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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담사는 왜 찬기파랑가를 지었나
여태까지 신라 향가 찬기파랑가는 ‘화랑 기파랑을 찬미한 노래’라 하고, 이 노래의 배경설화는 없다고 단정하여 왔다. 과연 그럴까? 그 관련 기록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자.
찬기파랑가는 삼국유사 권 2에 ‘기파랑을 찬미한 노래’란 제목으로 안민가와 함께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당나라에서 도덕경 등을 보내니 왕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이 되던 해에, 5악(五嶽)과 삼산신(三山神) 들이 때때로 나타나서 대궐 뜰에서 왕을 모셨다. 3월 3일 왕이 귀정문 문루 위에 나가서 좌우 신하들에게 일렀다.
“누가 길거리에서 위엄과 풍모 있는 중을 한 사람을 데리고 올 수 있겠느냐?”
이때 마침 위엄과 풍모가 깨끗한 고승 하나가 길에서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신하들이 이 중을 왕에게로 데리고 오니 왕이 말했다.
“내가 말하는 위엄과 풍모가 있는 중이 아니다.”
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다시 중 한 사람이 있는데 누비옷을 입고 벚나무로 만든 통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왕이 보고 기뻐하여 문루 위로 맞아 들였다. 통 속을 살펴보니 차 달이는 도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왕이 물었다.
“그대는 대체 누구요?”
“소승은 충담이라고 합니다,”
… (중간 부분 생략. 안민가 배경설화 참조) …
중은 이에 차를 끓여 바쳤는데, 찻잔 속에서 향내가 풍겼다. 왕이 말하였다.
“짐은 일찍이 대사가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의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러하 오?”
“그렇습니다.”
… (중간 부분 생략. 안민가 배경설화 참조) …
찬기파랑가는 이러하다.
목메어 자리하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 따라 떠가 숨었구나
모래 깔린 물가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으라
일오나리 조약돌에서
낭(郞)이 지니신
마음을 좇으려 하네
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눈도 덮지 못할 고깔이여
경덕왕은 성기의 길이가 8촌이나 되었다. 아들이 없어 왕비를 폐하고 사량 부인으로 봉했다. 후비 만월 부인의 시호는 경수태후이니 의충 각간의 딸이었다. 어느 날 왕은 표훈대덕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서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바라건대 대사는 상제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 주시오.”
표훈은 명령을 받아 천제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 왕께 아뢰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될 수 있지만 아들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왕은 다시 말하였다.
“원컨대 딸을 바꾸어 아들로 만들어 주시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천제께 청하니 천제는 말하기를,
“될 수는 있지만 아들이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하였다.
표훈이 내려오려고 하자 천제는 다시 불러 말했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데 지금 대사는 마치 이웃을 왕래하듯이 하여 천기를 누설했으니, 이제부터는 아예 다니지 말도록 하라.”
표훈은 돌아와서 천제의 말대로 왕께 알아듣도록 말했지만 왕은 또 다시 말하였다.
“나라가 비록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서 대를 잇게 하고 싶소.”
이리하여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무척 기뻐하였다. 8세 때에 왕이 돌아가시매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혜공왕이다. 나이가 매우 어린 때문에 태후가 섭정하였는데, 정사가 잘 다스려지지 않아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루 막을 수가 없었다. 표훈대덕의 말이 맞은 것이다.
왕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날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항상 여자의 놀이를 하고 자랐다.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교의 무리들과 어울려 희롱하며 노니,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선덕왕과 김양상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 한다.
종래 찬기파랑가는 배경설화가 없는 노래로 인식되어 왔다. 또 이 노래를 기파랑이라는 화랑을 찬미한 노래로 알아 왔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하여는 다시 한 번 세심히 더듬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 이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자.
향가 기록은 산문인 배경설화와 운문인 시가 하나의 구조로 짜여 있는 변문(變文=講唱)의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앞에서 말했다. 산문이 빠지거나 혹은 운문이 빠지거나 하면 그것은 완전한 글이 되지 못한다. 바꾸어 말하면 두 가지 형태의 글이 합해져야 완결을 이루는 체재다. 이것은 일찍이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적인 고유 문채다.
그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 또한 겉으로는 질서가 없는 기록 같지만, 속을 자세히 살피면 모두가 할 말을 다하는 짜인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언뜻 보이는 외형에 이끌려 찬기파랑가의 배경설화가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면 여기서 이 배경설화의 전체적 구조와 거기 담긴 숨은 의미를 찾아보자. 이 설화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내용으로 짜여 있다.
① 왕이 도덕경을 예를 갖추어 받았다.
② 충담사로 하여금 안민가를 짓게 했다.
③ 표훈대덕으로 하여금 상제께 고하여 아들 갖기를 간절히 원했으며, 이렇게 해서 얻은 아들인 혜공왕은 어릴 때부터 도교의 무리들과 놀기를 좋아했으며, 치세 중에는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져 마침내 그는 시해되었다.
여기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이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도교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도덕경을 받아들인 경덕왕은 말할 것도 없고, 표훈대덕 또한 완전히 신선화된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신선이라 하면 하늘나라에 자유로이 왕래하여 조물자인 천제와 접할 수 있고, 인간세계에 나타나서는 생사의 한계와 시공의 경계를 초월하여 활동할 수 있는 것을 뜻하는바, 왕의 후사를 얻기 위하여 천제에게 올라가 고하는 표훈대덕의 행적은 불승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완전한 도교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하늘에 올라가고 땅으로 내려오며 인간 세상을 자유로이 드나드는 신선이다. 혜공왕 역시 어릴 때부터 도교의 무리들과 섞여 놀기를 좋아했다는 것으로 보아 도교적 인물이다.
불교국인 신라에서 볼 때 도교는 하나의 이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시대적 조류가 이 설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즉 이단적인 도교에 기대었기 때문에 혜공왕의 치세는 어지러웠고 끝내는 시해되었다는 것이 이설화의 요지다.
이처럼 『삼국유사』의 설화는 날줄과 씨줄로 긴밀히 짜인 구조로 되어 있다. 겉으로는 엉성한 것 같지만 속은 매우 긴밀한 짜임새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찬기파랑가의 배경설화는 없다고 하는 종래의 주장은 그만큼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 설화의 후반부 즉 “찬기파랑가 왈(曰)”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바로 찬기파랑가의 배경설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찬기파랑가의 성격에 대하여 살펴보자.
신라 향가의 작자 이름은 설화성이 상당히 높다. 작자명이 실명이라기보다는 노래 내용을 함축하는 예명일 가능성이 짙다. 그러면 작품과 그 작자 이름과의 관련성을 살펴보자.
모죽지랑가의 작자 득오는 죽지랑 만나기를 ‘시름’하며 지은바, 득오(得烏)의 뜻이 ‘시름 [憂우]’이다.
안민가의 작자 충담사는 충성[忠충]과 관련된 말[談담]을 노래했다 하여 충담사(忠談師)다
처용가의 작자 처용은 역신을 용납[容용]하여 처리[處처]했으므로 처용(處容)이다.
서동요의 작자 서동은 마[薯서]를 캐는 아이[童동]와 관련지어 서동(薯童)이다.
맹아득안가의 작자 희명은 5세 된 딸의 눈이 밝아지기를[明명] 바랐다[希희] 하여 희명(希明)이다.
혜성가의 작자 융천사는 하늘[天천]의 혜성과 융통[融융]했다 하여 융천사(融天師)다.
원가의 작자 신충은 임금의 신임[信신]과 작자의 충성[忠충]을 관련지어 신충(信忠)이다.
우적가의 작자 영재는 향가를 부르는[永=詠영] 재주[才재]가 뛰어났다 하여 영재(永才)다.
이에서 보면 향가의 내용과 작자명은 상당히 밀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찬기파랑가의 성격을 설명하는데 상당한 시사를 준다. 그것은 충담사가 지은 안민가가 충성[忠충]과 관련된 말[談담]과 관련된 내용이듯이, 충담사가 지은 찬기파랑가 역시 충성[忠충]과 관련된 말[談담]과 연관이 있는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본다면, 찬기파랑가 역시 충담사가 왕에 대한 충성의 말을 담고 있는 노래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노래를 기파랑이라는 한 화랑을 찬미한 것으로 파악해 온 견해는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배경설화를 겉으로 보면, 왕이 충담사를 처음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왕은 이미 충담사를 익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위엄과 풍모를 갖춘 승려 한 명을 데려오라 해서 신하들이 한 승려를 데리고 오자, 그를 본 왕은 단번에 “내가 말한 위엄과 풍모가 있는 중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물리쳤다. 이를 보면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미리 점 찍어 놓은 사람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곧 충담사다. 왕은 이미 충담사가 지은 찬기파랑가의 ‘뜻이 매우 높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음은 그러한 사실을 더욱 확실케 한다.
나아가 ‘뜻이 매우 깊다’는 것 또한 일반적인 말이 아니라, 남이 모를 깊은 뜻이 거기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단순히 시적 수준이 높다는 뜻이 아닌, 일반인들이 언뜻 알아차릴 수 없는 그 어떤 비밀스런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은 잠시 뒤로 미루고 ‘랑(郞)’의 의미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기파랑’이란 이름에 ‘랑’ 자가 붙어 있으니, 기파랑을 화랑으로 단정해 왔다. 그러나 ‘랑’ 자가 붙는다고 하여 전부 화랑이라 할 수는 없다. 또 이 배경설화의 어디에도 기파랑이 화랑이라는 것을 단정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랑’ 자는 화랑이 아닌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붙일 수 있는 글자다.
종들이 주인을 높여서 단랑(檀郞)이라 불렀고, 벼슬 이름으로 원외랑(員外郞), 시랑(侍郞), 등화랑(登化郞) 등이 있고 화왕계에는 풍당랑(馮唐郞)이 등장하고, 『삼국유사』에는 연오랑, 처용랑, 비형랑, 명랑 등의 인물이 나온다. 또 이규보의 『동명왕편』에는 천왕랑이 나오고, 『사물이명록』에는 풍륙랑(馮六郞)이라는 귀신이 나오며, 『중화대자전』에는 중을 일러 치랑(緇郞)이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파랑을 화랑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찬기파랑가의 성격을 요약해 보자.
① 충담사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왕을 위해 충성 어린 안민가를 지었다. 찬기파랑가 역시 향가가 갖는 작자명의 설화성으로 볼 때 왕을 위한 충성을 담아 지은 노래다.
② 왕과 충담사는 이전부터 서로 알고 있는 사이며, 찬기파랑가는 겉으로는 퍼뜩 알 수 없 는 ‘의미가 범상치 않은’ 노래다.
③ 기파랑은 화랑이 아니라 왕의 고민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원의 대상이 되 는 인물이다.
어지러워진 신라 하대의 난국을 수습하기 위한 처방으로 지은 노래가 안민가라면, 찬기파랑가는 왕의 어떤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주원으로 지은 노래다.
여기에 나타난 고민은 배경설화의 내용으로 보아 대를 잇기 위한 아들 낳기다. 그런데 경덕왕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것이다. 경덕왕의 고민은 바로 그것이다. 충담사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찬기파랑가를 지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반 사람들이 잘 알 수 없는, ‘뜻이 매우 높은’ 이유다. 그러면 왕은 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왕의 성기의 길이가 8촌이나 되는 기형에 있다. 성기가 너무 커서 그것을 받아 줄 상대가 없는 것이다. 성기가 커서 배필을 구할 수 없는 이야기는 『삼국유사』 지철로왕 조에 일찍이 보인다.
왕은 음경의 길이가 1척 5촌이나 되어서 배우자를 얻기가 어려웠다. 사자(使者)를 세 방면으로 보내어 배필을 구하였다. 사자가 모량부의 동로수 나무 밑에 이르러 보니 개 두 마리가 북만 한 똥 덩어리 하나를 물었는데 두 끝을 다투어 가며 깨물고 있었다. 동네 사람에게 물으니 한 소녀가 말하였다.
“이 부(部) 상공의 딸이 이곳에서 빨래를 하다가 수풀 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사자가 그 집을 찾아가 알아보니 그 여자의 키는 7척 5촌이었다. 사자가 사실을 갖추어 아뢰니 왕은 수레를 보내 궁중으로 맞아들여 왕후로 삼았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치하하였다.
왕의 성기가 너무 커 거기에 맞는 배필을 구할 수 없어 애를 먹다가, 마침 키가 7척 5촌이나 되고, 평소에 똥덩이가 북만 한 것을 누는 모량부의 거대한 여자를 구해 왕후로 맞이했다는 이야기다. 경덕왕도 성기가 너무 커서 첫 왕비는 폐하고 후비 만월부인을 맞아 들였다.
그래서 왕은 충담사로 하여금 은밀히 자신이 가진 이 병 아닌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찬기파랑가를 지어 주원했던 것이다. 그러니 찬기파랑가는 아들을 갖기 위한 성기와 관련된 주원을 담은 노래다. 충담은 그것을 비는 의식에서 기파랑을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기파랑은 누구인가?
기파는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유명한 의사다.
그는 왕사성(王舍城) 빈파사라왕의 아들 아사세와 절색의 창녀 바라밧데 사이에서 태어났다. 나자마자 바라밧데는 하녀에게 당부해서 하얀 옷으로 아이를 싸서 길가에다 버렸는데, 마침 왕궁에 참례(參禮)하기 위하여 마차를 타고 가던 무이라는 사람에게 발견되어, 기파라는 이름을 얻고 유모에 의하여 양육된다. 기파라고 하는 것은 목숨, 장명(長命)이란 뜻인데, 버려졌을 때 살아 있었기 때문에 얻어진 이름이다.
자라면서 그는 의술을 배우기로 작정하고, 토쿠사시라국에 성이 아다일러, 이름을 힝카라라고 하는 명의에게 가서 의술을 배우기 시작한다. 7년 만에 모든 의술을 습득하고 후계자로 지명된 그는, 다시 마갈타국 왕사성으로 돌아와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난치병자를 치료하는 신술을 발휘하였고, 마침내는 왕의 시의가 되어 여러 가지 고민스러운 왕의 병을 치유해 주는 명의가 되었다.
또 기파는 악인 아사세를 회개시킨 불자로도 유명하다. 부왕을 죽게 한 아사세는 자기가 저지른 죄책감에 스스로 괴로워하여 끝내는 온 몸에 중기가 생겨 크게 고생을 하는데, 마음에서 생긴 이 종기는 절대로 낫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더욱 고민한다. 이때 기파가 나타나, 악을 범해도 곧 참회하고 두 번 다시 악을 범하지 않으면 그 죄는 지워진다고 역설하고, 마침내 세존에게 인도하여 그를 불문에 귀의시켰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기파는 왕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심신을 치유한 명의로서, 또 충성스러운 신하로 부각되어 있으며, 세존까지도 그를 극구 찬양하리만큼 위대한 인물로 불전에 나타나 있다.
나라의 안민을 비는 충성스러운 신하요 불제자였던 충담사는 아사세왕의 고질적인 병 치료와, 정성으로 그를 회개시킨 의사요 불자였던 기파의 덕을 찬미하고, 그럼으로써 경덕왕의 성기 이상을 치유하고 아들을 갖고 싶다는 정신적 고민을 해결하고자 염원했으며, 이의 발원이 찬기파랑가로 나타났던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찬기파랑가는 충담사가 왕의 성기 이상을 치료하기 위하여 충성된 마음을 담아 그 해결을 위한 제사의식에서, 불자요 명의인 기파를 찬하며 부른 주원가다. 충담사는 ‘일오나리 물가’에 제단을 세우고 목메어 울면서 정성을 다하여 기파를 찬한다. 달은 이미 지려 하는 밤중인데 일오나리 물가의 조약돌을 밟고서 기파의 위대한 마음 즉 은덕을 기리며 주원한다. 기파랑의 그러한 높은 덕은 너무 높아서 한겨울의 눈도 그것을 덮지는 못할 것이라 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명의인 기파의 힘으로 경덕왕의 비정상적인 성기로 빚어진 아들 얻기를 주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