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시론 중앙일보 입력 2023.03.17 01:00
유대인의 ‘하브루타 교육’과 ‘창조정치’
요즘 대한민국 정치를 보면서 우리 국민은 어떻게 인식할까. ‘사색당쟁’(四色黨爭)으로 날을 지새운 조선은 급기야 구한말에 나라를 잃었고, 지금은 극한 갈등의 정치로 국가 경제가 어려움에 빠졌다. 그래서 항간에 정치란 ‘정’말로 ‘치’사한 것이 우스개까지 나돌고 있다. 정치의 사전적 풀이는 ‘국가 권력을 활용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러면 ‘창조정치’는 과연 어떤 의미의 정치일까. 한때 ‘창조경제’라는 용어가 정치적으로 활용된 적도 있었지만, 국가의 새로운 경제 영역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창조정치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창조적 상상력으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잠재력을 활용해 현실 정치에 메마른 꿈과 사랑을 활성화해 정치에 융합하는 새로운 정치 형태라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기존 정치에 빈약한 꿈과 사랑을 창조정치의 속성으로 키워 국민의 삶에 접목하면 국민은 더 행복해질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창조정치의 핵심은 무엇보다 자유 민주주의가 정치의 기본이 돼야 한다. 경제는 활력이 넘치는 시장경제를 명확하게 확립해야 한다. 이런 자유민주주의 국가 체제 위에 국가권력은 창조적 경우에만 최소한으로 활용돼야 한다. 그러면 국가 경제는 더욱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된다.
창조정치 캠페인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상상력으로 정치에 대한 매력적인 꿈을 만들어 국민이 스스로 국가 발전에 즐겁게 기꺼이 몰입하게 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인문학의 철학적 상상력과 자연과학의 실험적 창의력을 결합해 만든 ‘꿈과 사랑’으로 국가 경제에 융합하면 국민경제는 자연스럽게 부흥할 것이다. 말하자면 창조정치는 국가가 행사하는 최소한의 권력으로 경제 부흥의 꿈과 사랑을 키우자는 새로운 정치 운동이다. 한정된 절대 ‘파이’로 파생되는 분배의 정치 갈등을 최소화하고 절대 파이를 창조정치로 오히려 키워 공정한 분배를 통해 국민을 화합하도록 하는 정치 캠페인이 될 것이다.
이와 유사한 창조정치로 성공한 민족이 유대인이다. 부존자원이 빈곤하고 인구도 적은 이스라엘을 세운 유대 민족이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았고, 세계 최강인 미국에서 정치와 경제의 핵심적 역할을 하는 민족이다.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유대인 특유의 창의적 자율학습 교육이다. 유대인을 가장 창의적인 민족으로 만든 원동력은 짝을 지어 토론하는 학습 방법인 ‘하브루타(Havruta)’ 교육이다. 교육으로 창의적 국민을 만들어 자율적으로 경제 부흥과 국민 복지를 증진하는 것이 바로 유대인의 창조정치다.
우리는 창의력이 부족한 교육을 짝사랑하고 있다.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창의력이 부족한 타율적 교육을 우리는 일방적으로 짝사랑하고 있다. 이런 교육에서 황홀한 사랑의 에너지와 영감적 공감력이 결코 분출할 수 없다. 유대인의 하브루타 교육은 다르다. 학생 스스로 열정적인 사랑의 블랙홀에 빠져 창조적 빅뱅을 만들도록 교육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창조적 에너지가 솟구치고 상상력 넘치는 새로운 소우주가 탄생하게 된다.
창조정치에서는 기존 정치에 부족한 미래지향적 공감 에너지를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고심한다. 이를 위해 전직 국회의원 모임인 대한민국헌정회 내에는 국가건설입법위원회가 만들어져 과학 공감 에너지의 산실이 될 ‘과학의 전당’ 관련법 제정이 추진되고 있다. 지금 뒷전으로 밀려난 홍익인간 정신을 어떻게 키울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창의성이 실종된 정치, 이기적이고 이념적인 진영논리에 빠진 갈등 정치, 어린이들의 과학 요람 ‘과학의 전당’ 건립 꿈이 취약한 현실 정치, 나날이 오염되는 정치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창조정치의 ‘ESG 경영’이다.
ESG 경영이 가장 시급한 분야가 정치고, 정의가 실종된 분야가 바로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정치다. 정치 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이라고 질타한다. 우리 국민의 정치의식 개혁 차원에서 새로운 정치 캠페인이 필요하다. 필자는 창조정치가 대안이라고 확신한다. 극단적 정쟁으로 침몰 직전에 내몰린 우리 대한민국을 창조정치의 깃발을 올려 살려내자. 지혜를 모으자. 시간이 많지 않다.
* 오늘의 묵상 (22070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를 모두 고쳐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가까이”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당신의 삶에 더 깊이 참여하라는 뜻이며, 이것이야말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더러운 영들이 쫓겨나고 병자와 허약한 이가 치유받는 것은 성경에서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승리가 당신의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편 열두 제자의 이름이 “사도”라는 호칭으로 소개됩니다. 복음을 읽으면서 이 부분을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이미 익숙한 이름들이기도 하지만 그 명단에 자신 또는 친밀한 이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본당에서 봉사자를 선발하여 명단을 발표하여도 교우들은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그 명단에 올릴 마음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어찌 신자들뿐이겠습니까? 사제품을 받으며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라고 바쳤던 기도가 점차 “쟤가 있지 않습니까? 쟤를 보내십시오.”라는 기도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제자들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계속 이루십니다. 그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 봅시다.
(김인호 루카 신부 대전교구도룡동성당주임)
* 2할 9푼과 3할 타자의 차이 (아침공감편지 230207)
2할 9푼을 치는 타자와 3할 타자의 차이는 단순하다.
2할 9푼 타자는 4타수 2안타에 만족 하지만 3할 타자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4타수 3안타 또는 4타수 4안타를 치기 위해 타석에 들어선다.
-장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