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호부터 <군 포교의 현장> 코너명을 <연병장에 피어나는 연꽃>으로 변경하여 연재합니다.
군 포교는 미래 불교의 씨앗을 심는 일
흔히 군부대를 일컬어 ‘포교의 황금어장’이라 부른다. 군대 생활이 힘들다 보니 많은 장병들이 종교에 의지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고, 이런 와중에 종교 시설을 찾는 발걸음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군 장병은 불자인구의 취약 부분인 젊은 층이기 때문에 가시적인 효과가 더욱 크다.
하지만 불교계만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와 천주교 역시 군 장병을 대상으로 한 포교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의 적극성을 감안할 때 불교계의 군포교는 서운한 말이지만 뒤처진 감이 없지 않다.
그래서 군 법사들은 밤낮없이 포교 방법을 고민한다. 여기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해, 또 신세대 장병들의 복지 증진을 위해 시대 문화의 변화에 귀 기울이는 군법당이 있으니, 바로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이황리에 위치한 호국 상승사(주지법사 무염 이태곤)이다.
영상물로 다가가기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 봄꽃이 만발하기 시작한 지난 4월 8일 찾은 호국 상승사에는 법회 시간이 가까워졌는지 불자 장병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장병들을 따라 들어선 법당에는 이미 무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법당 안 양쪽에 서 있는 스피커와 오른쪽에 자리 잡은 대형스크린이 밝은 표정으로 찾아드는 불자 장병들을 맞이했다.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장비는 법상에 놓은 노트북. 오전 10시 30분, 드디어 일요 법회를 알리는 타종이 울렸다. 이어 법회는 사홍서원, 『반야심경』 봉독 등 여느 법회가 다를 바 없이 진행된다. 이어진 법문 시간, 법당 안 조명이 조금씩 어두워지면서 잔잔한 음악과 함께 스크린에 ‘자비송과 자비의 연꽃’이란 제목의 영상물이 등장했다. 이런 법문 시간에 익숙한지 불자 장병들은 가부좌한 채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명상 음악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듯 명상에 잠겼다. 이 시간은 명상음악으로 한 주간 고단했던 장병들의 마음을 편하게 다스려 주는 명상의 시간이었다.
최근 세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명상 치료법이 군법당에서 장병들을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영상물 상영이 끝나자 이태곤 주지법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불교의 명상 중에 자비관이란 명상법이 있습니다. 이 관법은 마음속 원망과 증오심을 사라지게 하는 수행법입니다. 즉 감상을 통해 듣는 이의 마음속에서 무심결에 자비와 사랑의 마음이 발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간결하면서도 감성을 깊이 파고드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정감 어린 목소리가 특색입니다. 다시 한 번 감상하십시오.”
이어 주지법사는 찬불가 동영상을 상영한다. 동영상을 먼저 보여 준 다음 그에 대해 설명하고, 장병들이 따라 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 법사는 법회를 위해 영상물을 직접 제작한다. 예를 들어 찬불가 ‘관세음보살의 노래’의 경우, 가사에 맞는 관음보살 불화를 찾아 일일이 편집한다.
장병들을 사로잡는 천상의 소리
“요즘 장병들에겐 무엇보다 흥미를 갖게 해야 합니다. 딱딱한 법회 특히, 틀에 박힌 것 같은 정형적인 방법으로는 신세대 장병들을 부처님 품 안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찬불가 영상 법문입니다. 재미있게 찬불가를 배우고, 또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이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회의 하이라이트는 이태곤 주지법사가 법당을 찾은 장병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선물인 오카리나 연주(이날은 부활절이었기 때문에 푸짐한(?) 먹을거리가 준비된 타 종교 시설을 찾는 장병들이 많은 날이다).
법당은 전문 연주장을 방불하듯 음향이 웅장했다. 그런 만큼 장병들의 관심도 지대했다. 주지법사의 오카리나 연주가 끝나자 장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이 법사는 장병들의 요청에 따라 법회 후 대웅전 앞뜰 잔디밭에 앉아 오카리나 연주를 한 차례 더 해야 했다. 법회에 처음 왔다는 한 이등병은 “법사님의 오카리나 연주를 들은 후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마치 대형 연주회에 온 것 같이 감동적이었어요”라며 이색적인 법회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음악에 대한 남다른 관심만큼이나 수준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이태곤 법사의 음성 포교는 초임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피아노가 없는 법당에서 직접 기타를 둘러메고 찬불가를 가르치며 음성 포교의 첫발을 내디뎠다.
주지법사를 만나기 위해 오랜만에 호국 상승사를 찾았다는 한 간부 불자는 “지금도 법사님이 기타 들고 찬불가를 가르치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당시 같이 근무하던 사람들을 만나면 가끔 그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오늘 오카리나 연주를 들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항상 불자 장병들을 위하는 모습에 불자의 한 사람으로 고마울 따름입니다”라고 칭찬했다.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이 법사는 포교에 대한 가치관도 남달랐다. 단순한 포교를 떠나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군불자 양성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군포교의 중요성은 젊은 청년 장병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장병들이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봅니다. 세상에 난무하는 전도된 가치나 올바르지 못한 이념, 또는 사상에 빠져들면 자칫 인생 전체를 망쳐 고통의 나날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젊은 장병들에게 부처님의 정법을 전도하여 올바른 인생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통해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통기타라는 자신의 특기를 포교에 적극 활용한 이 법사의 포교 방법은 이제 음성 포교를 벗어나 영상 포교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앞으로 찬불가 동영상은 물론 시와 음악이 삽입된 ‘영상 편지’ 등을 CD로 제작, 배포할 계획도 갖고 있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알맞은 방법으로 가르침을 주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대기설법처럼, 이태곤 주지법사는 이 시대 장병들의 근기에 맞는 포교 방법을 개발해 낸 셈이다. 신세대 장병들을 부처님의 품으로 이끌려는 그의 노력과 정성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 호국 상승사 :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이황리 전화 : 031)641-5336
취재·정리|김이열 객원기자
기독교의 활기찬 전도는 군 장병들에 대한 선교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노래에 맞춰 활기찬 율동을 선보이는 워십, 브레이크 댄스를 응용한 비보이, 문화의 사각지대에 놓인 장병들을 위한 연주회 등의 문화적 접근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CCM을 활용한 선교이다.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란 기존의 찬송가의 틀을 뛰어넘어 현대 음악의 대중성을 활용한 기독교 특유의 종교가요. 대중음악의 비트에 익숙한 젊은 층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음악이기도 하다. 기독교에서는 이 CCM을 선교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전국의 군부대를 찾아다니며 한 달에 10여 회 이상의 공연을 펼치는 군선교단이 있는가 하면 개인 음반을 발매하고 인터넷에서 두터운 팬 층을 이미
확보한 CCM 가수가 군대를 직접 찾기도 한다. CCM 가수 정예원 씨도 그중 한 사람.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 전국의 군부대를 돌며 장병들에게 CCM 공연을 선사한다. 정예원 씨가 소속된 피스뮤직의 강원욱 실장은 CCM 선교의 목적은 비신자들이 느끼는 거부감을 해소하면서 음악이라는 영혼의 언어를 통해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알리는 것이라 밝힌다. 특히 강원욱 실장은 군 시절, 군 교회를 통해 CCM을 접하고 기독교적 사랑의 느낌을 받아 제대 후에도 CCM 군선교를 해야겠다는 비전을 세우게 됐다고 한다. 정예원 씨의 공연이 있는 날이면 누이동생처럼 착하고 여자친구처럼 예쁜 예원 씨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자그마한 군교회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라고. “원래 종교의 교리는 일반인들에게는 어렵고 딱딱해서 거부감을 일으킬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음악으로 접근하면 그런 거부감이 덜해요. 감성에 호소하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접하는 거죠”라는 강원욱 실장의 말처럼 음악을 매개로 한 선교에 대한 장병들의 호응은 뜨겁다.
얼마 전 일요일에 기자가 직접 겪은 일이다. 길을 가는데 어디선가 흥겨운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중고생, 고작해야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청년들이 기타를 치고 봉고를 두드리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박자를 맞추며 귀를 기울이다가 노래의 가사를 알아듣고는 깜짝 놀랐다. ‘예수 닮기 원해’라는 가사를 너무나도 밝고 명랑하게 부르는 청년들을 보면서 한편으로 무섭기도 했고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 무서움은 기독교가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활용하면서 무섭게 미래의 기반을 다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 때문이었고 부러웠던 것은 찬불가를 흥겹게 즐겨 부르는 젊은 친구들, 어린이들, 학생들을 본 적이 과연 있었나 하는 자각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