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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 보현선원 대중공양을 다녀와서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만나서 이야기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선지식이 그런 사람이다. 무언가 배울 만한 사람을 만나서 가르침을 듣는 것은 큰 기쁨이다. 그래서일까 숫따니빠따 ‘축복의 경’(Sn.2.4)에서도 “때에 맞추어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65)라고 했다. 또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66)라고 했다.
1. 원담스님을 만나러
수행자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개심사 보현선원에서 하안거 중에 있는 원담스님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지난 7월 4일 담마와나선원에서 열린 한국테라와다불교 안거 입재법회날 점심식사할 때 법우님들과 이야기 하다 나온 말이다. 밥을 먹다가 원담스님과의 인연을 얘기 했는데 즉석에서 한번 만나 뵙기로 결정한 것이다.
가르침을 듣기 좋아하는 불자들이 있다. 그리고 공양하기를 즐겨하는 불자들이 있다. 안거철만 되면 전국 제방선원을 찾아 다니며 보시하는 불자도 있다. 그것도 작은 선원이다. 가난한 절의 작은 선원에서 정진하는 수행자들에게 먹을 것과 여비 등을 보시하는 것이다. 보시를 하면 과보가 따른 다는 것을 아는 불자들이다. 그것도 아주 큰 과보가 기대되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M142)을 보면 축생에게 먹을 것을 주어도 백배의 갚음이 기대된다고 했다. 부도덕한 자는 천배라고 했다. 오계를 지키는 일반사람은 십만배라고 했다. 그렇다면 수행자는 얼마나 될까? 천억배가 될 것이라고 했다. 감각적 욕망을 벗어난 수행자를 말한다. 성자에게 보시한다면 헤아릴 수 없는 과보가 기대될 것이다.
이번 보현선원 대중공양에는 모두 다섯 명이 동참했다. 방명숙, 이혜지, 상선행, 반야심 법우님이다. 특히 방명숙 법우님이 주도했다. 자신의 차를 이용하여 세 명의 법우님과 함께 했다. 모두 선지식을 만나 가르침 듣기를 좋아하고 공양하기를 즐겨 하는 법우님들이다. 청정한 스님들에게 공양하면 과보가 크다는 사실을 안다고 볼 수 있다.
. 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일까?
선방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이야말로 가장 청정하다고 볼 수 있다. 수많은 스님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안거에 들어간 스님들에게 공양하면 과보가 가장 클 것이다. 식이 맑기 때문이다. 매일 정진하기 때문에 청정할 수밖에 없다. 이런 스님에게 보시하면 과보가 크다고 했다. 그렇다면 최상의 보시는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탐욕을 떠난 자가 탐욕을 떠난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 보시는 세간적 보시 가운데 최상이라고 나는 말한다.”(M142)
보시는 믿음을 가지고 하라고 했다. 보시를 하면 큰 과보를 받는다는 믿음을 말한다. 이런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가 될 것이다. 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똑똑한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을 속여서 보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인과의 법칙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3. 상대방의 가슴에 남아 있기 때문에
최근 박원순시장 죽음과 관련하여 글을 읽었다. 어느 카톡방에 올려진 글 중에 보시와 관련하여 새겨 두고 싶은 말을 발견했다. 지나치면 잊어 버릴까봐 스마트폰 메모앱에 저장해 놓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입으로 뱉은 말은 짧은 순간에 사라지지만 소멸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하물며 글로서 남겼으니 누군가의 눈에서, 또는 누군가의 가슴에서 머물고 있을테니 업을 지어도 보통 업을 지은게 아니구나 싶다.”
누군가의 가슴에 ‘남아 있다’라는 말에 공감했다. 함부로 뱉은 말은 허공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글도 구업을 짓는 것이 되기 때문에 누군가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악플을 달지 않아야 하는 이유라고 본다. 하물며 보시는 어떨까?
누군가 보시는 바보나 하는 짓이라고 무시한다면 이는 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이는 인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행위에 대한 과보를 인정하지 않을 때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막행막식하며 살 것이다. 탐욕과 성냄과 미혹으로 사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 사는 방식이다. 그러나 보시를 하면 과보를 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누가 말려도 기어이 하고 말 것이다. 보시를 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가슴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4.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보시에는 조건이 있다. 청정한 보시가 있고 청정하지 못한 보시도 있다. 어느 경우나 보시 받는 자가 청정하면 청정한 보시가 된다. 반대로 보시 받는 자가 청정하지 못하면 청정하지 못한 보시가 된다. 이런 경우 “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가 될 것이다. 반승반속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여법하게 얻은 재물로 오계를 지키는 자가 오계를 지키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한 보시라고 했다. 이 보다 더 좋은 것은 청정한 자가 청정한 자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보시하는 자도 청정하고 보시받는 자도 청정하면 최상의 보시라고 했다.
보시를 하면 과보가 따른다는 믿음을 가진 자가 선방스님에게 보시한다면 굉장한 보시가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 보시는 굉장한 과보를 가져온다고 나는 말한다."(M142)라고 했다.
5. 절에 갈 때는 빈손으로 가지 말라고
법우님들과 서산휴게소에서 만났다. 원담스님에 따르면 보현선원에서 점심공양하기가 여의치 않다는 말을 들었다. 휴게소에 모여 점심을 해결하고 들어 가기로 했다. 오전 11시에 방명숙법우님 일행을 만났다. 방명숙법우님이 점심을 샀다. 식사를 마치고 해미읍으로 이동했다. 공양물을 사기 위해서이다.
선방스님들을 위해서 최상품을 샀다. 수박 큰 것 한통, 복숭아 한박스, 포도 작은 것 두 박스, 그리고 제과점에서 롤케익 두 개와 빵 여러 개를 샀다. 상선행 법우님은 손수 만든 단호박 죽을 준비했다. 750미리 패트병 다섯 개에 담긴 것으로 정성으로 만든 것이다. 보시금도 준비 했다.
출가자는 재가자의 보시에 크게 의존한다. 출가자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수입이 없다. 먹을 것과 입을 것, 거처 등을 재가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절에 갈 때는 빈손으로 가지 말라고 했다. 공양물이나 보시금을 반드시 지참해야 함을 말한다.
보시는 능력껏 했다. 늘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더 많이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능력껏 하게 된다. 그러나 능력껏 보시하는 것은 재벌못지 않은 보시가 된다. 왜 그런가? 비율로 따지기 때문이다.
월수입이 2백만원인자가 10만원을 보시하면 5% 보시가 된다. 월 수입이 1억원인 부자의 5백만원에 해당된다. 월 수입이 200억원의 재벌이라면 10억원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가난한 자가 능력껏 보시하는 것은 재벌이 보시하는 것 보다 공덕이 더 클 수 있다.
6. 개심사 참배를 하고
보현선원은 개심사에서 뚝 떨어진 곳에 있다. 가파른 길을 차로 약 5분 이상 올라가야 한다. 보현선원에 1시까지 가면 된다. 시간이 한시간 여유 있어서 개심사 참배를 했다.
개심사에 와 본 사람도 있고 처음인 사람도 있다. 그런 개심사는 언제 와 보아도 고즈넉한 느낌이다. 너무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다. 마치 자기 집처럼 포근하고 안은한 느낌이다. 아마도 오래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웅전과 심검당은 조선초기에 지어진 것이다. 대부분 절이 임진왜란때 불탔다고 하는데 전란을 피해 간 것이다. 그래서 대웅전은 보물이다. 수덕사 대웅전에서 보는 것처럼 팔작지붕이 특징이다. 심검당은 기둥이 뒤틀려 있다. 자연그대로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런 모습에서 안도한다. 직선과 각으로만 되어 있는 건축물만 보다가 뒤틀리고 휘어진 기둥을 보니 안심이 되는 것이다.
개심사 참배를 마치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 오다가 원담스님을 만났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개심사에서 스님들에게 점심공양을 밖에서 제공했는데 외출했다가 돌아온 것이다. 바로 이전날에는 수덕사에서 공승공양이 있었다고 했다.
7. 보현선원을 향하여
차 두 대가 보현선원을 향해 출발했다. 스님은 999cc 경차에 탑승했다. 뒤에는 방명숙법우님차가 따라 왔다. 스님 말대로 길은 가파랐다. 산사에 가면 이 정도 경사는 각오해야 한다. 과연 무사하게 올라갈 수 있을까? 그동안 가파른 산사길을 오른 경험을 살려 최대한 밟았다. 경차임에도 힘은 좋았다. 무난하게 올라갔다.
대한민국에 수많은 사찰이 있다. 이런 곳에 이런 선원이 있을 줄 몰랐다. 선원이라기 보다는 절처럼 보였다. 마치 숨겨진 절과 같다. 아는 사람만 아는 절과 같다. 더구나 선원이기 때문에 일반사람의 출입이 통제된다. 오로지 수행자들만을 위한 공간인 것이다. 마치 비밀의 정원에 온 것처럼 일반사람들은 한번도 와 보지 않았을 것 같은 곳에 온 것이다.
불가에서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큰 공덕이라고 했다. 안거 중에 선원에 간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선방스님들을 위한 대중공양이라는 명목으로 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청정한 공간으로 간 것이다.
청정한 공간에서 외부사람들은 티끌과 같다. 번뇌에 가득 찬 사람들이다. 청정한 공간에 왔으면 몸도 마음도 청정하게 해야 할 것이다.
8. 좌선과 포행을 하고
원담스님은 선방 건물로 인도했다. 보현선원에서 전망이 최고 좋은 곳이다. 앞에는 초록의 바다이다. 저 멀리 아스라히 바다가 보일둥말둥한다.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곳이다.
선방건물 툇마루에 앉았다. 스님은 먼저 명상하자고 했다. 약 10분 가량 입정했다. 풀벌레 소리가 들려 왔다. 큰 소리도 있고 작은 소리도 있다. 종종 새소리도 들렸다. 마치 연주하는 것 같다. 주기성을 띠는 것이다. 한줄기 바람이 얼굴에 부드럽게 부딪쳤다. 눈을 감고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들뜬 마음도 가라 앉았다. 일종의 ‘마음의 세탁’이라고 볼 수 있다. 청정한 선원에서 객진번뇌를 떨쳐 버리고자 한 것이다. 다음으로 포행을 했다.
선방 앞에는 반원 모양의 마당이 있다. 앞에는 소나무가 있어서 운치가 있다. 좌선이 끝나면 포행하는 곳이라고 한다. 스님을 따라 천천히 빙빙 돌았다. 그렇다고 경행은 아니다. 행선이 아님을 말한다.
행선은 천천히 해야 한다. 동작 하나하나를 알아차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발을 들어서 밀고 내딛는 것에 최대 6단계가 있다. 모두 알아차려야 한다. 더구나 의도까지 알아차림하다 보면 느리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선방에서 포행은 가벼운 몸풀기에 가까운 것 같다.
9. 트렁크 하나가 전재산
선지식을 만나는 것은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법문을 듣는 것이다. 법문을 듣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온 것이다. 스님은 어떤 법문을 준비했을까?
스님은 스님의 방으로 안내했다. 작고 검소한 방이다. 살림살이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평소 스님의 삶이 그렇다. 트렁크 하나가 전재산이라고 했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진주선원 불자들은 스님 모시기를 부처님 모시는 것 같다.
스님은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진주선원 불자들은 스님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배우려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잘 모시려고 하는 것 같다. 2017년 1월 진주선원불자들과 11일 동안 인도성지순례를 함께 했었다. 그때 스님 대하는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다.
10.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스님과 다섯 명이서 작은 방에 앉았다. 스님은 차를 따라 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준비한 법문은 ‘사띠’에 대한 것이다.
스님에 따르면 사띠는 여러 명칭으로 불린다 했다. 그 중에는 기억도 있다.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라고 했다. 오래 전에 들은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주의기울여 잘 들어야 할 것이다.
듣는 것으로 그친다면 법문하는 의미가 없다. 들은 것을 기억해 내야 한다.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뼈에 새기면 오래 갈 것이다. 이렇게 기억해야 그 다음 단계가 진행된다. 알고서 행하는 것과 모르고 행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래서 무명이 대죄라고 했다. 알고 행하면 실수를 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가르침을 들었으면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뿐니야여, 수행승이 믿음을 갖추었고 , 찾아 와서, 가까이 앉아, 질문하고,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가르침을 기억하고,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고, 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한다면, 여래가 기꺼이 설한다. 뿐니야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원리를 갖출 때, 오로지 여래가 가르침을 기꺼이 설한다.”(A9.82)
부처님은 법을 들을 자세가 준비 되어 있는 자에게 설했다. 먼저 믿음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믿음이 있더라도 건성으로 듣는 자에게 설하지 않았다. 듣고 난 다음 깨끗하게 잊어 버린다면 설한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더라도,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때 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고 했다.
들었으면 기억하고 사유하고 새겨야 할 것이다. 이런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을 때 법을 설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경을 매일 외워도 실천하지 않으면 가르침을 설한 의미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한 최상의 공양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11.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아서
분우위기는 자유로웠다. 아무래도 사람 숫자가 적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열명만 넘어가도 강의식이 된다. 숫자가 적으면 서로 부담이 없는 것 같다. 더구나 차담이다. 차를 매개로 한 대화는 부드러울 수밖에 없다. 시간 제한 없이 무제한적으로 얘기할 수 있다.
법우님들은 준비해 온 질문을 했다. 재가의 삶을 살다 보니 가족에 대한 것이 가장 큰 이슈인 것 같다. 그것은 한마디로 ‘불안’이다.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현상은 어느 좌담에서나 공통적인 현상일 것이다. 원담스님에 따르면 요즘은 손주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고 한다. 불자들이 노쇠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자식걱정에서 손주걱정으로 바뀐 것이다.
마음이 왜 불안할까? 가족들이 잘 되기를 바래서일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한다. 기도를 하고 나면 마음이 일시적으로 편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담스님은 기도하지 말라고 했다. 기도가 나쁜 것이 아니라 탐욕에 기반한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더 이상 바라는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라는 기도는 부처님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욕망이 개입된 바라는 기도에 부처님은 눈길도 주지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을 편안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마음 달래기나 마음을 위한 하는 그런 불교를 하지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라고 했다.
욕망의 기도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욕망으로 이루어진 몸이기 때문이다. 흔히 오온이라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말이라고 했다.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에게나 있어서 오온이지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오온이 아니라 오취온이라고 했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육근과 육경도 욕육근과 욕육경이 된다고 했다. 욕계중생들은 어느 것 하나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에서 자유로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아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아는 것이라고 했다. 이 정형구에 대하여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전재성 선생은 ‘마법의 주문’이라고 했다. 이 주문만 외면 모든 것이 다 풀려질 것이라고 했다.
12. 왜 무아(無我)라고 하는가
어느 법우님이 무아와 비아가 어떻게 다른지 물어 보았다. 이에 스님은 무아(無我), 비아(非我), 불아(不我)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하면서 이는 모두 빠알리어 아낫따(anatta)를 번역한 말이라고 했다.
왜 무아라는 말을 쓰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쓴 것이라고 했다. 뒤에 토를 달지 않기 위해 쓴 것이라고 했다. 비아나 불아를 사용하면 여지를 남겨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아라고 하면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어서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무아가 될 수 있을까? 이 말은 “어떻게 해야 나를 버릴 수 있을까?”라는 말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나를 버려야 욕망이 생기지 않는다. 원담스님에 따르면 우리들은 욕망의 기계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욕망이 우리를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온이 아니라 오취온이고, 육근이 아니라 욕육근이라는 것이다.
13. 물고기와 새의 비유
아라한이 되지 않는 한 우리는 오취온의 존재이다. 그래서 끊임 없이 욕망을 갈구한다. 가족 걱정을 하는 것도 욕망에 따른 것이다.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근저에는 욕망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서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 범죄도 저지른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염라대왕은 들어 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욕망을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무아의 경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행을 하여 어떤 특별한 경지를 얻어야 할까? 어떤 관문을 통과하여 열반을 맛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어떤 위대한 경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욕망에 물든 마음을 내려 놓는 것이 위대한 경지라고 했다. 또 지금 이순간 숨쉬고 있는 것에 오직 감사할 뿐이라고 여기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물고기와 새의 비유를 들었다.
물고기는 물속에 살지만 물은 걸림이 없이 잘 살아 간다. 새는 하늘을 날지만 창공은 걸림이 없이 잘 살아 간다. 왜 그런 것일까? 이에 대하여 영역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에서는 어디까지 영역인지 알 수 없고, 창공에서도 어디까지 영역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사람은? 이에 대하여 원담스님은 이것이 나의 자아라는 망상이라는 있기 때문에 걸림이 있다고 했다. 좀 더 자세하게 알기 위해 스님의 카페를 찾아가 보았다.
스님은 다음 카페 ‘마음의 호숫가에서(http://cafe.daum.net/MindLake
“물고기가 물을 소유한다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나는 새가 하늘을 소유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나무가 땅을 점유하고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는 일이 있는가? 물고기와 새와 나무는 소유하지 않아도 모두 조화롭게 잘 살아가지 않는가? 너는 세상을, 삶을 너의 것으로 소유하는가? 소유하려 하기에 삶은 짐이 되고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원담스님, 소유할 없는 것을 소유하려 하지 말라, 2020-07-18)
따끈따끈한 글이다. 올린지 하루 밖에 되지 않는 글이다. 마치 대중공양 올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한 법문처럼 보인다.
내뜻대로 하려는 사람이 있다. 아이도 내 뜻대로 되어야 하고, 남편도 내뜻대로 되어야 한다. 남자라면 아내도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심지어 대통령도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돈도 내 뜻대로 벌려야 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왜 그런가? 소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내몸도 내뜻대로 되지 않고 내 마음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물며 어떻게 남을 내뜻대로 할 수 있을까? 모든 대상은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가 소멸한다. 소멸하는 것에는 조건은 없다. 그냥 소멸할 뿐이다. 그럼에도 붙잡으려 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원담스님은 글에서 “손아귀로 공기를 잡으려는 것과 같고, 물을 움켜 쥐려 하는 짓과 같아 이뤄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텅 빈 것에 내 욕망을 투사하니까 그것이 탐스럽게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고 했다. 인간은 결점투성이라고 했다. 욕망으로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연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나는 이것 밖에 안돼”라며 매일 절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욕망에 집착된 오온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절망해야 진실이 보인다고 했다. 아상을 부수는 것이다. 밑바닥부터 다시 하는 것이다.
14. 말을 잘라먹지 않고
스님과의 시간은 두 시간 반가량 이어졌다. 스님은 말을 잘 들어주었다. 이는 도중에 말을 잘라먹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말을 다 할 때까지 눈을 응시하며 다 들어주는 것이다. 할 말을 다 했을 때 스님이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스님과 대화를 했는데 자꾸 말을 잘라먹는 것이다. 말하는 도중에 말을 자르고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다. 기다렸다가 마저 이야기하고 있는데 스님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또다시 말을 자르는 것이었다. 도무지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말을 논리 있게 잘 하는 것이 말을 잘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다. 말을 잘라먹지 않고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다.
재가불자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삶이 불안한 것이다. 그리고 근심과 걱정이 많다. 그래서 “스님, 제 말 좀 들어주세요.”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다.
말을 잘라먹지 않고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대화를 잘 하는 사람이다. 원담스님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았다. 시선은 부드럽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와 쾌불쾌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인형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될 때가 있다.
스님의 법문이 끝났다. 법문이라기 보다는 자유로운 토론이 되었다. 스님은 선물을 하나 주었다. 빨강구슬로 되어 있는 열쇄걸이 내지 차걸이 같은 것이다. 멀리서 온 사람들을 위해서 무언가라도 하나 챙겨 주려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5. 보시는 자기자신에게 하는 것
선지식을 찾아 가서 가르침을 듣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듣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들은 것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새겨야 한다. 최종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법문을 설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될 것이다.
청정한 수행자가 보시하는 것은 헛된 것이 아니다. 청정하지 못한 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청정한 자가 보시하면 그 보시는 청정한 보시가 된다. 또 청정한 자가 받아도 청정한 보시가 된다. 최상의 보시는 보시하는 자나 보시 받는 자가 청정했을 때이다. 그런 보시는 헛된 것이 아니다.
‘사랑은 그대 가슴에’라는 시가 있다. 말을 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글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 사람의 가슴에 남아 있다. 선업이든 불선업이든 나의 가슴에도 남아 있고 남의 가슴에도 남아 있다. 업을 지으면 없어지지 않고 어딘가에 남아 있다. 보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법우님은 정성을 들여 단호박죽을 만들었다. 선방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을 위한 것이다. 법우님들은 보시금을 준비했다. 능력껏 준비한 것이다. 안거가 끝나 해제철에 여비에라도 보태려 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헛된 것이 아니다. 업을 지으면 상대방의 가슴에 남아 있듯이, 보시를 하면 상대방의 가슴에도 남아 있다.
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시는 현명한자들이 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갚음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시는 자기자신에게 하는 것이 된다. 보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2020-07-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