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이비드 호킨스 선생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건강은 상당부분 의식수준의 표현"
04. 건강
건강문제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내과의사와 정신과 의사, 영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연구자로 살아오면서 나 역시 건강과 자기치유 영역에 초점을 맞춰왔다.
몸과 마음, 영혼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은
몸은 스스로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의식이라는
더욱 큰 에너지 장을 통해
경험될 뿐이다.
인간은
조밀하고 단선적인 형태에서
영원히 팽창하고 증가하는
비선형적인 무정형으로 진화한다.
그러다 종국에는
'자각의 장에 이르러
경험자체를 경험'
한다.
건강이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 몸과 마음, 영혼의 관계는 아주 중요하다. 모든 경험이 의식 안에서 진행되므로 의식자체를 이해해야 한다.
밝혀진 바에 의하면
치유는
마음의 믿음체계와
태도에서 비롯된다.
에너지 장들이 지닌 힘 때문이다.
그러므로
건강은
상당부분 의식수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논리적인 사람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에너지 장들 사이의 수학적 관계를 토대로
통합적인 의식지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태도와 느낌, 인식, 믿음 등을 포함한
많은 것들의 핵심이 뿜어내는
에너지들을 측정했다.
에너지 장들의 상대적인 힘을 측정한 이 지도에서 무감정(50)은 두려움(100)보다, 두려움은 용기(200)보다 훨씬 약하다.
에너지 장들은
상대적으로 서로 다른 차원의 힘을 지니며,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용기의 단계에서부터
위로 이동해
중립과 자발성, 수용,
사랑의 에너지 장으로 올라간다.
이 장들은
생명과 진실을 보살피고 지지해 줄 뿐만 아니라
에너지까지 부여해 줌으로서
생기를 높인다.
의식지도 아래(200이하) 단계에서는
인간 내면의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다.
진실은
200의 의식단계부터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지도 아래부분에서
600의 단계로 올라가면
이원성과 환영의 장들을
떠나게 된다.
작은 나 혹은 에고라 부르는 것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영혼의 위대한 스승들이나 아바타같은
깨달은 존재들의 에너지 장은
600대에서 시작해 1000의 단계까지 계속 상승한다.
건강은
살아있음을 의미하며
에너지 장의 표현이기도하다.
몸은
마음속에 부정적인 것들이 많을수록
부정적인 에너지가
몸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커진다.
반대로
마음속에 긍정적인 것들이 많을수록
생명의 에너지 장은
더욱 긍정적이고
강력하게 변한다.
이런 사실은
생명의 표현과 건강을 지지해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도구를 제공해준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병을 부추기는 에너지 장들이 존재하는 반면, 200위의 에너지 장들은 생명을 지지해 준다. 그리고 이 각각의 에너지 장들은 감정과도 연관되어 있다.
반생명적인 에너지 장은
자기혐오나 무기력, 절망, 후회,
우울, 걱정, 불안, 갈망, 분노, 증오,
오만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지니고 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건강의 악화를 동반한다.
또 파괴적인 감정 상태가
에너지와 영혼의 상실, 의기소침,
덫에 걸린듯한 느낌, 지나친 팽창과 확장, 힘의 상실은
의식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영적인 면에서 볼때,
이런 부정적인 마음상태에 사로잡혀 있으면
죄와 고통, 절망, 슬픔, 두려움, 좌절, 경쟁, 서열 등의 시각에서
세계를 경험한다.
신도 부정적인 존재로 개념화한다.
저급한 에너지 장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을
인간의 궁극적인 적과 같은
부정적인 존재로 묘사하거나
부인한다.
인간에게 벌을 내리고 심지어는 지옥속에 영원히 내던져 버리는 존재, 인간을 무시하는 비정한 존재, 보복을 일삼는 존재가 신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에너지 장은 부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의식속에서도 파괴적인 작용을 불러온다.
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200이하의 낮은 의식단계와
관련있는 것이다.
건강은
이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포함한
장애물들을 제거했을때 생겨나는
거침없는 생기의 발현이다.
한계와 분리의 느낌들을
뛰어넘을 때
비로소 건강이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거부할 힘이 있으므로
삶의 부정적인 것들도
부정해버릴 수 있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마음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다시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
건강은
자기존중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은
어떻게 터득할 수 있을까?
몸은
어떻게 경험되며,
몸과 나는 어떤 관계일까?
몸을 경험하지 않는
지고의 상태에 이르면
몸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곁눈질로 슬쩍봐도 되는
어떤 것처럼
몸은 경험의 중심이 전혀 되지 못한다.
몸과
자신과의 동일시를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의식지도 아래쪽에서는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이런 동일시가 점차 약해진다.
그러다
종국에는
몸과의 동일시를 넘어서
영혼으로서의 큰나를 깨닫는 단계로 이동한다.
몸과 마음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꼭 필요하다. 분명하게 이해하기 힘든 어떤 것과 건강의 영역에서 몸과 마음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임상을 통해 드러난 기본 법칙은
'우리의 내면만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치유와 건강의 법칙이며,
이 법칙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면은 병으로
다른 한면은 건강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치유와 건강을 불러오는 이해,
즉 우리의 내면만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똑같은 이해에서
두가지 상반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임상학적으로 좋은 예를 들자면 다중인격을 꼽을 수 있다. 최면도 마찬가지다. 최면에 든 환자에게 책상위의 장미꽃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라는 암시를 준다. 그러면 환자는 눈을 뜨자마자 두드러기 발진을 일으키고 재채기를 한다. 그런 후에 환자에게 이 암시를 잊어버리게 해도 환자는 트랜스 상태에서 깨어나는 순간 숨을 쌕쌕거리고 두드러기나 발진증상을 보인다.
마음이 믿는 것에
몸이 그대로 반응하는 것이다.
최면을 통해서
프로그램이 사실임을
환자에게 각인시킨 후
이 프로그래밍 과정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게 해도,
거의 모든 병의 증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일상의 삶에서
흔히 의식하지 못하는 믿음체계나
프로그램때문에
병이 야기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실험실에서는 심리실험을 할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임상에서 수도없이 프로그래밍된다(최면에 빠진다). 이것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이다.
텔레비전 앞에
멍하니 앉아있을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이때는 프로그래밍 과정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흡수되면
남은 생애 동안
이것에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아동기 기억상실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섯살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개중에는
아동기 전체의 기억이 아예 혹은
거의 없는 이들도 있다.
아동기를 기억하는 이들이라 해도
기억이 텅 빈 영역들이 있다.
이 영역속에서
많은 프로그램들이 숨어있다가
이런저런 다양한 형태의 좋지 않는 증상으로
모습을 계속 드러낸다.
심장병은
우리집안 내력이야와 같은 말도
이런 프로그램 중의 하나다.
비만은 집안 내력이야.
알레르기도 집안 내력이야.
우리 집안 사람들은
전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와 같은
생각들이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마음속에 뿌리내린다.
이런 과정은
마치 최면에 빠지는 것과 같은데,
이 프로그램들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지워버리지 않으면
무의식속에서 계속 작동한다.
한기나 외풍을 맞으면
감기에 걸린다는 생각도
이런 프로그램의 한 예다.
다중 인격 사례에서도 마음이 몸에 미치는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즈음 정신의학 분야에서 이런 사례들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덕분에 다중인격이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흔한 질환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환자가
어느 한 인격의 의식을 받아들이면
이 의식은 몇 분에서 몇시간, 며칠, 몇주
심지어 몇년에 이르기까지
환자의 몸안에서 작용한다.
이 인격이 지배하는 동안
환자는 이 인격의 모든 믿음체계에
영향을 받는다.
이 인격이
궤양이나 비만, 알레르기, 게실염, 대장염,
요통 등을 앓고 있다고 믿으면
실제로 이런 병들의 증상이
몸에서 나타난다.
그러다
감정이나 삶의 환경이 변하거나
무언가에 중독되면
이 인격이 떠나면서
흔히 역전현상이 일어난다.
다른 인격이 몸에 들어오고
새로운 인격에는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몸이 즉시 과거의 모든 병들을 치유하는 것이다.
마음이
몸에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구 200
몸 200
이와 관련된 물리학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지구 자체가 그러하듯 몸의 에너지는 약 200에 달한다. 반면에 마음의 에너지 장은 훨씬 강해서 흔히 499까지 이르며, 400대의 에너지 장에는 지력과 이성, 논리, 믿음, 마음 등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딸기 씨나 캐러웨이 같은
온갖 종류의 씨앗들이
게실염을 일으킨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300에서 400의 에너지 장에서 나온
이 생각의 힘이
200의 에너지 장에 있는
몸을 압도한다.
믿음의 패턴이 지닌 영향력에
몸이 압도당하는 것이다.
모든 생각은
형태를 지니고 있다.
개인이나 집단의 무의식
혹은 집단이나 사회의 의식안에도
생각이 아주 세세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거나 공감하면
우리의 의식안에도
이 생각이 들어와
몸을 통해 표현된다.
마음이 믿는대로
몸이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을 치유하고
건강을 얻으려면
몸은 물론 마음도 집중적으로 치료하면서
의식의 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의식안에 있는 것을
몸이 표현하면
이것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의식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우리는 대부분 자각하지 못한다.
이런 상태를 흔히
"무의식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해도
몸은 이 생각을 드러내준다.
생각이 몸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므로
몸은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을 알려주는
엑스선과 같다.
예를들어 당뇨병에 걸린 사람중에 이렇게 말하는 이가 있다. "입에서 당뇨병 얘기가 나온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가족중에 당뇨병에 걸린 사람도 없고요. 그런데 도대체 제 마음속 무엇때문에 당뇨병이 생겼는지 알수없네요'.
이런 경우
아마 집단적인 무의식 어딘가에
당뇨병에 대한 믿음이나
당뇨병과 관련된 모든 것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환자를
오랜 기간동안 관찰해보면
당뇨병을 일으킨 프로그램의 기원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프로그램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므로
환자가
특정한 병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환자의 믿음체계도 치유해 주어야 한다.
병의 근원을 없애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건강을 불러오는 것은
긍정적인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가짐은
의식의 장에서 생겨나
낮은 물리적 차원에서 구체화되는
의식의 단계를 반영한다.
건강은
중립위의 장들인
자발성과 사랑, 내면의 기쁨,
내적인 평화의 상태에서 시작된다.
정신적인 것은
400대의 점수를,
사랑과 관련된 것은
500이상의 점수를 보여준다.
영혼은
500의 단계를 지배하는데,
영혼에 대한 의식적 자각은
위로 올라갈수록 높아진다.
그러므로
지력이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력이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인 특성이라고 믿는 지식인들이나
여러 학문적 작업들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
지금이 이성의 시대라는 사실은 맞다.
그러나
지력은
기껏해야 400대에 있다.
의식이라는 비선형적인 에너지 장은
정신과 논리, 이성을 넘어서 있으며,
정신화를 초월해
전혀 다른 패러다임과 존재방식을 드러낸다.
병을 이해하면 병의 반대인 건강도 이해할 수 있다.
병속에는
언제나
무의식적인 죄책감이
자리잡고 있다.
추정을 해보면 이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연구결과도 이것을 재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자발적인 용서의 과정을 통해
무의식적인 죄책감을 내려놓고,
생명을 지향하는 태도로
비판과 판단, 옳고 그름도 내려놓고
연민의 마음으로
삶을 이해하려는 열망을 통해
용서로 나아가게 해주는
완전한 체계가 있다.
이렇게
부정성을 해결하려면
인식을 재맥락화시켜야 한다.
"기적수업 워크북"을 실천했을 때 일어나는 변화가 그 예다.
무의식적 죄책감이나
정신적인 믿음체계를 포함해
여러가지 요인들이 병을 불러온다.
어떤 병에 잘 걸리는 것은
마음속에 특정한 믿음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죄책감이
스스로를 정당화할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유명인이
텔레비전에 출현해서
투병기를 소개한 탓에
악명을 얻는 병이 있다.
그러고 나면
암시때문에
이 병이 유행처럼 번진다.
마음이
이 병의 특이성과 믿음체계,
프로그램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죄책감도
자율신경계와 호르몬의 균형,
체내의 모든 스트레스 작동구조,
경혈에너지 체계를 통해
병에 힘을 싣는다.
긍정적인 태도를 지니면
경혈 에너지 체계가 균형을 잡고,
건강하고 생기 넘치는 에너지가
모든 에너지 통로를 순행하면서
인체기관들을 자극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을 지니면
열두개의 주요 경락을 관통하는 에너지의 흐름이
방해를 얻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영향을 받은 기관에
병이 생긴다.
이처럼
부정적인 감정은
병의 과정을 강화시키고,
무의식적인 죄책감은 병에 에너지를 부여한다.
몸이
우리의 믿음을 표출하므로
정신의 작동구조에 따라
병의 형태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험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신기하게 여겨지겠지만 몸 자체에는 지각력이 없다. 몸자체를 경험하는 능력이 몸에는 없다는 의미이다. 몸의 오감을 통해 경험이 일어날 뿐이다. 이처럼 우리는 몸 자체를 경험하지는 못하고 몸의 감각을 경험한다. 그런데 오감자체에도 자신을 경험할 능력이 본래없다. 오감은 마음을 통해 경험될 뿐이다.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 오감을 보고해주므로 우리는 실제에게 여러단계 떨어져 있게 된다.
하지만
마음자체도
자신의 경험을 경험할 수 없다.
마음보다 훨씬 큰 에너지 장,
즉 의식의 장속에 있어야 한다.
의식덕분에
우리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식한다.
몸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오감을 통해
마음이 우리에게 전달해주므로
우리의 인식은 신체적인 몸에서 몇단계 떨어져 있다.
의식도
자신보다 더욱 큰 어떤 것,
즉 자각(awareness)을 필요로 한다.
자각은
의식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게 해주며
마음안에서 벌어지는 일도 보고 해준다.
그리고
마음은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오감을 통해 알려준다.
우리가
나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물질적인 몸에서
여러단계 떨어져 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몸을 지배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또
400대의 에너지 장들이 갖는
물리적 특성을 이해하고,
이 장들의 순전한 힘이
몸의 에너지보다 더욱 강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물질적인 몸(200)은
마음(400)이 시키는대로 한다.
마음이
"난 이런 병이 있어"라고 말하면
몸이 그대로 순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정적인 프로그램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진실을 제한하기만 한다.
제한한다는 프로그램들을
의식적으로 취소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진실은
'나는 무한한 존재이므로
부정적인 프로그램에 지배당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달걀에 가득들어 있는 콜레스테롤은 심장병을 일으켜와 같은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흔히 이 말을 진실로 여긴다. 달걀의 콜레스테롤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인다는 믿음체계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몸도 이런 믿음에 따라 달걀이 들어왔을때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인다. 나도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았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런 믿음체계를 철회하고 스스로에게 되풀이해서 말해주었다.
"나는 무한한 존재이므로 이것에 지배당하지 않아.
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내 마음에 들어있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이런 믿음체계는 내게 적용되지 않아.
지금부터 나는 이것을 철회하고 거부할거야"
마음이
부정적인 믿음체계로
우리를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부정적인 믿음체계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그것은 하나의 믿음체계일 뿐이므로 받아들이거나 공감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말해주어야 한다.
어떤 믿음체계에 공감하면
그것의 집단적인 에너지가 지닌 힘이
강화된다.
반면
그 믿음체계를 거부하면
그것의 집단적인 에너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건강과 관련된 부정적인 믿음체계에
공감하지 않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이 점은
유행병의 암시나 히스테리 문제에서
특히 중요하다.
정서적인 프로그램이 밀려들어
프로그래밍을 돕고
부채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에이즈에 대한 이야기는 요즘에도 자주 들려온다. 이런저런 두려움과 분노, 죄책감까지 이용하는 대중매체에서 에이즈 이야기를 끊임없이 되풀이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온갖 수치심과 죄책감을, 특히 우리 문화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성에 대한 수치심과 죄책감을 에이즈만큼 잘 불러일으키는 병이 있을까? 이런 감정들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띠다가 가장 저열한 에너지로 변모한다. 유행을 만들어 부정적인 믿음을 확고히 하기에 에이즈보다 더 좋은 영역은 없다. 에이즈는 자신의 성에 대한 의식적인 죄책감과 슬픔,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무의식적 죄책감과 병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이 모든 것이 400대의 에너지 장에서 정신적인 믿음체계를 만들어내는 무대가 된다.
또 두려움의 부정적인 에너지 장(100)과 죄책감(30)도 있다. 이런 감정들은 병에 딱 들어맞는 환경을 제공한다. 마음이 선택해 담아 두었다가 이것을 표현의 한 형태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콜레스테롤 실험에서
달걀을 먹으면 콜레스테롤 수치가 올라간다는
생각이 떠오를때마다
이것을 지워버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아졌다.
덕분에 지금은 매일 아침 달걀 3개에 치즈, 다른 고 콜레스테롤 식품까지 먹는다. 그래도 콜레스테롤 수치는 낮다. 때로는 내 연령대의 정상수치보다 낮게 나온다. 몸은 마음이 믿는 그대로 행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신뢰의 문제가 끼어든다. 개중에는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다.
"믿기만 하면 그대로 일어난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원인은
무의식의 본질에 있다.
그것이 일어날 기회를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고를 잘 당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사고를 잘 당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자동차 범퍼에 부딪히거나
계단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날아오는 공에 머리를 맞기에 딱 알맞은 장소,
알맞은 시간 속에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몸을 둔다.
하지만 마음이 방법을 발견할 것이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최면과 같은 상태에 들어가 이런 프로그램이 삶에서 드러나도록 올바른 기회에 자신을 노출시키면 된다. 극한 스포츠를 즐기거나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것 등이 그예다.
과학자들은
독감 바이러스로 많은 실험을 해왔다.
예를들어 100명의 자원자에게 다량의 독감바이러스를 노출시켰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일부만 독감에 걸렸다. 바이러스의 위력이 의식이 아닌 바이러스 자체에 있다면 100명 전원이 독감에 걸려야 맞다. 바이러스가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65%의 사람들만 독감에 걸렸다.
자원자의 1/3은
바이러스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바이러스에 대한 의심이 충분하기는 했으나
무의식적인 죄책감이 적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독감이라는 형태로 죄책감을 표현하는 일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것도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다.
치유에서도
똑같은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폐렴이나 조류인플루엔자 역시
노출된 사람들 전부가
이 병에 걸리지는 않았다.
일부 사람들만 감염됐다.
치료에 반응한 비율도 마찬가지로
일부에 불과했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원인을 보면
치료에 반응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인 죄책감에
지배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들이 받아들인
특정한 생각의 형태에는
이 병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부정적인 믿음체계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병이나 치유 모두
믿음체계에 스며있는
에너지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건강해지려면
부정성을 받아들이는 일을
자발적으로 멈추어야 한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처음부터 부정성을 받아들일까?
이들은 왜 프로그래밍에 그토록 취약할까?
현재 유행하는 병들을 소개하는 기사를 잡지에서 읽을 때마다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이들이 이미 지니고 있는 죄책감이나 두려움의 양과 관련이 있다. 두려움은 사실 무의식적인 죄책감이나 두려움의 양과 관련이 있다. 두려움은 사실 무의식적인 죄책감의 결과다.
상처를 쉽게 받는 사람은
두려움에 마음을 잘 빼앗기기 때문에
병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금세 프로그래밍되어서
실제로 그 병에 걸린다.
건강에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마음가짐을 받아들이고
부정적인 것들을 놓아버리는
자발성이 필요하다.
삶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기꺼이 용서하는 자발성은
부정적인 프로그래밍을 거부하는 태도와 더불어
건강에 많은 도움을 준다.
마음의 힘을 얻는데
자발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부정에 빠져
"저기 바깥"의 어떤 것 때문에
병이 들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의 힘은
멀리 달아나 버린다.
200 아래의 에너지 장은
스스로를 희생자로 여기는 마음을
강화시킨다.
자신의 힘을 포기해 버리고
외부의 무언가에
이 힘을 맡겨버리기 때문이다.
낮은 단계의 에너지 장에 있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행복과 생존의 근원이
외부의 어떤 것에 있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200이상인 진실의 단계로 올라가면
에너지 장이 긍정적으로 변하면서
자신의 힘을 되찾는다.
이제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삶에서 행복과 기회를 창조할 힘은
나, 오로지 나에게 있어.
내 안에서 이 힘이 생겨나는 거야.
또 건강이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인정하고, 자신을 더이상 명의 무력한 희생자로 여기지 않는다. 실제로 바이러스나 사고, 콜레스테롤, 불균형적인 요산수치의 희생자가 아니다. 자신의 힘을 다시 인정하고 이렇게 말하면 된다.
"그걸 창조해낸 건 내 마음이야.
간 요리를 먹으면
신장이 요산수치를 올라가게 만들어
통풍에 걸린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내 마음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사실로 믿으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거야"
그러나
높은 수준의 자각능력이 있어야
마음에 이처럼
많은 힘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설탕을 먹으면서 당분이 저혈당을 일으킬거라고 믿으면,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말인가요? 하고 묻는 이들도 있을텐데, 내 대답은 "그렇다"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 이것과 관련있는 물리적 작용을 다시 설명하겠다.
400대인 믿음체계와 비교해서
200대인 몸의 에너지 장이
더 약하다는 점을 기억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설탕과 사탕을 먹으면
저혈당증과 당뇨병 혹은
비만에 걸린다는 믿음은
이런 병을 충분히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런 믿음은
그러나 진실에 대한 부정이자
희행자가 되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변명에 불과하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라는 말도
하나의 해명일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은
사실 작동원리일 뿐이다.
신체적인 차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원리를 설명한 것은
원인이 아니라
단순히 작동원리를 밝힌 것에 불과하다.
결과는
몸의 차원에서 일어나지만
원인은 마음의 차원에 있다.
그 반대는 아니다. 이런 점을 뒤집어 보기만 해도 건강과 치유에 이르는 완전한 열쇠를 찾을 수 있다.
건강은
긍정적인 태도에서 생겨난다.
귀가 따갑도록 이런 말을 들어서
짜증날 수도 있다.
병에 걸린 사람은
마음이 긍정적이지 않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자세를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며
병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건강해지는데
마음의 자세가 어떤 역할을 할까?
우선
건강하지 않은 사람의 내면에는
무의식적인 죄책감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의 치유책은
용서하겠다는
자발적인 의지다.
필요하면
기적수업이나 12단계 회복프로그램 그룹같은 단체에 들어가
용서에 대한 각오를 들을 정도로
의지를 기꺼이 끌어내야 한다.
이 모임은
타인을 비판하고 공격하며
판단하는 성향을 내려놓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특별히 고안된 프로그램들이다.
그래서
타인들을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자세를
내려놓으려는 자발적인 의지를
갖게 해준다.
마음의 작동 구조는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타인을 비판하거나 판단할 때
자신도 비판하거나 판단하게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무의식적인 죄책감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더욱 크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인 메시지는
자율신경계와 경혈 에너지체계를 통해
해로운 방식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정적인 믿음체계를 부정할 수 있는
거부의 힘도 동시에 존재한다.
이런 힘을 되찾으려면
병의 원인이
마음 자체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자발적인 의지로
희생자적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힘을 되찾아야
건강을 회복하고 영혼을 진화시킬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부정적인 에너지 패턴에서 벗어나겠다는
열의와 자신에 대한 진실을 직면해서
긍정적인 에너지 장으로 이동하겠다는
자발적인 의지다.
의지를 가지면
실제로 비교적 빠르게
긍정적인 에너지 장으로 옮겨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핵심은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들려주는
자발적인 의지다.
글쎄
사실 이런 말을 믿지는 않아.
하지만
병을 일으키는 힘이
마음에 있다고들 하니까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어.
난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이니까.
마음을 열고
기꺼이 동의하면
열의도 생겨나며
발견할 것들을 수용하기 시작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의식이 사랑의 에너지 장으로 옮겨가면
치유와 회복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용서하겠다는 자발적인 의지가
우리를 연민의 자발적인 의지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연민은
모든 존재들의 내면에 숨어있는
순진무구함을 보겠다는 자발적인 의지를 의미하며,
이것은 곧 자발적인 용서와 함께 일어난다.
타인의 내면을
진심으로 들여다보고
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함을 발견하는 능력과 힘은
이렇듯 연민과 열의에서 생겨난다.
모든 존재의 내면에는
타고난 순진무구함이 있다.
아무리 오래살아도
이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의식자체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실수나 부정적인 프로그램도
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함때문에
생겨난다.
모든 이들의 내면에
본질적인 순진무구함이
변함없이 내재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분별력이 부족해서
부정적인 프로그램을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순진무구한 본성때문이다.
아이의 순진무구함 속에는
어떤 경고장치도 없다.
"바깥세상은
네가 받아들이는 만큼
부정성을 한껏 주입시키려고 해"라고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세상은
이런 주입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기도 한다.
광고도
대부분 부정적인 에너지 장을 향한
호소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두려움과 욕망,
자만심은 200아래의 수준에서 나타난다.
내면에 순진무구한 본성이 있으며
이것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자각하는데는
자발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자기보살핌 self-care"을 살펴보자.
순진무구함의 결과로부터
자신을 지킬 책임을 지는 것,
순진 무구함때문에
마음이 받아들인 오해들을 풀어버리려는
자발적인 의지가
바로 자기보살핌이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자신을 바로보는 시각을 조정할 수 있고
치유도 가능해진다.
의식의
본질적인 순진무구함을 자각하면
우리안에 치유의 힘이 생기는 것이다.
프로그래밍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순진무구함이다.
이 점을 깨달으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다.
"모든 일이
나의 순진무구함때문에 일어났어.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런거야.
타인들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이제 이런 태도를 버릴거야"
이점을 기꺼이 성찰하고
앞에서 설명한 과정을 거치는 사람들은
병에서 완전히 회복될 수 있다.
연민처럼
용서의 능력도
우리안에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태도는
이런 능력에서 생겨난다.
용서와 연민의 능력이 크고 강하면
자신의 인간적인 면들도
용서의 눈으로 바라본다.
진실을 부정하고 제한하는
온갖 짓들을 해도
자신과 타인을 용서한다.
200아래의 에너지 장에 있는 존재들은 전부 진실을 부정하지만 200위의 에너지 장에서는 모두 진실하고 긍정적인 것들을 받아들인다.
몸은
마음이 믿는 것들을 반영하고
마음은 영혼의 상태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 영혼 중에서
영혼의 힘이 가장 강하다.
몸의 건강을 결정짓는 것은
말 그대로 영혼의 상태인 것이다.
마음의 힘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면,
주의력과 인내심을 발휘해서
마음이 교묘하게
부정성을 표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부정성의 표출을 알아차리는 순간
멈춰야 한다.
그러면
부정성에 대한 지각능력이 커져서
그 실상을 알아차릴 수 있다.
잘못된 겸손을 버리고 이런 생각들에 의문을 품는다.
"음 알다시피 난 별로 똑똑하지 않아.
내 글씨는 엉망이야.
날씬한 사람들하고 똑같은 양을 먹어도 난 살이쪄"
스스로를 제한하고 파멸시키는
이런 공격적인 생각들을 하거나
입밖으로 꺼내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그 생각들을 멈추고 지워버린다.
글씨가 엉망인 이유는
글씨를 잘못 쓴다는
믿음체계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의 모든 범위에서
마음의 프로그램들을
전부 뒤집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경험이 입증해주는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요컨대 엉망인 글씨는 마음의 물리적인 표출이며, 그 반대는 아니다. 글씨가 엉망인 원인은 우리의 마음과 믿음체계에 있는 것이다. "너 글씨를 정말 못쓰는구나!"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은 후부터 부정적인 프로그램이 작동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의식의 기발한 재주를 파악해야 한다. 최면실험을 관찰한 경험이 있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피최면자에게 깨어나면
다리가 가려울 것이라고 말한 다음
이 말을 잊어버리라는 암시를 준다.
그리고
최면에서 깨어난 후 어떤 느낌이 드는지 물으면
피 최면자의 마음은 즉시 다리가 가려워야 하는 이유들을
가장 기발하고 설득력있게 만들어낸다.
단순히
'음 다리가 가렵네'하고
넘겨 버리지 않고
언제나 창조력을 발휘해서
변명을 해대기 시작한다.
모 바지를 입고 있는데,
아시다시피 전 모에 알레르기가 있어요.
그리고
이 방처럼
증기 난방을 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가려워요.
피최면자의 마음속에
일부러 주입시킨 증상의 원인들을
마음이 창조적으로 지어내는 모습을 보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정식으로 최면을 걸지 않아도
마음은 똑같이 할 것이다.
우리도
반평생이나 최면에 걸려 있으면서
이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을 수 있다.
최면이란 무엇인가?
암시에 감응하는 것 아닌가?
방어벽 없이
암시에 걸리기 쉬운 이완된 상태에 드는 것이
바로 최면이다.
이런 상태에 있을때는
기억을 하든 못하든
언제나 모든 프로그램들을 받아들이며,
이런 프로그램들은 지금도 작동을 하고 있다.
텔레비전을 볼때처럼
반쯤 잠자는 상태에 있다보면
몇시간 동안 주입된 프로그램들이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결국은 무의식적인 최면프로그램처럼 작동한다.
아 난 못해,
못한다고 카드를 잘쳤던 적이 없어처럼
일어나는 생각들을 주시하면 자
신이 무엇에 프로그래밍되어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카드를 잘 치지 못한다는 믿음체계를 갖고 있으면
실제로 카드를 못치게 된다.
이로 인해 카드를 못친다는 믿음체계는
더욱 강해진다.
이 믿음체계 자체가
스스로를 강화시키고
충족시키는 예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부지불식간에 흡수한 믿음은
삶에서 그대로 실현되며
이로 인해 이 믿음체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삶을 잘 들여다보면
자신이 어떤 믿음체계를 갖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알아차리기 어렵다면
믿음체계들이 무의식 속에 들어있거나
사회의 집단의식에서 자신도 모르게 흡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은
고차원적인 에너지 장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다.
540이상의 에너지 장은
감사와 용서,
치유의 장이다.
기꺼이 용서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치유의 과정이 저절로 시작된다.
그러나
사랑의 장에서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소한 일에도 쉽게 감상에 젖거나
감정을 더 중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의존이나 통제, 감상벽,
감정주의를 흔히
사랑으로 부르기도 한다.
감상적이고 감정적인 집착속에서
주거니 받거니 서로를 통제하면서
욕망을 충족시킨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그리는 사랑이 바로 이렇다. "조지를 사랑했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진실로 조지를 사랑한적이 없다는 의미이다. 명치가 꽉 막힌 것같은 감상적인 집착에 사로잡혀 상대를 미화하고 낭만적으로 생각하면서 감정 에너지를 마구 쏟았다가 관계가 깨지면 부정적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것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은
내면에서 우리 스스로가 내린 결정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정과 열의를 갖는 것이다.
상대를 사랑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이것은 나의 내면이 내리는
결정이다.
이런 결정에
상대가 해줄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사랑하겠다는 결정이
무조건적인 사랑의 안정적인 에너지 장을 만들어 내므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희생자가 되지 않는다.
상대의 행동이
마음에 안들거나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할수도 있다.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은
달라지지 않는다.
예를들어 살인죄로 20년 동안 수감중인 아들을 보러간 어머니는 여전히 아들의 존재를 그의 현재 상태를 사랑한다. 아들의 행동이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아도,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하건 달라지지 않는다.
어머니의 사랑이나
익명의 알콜중독자 협회와 같은 12단계 프로그램 그룹들이 보여주는 사랑처럼
세상에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실례들이 있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상대의 소유물이나
과거에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나
의식단계가 낮은 사람들은
상대의 소유물에 관심을 갖고
이것을 토대로 상대를 평가한다.
의식지도 중간단계에 속하는 이들은
행위에 중점을 두고
이 행위와 이것이 가져오는
모든 직함들로 상대의 상태를 평가한다.
지도 윗부분으로 올라갈수록
상대의 본성과 현재의 변화된 모습,
상대의 현재 상태와 존재,
진정한 모습에 관심을 둔다.
상대의 진화정도와 가치,
현재의 달라진 모습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
판단없이
모든 생명을 북돋아 주는 사람이 되려는
자발성이 있으면
내면이 저절로 이런 상태에 이른다.
긍정적인 에너지 장이 지닌
치유의 성질때문이다.
긍정적인 에너지 장은
건강의 조건이 돼주며,
모든 존재가 완벽함을 보게 해준다.
또 모든 존재들이
선을 위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깨닫게 해준다.
이런 상태에서는 병이 생겨날리가 없다.
건강으로 가는 방향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병은
그저 치유를 위해 생겨난
현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질병을 계기로
교훈을 얻는다.
"잘봐.
내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제발 고치라고.
죄의식과 자기혐오,
제한적인 사고방식을 고치란 말이야.
위의 단계로 올라가서
나를 사랑해봐.
그래야 치유할수 있어".
이렇게 병이 전하는 말을 듣게 된다.
질병은
영혼을 성장시키라는
요구와 같다.
무언가 잘못됐으므로
살펴봐야 한다고
끊임없이 재촉하는 귀찮은 존재가
바로 질병이다.
무언가 다른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을
질병이 일깨워주는 것이다.
우리의 반응이 창조해내는 것은
삶의 사건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사건 자체는
어떤 식으로도
우리의 반응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건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판단,
처리방식이다.
우리의 태도와 관점, 상황,
전체적인 의미때문에
사건들은 정서적인 영향력을 갖는다.
요컨대
사건들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나
영향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스트레스는
외부적인 힘이
삶에 영향력을 행사할 때 생긴다.
자신을 희생자로 보고
행복의 근원을 외부에 두는 태도,
자기 마음의 힘을 부정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치유는
자기 마음의 힘을
다시 받아들이고,
어떤 환경이나
사건, 장소, 위치, 상황, 일,
사람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다름 아닌 자신임을 인식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이것들의 의미와
우리의 입장,
받아들이는 방식을 창조해내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태도에 따라
이것들은 행복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질병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결과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몸은
결국 애완동물이나
작은 마리오네트와 같다.
기쁨과 즐거움의 에너지 장 덕분에
몸은 행복하고 건강하게 움직인다.
지나치게 고민하지 않고도
늘 하던 일을
자연스럽게 해낸다.
건강은 이처럼
몸에 관심을 덜 기울이면서도
감사의 마음으로
몸을 즐기는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몸과 함께하는 태도의 표현이
바로 건강이다.
건강하다는 것은
자신의 근원적 힘을 다시 받아들이고
건강의 원천을 외부세계에 맡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운동도
몸의 경험이 주는 즐거움때문에
계속한다.
수용을 하는 것도
몸의 경험이 주는 즐거움때문에
계속한다.
수영을 하는 것도
몸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이 즐겁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건강에 좋다고 여기는 활동들은
이처럼 내면의 생동감이 표출된 것이다.
몸을 이처럼
건강한 방식으로 표현하면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방식들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기 때문이다.
몸을
즐거운 어떤 것으로 보고
사랑하면,
그 결과로 건강하게 몸을 즐길 수 있다.
이때 건강은
자기도취가 아니라
사랑과 감사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오 내 소중한 몸, 날 위해 열심히 일해주었어.
사랑하고 고마워.
넌 정말 귀중해
라고 감싸는 마음에서 싹트는 것이다.
하지만 몸이 곧 나는 아니다. 이점을 알면 오른 팔을 잃어도 진정한 나는 변함이 없어라고 말할 수 있다. 외팔을 잃거나 두다리를 잃어도 두 귀를 잃어도 마찬가지다. 몸이 거의 무에 가까울 정도로 서서히 줄어들어도 자아감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다.
건강한 사람은
외부의 사건이나
몸 자체에 휘둘리지 않는
자아감을 발달시킨다.
몸은 몸이고
사건은 사건이며,
나는 진정한 나임을 안다.
실제로 이런 사건들은 나의 본성을 건드리지 못한다. 큰나는 매일 아침 자신의 이름이나 주소, 현재 있는 곳, 그날 할일 등을 떠올리기 전부터 깨어 있으며 언제나 손상없이 그대로 존재한다. 하드웨어 같은 순수의식은 "소프트 웨어" 즉 프로그램이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영향받지 않는다.
건강한 태도는
덧없는 것에 현실이나
생존의 바탕을 두지 않는 것이다.
낮은 의식 단계에서는
언제난 본질적으로
덧없는 외부의 무언가에 생존의 토대를 둔다.
그러나
세상과 관련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게 변한다는 점뿐이다.
그러므로
일이나 소유물, 특정한 관계같은
외부의 무언가를 행복이나 생존의 원천으로 삼으면
건강을 잃은 결과를 자초하게 된다.
상실의 두려움이 가장 먼저 우리를 덮칠테니 말이다. 무의식적으로라도 직함이나, 지위, 집, 차, 몸의 아름다움 같은 것에 행복의 원천을 두면 스스로가 나약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무의식에 엄청난 두려움을 저장한다. 따라서 생존의 원천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강화하고 이것들의 상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일에 끊임없이 역점을 두게 된다.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참된 본성을 알며,
큰 나는
이런 외적인 것들을 넘어서
훨씬 중요한 존재라는 점도 인식하고 있다.
외적인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일시적으로 즐거움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생존이
이것들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수용의 에너지 장으로 올라가면
자신의 힘을
세상에 내맡기는 어리석음을
멈춘다.
그리고
행복의 원천이
자신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런 사람을 척박한 섬에 데려다 놓고 1년후에 가보면 코코넛을 재배하면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나무집을 짓고 원주민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 삶을 재창조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행복의 원천은
나 자신이다.
내가 건강의 원천이다.
전염병이나 바깥 세상의 어떤 것,
내가 먹는 것에 달려있지 않다라는 인식이
행복의 원천임을 아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 덕분에
거짓된 믿음체계를 초월해서
그것에 더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
거짓된 믿음체계들을 제거하면
삶이 어떻게 나아질까?
두려움을
신봉해야 안전하다고 믿는 마음 상태는
이렇게 말할수도 있다.
"거짓된 믿음체계들을 제거하면
난 정말 곤란해지고 말거야"
두려운 생각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따라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꼬드기는 것이다.
마음의 힘을 인정하고
실수들을 되돌리며
용서와 연민의 마음을 가지려는
자발적인 의지가 있으면
행복의 원천을 외부에 둘때
스스로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삶의 환경을 재조정하면서
'내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내게 정말로 가치있는 것은 무엇일까?
삶의 의미를 지키는데
굳이 없어도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일이나 지위가 없으지면
내 삶에는 어떤 의미가 남을까?
삶에 어떤 가치가 있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죽을까?
같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자신의 삶이 의미있고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느끼는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려면
내면의 성찰과 영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이런 상태에 이르면 병이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도 없어진다. 큰 나의 위대함을 깨달아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갖기 때문이다.
영적인 발달의 장에서
전체적으로 성장하면
건강도 좋아진다.
마음의 태도를 바꿔
스스로를 제한하는 믿음들을 놓아버리면서
건강이 더욱 빠르게 호전된다.
시간이
그리 오래걸리지도 않는다.
그러려면
먼저 자신에게
힘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다음은
스스로 시험해 보고
자신의 경험으로 이것을 입증하려는
자발적인 의지를 가져야 한다.
또
타인의 회복을
하나의 자극으로 받아들일줄도 알아야 한다.
타인들의 회복 경험담을 믿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음 저사람들한테 효과가 있었다니
나도 기꺼이 해봐야지"
나는 임상경험은 물론이고 나 개인의 삶에서도 병이 몇분에서 며칠 몇주 혹은 몇달만에 사라져 버리는 경우를 목격해왔다. 24년간이나 지속되던 만성적인 질병도 2년만에 사라졌다. 앞에서 설명한 과정을 끊임없이 실천한 덕분이다. 물론 발병요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여도 끈질기게 남아있는 병들이 있다. 이런 경우 대부분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서구 문화권의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이유 중 하나로
개인과 집단의 카르마가 있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카르마는
인간의 존재 자체의 유전물을 가리키며,
이런 유전물은 신체적이고 영적인 진화로 나타난다.
개개인은
이미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의식수준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유전적인 양식과도 일치한다.
영혼의 진화는
개인과 집단의 무의식속에 있는
카르마의 양식을
표면화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영적인 수행을 하면
역설적으로 억압되어 있던 카르마의 양식들이
겉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신비주의자들의 생애도
이런 특징을 보여준다.
이들의 생애에는 흔히 투병기간이 포함되어 있다.
만성질환의 근본원인은
흔히 변성의식 상태로의 유도나 최면같은
간단한 전생 퇴행기법으로도 알아낼 수 있다.
만성질환의 근원은
흔히 아주 구체적이기 때문에
잊고 있던 사건과 관련해서
타인과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을 거치면 치유할 수 있다.
다른 방법은
타인들에게 병을 일으킨
자기 안의 무의식적인 측면(집단 무의식에서 생겨난)을 용서해서
내면의 치유자를 바깥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예를들어
병의 특징이 다리를 절름거리는 것이라면
타인들을 절름거리게 만든 면을
내 안에서 찾아내 용서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처음에는 회의적으로 여겨지겠지만
놀랄만큼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치유는
마음의 힘을 받아들이려는
자발적인 의지에서 생겨난다.
부정적인 것에 저항하거나
긍정적인 것으로 대체하려는 노력없이
그냥 부정적인 말을 내뱉지 않겠다는
자발적인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부정적인 것을 놓아버리면
자신과 타인을 판단하는 태도도
내려놓을 수 있다.
왜 그럴까?
우리가 진정으로 존재하는 에너지 장은
언제나 현존하므로
장애물을 내려놓으면
살아있음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은
생명의 진동자체가 만들어내는
에너지 장이다.
내면의 진정한 자아는
태양처럼 언제나 빛을 발한다.
부정적인 구름때문에
이것을 경험하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고
진실을
프로그래밍 할 필요는 없다.
거짓된 프로그램을
제거하기만 하면된다.
구름을 제거해
태양이 부정적인 것을 밝게 비추도록 하면
긍정적인 에너지 장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필요한 일은
부정성을 제거하는 것뿐이다.
부정적인 사고습관을 내려놓으려는
자발적인 의지만 있으면 된다.
이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면
살아있다는 느낌과 더불어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기쁨이 커진다.
이런 기쁨은
처음에는 미묘하게 찾아오지만
차츰 강렬해진다.
그러다 종국에는
몸이 있다는 느낌도,
자신의 육체성에 대한 인식도
희미해진다.
행복의 고차원적인 단계로 진화해 들어가면
기쁨을 경험한다.
몸을
즐거움의 원천으로 보고
기쁘고 즐겁게 몸을 경험한다.
그러다
의식의 가장 높은 단계로 나아가면
몸을 경험하는 일이
전체적으로 줄어든다.
기쁨의 확산과 더불어
내면의 점진적인 고요와 평화로운 지복의 상태를
점진적으로 깊이 경험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몸에 대한 경험은 사라지고
모종의 숭고한 상태를 경험한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기쁨의 현존, 사랑의 지복
그 자체가 된다
.
그렇게 되면
몸에 대한 인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몸이 방안에 있어도
방안의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몸과의 동일시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몸이 행복하게 할 일을 할때도
이런 시각으로 몸을 바라본다.
방안의 다른 물건들에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몸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개별적이고 제한적인 자기,
제한적인 몸과의 동일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 이르면
몸은 우주의 무한한 존재와 함께
우리 자신도 포함한
절대적이고 무한한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생각의 자리를 지워버리고
나는 무한한 존재이므로
부정적인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다라는
말로 이 자리를 채워야 한다.
이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우리의 정수가
진리의 실재와 조응하면
거짓을 부정할 힘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모든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진실을 채워넣어야 한다.
자신을 향한 사랑을 선택했으므로
부정적인 생각의 자리에서
긍정적인 무언가를 채워넣는다.
난 부정적인 생각을 지워버릴 거야.
그것을 더이상 흡수하지 않아.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대신에 나를 사랑하는 쪽을 선택할 거야'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사랑은 위대한 치유자다. 우리의 재능과 힘 안에는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이 들어있다. 그저 장애물들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
완전한 건강은
영적인 지각의 표현이다.
부정성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사랑으로 채우겠다는
자발적인 의지의 표현이 바로 건강이다.
반면에
질병은
낮은 차원의 에너지 장이 생각으로 인해
형태를 얻어 나타난 결과다.
몸의 건강은
긍정적인 에너지 장의 표현이고
긍정적인 에너지 장은
자비와 용서에 헌신하겠다는
자발적인 의지로 강해진다.
우리의 존재는
몸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몸에 국한돼 있지는 않다.
또 몸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며
느끼고 감사하고 살아있음을
만끽하려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경험을 경험하는(experiencing of experience)단계'에
이른다.
그렇게 되면
기쁨의 자각 자체, 존재에 대한 감사자체,
의식자체가 된다.
또
몸은
의식자체의 장안에 포함된다.
여기서
몸이 마음안에 있다는
놀라운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제한적인 믿음체계를 지닌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이 머릿속 여기 위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을 경험할 때
마음은 모든 곳에 있다.
생각을 경험할 때도
생각은 모든 곳에 있다.
여기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여겨지는 생각은
사실 모든 곳에서 경험되고 있는
믿음체계다.
생각에 대한
생각인 것이다.
이처럼
내적인 경험은
생각과 몸의 경험이
모든 곳에서 비국부적으로 일어남을 보여준다.
그리고
생각은
의식자체에서 일어난다.
몸이 의자에 앉아 있음을 이해할때,
이 이해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의식자체에서 일어난다.
건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의식의 본질에 관심을 기울이고
살아있는 생명으로서의 우리 존재에
감사의 마음을 갖는 일이다.
이 장에서 몇가지 내용들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설명했다. 이런 내용들이 진실임을 받아들이는데 우리 마음이 저항적인 자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뇌의 학습이란
사실 아주 자연스러워질때까지
똑같은 관점에 자신을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노출시키고
거기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치유와 건강이라는 문제를 다룰때는
이런 학습에 힘이 든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사고체계를
사실상 뒤집어야 하기 때문이다.
몸은
마음의 표현이며
그 반대는 아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흔히 반대라고 말한다.
병의 원인이
세상에 ,바이러스에,
혹은 박테리아에 있다고 떠들어댄다.
약물치료로 효과를 보는 이유도
이것에 대한
엄청난 믿음때문이다.
약물의 힘을
믿기 때문인 것이다.
플라세보의 본질에 대한 과학적 연구결과들을 보면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병이든 환자의 35%는 플라세보만으로 치유가 가능하다고 한다. 알약을 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암시만 주어도 35%의 사람들이 병에서 회복된다.
그러므로
의식속에서
중요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음을 인식하면,
병과 건강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모두 평가해서
영혼의 성장과 진화를 위한
발판으로 활용할 수 있다.
모든 영적인 작업이 그렇듯
마음은 부정적인 프로그램들이 고통을 불러와도
이것을 내려놓지 않으려 한다.
이런 저항의 근본원인은
에고가 부정성에서 얻는
은밀한 이득 즉 합리화된 분노와 원망,
자기연민 등에서 얻는 즐거움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부정성에서 얻는
만족감을 버려야 한다.
부정적인 태도가 주는 만족이
과연 고통에 집착하면서까지 얻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자문해보기만 해도
이득에 대한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들은
우월하거나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앙갚음하는 것도
은밀하게 즐긴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마음상태를 키우면,
그 대가로 질병에 쉽게 걸리고
회복도 잘 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정직한 것이야 말로
발전을 이뤄내고
건강과 행복을 얻는 열쇠다.
위에서 말한 모든 내용과 상관없이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점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곧 한계와 나약함의 원형질까지 물려받았다는 의미이며, 우리가 살아갈 날들이 유한하다는 점이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라는 말은 인간성 자체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가르쳐준다.
부처가 말한 것처럼
"공덕을 쌓아
부정적인 카르마를 소멸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크나큰 선물이다"
공덕을 쌓아
부정적인 카르마를 소멸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크나큰 선물이다
고타마 싯다르타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
공덕을 쌓아 부정적인 카르마를 소멸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크나큰 선물이다
고타마 싯다르타
완전한 건강은 영적인 지각의 표현이다. 부정성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사랑으로 채우겠다는 자발적인 의지의 표현이 바로 건강이다. 반면에 질병은 낮은 차원의 에너지 장이 생각으로 인해 형태를 얻어 나타난 결과다. 몸의 건강은 긍정적인 에너지 장의 표현이고 긍정적인 에너지 장은 자비와 용서에 헌신하겠다는 자발적인 의지로 강해진다. 우리의 존재는 몸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몸에 국한돼 있지는 않다. 또 몸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며 느끼고 감사하고 살아있음을 만끽하려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경험을 경험하는(experiencing of experience)단계에 이른다. 그렇게 되면 기쁨의 자각 자체, 존재에 대한 감사자체, 의식자체가 된다.
나는 무한한 존재이므로 이것에 지배당하지 않아. 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내 마음에 들어있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이런 믿음체계는 내게 적용되지 않아. 지금부터 나는 이것을 철회하고 거부할거야"
"공덕을 쌓아
부정적인 카르마를 소멸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크나큰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