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끗 차이
하희경
이해와 오해는 동전의 양면 같다. 생김새만 보면 두 단어 모두 뾰족한 구석이라고는 없다. 동글동글 부드러운 모양새가 제법 귀엽기까지 하다. 하지만 성격이나 쓰임새는 영 다르다. 입술 끝에 이해가 닿으면 절로 웃음이 나고, 오해는 스치기만 해도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길을 잃게 된다. 얼핏 같은 단어로 보이지만 이해는 공기가 있어 숨을 쉴 수 있듯이 삶의 여정을 순탄하게 하는 반면, 오해는 나날이 두께를 더해가는 미세먼지처럼 우리를 숨 막히게 한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든 두 단어를 만나면, 일단 멈춰 서서 숨을 골라야 한다.
“엄마, 코지 공주대학교에 가게 됐어요. 입학 전에 엄마 집에서 며칠 지내도 되지요?”
“잘 됐네. 당연히 그래도 되지. 그런데 언제 입학이니?”
“3월 4일에 기숙사 들어가요.”
“그래? 엄마는 3월 1일에 졸업인데. 손자는 입학하고 할머니는 졸업이라니 재미있네.”
아들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남편이 바쁘게 움직인다. 평소에는 맨발로 다니기 어려울 만큼 보일러 온도를 낮추던 남편이, 손자가 추울까봐 난방을 최고로 올린다. 한국말이 서툰 손자와 소통하기 위해 번역기를 찾기도 하고 이발소에도 간다.
“엄마, 저도 같이 가기로 했어요.”
“정말? 엄마야 좋지. 그런데 갑자기 왜?”
“코지 기숙사도 보고, 엄마 졸업식도 참석하고 싶어서요.”
“잘 됐다. 안 그래도 아빠가 코지랑 대화하려면 번역기 필요하다며 혼자 바쁘던데.”
아들이 함께 온다니 더 기쁘다.
아들은 필리핀에서 핏줄이 다른 두 아이를 양아들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두 아이에게 제대로 된 가정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이미 성인이 되어버린 큰손자는 바로 호적에 올릴 수 없다. 그래서 5년 후 귀화를 목적으로 제법 큰돈을 들여 공주대학교 한국어어학과에 입학시키게 된 것이다. 그렇게까지 정성을 다하는 아들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하지만 이번에 연년생으로 두 아이를 낳으면서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지 하는 염려도 떨칠 수 없다.
묘한 것은 아들이 사는 방식을 충분히 받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자식이 결혼하면 제 가족에게 집중하는 게 정상이라는 걸 잘 알면서, 그 아이들 중 일부가 친 혈육이 아니라는 게 깔짝거리는 것이다. 그건 아이들에게 하는 것만큼 부모인 우리에게도 해주길 바라는 욕심 때문이다. 내가 자기를 어떻게 키웠는데, 훌쩍 타국으로 떠나버려 자주 못 봐 아쉬운데, 그런 부모 마음도 모르고, 제 가족만 우선하는 것이 서운하다. 그러다가 문득, ‘아! 어머니도 이런 감정이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우리가 두 아이를 입양했을 때였다. 어머니는 그 아이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돈 많이 드는데 쓸데없는 짓 한다고 야단하셨다. 글씨나 알고 셈만 할 줄 알면 심부름이나 시키다 제금내면 되지, 당신 아들 뼛골 빠지게 한다고 아침마다 아이들 앞에서 타박하셨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당신에게 필요한 걸 요구하셨다. 때로는 그 정도가 지나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받은 상처로 할머니를 가까이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키워준 공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지금도 뭐라 하신다.
그랬구나, 이제야 어머니 마음이 보인다. 아들 하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니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그만큼 힘들어하는 게 안쓰럽고, 당신에게 돌아올 수도 있는 몫을 핏줄도 아닌 애들에게 퍼주는 며느리가 곱게 보이지 않았겠구나. 그래서 사사건건 눈에 거슬려 어떻게 해도 성에 차지 않았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내가 입 밖에 내지 않고 속으로 생각하는 걸 어머니는 바로바로 표현하셨을 뿐이었구나.
이해와 오해는 결국 한 끗 차이였다. 어머니와 나의 마음은 같은 선상에 있었다. 다만 어머니가 당신 주장을 먼저 던졌다면, 나는 왜 그러실까하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을 뿐이다. 오랜 시간 어머니를 이해가 아닌 오해로 덧 씌었던 시간들은 앞으로 내가 풀어나갈 숙제이다. 혈육이 아닌 두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고도 미처 풀지 못한 나의 숙제가 이제는 타국에서 온 혈육인 두 손자를 통해 어떻게 마무리될지 궁금하다.
속이 보이지 않는 강이 있다. 잔잔하다가도 거친 숨 내뱉으며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강. 강물 위에는 긴 다리를 드리우고 먹이 찾는 왜가리와, 떼로 몰려다니며 한 가족임을 자랑하는 청둥오리도 있다. 간혹 쓰임 다한 물건들이 떠내려 오거나, 때때로 쓸 만한 것들이 밀려와 또 다른 선택을 기다리기도 한다. 얌전한 듯 내숭떨다가 변덕스레 소용돌이치는 강물의 흐름을, 강가에 선 크고 작은 풀과 나무들이 지켜보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한 가족이라는 걸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