에 비슷하다고 하지는 않지만 또한 비슷하니 병을 가볍고 얕은 것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습니다.
若其當傾危。則順其勢而勇轉。遇患難則踵雖破而不旋。此其處不幸之道。而不可以埴物而忽之也。
기울어져 위태로워지면 그 형세에 따르고 용감하게 돌며, 환난을 만나면 깨어질지언정 선회하지 않으니, 이것은 불행에 처신하는 도이니 흙으로 만든 물건으로만 홀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然則甁之扁。何取乎。才乎智乎。城郭之深乎。處不幸之道乎。取其人與物之近似者而則之。鑒其才與智之淺短者而勉之。廓城郭而敝之。處不幸而思之則幾矣。若夫傾其實酌彼罍曰。此余所以扁吾窩者。吾未見其可也。
그러한즉 병으로 편액하는 것은 무엇의 의미를 따온 것입니까? 재주입니까? 지혜입니까? 성곽의 깊음입니까? 불행에 처신하는 도입니까? 그 사물과 사람이 닮은 것을 취하여 본받으니 그 재주와 지혜의 얕고 짧은 것을 거울삼아 힘쓰고, 성곽의 둘레가 무너진 것이나 불행에 처하여 병의 덕성을 생각하면 큰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내용을 기울여서 저 술독을 따르면 이것이 제가 저의 움집에 병으로 편액하는 까닭이 되는데 이렇게 보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老人莞爾而笑。余亦蘧然而覺。遂錄之以爲記。
노인은 빙그레 웃었고, 나 또한 바로 잠에서 깨어났다. 이런 일을 적어서 기문으로 삼는다.
-甁窩先生文集卷之十四
9) 병와, 공재 윤두서, 다산 정약용
①다산의 호연정 방문 시
陪家君至永川,訪李氏溪亭(則浩然亭)
아버지를 모시고 영천에 이르러 이씨의 시냇가 정자 호연정을 방문하여
伏檻臨秋水 난간은 가을물에 붙어 있고,
周垣帶夕陽 담장은 석양을 띄었네.
竹深容鳥雀 깊은 대숲 참새들 받아들이고,
松偃積風霜 굽은 솔 풍상을 겪었네.
著述窮三禮 저술은 삼례를 밝혔고,
文華蓋一鄕 문장은 한 고을을 덮었네.
遺徽逮久遠 남긴 인문은 오래도록 미치니,
瞻仰在祠堂 사당에서 우러러 바라보네.
定本 여유당전서 223쪽 詩集 卷一
[주-D001] 浩 : 新朝本에는 ‘活’로 되어 있다.
***병와의 조카사위(姪壻)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이고, 윤두서의 손자사위(孫壻)가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이다. 정재원은 병와에게 경사(經史)를, 윤두서는 예학을 배웠다. 다산은 아버지에게 경사를 배웠다.
②목민심서의 병와
이형상(李衡祥)이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었는데, 제주에는 광양당(廣壤堂)이란 것이 있어 이 고장 백성들이 여기에 기도하는 것이 풍속으로 되어 있었다. 이형상이 그 사당을 태워버리라 명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기며, “옛날에 김치(金緻)가 영남 관찰사(嶺南觀察使)가 되었을 때 태백산 신사(太白山神祠)를 헐어버린 일에 견줄 만하다.”라고 하였다.(李衡祥爲濟州牧使,州有廣壤堂,土民祈禱成風。公命焚之,聞者稱快。昔金緻觀察嶺南,毀太白山神祠,可以匹美云)
혹시 고을에 음사(淫祀)하는 잘못된 관례가 전해 오는 것이 있으면 사민(士民)들을 깨우쳐 철훼(撤毁)하기를 도모할 것이다.
-목민심서 예전(禮典) 6조 / 제1조 제사(祭祀)
***광양당(廣壤堂) : 제주도 남쪽 호국신사(護國神祠)의 당명(堂名)이다. 이곳 전설에, 한라산신(漢拏山神)의 아우가 날 때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고 죽어서는 신이 되었는데 고려(高麗) 때에 송(宋)나라 호종단(胡宗旦)이 와서 이 땅을 압양(壓禳)하고 배를 타고 돌아가자, 그 신이 매로 변해 호종단의 배를 쳐부숨으로써 호종단이 끝내 비양도(飛揚島) 바위 사이에서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조정에서 그 신의 신령함을 포창하여 식읍(食邑)을 주고 광양왕(廣壤王)을 봉하고 나서 해마다 향(香)과 폐백을 내려 제사하였고, 조선조에는 본읍(本邑)으로 하여금 제사 지내게 했다. 제주에서는 봄가을로 남녀가 광양당(廣壤堂)과 차귀당(遮歸堂)에 모여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에게 제사한다.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 1702년에 1년간 제주 목사(牧使)로 와서 광양당을 불태웠으며, 각 마을마다 있었던 129개의 신당을 없앴지만 그 이후에 다시 복구되었다.
2. 완귀정(玩龜亭)
1)완귀정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20호.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안증(安嶒)이 건립한 주택으로, 완구정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사랑채의 당호(堂號)이다.
안증은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학문을 가르쳤으나 인종이 등극한 지 1년도 못 되어 승하하자, 낙향하여 1546년(명종 1)에 이 주택을 건립하였으며, 1695년(숙종 21)에 안후정(安后靜)이 중수하였다.
이 주택은 좌측에 정침(正寢)을 두고 우측에 사랑채를 배치하였는데, 정침 부분은 대문채·방앗간채·안채가 ㄷ자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완구정과 식호와(式好窩)가 ㄱ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2개의 건물은 모두 호계천(虎溪川)을 향해 자리잡고 있다.
완구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인데, 정면은 단층으로 되어 있으나 후면은 누각(樓閣)으로 꾸며 호계천을 향하고 있다. 평면은 어간(御間)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온돌방을 두었으며, 전면에는 퇴간(退間)을 두었다.
가구(架構)는 5량가이며, 주상(柱上)에는 이익공(二翼工)으로 장식하였다. 식호와는 1746년(영조 40)에 건립된 것으로 문객들이 글을 읽으며 쉬어가던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기와집으로, 평면은 어간 3칸을 온돌방으로 꾸미고, 좌우 측간에는 마루를 꾸몄다.
2)안증(安嶒, 1494-1553)
자는 사겸(士謙), 호는 완귀(玩龜)이다. 고조는 안강(安崗)이며, 증조는 전옥서(典獄署) 주부(主簿) 안숙양(安叔良), 조부는 인의(引儀) 안보문(安普文)이다. 아버지 사간(司諫) 안구(安覯)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도이며, 어머니 진도 김씨(珍島金氏)는 사정(司正) 김저(金渚)의 딸이다.
부인 영양 최씨(永陽崔氏)는 도사(都事) 최숙강(崔叔强)의 딸이며,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 안종경(安宗慶)을 데려다 후사를 이었다.
안증은 아버지가 김종직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처음부터 벼슬에는 뜻이 없고 학문에만 심취하여 성리학의 이론을 깊이 터득하였다. 후일에는 성리학의 이론이 실제 생활과는 유리되는 점이 많음을 지적하고 실학 사상에 심취하였다. 결국 실학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벼슬길에 오르지 않겠다던 평소의 마음을 고쳐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좌랑을 거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사서(司書)·설서(說書)가 되었다.
이로부터 후일 인종이 된 세자에게 학문보다는 정치 문제에 큰 비중을 두고 강론을 하였다. 그러나 병약한 인종이 즉위한 지 일 년도 못되어 승하하니 모든 백성은 반상에 관계 없이 엄격한 평등을 지향하는 민본사상을 주창한 공의 이상이 무산되었다. 또한 을사사화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장을 목격하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인종의 태실이 있으며, 평소 보아둔 이곳 영천으로 내려와 완귀정(玩龜亭)을 짓고 유유자적하니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서로 안증의 지조를 칭송하는 시를 지어 주었다. 1553년 3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목판본인 8권 1책의 『완귀실기(玩龜實記)』가 있다. 영천시 도동(道東)의 호연사(虎淵祠)에 제향되었으나 현재는 유허비만 남아 있고,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道南洞)에 안증이 건립한 완귀정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증 [安嶒]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3)안후정(安后靜, 1659-1702)
본관은 광주. 자는 군경(君敬), 호는 성재(省齋)이며, 1659년(효종 10) 도동리(道東里)[현 영천시 도남리]에서 태어나 1702년(숙종 28) 10월 18일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안광소(安光韶)이며, 증조는 감찰(監察) 안전(安琠), 조부는 증(贈) 판결사(判決事) 안명한(安鳴漢)이다. 아버지는 안세영(安世英)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 成氏)로 성길(成 日+吉)의 딸이다. 부인은 의인(宜人) 오천 정씨(烏川鄭氏)로 진사(進士) 정사현(鄭思賢)의 딸이며, 슬하에 6남을 두니 안여택(安汝宅)·안여이(安汝履)·안여행(安汝行)·안여인(安汝仁)·안여기(安汝器)·안여국(安汝國)이다. 안후정은 몸소 밭을 갈고 가꾸며 힘써 배워 1691년(숙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169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700년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보임되었다가 학록(學錄)으로 전보되었다. 1702년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가을에 학정(學正)으로 승급되었으나 나아가지 못했다. 목판본인 4권 2책의 『성재일고(省齋逸稿)』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후정 [安后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 호연정(浩然亭)
1)호연정
병와 이형상이 영천에 정착한지 11년째 되던 해인 1710년경 건립되었다. 영천에 정착한 후로도 제주와 경주에 외직을 지내고 있는 사이 정자를 짓기 시작해 완전히 벼슬을 버리고 난 1710년경에 정자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상량문에 초옥삼간(草屋三間)이라는 기록이 있어 건립 당시에는 초가집 3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근대 일제 강점기에 중건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추정하기로 중건되면서 정자 남쪽 강변에 담장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형상은 정자를 완성하고 수많은 저술 활동을 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호연정은 방형의 토석 담 정면 우측에 난 사주문을 들어서면 ‘一’자형의 정자가 강변 언덕에 남동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가운데 대청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다음 전면에 반 칸의 퇴를 둔 전형적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이다.
대청 뒤와 건물의 측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해 동선의 편의를 도모했다. 전면의 퇴 가장자리에는 계자각 난간을 두른 헌함을 두어 운치를 더했다. 창호는 청방간과 청퇴 간에 사분합 들문을 달아 공간 확장을 꾀했고 대청 배면에는 판벽에 쌍여닫이 판문을 두어 주 진입부로 삼았다. 이로 해서 호연정의 진입구성은 후면 진입이다. 방의 전면에는 머름 위에 쌍여닫이 세살창을 달았다.
구조는 퇴칸에만 원주를 세우고 누하 공간과 누상 공간으로 만들었으며 나머지는 방주를 세웠다. 퇴칸의 기둥 상부는 연화문을 초각한 앙서로 초익공 양식을 취했고 주 간에는 창방과 장혀 사이에 소로를 끼웠다. 대들보 위에 중보를 얹고 화문을 초각한 단지형의 대공을 받쳐 오량 가의 가구를 완성했다. 지붕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에 서까래는 선자연으로 처리해 격식을 갖추었다. 지붕 위는 한식기와와 일식기와가 혼용되어 있다.
호연정 정면 어칸 상부에 ‘호연정(浩然亭)’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 청퇴간 상부에 ‘시집재(是集齋)’, 좌측방 상부에 ‘역락료(亦樂寮)’, 우측방 상부에 ‘이양루(二養樓)’의 현판이 걸려 있다. 또 청방 간 상부에 ‘호연정상량문(浩然亭上樑文)’과 ‘호연정중건기(浩然亭重建記)’가 걸려 있다.
정자 뒤로는 보물 제652호로 지정된 병와 이형상 수고본(手稿本)을 보관하는 유고각이 있다. 내부에는 병와 이형상이 저술한 책과 유품이 보관되어 있고 성남서원에 봉안 되어 있었던 「오성도」도 함께 있다. 정자는 중건 이후 관리가 잘되고 있다. 한편 정자 남쪽은 담장 아래로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
호연정은 18세기 초에 건립되어 근대에 중건된 건물로 특히 지붕을 겹처마로 구성하고 일식기와가 있는 점, 청퇴 간 상부에 교살 유리창이 있는 점, 창방 부재의 단면이 매끄럽게 모죽인 점 등 근대에 흔히 나타나는 특징으로 시대적 변화에 따른 건축 기법이 잘 드러난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연정 [浩然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 檀琴銘幷序 단금명과 서문
사진9. 병와 이형상의 단금(檀琴)
舜以桐。嵇以漆。檀琴非古也。然以漢挐爲嶧陽。以赤松爲檀君。帶吳爺筆。自耽羅携還。則後
之視今。亦古也。況爾聲淸切而疏越。吾不容濁焉俗焉者。音豈不人太古而器太古哉。是爲銘。
白鹿潭友仙。淡如也。瀛州海伴書。浩如也。甁窩之鼓。繹如也。
순(舜) 임금의 오동나무 거문고, 혜강(嵇康)의 옻칠한 거문고가 있는데, 이 박달나무 거문고는 옛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라산을 역양(嶧陽)으로 삼고, 적송(赤松)을 단군(檀君, 檀香木)으로 삼았다. 오판서의 편지와 함께 탐라에서 들고 돌아왔으니 뒷날에 오늘의 것을 보면 또한 옛 것이 된다. 하물며 거문고 너의 소리가 맑고 절절하며 시원하고 빼어난데, 나는 탁하고 속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함에야. 소리야 어찌 태곳적 사람이 연주하는 것이 아니고 태곳적 악기의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것으로 명을 삼는다.
백록담(白鹿潭)에서 신선을 벗하였으니 맑다.
영주(瀛州) 바다에서 책을 벗하였으니 드넓다.
병와(甁窩)가 타니 소리가 흘러나온다.
-甁窩先生文集卷之四
***舜桐: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옛날 순 임금이 오현금으로 남풍가를 불렀다.” 하였고, 《공자가어(孔子家語)》 〈변악해(辨樂解)〉에 “옛날 순 임금이 오현금을 타면서 남풍시를 지었다. 〔昔者舜彈五弦之琴 造南風之詩〕” 하였다.
***嶧陽: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역산(嶧山)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역산에 오동나무가 많이 자라는데, 이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들면 아주 좋은 소리가 난다고 한다. 《서경》 〈우공(禹貢)〉에 “역산 남쪽에 우뚝 자란 오동나무를 조공한다.〔嶧陽孤桐〕” 하였다.
***嵇琴: 嵇康 所抚之琴。《晋书·阮籍嵇康>>, 高承 《事物纪原·乐舞声歌·嵇琴》:“或曰嵇琴,嵇康 所制,故名嵇琴”
***병와는 장희빈 복위를 주도하다 1702년 제주 대정현의 외딴섬에 위리안치된 남인 오시복(吳始復, 1637-1716)을 옹호하다 1703년 51세에 삭탈관작되어 영천으로 돌아왔다. 오시복은 이조와 호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병와의 제주목사 시절 행정에 조언을 하였고, 병와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오시복은 행서와 초서의 달인이었다.
3) 檀琴 以漢挐自枮檀香爲琴
단금 한라산의 저절로 고사한 단향목(檀香木)으로 거문고를 만들었다.
山是三神一 산은 삼신산의 하나이고,
檀爲太白餘 단향목은 태백산 신단수(神檀樹)의 자취이네.
吾將千古意 나는 천고의 뜻을 기약하여,
晨夕六絃於 새벽, 저녁으로 여섯 현에 노니네.
*枮:枯의 誤刊.
*단향(檀香): 단향목, 전단목(栴檀木), 백단(白檀), 축법진(竺法眞), 진단(眞檀)
*삼신산: 신선이 사는 봉래, 영주, 방장 세 산.
-甁窩先生文集卷之一。
3. 서세루(瑞世樓)
1)영천군전도(1872)
2)신증동국여지승람 영천군(永川郡)(발췌)
【군명】 절야화(切也火)ㆍ임고(臨皐)ㆍ영주(永州)ㆍ익양(益陽)ㆍ영양(永陽)ㆍ고울(高鬱).
【산천】 모자산(母子山) 고을 북쪽 90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사룡산(四龍山) 고을 남쪽 50리에 있다. 채약산(採藥山)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금강산성(金剛山城) 고을 동쪽 8리에 있다. 공산(公山)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대구부(大丘府) 조에도 있다. 작산(鵲山) 고을 남쪽 6리에 잇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이 고을의 지형이 나는 봉(鳳)과 같다.” 하는데, 봉은 대나무를 사랑하고, 또 까치가 지저귀고 날아가지 않는 것을 보았으므로 산의 이름을 작(鵲)이라 하고 또 죽방(竹防)이라고도 한다. 죽방산(竹防山) 고을 남쪽 9리 떨어진 곳의 남천(南川)과 북천(北川) 두 물 어구에 있다. 청경산(淸景山)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보현산(普賢山) 혹은 모자산(母子山)이라고도 하며, 청경산에서 나와서 명원루(明遠樓) 밑을 거쳐서 북천과 합하여 흘러 가다가 하양현(河陽縣) 남천이 되었다. 북천 고을 북쪽 6리에 있는데, 모자산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청통역(淸通驛)에 이르고 남쪽으로 남천과 합해서 동경도(東京渡)가 되었다. 이 고을이 두 물이 합류하는 곳에 있기 때문에 영천(永川)이라고 이름했으며 영(永) 자는 이수(二水)를 뜻한다. 범어천(凡魚川)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그 근원이 사룡산(四龍山)에서 나와서 동경도(東京渡)로 들어갔다. 자을아천(茲乙阿川) 옛날 신녕 북천 상류에 있다. 서천(西川) 신녕현 서쪽 1리에 있는데, 공산(公山)에서 흘러나와서 고을 북천과 합하여 흐른다. 시천(匙川) 고을 서쪽 16리에 있는데, 근원은 공산에서 나와서 하양현 남천 상류로 들어갔다. 동경도(東京渡)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청천지(菁川池)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신증』 병풍암(屛風巖)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누정】 명원루(明遠樓) 객사 동남쪽에 있으며, 삼면이 모두 넓고, 아래에는 큰 냇물이 있어 남쪽으로 흐른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 제명원루(題明遠樓)
청계석벽포주회(淸溪石壁抱州回) 맑은 시내 돌벼랑은 고을을 안고 도는데
갱기신루안활개(更起新樓眼豁開) 다시금 새 누각 이룩하니 눈이 활짝 트이네.
남묘황운지세숙(南畝黃雲知歲熟) 남쪽이랑 누른 벼는 풍년이 왔음을 알리고
서산상기각조래(西山爽氣覺朝來) 서산의 서늘한 기운에 아침이 되었음을 깨닫네.
풍류태수이천석(風流太守二千石) 풍류 즐기는 태수는 녹봉이 이천석인데
해후고인삼백배(邂逅故人三百杯) 옛 벗을 우연히 만났으니 술이 삼백 잔이라.
직욕야심취옥적(直欲夜深吹玉笛) 곧바로 밤이 깊어 옥피리를 불면서
고반명월공배회(高攀明月共徘徊) 높이 밝은 달 휘어잡고 함께 배회하고 싶네.” 하였다. ○ 이용(李容)의 시에, “새로운 누각 우뚝한데 나는 새 돌아오고, 여기 오르니 좋은 회포 저절로 열려오네. 딴 고을 사는 옛 친구 다시 만나기 어렵고, 올해의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네. 시내가 비었으니 물 그림자는 노래하는 부채를 흔들고, 산이 가까우니 가을 빛은 술잔에 떨어지네. 2년 동안 적은 녹봉으로 무슨 일을 이루었는가. 천 리 밖에 혼자 서서 부질없이 배회하네.” 하였다.
『신증』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영천(永川)은 경상도에서 제일 아름다운 군으로서 우리 고향 대구와 멀지 않다. 무진년에 내가 태수 손선생(孫先生) 사성(士成)을 뵙고 말하기를, ‘이 군(郡)을 영(永)이라고 일컫는 이수에서 취한 뜻이니, 대개 이수(二水)는 근원이 모자산(母子山)에서 나와서 두 갈래로 나뉘어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흐르다가 이 고을 앞에 이르러 하나로 합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은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나를 끌고 높은 데 올라 바라보매, 내 시험삼아 좋은 산천의 경치를 대략을 그리고 여기에 누(樓)까지도 써 보았으나 몹시 화려한 글이 되지 못했다. 그 뒤 임오년 가을에 내가 사신이 되어서 영지군(永知郡)에 이르니, 지군(知郡) 김선생(金先生)이 나를 맞아 함께 누각에 올라 종일토록 술 마시고 글을 읊었다. 누의 건물이 크고 넓으며 단청 빛이 아름다워 옛날과 다르니, 이는 전 태수 정차공(鄭次恭)공이 중수한 것이다. 을미년에 내가 사신이 되어 다시 이곳에 왔었고, 그 뒤 무술년 가을에 남도(南道)를 순찰하면서 이름난 누각을 두루 찾았으니, 진주(晉州) 촉석루(矗石樓)ㆍ안동(安東) 영호루(映湖樓)ㆍ밀양(密陽) 영남루(嶺南樓)ㆍ울산(蔚山) 대화루(大和樓)ㆍ양산(梁山) 쌍벽루(雙碧樓)ㆍ김해(金海) 연자루(燕子樓) 등은 모두 이름난 곳들인데 이 누의 경치도 또한 이 누각들과 비슷할 뿐 아니라, 명원루가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재상 김극련(金克鍊)후가 번잡한 일을 잘 처리하는 재능이 있어 동서쪽의 별실을 고쳐 지었는데, 모양을 옳게 하였기로 내 몹시 칭찬했었다. 그 뒤 오래 되어 임인년 가을에 신윤종(申允宗)후가 원으로 나갔는데, 부임한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정치가 잘 되고 사람들이 화합하여 까다롭게 하지 않고서도 저절로 엄하게 되었다. 이에 동쪽 별실을 고쳐 짓고 거기에 조그만 마루를 붙여 지어서 이름을 청량당(淸涼堂)이라고 하였다. 또 서쪽 별실을 만들어 크게 마루를 붙여 지은 다음, 이것을 쌍청당(雙淸堂)이라고 했는데 모두 몹시 정미했다. 을사년에 개연히 이 누를 새로 고칠 생각이 있어 낡은 곳을 보충하고 찌그러진 곳은 고치며, 또 단청을 새로 하니 정하고 빛나기가 전보다 백 배는 더했다. 따로이 포주(庖廚) 아홉을 만드니 누각의 제도가 이에 이르러서 크게 고쳐졌다. 그 동안에 조카 팽소(彭召)가 나에게 기문을 쓰기를 청하기로 나는 말하기를, ‘이 명원루가 생긴 지 이미 오래라서 고려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고을을 지난 사람으로 영웅 호걸과 문인 재사(才士)가 그 몇 명인지 알지 못하건만 아직까지 기문을 지은 이가 없었는데, 내가 어떤 사람이길래 뻔뻔스럽게 이를 짓겠는가.’ 하고 여러 날을 끌어 왔었다. 이제 다시 누차 청하니 사양할 길이 없어 이에 기문을 쓰는 것이다. 내 일찍이 명원(明遠)의 뜻을 이 고을의 한두 부로들에게 물었더니 절간의 복잡한 말을 하므로 나는 한 번 웃고 그만두었다. 내 생각건대 한유(韓愈)의 시에, ‘먼 곳을 보는 눈이 쌍으로 밝은 것을 더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명원의 뜻은 혹시 여기에서 나온 것인가. 보건대 그림 그린 기둥, 나는 듯한 대들보와 겹으로 된 처마, 구부러진 난간이 팔면으로 활짝 열려 있어 사방에서 바라다 보아도 모두 통해서 명랑하고 상쾌하며, 크고 넓어서 위로 하늘에 닿아 별을 딸만하고 아래로 땅에 닿지 않았는데, 맑은 냇물을 움킬 만하다. 하늘과 땅이 맑고 편안하며 바람과 달이 활짝 개서 사계절의 아침과 저녁이 광명하고 맑은 기운이 길이길이 발과 책상 가운데 있고, 풍속의 티를 벗어나고 세상 티끌을 끊어 한 점 티도 그 사이에 없으니 이른바 명(明)이라는 것이요, 바라다보면 모든 산이 둘러싸이고 여러 산봉우리가 높고 높아서, 푸르게 튀어나고 푸르게 솟아 있는 것이 연기와 구름 아득한 안개 속에 출몰하여 저 멀리 몇 백 리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다. 긴 숲과 큰 들판은 꾸불꾸불 평탄하며, 누른 밭두둑 푸른 풀밭은 가로세로 뻗쳐 있어 하늘이 길어도 끝이 없고 새가 날아도 다하지 못하여 저 멀리 그 끝간 데를 알지 못하겠으니, 이른바 원(遠)이라는 것이다. 이 누에 오른 이는 장막속에 칼을 차고 창을 든 대부가 아니면 반드시 진신(搢紳)의 의관을 한 군자들로서, 모두 고명하고 원대한 의견이 있는 사람들이라, 눈을 들어 멀리 명원한 뜻을 보게 되니, 반드시 마음으로 터득하고 스스로 얻을 것이다. 전후에 원이 된 자가 또한 모두 밝게[明] 판단한는 재주와 크고 먼[遠] 그릇이 있어서, 비록 조그만 일을 경영하는 데도 역시 여러모로 계획해서 혹은 보충하고 혹은 더하며, 혹은 수리하고 혹은 고쳤으니, 그 마음 쓰는 것이 역시 부지런하지 않은가. 아, 명원이란 뜻을 크다고 할 것이다. 사람이 막힌 데를 보면 밝지 못하고 밝지 못하면 멀지 못할 것이니, 군자가 고명(高明)하고 궁원(窮遠)한 데 거하여 먼데를 보는 것이 오직 밝은 연후에라야 가히 이치가 통달하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니, 누라고 유독 그렇지 않겠는가. 신후(申侯)가 군을 다스린지 6년에 여기에 종사해서 정치를 잘한다고 조정에 알려지자 칭찬하고 멀지 않아 불러 들이게 되었으니, 명성이 더욱 밝게 나타나고 먼 곳에 전해졌음이 의심 없을 것이다. 내가 태사(太史)의 장(長)이 되었으니 불가불 대서특필하여 찬미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우선 이렇게 써서 기문을 삼노라.” 하였다.
『신증』 청량당(淸涼堂) 명원루 동쪽에 있다. ○ 조위(曹偉)의 시에, “새로이 화려한 집을 지어 물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내 여기 올라서서 있은 지 오래어라. 더운 바람 꽃다운 풀 개인 냇물 멀었고, 떨어지는 해 외로운 구름 새만 홀로 날고 있네. 산 안개 몽롱하여 주렴밖에 떨어지고, 버들 꽃 어지러이 모자 가에 불어오네. 밤이 깊자 달이 난간 위에 올라오니, 한결같은 청량(淸涼)한 맛 홀로 알고만 있네.” 하였다. 쌍청당(雙淸堂) 명원루 서쪽에 있다.
【고적】 임천폐현(臨川廢縣) 본래 골화소국(骨火小國)인데 신라 조분왕(助賁王) 때에 이곳을 쳐서 빼앗아 가지고 현(縣)을 두었었다. 경덕왕이 임천(臨川)으로 고쳐서 임고군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 초년에 인하여 붙였으니 고을 동남쪽 5리에 있다. ○ 김유신(金庾信)이 고려를 칠 계획으로 골화관(骨火館)에 나와 잤는데 바로 이곳이다.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있다.
【인물】 고려 황보능장(皇甫能長) 태조(太祖) 때 사람이며, 금강성장군(金剛城將軍)이 되어 공이 있다. 자기가 일으킨 땅 골화(骨火)ㆍ도동(道同) 등 현을 합쳐서 영주(永州)를 만들었다.
【우거】 고려 정몽주(鄭夢周) 고을 동쪽 우항리(亐項里)에서 났으며, 영일(迎日) 인물(人物) 편에 자세하다.
【효자】 양배(楊培) 벼슬이 동래 병마사(東萊兵馬使)에 이르고, 부모를 위하여 3년 동안 여막에서 살아서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성곽】 읍성(邑城) 선조(宣祖) 24년에 쌓았다. 둘레 1천 9백 2척이며 우물 세 개가 있다.
【사원】 임고서원(臨皐書院) 명종(明宗) 을묘년에 세웠으며, 선조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정몽주 문묘 조에 보라. 황보인(皇甫仁) 자는 사겸(四兼)이요, 호는 지봉(芝峯)이며, 영천인(永川人)이다. 단종(端宗) 계유년에 화를 입었으며,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장현광(張顯光) 성주(星州) 조에 보라.
3)조양각(朝陽閣)(발췌)
조양각은 금호강이 시가지의 중심을 관통하는 창구동 1-1번지에 있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 당시 부사였던 이용이 남천과 북천이 합류하는 금호강의 절벽, 현재의 위치에 지었다.
명원루는 1592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소실됐다. 인조 15년(1637)영천군수 한덕급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명원루 자리에 누각 15칸과 협각 3칸을 지어 ‘조양각’이라고 명명했다. ‘조양’은 ‘시경’의 ‘대아권아 편’에 나온다. “봉황은 동쪽에서 뜨는 아침 햇살(朝暘)에 운다“라는 구절에서 얻어왔다. 영천의 지세가 ‘날아가는 봉황새’ 모양인데 아침햇살에 우는 봉황은 길조라는 뜻이다.
조양각은 강 쪽에서 보면 ‘조양각’ 이고 조양공원 마당 쪽에서 보면 ‘서세루(瑞世樓)’다. 봉황이 사는 세상이니 당연히 상서로운 세상(瑞世)일 거라고 붙인 이름이다. 영조 18년 (1742)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떨치던 윤봉오가 조양각을 중창하면서 서세루라는 현판을 써 달았다. 윤봉오는 조양각의 규모를 확대해 중수했는데 별실을 마련하고 내문을 남덕문, 외문을 곤구문이라 했다. 지금은 별실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았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 누각안에는 방이 한칸 있는 팔작지붕 구조다.
영천시는 조양각 일대를 조양공원으로 조성했는데 왕평 이응호의 황성옛터 노래비, 한국 여성 최초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던 여류소설가 백신애 표석비, 산남의진비가 있다. 눈길을 끄는 표지석이 하나 더 있다. ‘조선 통신사의 길’ 비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우리나라 통신사가 국서를 들고 일본으로 가던 중 영천에 머물렀다는 기념비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왕래 400주년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영천에서 고을살이를 했던 목민관 21좌 선정비 “나의 외증조부 영의정 만사(심지원 군수의 호)는 원님으로 1년 있으매 후택이 흡족하여 읍민이 비를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다. 그 뒤 82년 만에 소자가 또한 여기 고을살이 하매 글자도 희미하게 마태가 끼어서 흠감함을 금할 수 없네. 비각을 짓고 다시 새겨 오래도록 전하고자 한다” (심지원 군수 청덕비)
심지원은 군수를 지낸 뒤 1년만에 사헌부집의로 발령받아 조정에 들어갔다가 효종때 영의정에 까지 올랐다. 영천 사람들의 인심을 얻었는지 영천 송곡서원에 배향됐다. 청덕비를 쓴 이는 외증손인 이명희 군수로 그도 역시 선정을 하여 청덕선정동비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김동완, 경북일보 2016년 8월 19일
4)조양각시문집(朝陽閣詩文集)
현재 조양각에는 이 건물과 관련된 시문을 새긴 현액이 무려 70여 점이나 걸려 있는데, 『조양각시문집』은 바로 이 조양각에 걸려 있는 시문들과 문헌에 기록된 조양각 관련 시문들을 함께 모아 번역한 것이다.
『조양각시문집』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정몽주(鄭夢周) 등 112명이 쓴 120여 편의 한시와 서거정의 「명원루기(明遠樓記)」와 6편의 중수기(重修記), 2편의 상량문이다. 조양각에서 시문을 남긴 인물들 가운데는 정몽주·유방선(柳方善)·서거정(徐居正)·김종직(金宗直)·조위(曺偉)·이현보(李賢輔)·이행(李荇)·이이(李珥)·박인로(朴仁老)·이안눌(李安訥)·남공철(南公轍)·조긍섭(曺兢燮) 등 우리나라 문학사와 정신사에서 큰 위상을 차지하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부록으로 첨부된 환벽정 관련 시문에는 서거정 등 37명의 한시와 송준길(宋浚吉)이 쓴 「환벽정기(環碧亭記)」가 수록되어 있는데, 환벽정에서 시문을 남긴 인물 가운데서도 서거정·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김상용(金尙容)·홍익한(洪翼漢)·남구만(南九萬)·송준길 등의 저명인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조양각시문집』(영천시, 1983)/『조양각시문집』(영천문화원, 2004)
5)계미통신사 기록
영조39년(1763) 8월 16일 경자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영천에 도착하였다. 본군에서 지공하였다. 영남 관찰사 김상철(金尙喆) 공이 조양각(朝陽閣)에 와서 전별연을 베풀어주었다. 개령, 안음, 칠곡에서 주연상을 나누어 준비하였고, 안동, 의성, 경주 및 본군에서 기생과 악공을 모두 불러 모았다. 객사는 본래 넓고 탁 트인 곳으로 이름이 있었으나 주연상이 사방에 우뚝 솟아 있어서 앉아 있는 사람들이 겨우 얼굴만 볼 수 있었다. 네 명의 詞客만 연회에 참석하였으니 좌석이 좁기 때문이었다. 앞 길거리에서 마상재(馬上才)를 공연하였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니 여러 도에서 다 몰려 왔다. 포은의 야흥(夜興) 시에 차운하였다. 시온(時韞, 南玉)은 염체(艶體) 절구(絶句)를 지었다.
-성대중, 일본록(日本錄)(계미통신사)
6)영천성 수복기(永川復城記)
1592년 7월에 있었던 영천성 수복에 관한 기록이다. 당시 참여한 사람과 그 후손들에 의하여 다수의 실기란 이름으로 책이 만들어졌지만, 놀랍게도 각 문중마다 기록의 차이가 지나치리 만큼 현격하다. 이에 지난해 화산군 권응수의 실기에 실린 영천성 수복 기록문에 이어 이번에는 직접 그 기록을 작성한 복재 정담과 창대 정대임의 실기에서 발췌한 영천성 수복 기록문이다.(블로그 영천선비)
*****
임진(1592)년 4월에 왜적은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고 첨사 정발과 부사 송상현을 죽이고 동래에서 세 길로 갈라서 진격했다.
첫 길은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안동을 경유하여 상주에 이르러 이일의 군사를 패하고 조령을 넘어 충주를 지나 서울로 향했으며, 둘째 길은 김해를 경유해서 성주 무계현으로 가서 강을 건너 지례, 금산을 지나 충청도 영동을 나와 청주를 함락하고 서울로 향하고, 셋째 길은 좌도 장기, 기장을 경유하여 좌병영 울산, 경주, 영천, 신녕, 의흥, 군위, 비안을 함락하고 용궁 하풍진을 건너 문경을 나와 둘째 길의 군사와 합세하여 조령을 넘어 충주에 들어가서 서울로 향하였다.
적의 깃발과 칼, 창이 천리에 서로 이어지고 대포 소리가 혹은 십리 혹은 육십리 거리에 서로 들리고 위험한 지대마다 진영을 설치하고 수비하여 밤이면 횃불로서 연락했다.
영좌(嶺左) 일로의 적들은 사방으로 통하는 길목인 영천에 수만 병력을 주둔시키고 사방을 노략질 했으며, 영남일대의 백성들이 피해가 가장 심했다. 이때 영천 유학 정대임이 충분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제종제 정대인과 먼저 창의하여 의병을 일으키니 향중 의사 조희익, 조성, 신준, 정천리, 정석남, 최인제, 김대해, 김연, 이득용, 이번, 이영근 등 60여인이 호응하므로 나도 역시 적개심이 분발하여 즉시 족제 대임의 진중에 가서 서로 더불어 의병 수백 명을 모집했다.
5월초 대동에서 적을 격파하고 정천리를 시켜 병사 박진에게 보고했다. 진은 크게 칭찬하고 감탄하며, 즉시 복병장에 임명했다.
휘하 선비 신준용은 대로하여 말하기를 “군관의 소임이 어찌 서생인 정대임에게 합당한가?” 이로부터 의병대장이다. 또 “어찌 복병장의 칭호를 쓰리요.”하니 대임이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여 토적하는데 남에게 굴종하는 것이 어찌 욕이 되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정천리, 이번 등을 시켜 피난민을 수색하여 나라가 위급할 때에 적을 토벌하는데 목숨 바칠 것을 권유하니 감격하여 눈물을 닦고 인심을 움직여 10여 일 동안에 900명이 모였다.
병사 박진이 의병수가 많은 것을 시기하고 억제하기에 의병들이 마음대로 못하고 지사들이 모두 실망했다. 이에 정대임, 정담은 족형 정세아, 조희익, 곽회근 등과 더불어 초유진영에 상황을 상서하고 “초유사의 령을 받들겠습니다.”하니 초유사 김성일은 크게 칭찬하고 제의장에게 명하기를 “각각 자기 군사를 통솔하여 그 절제를 엄숙히 하라.”고 하였다.
6월에 대임은 정천리로 하여금 성황산에 잠복시키고 이번은 봉천원에 잠복케 하여 왜적의 동정을 몰래 정탐하도록 하였다.
조금 후 정천리가 뛰어와 말하기를 “적이 많이 온다.”고 하였다. 즉시 이번과 조덕기 등에 명하여 군의 북쪽 길목에 잠복하여 대기토록 하였는데 운무가 가득차서 잘 보지 못하였다.
7월초에 왜적300여명이 신령길목에 나타나 날이 저물자 적들은 북습과 와촌 등지에서 방화하고 노략질을 했다. 정대임은 돌아올 길을 예측하고 당지산에 잠복해서 기다렸더니 이날 저녁 과연 적이 이르렀다. 아군은 적 20명을 사살하고 40명을 참수했다. 또 질림원에 왕래지 적을 철거하자 마침 어사라고 호칭한 왜적이 군위에서 말을 달려 신녕을 지나갔다.
7월 14일 박연에 진격하였다. 당시 신령의병장 권응수, 의흥복병장 홍천뢰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역시 왔다. 마침내 권응수와 합세하여 적을 대파했다.
적 40여명의 목을 베고 창검과 우마의 부속품을 탈취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나머지 적들은 도주함에 일부는 의흥 방면으로 다른 일부는 하양방면으로 도망쳤다.
권응수와 홍천뢰 등은 의흥 방면으로 추격하여 소계까지 가서 격멸했고, 정대임과 정담 등은 하양방면으로 추격하여 와촌까지 가서 격멸했다.
이로 인하여 아군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고 전세는 크게 꺾이고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떨치게 되어 적을 치려는 사람이 매우 많아졌다.
적도들은 감히 마음대로 나와서 노략질을 하지 못했다.
정대임은 여러 장수들과 의논해서 말하기를 “적이 연속적으로 패전하여 겁을 먹고 첩보활동을 하지 못하고 또 뒤에도 계속하지 못할 것이다. 이 기회에 영천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급히 공격하여 다 없애고 성을 회복하자.”고 하고 ‘어느 날 공격할 뜻’을 직속부하를 여러 군에 보내어 통고하고, 여러 의병 진영에 원군을 보내줄 것을 청원했다.
23일 군남 추평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화공 준비로 군졸들을 시켜 땔나무를 모아 서문과 북문에 쌓았다. 목책으로 길 다란 사다리를 엮어 성을 넘어 들어가는 도구를 준비하고 용감하고 강건한 사람을 뽑아 서쪽 산봉오리에 올라 적군의 다소를 살피게 하였다.
적병이 성밖에서 진을 벌려놓고 말을 달리며 혹은 곳곳에서 개미와 벌떼처럼 무리지은 것이 많아서 그 수를 알 수가 없었다.
이때에 권응수와 신녕 현감 한척이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홍천뢰 역시 군사를 인솔하여 와서 모이게 되었다.
24일에는 하양의병장 신해와 하양현감 조윤신, 자인의병장 최문병, 경산의병장 최대기, 경주판관 박의장 등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이게 되니 총 군사가 3,560여명이었다. 이때에 의성 감사졸(결사대) 500명이 왔다.
이를 세부대로 나누어 문무용사 수백명이 권응수를 별장으로, 신해를 좌총으로, 최문병을 우총으로, 정대임을 중총으로, 군수 김윤국을 별장으로, 진사 정세아, 정담을 찬획종사로 추대하여 각부서의 책임자로 삼았다.
기에 창의정용군이라고 쓰고 진 가운데 세우니 진세가 엄숙하였다. 따라서 기와 북을 준비하여 정대임이 제장사들에게 명하여 차례로 나와서 인사하게 하고 이어서 명령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전쟁의 와중에 임금님의 행차가 멀리 서쪽 변방에 계셔서 정령이 통하지 않는다. 이러한 때에 군중의 율령이 엄밀 정숙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날 적을 토벌하는 날 비록 혹 명령을 어기고 절도를 잃은 자가 있어도 일이 시작되는 초창기여서 짐짓 그 허물을 용서했다. 그러나 지금은 성을 점령한 적병의 수가 매우 많고 뿌리가 이미 깊으니, 우리의 외로운 군대로써 만약 전례를 답습한다면 큰일을 성취하지 못할까 걱정된다. 오직 우리 장수들과 군사들은 다 같이 약속하고 맹세하자.”하고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① 황급난언자(어지러운 말을 내는 자)를 참하고
② 적을 보고 5보 후퇴하는 자를 베고
③ 자기마음대로 행동하고 장수의 명령을 듣지 않는 자를 베고
④ 전쟁에 임하여 대오를 잃은 자를 벤다.
이에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응하여 군중에서 장군의 명령을 듣고 “감히 어김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약속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모든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병사는 정예함에 힘쓸 것이지 수가 많기에 힘쓸 것이 아니다. 우리 무리가 비록 적으나 적과 싸워 죽을 마음이 있고 적의 병사가 비록 많으나 뜻이 매우 교만하니 나는 적들이 반드시 우리에게 패배할 것을 안다. 다만 적들이 점거한 성지가 뒤에는 큰 언덕을 등지고 앞에는 강과 들에 임하고 있으므로 예전대로 굳게 수비하지 말고 유격전을 하는 것이 좋을듯하다. 여러 날 동안 적정의 태만함을 보고 바람 따라 화공을 펼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25일 군의 앞들에 진군하여 군대를 주둔시키자 적군 수백 명이 말을 목욕시키다가 아군이 오는 것을 보고 급히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중의 적들은 성첩에 올라가서 진앞에 세운 아군의 깃발을 바라보았다.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활과 화살을 쥐게하여 진전군인들 사이에 벌려 세웠다.
권응수, 홍천뢰는 기사 500명을 거느리고 적이 망보는 곳에 돌진하게 하고 또 정천리를 시켜 높은 봉오리에 올라 적의 원병이 오는 것을 망보게 하고 또 장사 400여명을 뽑아서 천변 숲속에 잠복시켜 급수하러 오는 적을 추격했다. 적은 이로써 식수를 얻을 수 없어서 마른식량을 먹고 여러 날 동안 곤란을 당했다.
26일 천변까지 진군하여 성에서 수 백보쯤의 거리에서 말을 달리고 병기를 번쩍이니, 적이 북을 울리고 뿔피리를 불었다. 왜장 두 사람이 금관을 쓰고 흑단 옷을 입고서 명원루 위에 나와 부채를 부치며 앉아 포로로 잡힌 여인들이 좌우로 벌려서 모였다.
조금 후 적병 천여 명이 성 머리에 늘어서서 일제히 총을 발사하니 우레와 나는 번개와 같았고 성안에 많은 적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니 소리가 산하를 울렸다. 또 우리나라 말로써 크게 공갈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여러 날 동안 해산도 하지 않고 전투도 하지 않느냐? 서울도 이미 함락되었고 팔도가 무너졌다. 너희들 어린 약간의 군사로서 감히 우리를 당할 수 있겠는가? 항복하여 너희들 신명을 보전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장수의 목을 베어 우리 깃발 아래에 가지고 오너라.”고 하였다.
홍천뢰는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도전하려고 하니, 정대임이 말하기를 “병법에는 경솔이 발동함을 금기하니 삼가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했다. 곧 군대에 명하여 진을 한 줄로 정돈하고 전혀 움직이지 않도록 하였다. 북을 울리고 피리를 불어 한가로운 기상을 보이자 적이 바라보고 더욱더 태만해졌다. 이에 권응수가 말을 달려 흑단 옷을 입은 왜장을 사살하니 성상에 있던 적들은 곧 성중으로 달려 들어갔다가 오후 5시경에 적의 무리가 아군을 향해 조총을 발사하니 날아오는 실탄이 빗발 같았다. 아군이 총 맞고 죽은 자가 3명이었다.
날이 저문 후에 적들이 횃불을 들고 왕래하며 서로 모의하는 형상이었다. 한 명의 중이 줄을 타고 내려왔는데, 그는 곧 불국사의 중으로써 포로로 잡힌 자였다. 정담이 그를 데려다가 적의 정세를 물어보니 곧 말하기를 “적이 내일 곧 힘을 합하여 아군을 공격하고자 하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쳐 왔습니다.”고 했다.
대임이 듣고 이날 밤 2경에 군사들에게 명하여 성을 넘어 긴사다리를 동서 문밖에 비치하도록 하였다. 또 명령하기를 “북을 3번 울리고 호각을 3번 불면 모두 장사들은 신호에 따라 성중으로 들어가라.”고 하고 또 정천리에 명하여 감사병 500명을 인솔하여 마현산에 잠복하였다가 내일은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시키고, 드디어 권응수와 약속하여 말하기를 “적이 너의 문에 침범하면 내가 너의 목을 베고 적이 내문에 침범하면 네가 나의 목을 베라.”고 하였다.
권응수, 신해, 홍천뢰, 박의장, 한척, 조윤신등은 군사를 인솔하여 서북 문을 포위하고 정대임, 정담, 정세아, 김윤국, 최문병, 최대기, 조희익, 신준용, 이번, 조덕기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동남문을 포위하였다.
27일 날이 밝자 북을 울리면서 성 밑에 다다라 남문을 먼저 공격하니 적병이 헤쳐저서 성상에서 총을 쏘면서 소리쳤다.
아군이 사다리를 갖고 방패를 지고 성을 넘을 형상을 보이니, 왜장 수명이 은 투구와 금 가면을 쓰고 비단 은포를 입고서 성문루상에 앉아 부채를 부치면서 군중에 독려하여 문을 열고 다 출병하여 역습하도록 하니, 대개 우리병사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단번에 짓밟고자 함이었다.
우리 장사 수백 명이 달려 나가 적의 중견을 치니 칼에 다친 적의 부상자가 또한 많았다. 조금 후에 왜적의 기마병 수천 명이 또 성안으로부터 일제히 총을 쏘니 아군은 적이 두려워서 나아가지 못했다.
대임이 분발해서 생명을 돌보지 않고 제 장수에게 독촉하고 친히 스스로 칼을 휘두르며 말을 채찍질하여 적진에 들어가 좌충우돌하니 칼 빛이 번개와 같았고 적병의 사상자가 추풍낙엽과 같았다. 적병들을 크게 문란하여 대오를 잃고 갈 곳을 몰라 서로 밟혀 죽은 시체가 삼대 같았다. 싸움에 이긴 기세를 타고 진격하니 감히 그 예봉을 당할 자가 없었다. 적병이 패하여 성중으로 들어가니 왜장이 그 군사가 패한 것을 보고 스스로 성 아래로 몸을 던졌다. 대임이 달려가서 목을 베니 곧 적의 명장 법화였다.
모든 장수 사졸이 더욱 용기가 나서 남문을 공격하여 파괴하고 성중으로 돌진하니 적진은 더욱 크게 문란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권응수는 홍천뢰, 신해 등과 함께 서북 문을 지키던 군사 500명을 나누어 각자로 하여금 창검을 가지고 성 밖을 지키다가 성을 넘어오는 적을 베도록 하고 제군을 독촉하여 성을 넘어가도록 하니 아직 적세가 막강하여 성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 이롭지 않았다.
권응전 역시 경솔하게 들어가지 못하도록 간청하였다. 응수가 대노하여 전열에 있으면서 나아가지 않는 자 몇 사람을 끌어내어 곧 베어서 다른 사람들이 보도록 돌리니, 사람마다 위엄을 두려워하여 용기를 내어서 다투어 들어가 서북 문을 공파했다.
먼저 성첩을 지키던 파수병 10여명의 목을 베었다. 적 기마병 천여 명이 성중에서 역시 나와 일제히 조총을 쏘았다. 아군은 조금 물러났다. 권응수가 몸을 떨쳐 크게 소리를 지르며 친히 기를 흔들고 말을 채찍질하여 돌진하면서 종횡으로 활을 발사하니 백발백중 사살자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 또 용사를 시켜 적의 시체를 취하여 배를 갈라서 창자를 내고 혹은 목을 베어 얼굴을 쪼개어 적중에 모두 던지니 적이 그것을 보고 놀라서 크게 혼란하여 겁을 먹고 나오지 못하고 성안으로 되돌아갔고 아군은 승승 진격했다.
이때에 정대임이 명령하여 북을 울리고 남북이 상응하여 공격 준비를 하도록 하고 또 명하기를 “3차 북을 울리고 각을 불면 동서 제장들은 좌우로 공격하라.”고 하니 수천 장졸이 일시에 성문을 파괴하고 들어가며, 사다리로 성을 넘고 들어가서 일시에 사방에서 북을 울리고 소리 높이 떠들면서 들어가니 천지가 진동하고 나는 화살이 비 오듯 하였다.
아군의 병사들의 위세가 더욱 용맹하여 그 형세가 달리는 고래, 성난 호랑이와 같았다. 승승장구하여 들어가니 잠복했던 적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적과 골목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서북풍이 크게 불어왔다. 정천리는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마현산으로부터 재와 모래가 날려, 진중과 성중이 혼미하고 화약이 바람에 날려 적이 능히 총을 쏠 수가 없어 총대로 치고 박는 육박전이 벌어졌다.
아군이 돌격하여 이미 300여명의 적을 베니 적이 대패하여 총기를 버리고 달아나 관사나 관헌 창고에 숨었다. 이때에 정천리가 큰 소리로 호령하여 “포로들아, 빨리 나오너라! 우리가 곧 화공을 행하려 한다.”고 했다. 이에 포로로 잡힌 남녀가 앞을 다투어 나오니 이미 적의 위세가 꺾인 때라 막을 수가 없었다.
정천리와 결사대 500사졸은 사다리로 성을 넘고 바람을 따라 성 밖에 쌓은 나무에 불을 지르니 화염은 맹렬하고 바람은 거세어 성 밖에 쌓은 나무에 붙은 불이 또 성안으로 옮겨 붙어 순식간에 불꽃과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적도들은 마음이 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불난 숲의 새와 같이 허둥지둥 거렸다. 동남 문으로 앞 다투어 나오다가 밟혀죽고, 나오는 자는 대임과 정담이 군사를 거느리고 문밖에 지키다가 나오는 대로 600여명을 처참하니 흘러 피가 시내를 이루었다. 나머지 적들은 도주하지 못하고 명원루에 올라 물에 빠져 죽기도 하였다.
서북의 적들은 성을 넘어 달아나려고 했으나 응수와 신해가 서로 앞 다투어 격살하니 적들은 곤궁하고 어려워서 갈 곳을 몰라 서로 짓 밟혀 죽은 자와 불에 타죽은 자를 가히 헤아릴 수가 없었고 아군 사상자도 역시 많았다.
남은 적 수십 명이 깊은 물속에 뛰어 들었고, 아군은 반드시 죽은 줄 알고 두었는데 조금 뒤에 물속에서 헤엄쳐 나와 건너편 언덕에 올라 도주했다. 권응평이 칼을 빼들고 추격하였으나 따라 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살아남은 적 수십 명이 경주로 도망치니 마침내 대첩했다. 화염은 밤이 새도록 그치지 않고 피비린내가 수 십리에 풍겼으며, 불에 탄 해골이 곳곳에 종횡으로 뒹굴며 구덩이에 가득 찼다.
28일 아침에 군사들에게 승리의 잔치를 베풀고 악기를 울렸다. 검열하니 아군의 전사자가 80여명, 부상자가 230여명, 전리품은 말 200여필, 총통, 창, 검 합계 900여 자루, 보안 채단이 또한 많았다. 또 포로로 잡혔던 사람이 우리에게 돌아온 사람을 헤아려 보니 남녀 모두 1,090여명이었는데 성명과 거주지를 묻고서 배고픈 자에 밥을 먹이고, 부상한 사람에게는 약을 주어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갈 때 모두 늘어서서 절하며 사례하기를 “오늘 이렇게 죽은 목숨을 살려준 골육의 은혜가 있을 줄을 생각도 못했습니다. 우리를 낳은 분의 부모요, 우리를 살려준 분은 장군이시니, 장군의 은혜가 호천망극입니다.”고 하였다.
이날 각 진에서 벤 왼쪽 귀 수량과 전투에서 획득한 여러 가지 물건을 기록한 도록을 본군 군수 김윤국에게 훌륭함을 구경시켰더니, 윤국이 의병진에서 획득한 것을 자기가 한 것처럼 밤사이에 좌병사 박진에게 보고했다.
이때 박진은 군졸을 거느리고 안동에서 머물면서 관망하다가 영천대첩의 보고를 이미 받고 자기 공으로 하고자 자기가 지휘한 것처럼 영천대첩의 공을 조정에 보고했다. 병사 박진은 이로 인하여 사기를 얻어서 말을 달려 영천에 이르러 진처에 토적방략을 돌아보고 크게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비록 옛날의 명장인 한나라 한신, 팽월과 촉나라 제갈공명이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하고 감탄해 하면서도 속으로는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復齋 鄭湛 壬辰亂中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