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남들 열심히 일하는 화요일이 휴일이고보니 쉬는 날까지 남편하고만 시간을 보내야할 판이예요.
다른 때는 부산집에 가서 둘째 아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반찬도 만들어 주곤 했는데, 요즘 제 형이 개원할 한의원 공사를 돕는다고 김제에 가 있어 굳이 부산집에 갈 일도 없게 되었어요.
이번 주에는 어디를 갈까 궁리하다가 등산화도 새로 샀겠다 남산 칠불암까지 등산을 가자고 했지요. 남편은 걸음이 시원치 않은데다 예전에 얼떨결에 한번 따라 나섰다가 애를 먹었다는 기억때문인지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거예요. 지팡이를 짚고 뒤에 처져 오면서 애들처럼 삼십 분만 올라갔다 내려올거라는 둥 계속 투덜투덜, 제가 가끔씩 "치즈" 하면서 돌아서서 사진을 찍어주며 "저기만 올라가면 금방이야" 달래주었더니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어디 끝까지 가보겠다고 하더군요.
칠불암에 거의 다 올라가 대나무숲 앞에서 전에 저희 병원에 근무하시던 원장님 사모님을 만났어요. 인적이 드문 그런 곳에서 아는 분을 만나게 될 줄이야 너무 반갑더군요. 칠불암 암자에 계신 외국인 승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봉사를 하고 내려가는 길이라는 거예요. 그 분이 경주에서는 동시 통역을 제일 잘 하신다고들 하더라구요. 전에 현각스님이 오셨을 때도 그 분이 통역을 하셨대요.
마지막으로 가파른 계단을 낑낑대며 오르니 칠불암 부처님들이 수고했다는듯이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내려다 보고 계시더군요. 칠불암은 앞바위에 사방불 그리고 뒷바위에 삼존불 그렇게 해서 칠불암인데, 여지껏 남아있는 신라시대 부처님들중에 이렇게 콧날이 우뚝 솟아있는 부처님도 드물거예요. 높은 산 꼭대기에 있어 아기를 낳으려는 여인네들의 손이 닿지않아 그런지 두 바위가 서로 비바람을 막아주어 그런지 1300년 전 모습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는 게 참 신비스럽네요.
칠불암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장 찍고는 다리쉼을 하고 있는데, 암자에서 젊고 예쁜 비구니 스님이 나오셔서 차나 한잔 하고 가라고 그러시더군요. 이 분이 주지스님인가 보다고 속으로 짐작은 했지만 저는 원래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남편은 어느 새 등산화를 벗고는 법당으로 들어서며 "여보, 빨리 와 봐. 여기 경치 끝내준다."라고 소리를 치지 뭐예요. 스님은 전에 있던 낡은 암자를 헐고 3년 전에 새로 암자를 지었다고 하시는데, 법당에 통창을 달아 칠불암 부처님을 볼 수 있게 만들어 따로 부처님을 모시지 않았더라구요. 방안에 앉아서도 남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오는 게 보름달이라도 뜨는 밤이면 너무 황홀해 쉬 잠들지 못할 것 같아요. 그 작은 암자에서 템플스테이도 한다니 언젠가 기회가 되면 어떤 기분일지 직접 체험해봐도 좋겠던데요.
체코에서 왔다는 서양 행자님이 따라주는 대로 차를 서 너잔 얻어 마시며 스님과 담소를 나누었는데, 제가 천주교 신자라고 소개를 하니 전에 혼자 배낭여행으로 바티칸에 갔던 얘기를 꺼내시더군요. 뜻하지 않은 스님의 호의를 받고 그냥 나오기가 미안하던 차에 방구석에 쌓여 있는 책들이 눈에 띄어 한권 사들고 나왔어요. 제목은 "친절한 간화선" 이었지만 불교에 대해 문외한인 제게는 용어부터가 너무 어려워 결코 친절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스님의 친필 사인을 받은 남편은 싱글벙글 기분이 엄청 좋았던가 봐요. 산에서 내려올 때는 지팡이까지 제게 양보하고 신바람이 나서 앞장 서 내려가던 걸요.
칠불암이 좋은건지 친절한 비구니 스님이 마음에 든 건지 다음에는 스님 드실 과자라도 사가자고 다시 갈 마음을 먹더군요. 어쨌거나 좋은 경치도 보고 예쁜 스님한테서 차도 얻어 마시고 정말 운수 좋은 날이었어요. 아니, 이런 걸 두고 부처님의 가피라고 하는 건가요?
첫댓글 칠불암 꼭 한번 올라가고 말거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