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공연계에서는 거의 모든 장르에서 대형화 바람이 불면서 관객에게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하지만 외제·명품 선호, 비인기 장르 고사, 전반적 오락화 등 눈앞의 이익과 ‘단맛’에만 빠져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자칫 전반적 경기 퇴조와 특정 장르 부문 치중 등과 맞물려 공연계의 기초체력이 바닥날 수도 있다는 우려다. 한편 방송·영화에서는 야사와 역사패러디물이 인기흐름을 타면서 코믹·복고분위기를 냈다.
-‘億’소리 나는 뮤지컬의 거품외국작품만 초강세 ‘외화내빈’-
연극·뮤지컬·무용 올해 연극·뮤지컬·무용 공연의 특징은 ‘외화내빈(外華內貧)’으로 요약된다. 외국 작품, 대형 작품이 초강세였다는 두 가지 점에서 겉은 화려했다. 하지만 한국작품, 창작물의 퇴조라는 측면에서 안으로는 허전했다.
대중적 미학이나 상업적 수지를 위해 검증받은 해외 대작과 과거 흥행작 재공연이 주류를 이뤘다.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한국 공연시장이 해외 명작의 각축장이 됐으나 이에 상응해야 마땅한 로컬 문화가 경쟁력 미비로 인해 입지가 좁아졌다는 해석도 있다.
외화의 압권은 뮤지컬. 뮤지컬 제작비가 영화의 그것 수준이다. ‘캣츠’는 1백억원, ‘토요일밤의 열기’와 ‘싱잉 인 더 레인’은 30억원, ‘시카고’는 25억원짜리였다. 내년 공연되는 ‘맘마미아’의 제작비는 80억원, ‘미녀와 야수’는 55억원이다.
뮤지컬 관계자들조차 “극장 등 인프라와 관객 개발이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본력 없는 제작사들이 ‘목숨 걸고’ 해외 대형 뮤지컬을 직수입하는 것은 ‘거품’”이라고 우려했다. 올 국내 창작 뮤지컬은 댄스뮤지컬 ‘댄서 에디슨’과 ‘가스’ 등에 불과하다.
연극 분야에서도 해외극과 번역극이 줄을 이었다. 해외극으로 ‘달의 저편’(캐나다), ‘창세기’(이탈리아), ‘센포 스기하아라’(일본) 등이 관심을 끌었다.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에 초청됐던 ‘리어왕’(중국), ‘레시프’(프랑스), 베세토 연극제의 ‘시라노 드 벨쥐락’(일본), ‘패왕별희’(중국) 등도 주목을 받았다. 번역극으로는 ‘프루프’(연출 김광보), ‘고곤의 선물’(성준현), ‘딜러스 초이스’(박근형), ‘허삼관 매혈기’(강대홍), ‘우동 한 그릇’(김동수) 등 동시대 외국 작품이 눈길을 모았다.
내한공연을 가진 안무가들 가운데 나초 두아토, 하인트 슈푀를리, 조지 발란신,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무용단 가운데 프렐조카주 발레단, 인트로단스 발레단, 쿨베리 발레단, 피나 바우쉬 무용단, 울티마 베스 무용단 등이 호평을 받았다.
-‘우린 불경기 몰라’야외무대 등 풍성-
클래식 경기는 바닥권을 맴돌았지만, 클래식 음악계에는 오히려 풍성함이 넘쳤다.
클래식 공연들은 1~2년쯤 전에 기획되는 탓에 바로 당시 경기에는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게 한 이유일 것이다. 두드러진 현상은 대형 야외무대 공연이 잇달았다는 점. 5월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투란도트’를 시작으로 9월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코끼리 등 수십마리의 동물을 동원한 ‘아이다’ 등 대형 오페라가 올랐다. 24일까지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도 ‘라 보엠’이 열리고 있다. 상암경기장에서는 4월 주빈 메타의 빈 필, 5월 조수미 콘서트, 10월 신영옥·호세 카레라스 콘서트도 이어졌다.
대형 야외공연은 색다른 맛을 선보이는 데다 관객 수를 늘려 클래식 저변을 확대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엄청난 제작비로 인해 티켓 가격이 60만원까지 치솟는 데다 볼거리에만 치중해 음악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이벤트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2월 홍콩 필, 4월 로린 마젤과 서울시향, 8월 정명훈의 도쿄 필, 9월 유리 테미르카노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 등이 세계적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내한도 팬을 기쁘게 했다.
‘쇼팽 콩쿠르 우승자 시리즈’로 피아니스트 리윈디, 크리스티안 침머만, 스타니슬라브 부닌, 당 타이 손이 찾아왔다. 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초프스키, 첼리스트 요요마와 미샤 마이스키, 바이올리니스트 빅토리아 뮬로바 등 일류 연주자와 장영주·장한나·이유라·임동혁 같은 ‘신동’들도 왔다. 소프라노 홍혜경, 테너 페터 슈라이어·살바토레 리치트라, 바리톤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 등도 다녀갔다.
전곡 연주는 흐름이 됐다. 임헌정이 지휘하는 부천 필은 말러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며 붐을 일으켰고, 강충모의 바흐, 김대진의 모차르트 등 피아노 전곡 연주 도전도 계속됐다.
-사극·현대극·교양·오락장르의 벽을 깨고 넘다-
방송 장르와 영역의 파괴가 두드러졌다. 세련된 감각이나 참신한 소재의 퓨전사극이 대성공을 거둬 사극과 현대물 간 경계를 허물었다. 정보나 지식이 더해져 교양화된 오락물의 득세로 더 이상 오락과 교양의 획일적 구분을 힘들게 했다.
10주 연속 시청률 1위를 지키는 ‘대장금’(MBC)과 ‘다모 폐인’이라는 마니아의 사랑을 받았던 ‘조선 여형사 다모’(MBC)는 소재·주인공·스토리 면에서 기존 사극과 달랐다. 궁중음식을 만드는 수라간 나인의 성공기와 화폐위조범 소굴에 들어가 활약을 펼치는 조선시대 여자 포졸은 기존 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 공익 캠페인성 오락프로그램 ‘느낌표’ ‘러브하우스’(이상 MBC) 등에서 시작된 교양 오락물은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오락물의 교양화 바람과 동시에 ‘타임머신’(MBC)처럼 교양물도 오락화를 꾸준히 시도하면서 시사·교양 프로그램이 흥미 위주로 전락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가수·모델·일반인들의 드라마 진출이 어느 해보다 활발했다. 연기라는 영역이 비(非)연기자에게 확대된 셈. 김민준·조한선·김남진·강동원 등 모델 출신이 대거 주인공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이들의 캐스팅은 연기력보다는 개인적 이미지에 좌우돼 ‘이미지 배우’를 양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인터넷에서 미남·미녀로 유명해진 ‘얼짱’이 TV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불법복제 여파…가수들 외도불황의 늪서 헤어날줄 모르고-
가요 가요계는 극심한 불황의 늪에 시달렸고, 가수들은 음악 외적 활동에서 활로를 찾아야 했다. 경기침체와 음반 온라인 불법복제의 여파는 가요계를 전반적인 불황으로 이끌었다. 한국음반산업협회에 따르면 음반 매출은 2001년 3천7백억원이던 것이 2002년 2천8백억원으로 줄었고, 올해는 1천5백억원으로 추산된다. 올 상반기중 50만장 이상 팔린 음반은 없고, 김건모 8집이 48만장, 조성모 5집은 39만장 팔리는 데 만족했다. 팝 음반시장은 더 열악해져 에이브릴 라빈의 ‘렛츠 고’ 음반이 9만8천여장 팔려 상반기 판매 1위에 올랐다.
반면 불법복제된 음악 파일들은 온라인 상으로 여전히 유통됐고 음반협회, 음원제작자협회 등 관련 단체들과 음반사들은 소리바다, 벅스 등 온라인 음악 서비스업체와 소송 등 마찰을 겪고 있다. 휴대폰을 통한 음악 매출은 지난해 3천4백억원으로 오프라인 시장을 능가했고, 올해에 매출액이 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가수들은 음반 판매나 공연보다는 ‘드라마’ ‘연예오락프로그램 출연’ ‘진행자’ 등 본격적인 외도에 나섰다. 성유리, 이현우, 신성우, 비 등이 드라마에 주연급으로 출연해 주목을 받았다. 가장 돋보인 이는 이효리. 성적 매력과 당돌함을 무기로 각종 프로그램의 섭외 1순위가 됐고, 그녀의 팬티·액세서리가 인기를 끈 것은 물론 ‘이효리 닮기’ 성형수술까지 등장하는 등 ‘신드롬’을 일으켰다.
-‘웃겨라, 웃겨라, 더 웃겨라’코미디 인기로 다 망할라-
영화 키워드는 단연 ‘코미디의 활황세’였다. ‘한국영화 점유율 50% 육박’도 빅 뉴스였지만 이에 기여한 대부분 작품이 코미디라는 사실을 환기하면 화두(話頭)는 코미디로 집약된다. 3·4분기 현재 47.3%를 기록중인 점유율을 연말까지 50%대로 진입시킬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가운데 연말 한국영화 3편(낭만자객·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실미도) 중 2편이 코미디다.
포문은 2월 개봉한 ‘동갑내기 과외하기’가 열었다. 대다수 국민에게 친근한 ‘과외’라는 소재를 재미있게 풀어낸 이 영화는 전국 4백93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동갑내기…’로 시작된 상승세는 3월 개봉, 전국 2백47만명을 동원한 ‘선생 김봉두’가 이어갔다. 이어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2백45만명), ‘싱글스’(2백10만명), ‘오! 브라더스’(3백14만명), ‘조폭마누라2:돌아온 전설’(1백90만명), ‘황산벌’(2백84만명·사진 맨위), ‘위대한 유산’(2백20만명) 등 열풍은 식을 줄 몰랐다.
양적으로 팽창했으나 작품성을 인정받을 만한 것은 드물다는 평가도 나왔다. 평단의 혹평을 받은 ‘첫사랑…’ ‘조폭마누라…’의 성공, ‘낭만자객’ 흥행 호조 등은 ‘웃기면 된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이에 편승해 한몫 보려는 얄팍한 영화 증가라는 악순환으로 번지고 있다.
‘살인의 추억’ ‘스캔들’ ‘올드보이’ 등 몇몇 장르영화들이 선전했지만 코미디 대세를 거스르기엔 역부족이라는 게 중론이다. 홍보 대행사 관계자는 “충무로에서 도는 시나리오의 70% 이상이 코미디인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일각에선 1990년대 초반 르네상스를 보낸 홍콩영화가 특정장르를 무분별하게 양산하다 쇠락한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공연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