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크는 역사상 가장 작고 가벼운 랜드로버지만 그래도 레인지로버 라인업의 일원이다. 편의 장비의 구성이나 성능을 보면 단순히 볼륨을 늘리기 위해 싸게 만든 차가 아니다. 오히려 랜드로버서는 처음 선보이는 장비가 많고 내비게이션의 화질도 상급 모델보다 좋다. 가솔린 모델은 동급의 SUV 중에서는 가장 스포티한 주행 성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엔진 사운드의 튜닝 역시 남다르다. 이보크는 역대 랜드로버 중 고속 안정성도 가장 좋다.
랜드로버는 유니크하다. SUV 전문 브랜드는 있어도 럭셔리 SUV 전문 브랜드는 랜드로버뿐이다. 랜드로버는 고객층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럭셔리 SUV 전문이지만 현재까지 잘 해나가고 있다. 단순히 틈새 시장을 선점했기 때문이 아니라 차의 성능이 받쳐줬고 이와 함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잘 육성해 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나 트렌드에 따라서 브랜드의 전략도 바뀐다. 90년대까지의 랜드로버는 풀 모델 체인지 기간이 길고 모델 가짓수도 금세 파악이 될 정도로 단촐 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는 전략이 바뀌었다. 일단 새 엔트리 모델인 프리랜더가 나오면서 이전보다는 전체 볼륨이 많이 늘어났다.
최근의 랜드로버는 독일 메이커들이 주도하는 것처럼 빠르게 파워트레인을 업그레이드하는 한편 모델 체인지 주기도 짧아졌다. 랜드로버로서는 대단히 과감한 움직임이다. 여전히 럭셔리 SUV 전문 브랜드라는 특성상 모델 체인지 주기는 긴 편이지만 이전에 비하면 확실히 빨라졌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레인지로버 스포츠라는 새 차종을 개발한 것도 눈에 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메이커들이 어려웠던 2008년에도 랜드로버는 비교적 괜찮았다. 그리고 경제 위기가 벗어나면서는 경영이 한결 좋아졌고 모기업에서도 그만큼 대접을 받는다. 랜드로버는 라인업에 위치한 모든 모델의 판매가 상승세를 띄고 있다.
이보크는 그런 랜드로버의 야심작이다. 역사상 가장 작고 가벼운 랜드로버를 표방하지만 레인지로버의 라인업에 포함하고 있다. 작고 가볍다고 엔트리 모델은 아닌 것이다. 따지고 보면 랜드로버는 당장은 볼륨을 늘리기 위해 싼 차를 만들 이유가 별로 없다. 생산 용량 자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이보크처럼 기존 전략에 걸맞는 모델이 더 필요하다.
구성을 보면 이보크는 레인지로버라는 이름을 달 만하다. 한 예로 서스펜션의 매그니라이드이다. 프랑스의 BWI가 개발한 3세대 매그니라이드는 레인지로버 이보크에 가장 먼저 탑재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매그니라이드는 아우디와, 코베트, 페라리 등에 공급되고 있는 시스템인데 최신 유닛이 이보크에 가장 먼저 쓰였다. 3세대 매그니라이드는 내부적인 개선을 통해 반응이 빨라졌으며 댐퍼당 에너지 소비도 20W로 낮아졌다. 싱글 코일을 2개의 소형 코일로 대체한 게 포인트이다.
EXTERIOR
이전의 시승기에서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랜드로버의 최근 디자인은 정말 좋다. 새로 선보인 디자인 테마가 끝내준다. 최신 모델인 레인지로버 이보크 역시 마찬가지다. 길에서 주위의 시선을 온통 끌어당긴다. 이번 시승회에서는 굳이 쫓아와 무슨 차인지 물어보는 운전자가 2명이나 있었다.
치프 디자이너는 바뀌었지만 디자인은 컨셉트카 시절과 거의 같다. 사실 컨셉트카에서 거의 바뀌지 않는 게 다행이면서도 의외였다. 같은 디자인 테마긴 하지만 랜드로버로서는 상당히 과감한 디테일이 채용됐기 때문이다.
기존의 랜드로버는 직선 위주에 미래적인 느낌의 디테일을 담았는데 이보크는 근육질을 더했다. 운동 많이 한 근육질 남성을 연상시킨다. 차가 작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 기존의 랜드로버들이 다들 한 덩치 하기 때문에 작은 건 맞지만 전장(4,365mm)에 비해 전폭(1,965mm)이 넓은 게 큰 부분을 차지한다. 보디 전체를 꽉 채우는 듯한 근육질 디테일이 이보크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킨다.
흔히 작은 차는 헤드램프나 그릴을 키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보크는 그렇지 않다. 슬림하게 처리해 스포티한 면을 강조하고 있다. 보닛에는 길쭉한 벤트도 마련되는데, 반만 뚫려 있다. 보통 아예 막히거나 모두 뚫리거나 둘 중 하나인데 반만 뚫어 놓은 것도 이채롭다. 보닛의 벤트는 쿠페에만 적용된다.
타이어는 245/45R/20 사이즈의 콘티넨탈 크로스컨택이다. 다이내믹 모델에 적용되는 사이즈이며 휠하우스를 꽉 채운 모습이 스포티해 보인다. 크로스컨택은 온로드 성능 위주의 SUV에 즐겨 채용되는 타이어이다.
INTERIOR
가장 작고 가볍다고 해서 이보크가 랜드로버의 엔트리 모델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레인지로버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실내에 들어서면 레인지로버 이보크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소재나 편의 장비에서 빈틈이 없다. 랜드로버라는 브랜드에 걸맞게 충분히 고급스럽고 편의 장비도 많다. 그러니까 독일 브랜드들의 새 엔트리 모델처럼 실내 소재를 낮추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보크의 실내는 다이내믹 패키지의 검은색이 더 고급스럽다. 대시보드와 도어트림, 시트까지 하얀색 바늘땀으로 엑센트를 줬으며 센터페시아 주변은 메탈 트림으로 치장했다. 이 정도 구성이면 페달에도 알루미늄을 적용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다른 부분에 비해 페달이 평범해 보이고 풋레스트도 면적이 좁은 편이다.
8인치 모니터 양쪽에는 자주 사용하는 버튼을 배치했고 무엇보다도 내비게이션의 화질이 좋다. 옛날 옛적 얘기를 자꾸 하면 민망한데 내비게이션의 화질이나 사용 편의성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국내에서 작업한 맵 중에서는 화질이 가장 좋아 보이고 눈에도 잘 들어온다. 최근의 재규어랜드로버는 내비게이션이 다들 좋아졌지만 이보크는 그중에서도 가장 좋다.
다른 레인지로버처럼 서라운드 모니터도 당연히 있다. 근데 기능은 이보크가 더 많다. 기본적으로 확대와 근접보기, 특수보기 기능 이외에도 보도의 연석 보기나 연결점 보기 같은 기능이 있다. 특히 이보크 같은 SUV에는 연석 보기 같은 기능이 유용하다. 가장 흔하게 당하는 일이 주정차 중 휠을 긁기 쉬운 것이니까. 거기다 오프로드 주행할 때도 대단히 유용하다. 서라운드 카메라가 있어서 어지간하면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 일이 없다.
공조장치의 디자인도 직관적이며 기어 레버는 재규어에 처음 도입된 형태가 적용됐다. 다른 점이라면 터레인 리스폰스 기능이 다이얼이 아니라 버튼 식인 것이다. 센터페시아는 볼보처럼 뒤쪽이 뚫려 있는데, 여기에도 조명이 들어오고 색을 바꿀 수도 있다. 흠이라면 조명의 온도 때문에 다리가 뜨겁다. 동반자석에 앉았을 때 왜 덥나 했는데 조명 때문이었다. 물론 조명의 밝기를 낮추면 해결되는 문제다.
계기판의 디자인 자체는 평범한데 가운데 액정에 뜨는 그림 및 폰트가 예쁘다. 수온계와 연료계는 디지털로 처리하고 그 외의 자잘한 정보들은 그래픽으로 표시한다. 이렇게 성의 있어 보이는 그래픽에서도 고급차임을 알 수 있다. 스티어링 휠에는 많은 버튼이 마련되고 길이와 높낮이 조절 폭도 큰 편이다.
다이내믹 모델에서는 시트가 압권이다. 스포티한 성향이라지만 SUV에 적용되는 시트로서는 많이 우락부락하게 생겼다. 헤드레스트에 구멍이 두 개나 뚫린 것이나 측면을 지지하는 볼스터도 심상치 않다. 실제로 앉았을 때 몸을 강하게 잡아준다. 시트만 봐도 다이내믹 모델을 사고 싶을 것 같다.
2열의 레그룸은 쿠페나 5도어나 똑같다. 단지 드나들기가 조금 불편할 뿐이다. 레그룸 자체가 넉넉하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매우 비좁은 수준은 아니다. 물론 쿠페의 경우 5도어보다 숄더룸이 부족하다. 지붕 전체를 덮는 파노라마 루프 때문에 2열까지도 탁월한 개방감을 얻을 수 있다.
POWERTRAIN & IMPRESSION
레인지로버 이보크에는 2리터 직분사 가솔린 터보와 2.2리터 디젤 엔진이 올라간다. 2리터 가솔린은 직분사와 터보를 더해 240마력, 34.7kg.m의 최대 토크를 발휘한다. 요즘은 리터당 마력이 높은 가솔린 터보가 많긴 하지만 2리터로 240마력은 평균 이상의 출력이다. 국내 시판 모델은 당연히 6단 자동이 기본이다.
이보크를 시승하면서 다시 한 번 터보가 좋은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터보가 배기량 이상의 힘을 내긴 하지만 2리터로 1.8톤의 무게를 가볍게 움직인다. 최대 토크는 1,750 rpm에서 나오며 체감으로는 그 이하의 회전수에서부터 충분한 힘을 받는다. 최신의 가솔린 터보는 디젤만큼이나 저속 토크가 좋은 것 같다. 이보크의 2리터 터보는 초기의 반응도 빠르지만 꾸준하게 힘이 나온다.
0→100km/h 가속 시간도 7.6초로 준수하지만 체감 가속은 더 빠르다. 가속 페달을 밟으면 아주 약간의 딜레이 이후에 민감하게 차체가 움직인다. 가다서다가 잦은 시내 구간에서도 아주 편하다. 오히려 기존의 랜드로버에 익숙하다면 너무 공격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순발력 면에서는 걱정할 일이 없다.
직선에서는 거침없이 가속된다. 가속 페달을 밟는 만큼 쭉쭉 뻗는다. 회전이 빠르게 상승하고 토크 밴드도 넓다. 어느 정도 회전수가 올라가면 힘이 죽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자동 변속 되는 시점까지 꾸준하게 토크가 나온다. 근래 나온 랜드로버 가솔린 중에 가장 좋은 엔진이 아닌가 싶다.
기어비의 간격은 넓은 편이다. 어느 정도 엔진의 힘에 자신이 있고 연비까지 고려한 기어비 설정이다. 2, 3단에서 100, 155km/h까지 가속되고 4단에서는 210km/h까지 나간다. 엔진의 힘이 없으면 이런 기어비로 4단 가속이 지루하다. 가속은 되겠지만 더디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보크는 크게 처지는 느낌 없이 무난히 고속 영역까지 가속된다. 5단으로 넘어가면 그때서야 가속이 주춤해지지만 속도가 제한되는 220km/h(내비게이션 상으로 209km/h)까지 꾸준하게 속도계 바늘이 올라간다.
이보크보다 최고 속도가 더 높은 랜드로버도 있지만 성격으로만 본다면 역대 모델 중 가장 온로드 지향이다. 거기다 고속 안정성도 랜드로버답지 않게 대단히 좋다. 고속에서는 찰싹 달라붙는 게 독일차의 느낌도 난다. 고속 직진 시 너무나 안정적이고 스티어링도 단단하다. 랜드로버로 경험한 최고의 고속 안정성이다. 랜드로버로서는 어느 정도의 아이덴티티는 포기한 대신 탁월한 고속 안정성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고속 시 자세뿐만 아니라 사운드도 이보크의 성격을 말해준다. 이보크는 랜드로버라는 럭셔리 브랜드의 모델이긴 하지만 운전의 재미와 스포티함을 추구했다. 조용한 차라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Si4 모델은 사운드를 즐기면서 신나게 타는 컨셉트이다.
이보크 Si4에서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엔진의 사운드이다. 일반적인 차는 당연히 엔진 음이 앞쪽에서 밀려오는데 이보크는 조금 다르다. 가속 시 엔진 사운드가 좀 더 운전자 가까이서 들린다. 마치 오디오의 사운드에서 앞뒤 페이드를 조절하는 것처럼 다른 차와는 달리 엔진 음이 가깝게 들린다. 가솔린 모델의 경우 말의 사운드 제네레이터가 적용돼 있다. 랜드로버에 따르면 엔진 사운드가 밑에서 올라오도록 튜닝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엔진 사운드를 강조한 세팅이다.
이보크에는 스티어링 휠에 시프트 패들이 있는 게 당연해 보인다. 시프트 패들은 딱 손이 닿기 좋은 위치에 있으며 작동감도 괜찮다. 넉넉한 힘과 빠른 반응을 자랑하는 엔진에 비해 변속기의 반응은 조금 못 미친다. D 모드에서 변속 시 반박자 정도 늦는다고 할까. 대신 S 모드에서는 보다 스포티해지고 주행 모드에서 다이내믹을 선택하면 공격적으로 변한다.
다이내믹 모드는 다이내믹 트림에만 제공된다. 그러니까 기존의 터레인 리스폰스에서 온로드와 고속 주행을 위한 다이내믹 모드가 추가됐다. 다이내믹 모드를 선택하면 엔진과 변속기, 스티어링, 댐퍼의 반응이 바뀐다. 이보크의 가장 다이내믹한 세팅인 셈이다. 일반 모드에서도 SUV로서는 상당히 단단하고 조향의 반응이 빠르지만 다이내믹에서는 더욱 스포티하다. 처음에 익숙지 않았을 때는 꼬불꼬불한 국도에서 세차게 달리기가 조금은 부담스러울 정도다.
다이내믹 패키지의 이보크는 하체가 상당히 단단하다. 댐퍼를 보면 완전히 온로드 성향인 것은 물론 경쟁 모델과 비교해도 댐핑이 단단하고 스트로크도 짧다. 랜드로버의 SUV가 이런 세팅일 수도 있구나 싶다. 이보크는 언더스티어가 거의 없고 코너에서도 빠르게 움직인다. 국도에서는 넓은 차폭이 부담되는 정도다. 길게 돌아가는 코너에서도 어느 정도는 타이어 소리를 즐길 수도 있지만 일정 한계를 넘어가면 VDC가 출력을 제어한다. 다이내믹 모드에서는 VDC의 개입도 늦춰진다.
디젤 모델의 프리스티지는 다이내믹 모드보다 부드럽고 좀 더 편하게 타는 성격이다. 가솔린은 운전자에게도 어느 정도는 스포티한 마음가짐을 요구한다면 디젤은 보다 대중적으로 탈 수 있다. 연비는 말할 것도 없고 정속 주행 시 소음도 디젤이 더 조용한 것 같다. 물론 디젤 모델에도 다이내믹 패키지를 고를 수 있다.
이보크는 이전에는 없었던 랜드로버지만 품질이나 고급스러움은 영락없는 랜드로버이다. 기존 랜드로버의 아이덴티티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새로운 차종을 잘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랜드로버로써 이보다 더 온로드 성능이 강조된 모델이 나오긴 어려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