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천 [설교, 누구나 잘 할 수 있다] 비평적 읽기
1. 전체적으로 글과 책의 구성은 상당히 괜찮다. chapter에서 chapter로 넘어가는 부분이 상당히 매끄럽고, 알아듣기 쉽게 썼다. 하지만 내용이 지나치게 많이 반복된다.
2. 저자의 전제를 파악하는 것이 책 전체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의 전제는 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설교자로) 세우셨다는 것과 ② 능력 주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라는 것(12p)이다. 그런데 이 전제가 ‘일반적’으로는 수긍할 수 있으나, ‘설교’의 문제와 연결되면 무리가 생긴다. 책 제목에 ‘설교’ 대신 ‘찬양, 행정, 상담’ 등을 넣어도 무리가 없을까?
저자는 몇 차례에 걸쳐(5, 13, 52p) 사역자들에 대한 부르심, 소명, 사역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했다. 모든 목사가 목회자로 부름 받았을까? 모든 목회자가 설교자로서의 소명/사역을 받은 것일까? 목사라면 무조건 설교를 잘해야 하는 것일까? 잘 할 수 있고, 잘해야만 하는 것일까? 설교를 못하는 목사는 회개해야(16p) 하는 것일까?
3. 저자가 말하는 ‘잘하는 설교’와 ‘위대한 설교자’는 ‘대형 교회의 성공한 목회자’와 ‘그들의 설교’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쉽게 이해되는 설교, 성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설교,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오게 하는 설교를 하도록 돕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기준, 그러한 모범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4. 포인트 워드에 대한 지나친 신뢰가 엿보인다. 하지만 포인트 워드는 만능일 수 없다!
5. ABC 이론은 ‘쓰기’와 관련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도구라고 생각된다.
* 아래에는 책을 읽어가면서 생각한 내용들을 함께 적어 보았다. *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들에게 능력을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라는 것과 설교는 운명이 아니고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알게 되었다. … 따라서 설교는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20세기에 설교를 가장 잘하는 목회자가 21세기에는 설교를 못하는 수준과 같도록 만들자”란 모토를 만들어 연구에 임했다(5p).
⇒ 일반적인 측면에서는 수긍이 된다. 하지만 보다 깊은 측면에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설교’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관건으로 보인다. 이 문구에 설교 대신 ‘노래’나 ‘행정’을 넣어도 성립될까? 누구나 노래를 잘 할 수 있다고? 누구나 행정을 잘 할 수 있다고? 수학이나 영어는 어떤가? 기본적인 재능(은사)과 노력(훈련) 사이에는 아무런 차별성이 존재하지 않을까? 어느 정도 따라 잡을 수는 있겠지만, 전혀 차별이 없게 되지는 않을 듯하다. 어느 정도 하향 평준화 시키면 몰라도 ‘누구나’라는 말은 좀 그렇다. ‘20세기에 설교를…’이라는 모토는 일견 ‘상향 평준화’(?)인 듯 보이지만 실은 ‘하향 평준화’일 수도 있다. 물론 전체적으로 ‘상향(上向)’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중화’의 일반적인 특성이 ‘하향(下向)’이요 ‘저질화’라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다. 붕어빵 틀에서 똑같은 붕어빵을 찍어내듯, 일정한 수준의 설교자를 만들어내는 체계란 과연…
모든 설교자는 친히 하나님이 세우신다. 인간 스스로가 설교자가 되고 싶다고 설교자가 될 수 없으며 설교자가 되기 싫다고 거부할 수도 없다(12p).
⇒ 원론적으로는 옳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설교하고 있는 모든 사람(설교자)가 다 하나님에 의해 세움 받은 사람들일까? 목사는 친히 하나님이 세우시지만, 모든 목사가 과연 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일까?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이 땅 위에서 죄 많은 그의 자녀들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하셨고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그의 자녀들에게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며 하나님은 위대하시기 때문에 그의 사역자들도 위대하기를 원하신다(12-13p).
⇒ 묘한 3단 논법이다. 거룩과 사랑은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으로서 위와 같이 적용하는 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거기에 ‘위대’를 갖다 붙이는 건 비약이 아닌가? 그러면 하나님의 전능(全能)이나 전지(全知)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적용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믿음의 분량이 다르고 사역의 분량이 다르지만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사역자들은 거룩하고 위대하게 사역할 수 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렇게 해주시기 위해서 그 자신이 인간의 몸으로 내려오셨고 지금도 우리와 역사하신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설교, 누구나 잘 할 수 있다.’라고 외칠 수 있었다(13p).
⇒ ‘이 사실을 바탕으로’? 무슨 사실? 믿음의 분량이 다르고 사역의 분량이 다른데, 그것이 어떻게 모두가 동일하게, 누구나 설교를 잘 할 수 있다는 결론의 바탕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누구나 설교를 잘 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신 것인가? 지금도 우리와 역사하시는 것이 누구나 설교를 잘 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인가?
설교에 대해 알게 모르게 운명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대형교회 목사들의 설교 능력과 열매를 시기하고…(13p)
⇒ 저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믿음의 분량이 다르고 사역의 분량이 다르다면… 설교에 있어서도 다르다고 해야 자연스러운데… 그런 생각은 ‘운명적인 생각’이라고 몰아붙인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은 물론 옳지 않지만, 설교 능력의 차이를 ‘운명론적인 생각’으로 몰아붙이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목회 패러다임의 전환이고 현실적 비전이다(14p).
⇒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 일이 저자와 STP에 의해서도 행해질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STP는 하나님의 직속 기관이요, STP 이론은 “하나님의 간절한 뜻이… 영감으로 내려”온 것(7p)이요, 여러 명의 추천인들의 말처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기록한 것”(9p), “천상의 이론”(265p), “하나님이 직접 만드시고 인도하신 이론”(267p)이며,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학교”(269p)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무능력한 자를 택하여 능력을 주시고 무지한 자를 선택하여 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 이제 우리 자신이 말에 능하지 못한 아이라고 탄식하지 말고 전능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15p).
⇒ 저자는 예레미야의 예를 들면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우신 전능한 하나님을 바라보자고 말한다. 하지만 모두가 예레미야일 수는 없지 않은가! 하나님이 당시의 모든 사람들을 예레미야처럼 만드셨던가? 당시의 제사장들, 종교 지도자들을 모두 예레미야처럼 만드셨던가?
모세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까지도 선지자가 되기를 원했다. 이것이 모세와 사도 바울의 심정이고 하나님의 심정이다.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자까지 다 선지자 되게 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더 원하시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설교자가 설교에 능하기를 원하신다(15-16p).
⇒ 하지만 모세가 그렇게 원했고, 사도 바울이 원했으며, 하나님이 원하셨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원하심과 실제로 그렇게 하심과의 차이점은 간과하는가?
설교에 대해 거룩한 분노가 있어야 한다. 위대한 하나님을 마음껏 선포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해서 분노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설교자가 설교의 무능력을 통회하고 자복하면 하나님은 그런 설교자에게 능력을 주실 뿐만 아니라 무능력한 설교자를 변화시켜 위대한 하나님을 높이 외칠 수 있는 응력을 주신다(16p).
⇒ 설교의 무능력은 과연 회개하고 통회 자복해야 할 죄인가? ‘설교는 누구나 잘해야 하는 것’이 전제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설교자들은 꿈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설교의 능력을 주시기 위한 꿈을 가져야 한다. … 선지자들은 꿈을 갖고 현실의 폐허 속에서 감사하며 찬양했다. 설교의 무능력한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은혜와 능력 주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감사하며 찬양해야 한다(17p).
⇒ 선지자의 꿈이 설교/선포를 잘하는 것이었을까? 여기에 갑자기 선지자의 꿈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묘한 논리… 물론 설교자로서 설교를 잘 하고자 소원을 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설교 능력의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설교의 무능력은 죄가 아니다. 스스로 나태하여 노력하지 않았다면 죄일 수도 있겠지만… 설사 모든 목사가 설교자로 부름 받았다 할지라도(일반적 측면), 모든 목사가 위대한 설교자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니다(특수한 측면).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우리가 위대한 설교자로 부르는 크리소스톰이나 스펄전, 로이드 존스 등의 존재는 비정상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설교자를 위대한 설교자로 세우셔야 하지 않는가?
성도들은… 자신의 깊은 문제가 설교로 해결되기를 원한다. 이런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성도들에게 감동과 확신을 줄 수 있는 설교를 해야 한다. 성도들은 언제나 위대한 설교자를 통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만약 이런 설교자가 있다면 먼 거리라도 단숨에 달려갈 열정이 그들에게는 있다. 그래서 자신들의 삶과 신앙을 변화시켜 줄 설교자를 찾고 찾는다(21p).
⇒ 물론! 설교를 통해서 그러한 역사가 일어난다! 하지만, 듣는 사람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듣기만 해도 설교가 ‘자동적’으로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반응’은 청중의 몫이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들이 위대한 설교자가 아니어서 그들의 말씀을 들은 청중이 그들을 핍박하고 죽게 했던가? 설교가 사람의 삶과 신앙을 ‘일괄적’으로 ‘자동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반응하는 자만 유익을 얻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13에서 말씀은 믿는 자 속에서만 역사한다고 말했고, 히브리서 기자 역시 히브리서 4:2 들은바 말씀에 믿음을 화합지 않으면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도 저자는 설교만 잘 하면 변화가 나타날 것처럼 말한다.
‘고급 지식을 찾음’(24p 도표 중에서)
⇒ 저자가 말하는 ‘고급 지식’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바로 앞에서 말한 ‘아이디어’ 혹은 ‘정보’를 말하는 것인가? 정말 고급한 지식이란…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통찰력’과 그것을 적용하기 위한 ‘인간과 성도에 대한 바른 이해와 통찰력’, 그리고 ‘구체적이고 정확한 적용 능력’이 아닐까?
이러한 사고방식이 아이디어 중심의 설교를 추구하게 한다. 아이디어가 없어서 설교를 못하는 것이지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설교자들은 누구나 설교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27p).
⇒ 저자가 말하는 ‘아이디어’는 무엇일까?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새로운 내용/정보’, ‘신선한 내용’인가? ‘아이디어 (중심) 설교’가 꼭 나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아이디어와 관련해서… (내가 보기에…) 아이디어는 두 방향에서 말할 수 있다.
1. ‘새로운 내용과 정보’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디서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1) 본문을 더 ‘깊게’ 파는 것이다. 원문 연구, 배경 연구 등… 그래서 상식적으로 알려진 것 이상의 ‘새로운’ 다시 말해서 ‘더 정확한’ 즉, 더 ‘깊은’ 내용을 퍼 올리는 것이다.
2) 본문을 더 ‘넓게’ 보는 것이다.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과 (성경의) 다른 책들, 단락들의 context를 보고 전체적인 시각으로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냥 보아서는 보이지 않는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다.
2. 설교자의 영성과 신학적 깊이에 근거한 ‘신선한 insight'이다. 그것은 어떻게?
1) 설교자의 생각을 깊고 넓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많이, 그리고 넓게 읽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성도에 대한, 그리고 사람에 대한 정보와 이해, 통찰력이 필요하다. 실제적인 이야기는 새롭게 흥미 있게 들린다. 그들의 삶과 관련된 말씀을 찾으라. 그들의 문제에 대한 성경의 답변을 찾으라. 단답형 말로 논술형으로! 선택된 본문 전체를 다 다루라! 단편적으로 다루지 말라.
3) 성령께서 주시는 통찰력에 민감하라.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통찰’을 붙잡으로! memo하라! 생각하라! 고민하라! 더 나은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쓰기와 말하기 능력의 향상을 위해서도 노력하라!
1. 성경 추구 : 성경적 아이디어란 성경으로 설교의 내용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경의 내용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제일 많이 하는 방법이 성경 해석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문맥과 흐름, 해석학적 접근이나 구속사나 문맥적 관찰, 성경의 원어, 사회 문화 정치 경제 종교 등의 배경… 이러한 접근 방법은 성경의 역사적 배경지식이 있어야 가능하다. 설교자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것과 설교를 잘하는 것에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믿는다(31p).
⇒ 내게 'idea'는 단편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idea보다는 ‘insight’가 훨씬 좋다. 한편, 지식만으로 설교가 잘 될 수는 ‘물론’ 없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잘하는 설교’(26p) 정도가 기준이 된다면… 이 부분은 필수적이다. [매일성경]이 제시하는 ‘적용 질문’(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등의)처럼, 모든 본문에서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즉, 모든 본문들에서 문맥/원어/배경에 대한 연구가 모두 효과를 발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른/잘하는 설교를 위해서 ‘정확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2. 예화 추구 : ①증명, ②집중, ③세련된 이미지, ④설득력(31-32p).
⇒ 예화의 기능에 대해서는 꽤 괜찮은 정리로 보인다.
특별한 신학적, 성경적 지식이 없어도 간단하게 설교자의 논리에 힘을 실어주는 예화는 현대 목회자들이 애용하는 가장 긴요한 설교의 내용이 되었다(32p).
⇒ 이 말인즉, 현대 목회자들은 (비록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신학적 성경적 지식이 별로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의 부족을 별로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왜? 예화가 있으니까!
3. 간증 추구 : ① 쉽게, ②강력하게, ③ 윤택하게, ④마음 문 열게(33p).
⇒ 빼먹은 것이 있다. 성도의 상태에 대한 이해는 그들에게 주시는 말씀의 분별 및 선택에 있어서 귀중한 재료가 된다!
신선한 설교를 위해서는 내용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다. 바로 그것이 설교를 위한 정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능력(전환 능력)인 것이다(33p).
⇒ 당연히 설교는 ‘연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설교는 ‘①연구 ②원고 작성 ③선포’의 세 요소로 구성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①읽기 ②쓰기 ③말하기’요 ‘①신학과 목회학 ②작문 및 문학 ③스피치 및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저자가 ‘내용’ 운운하는 것은 정작 ‘연구’에 해당하는, 즉 설교의 ‘원재료’ 확보에 대한 부분일 뿐이다. 원석(原石)은 세공된 보석에 비하면 초라하다. 그러나 원석이 없이는 보석도 없다. ‘세공’은 ‘보석’을 만들 수 있지만 ‘원석’은 만들 수는 없다. ‘전환 능력’은 ‘원재료 확보 능력’을 대신할 수는 없으며, ‘원재료 확보 능력’보다 ‘더 중요’하다도 할 수도 없다. 물론 ‘전환 능력’이 뛰어나면 원재료가 부실해도 다른 사람에 비해 훨씬 좋은 세공품을 만들어낼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원재료 확보는 ‘기본’이다!! 그 다음이 ‘가공/전환 능력’이다.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보다 그 지식을 설교에 맞게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성경 지식과 설교 지식은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성경 해석적 측면에서 수집된 정보 및 지식을 설교에서 활용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차이점이 있다(36p).
⇒ 지식은 원재료다! 원재료 없이는 가공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재료 vs 가공’ 식으로 둘 사이를 적대적인 것으로 말하거나 한쪽을 무시하고 다른 쪽만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지식‘과 함께’ 전환 능력‘도’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성경 지식은 ‘지식’으로, 설교 지식은 ‘지혜’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설교 전환 능력이 탁월한 설교자는 똑같은 본문과 내용을 갖고도 청중을 변화시키는 설교를 훨씬 더 잘하게 된다(36p).
⇒ 세공 기술이 탁월하면 당연히 같은 재료(때로는 더 나쁜 재료로도) 더 좋은 세공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설교자는 목회적 차원의 안목과 경험이 있어야 한다(36p).
⇒ 전환 능력을 위해서는 ‘목회적 안목과 경험’만 있으면 될까? 전환 능력은 연구한 ‘재료’를 설교를 위한 ‘설교문’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거기에는 1) 성도에 대한 목회적 이해/경험만이 아니라 2) 설교문 작성 능력도 요구된다. 즉 ①실천적 지혜와 ②글쓰는 능력이 함께 요구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학적 지식들은 오늘날 청중의 필요와 아픔을 영적으로 돌보는 데 있어서 동떨어지기 쉽다. 오히려 청중들에게 어려운 설교로 들리고 청중 자신과 관련 없는 형이상학적 내용이 되기 쉽다(37p).
⇒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신학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전환 능력’의 문제이다. 이 ‘신학적 지식’이라는 것이 어떤 종류와 성격의 것이냐에 따라 다르다는 점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실제 삶과 밀접하게 작용하는 신학 지식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을 일반화, 원칙화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해석적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은 설교자가 매우 강력한 무기를 갖추는 것이다. 이 능력은 모든 설교자가 꼭 갖춰야 한다. 다만 이런 성경 해석적 능력만으로 설교가 향상될 것이라는 생각은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의 내용이 심도 있다고 해서 설교의 은혜까지 저절로 풍성해지는 것은 아니다(38p).
⇒ Yes! & OK!
바리새인들이 하는 설교는 청중의 삶을 외면하고 그들의 아픔을 외면한 그저 자신들을 위한 어려운 내용들이었다. 율법을 현란하게 해석해서 이해하고 지키기 어렵게 만들어서 설교했다(38p).
⇒ 이는 바리새인에 대한 오해이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에 대한 기록은 어느 정도는 치우쳐져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바리새인들에 대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이 율법에 열심이었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했다는 사실 정도이다. 바리새인들의 가르침, 그들이 세운 ‘울타리’들은 율법 준수를 위한 것이었지 꼭 그들 자신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설교는 그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을 위해서 설교해야 한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내용을 갖고 설교해야 한다. 목사 자신을 위한 설교가 아니라 청중들을 위한 설교로 전환되어야 한다. 설교 내용의 수준만으로 설교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청중들이 듣고 지킬 수 있는 내용으로 전환해서 설교를 해야 한다(38p).
⇒ 설교는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일까? ‘설교자’는 물론 아니다. 그러면 저자의 말대로 ‘청중’인가? 아니다! 거기서 그치면 안 된다. ‘하나님’까지 가야 한다. 저자는 단순히 ‘하나님을 대신하여’라고 말하고 말지만… 설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대상으로서 ‘청중’은 중요하지만, 청중이 하나님보다 더 중시되는 것을 잘못되었다.
어렵게 설교하고자 했다면 한없이 어렵고 수준 높은 설교를 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청중들을 위하여 쉬운 내용으로 전환해서 전달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39p).
⇒ ‘잘하는 설교=쉬운 설교’의 공식은 일반적으로 맞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쉬운’보다는 ‘잘하는’에 강조점이 있어야 한다. ‘쉬운 설교’가 설교의 목적이 아니라 ‘잘하는 설교’가 목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잘하는 설교란 어떤 설교일까? 1)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고 알아들을 수 있게(그래서 ‘쉽게’라는 기준이 사용된다) 전달하는 설교, 그리고 2) 하나님의 뜻을 알아들은 청중이 그 뜻대로 살고자 결단하고 행동하게 하는 설교이다. 즉, 잘하는 설교는 ‘생각’과 ‘행동’의 두 축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 점을 무시하고 ‘쉽다’는 기준만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들은 예수님의 설교에 “권세”가 있다고 고백했다.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면 어떻게 그의 설교를 평가했겠는가? 얼굴과 목소리로만 평가하여 그의 설교가 “권세” 있다고 했겠는가(39p)?
⇒ ‘권세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권세 있다=이해할 수 있다’는 분명 아니다. ‘이해’는 그 말씀의 권세 있음을 인식하는 기초는 될 수 있으나, ‘이해할 수 있음=권세’는 아니다. 이해하므로 그 말씀의 권세를 깨닫고 인정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권세’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1) 가르치시는 예수님 자신의 권위와 위엄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경우 그 권위의 근거가 일반적인 랍비들과는 달리 ‘스승인 랍비들’이나 ‘전통’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2) 그 말씀을 듣고 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위엄과 힘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뛰어난 설교자들이 사용하는 지식과 정보는 대부분의 설교자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지식과 정보의 수준은 비슷하다(39p).
⇒ No! 탁월해야! 정확해야! 깊어야! 가능하다면 ‘좋은 재료’를 써야 한다. 우리에게는 예수님 같은 전환/가공 능력이 없으니 재료라도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위대한 설교자들이 설교에서 사용하는 지식과 정보는 이미 사용한 적이 있는 예화들이나 성경 지식들이다. 새롭고 독특한 것들이 전혀 아니다(39p).
⇒ 물론, ‘새롭고 독특한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또, 설교자는 새롭고 독특한 것만 다루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vise versa… 설교가 늘 보편적이고 잘 알려진 것만 다루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위대한 설교자들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지식과 정보들뿐만 아니라 어려운 신학적 지식들을 설교에 맞도록 쉽게 바꾸는 능력, 즉 ‘설교 전환 능력’이 탁월하다(40p).
⇒ 완전히 소화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 내놓는 능력… 어머니의 모유 수유 능력과 같은…
만약 설교 전환 능력이 없으면 어려운 설교의 내용은 청중들을 잘 이해시킬 수 없으며 그들의 신앙과 삶에 영향을 끼치기가 어렵다(40p).
⇒ 이해만 잘 시키면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해’는 ‘영향’과 ‘변화’를 위한 중요한 ‘기초’이기는 하다. 그러나, 자동적으로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뛰어난 설교자들은 수준 높은 신학 지식을 그대로 담는 설교의 내용을 만들지 않고 동시대의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수준으로 전화시켜서 설교의 내용을 전함으로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고 있다(41p).
⇒ 물론, 설교자가 청중의 수준에 맞추어서 설교하는 것은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전해진 종교개혁자들의 설교 수준은 오늘날 목회자들의 설교 수준을 훌쩍 뛰어 넘는다. 즉, 어렵다! 게다가 당시의 청중들은 대부분이 정말로 ‘무식한’ 농부나 광부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어려운 내용을 그들을 향해 전했다. 사실 종교개혁가들이나 청교도들은 청중들이 그런 수준 높은 설교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 놀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마이클 호튼의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참고). 즉, 이해를 위해 설교 내용을 ‘끌어내리기’ 한 것이 아니라, 이해를 위해 청중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하고자 했다는 말이다.
명설교자들은 수준 높은 현란한 내용으로 설교하는 경우보다(41p)…
⇒ ‘수준 높은’과 ‘현란한’은 같은 것이 아니다! ‘수준 낮은 현란한’ 설교도 있다!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 수준 높은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청중의 귀에 들려주어서 청중에게 감동을 주어 변화시키는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이다(41p).
⇒ No! ‘수준 높은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설교가 정말로 ‘진정한 전환 능력’이다!
수준 높은 내용으로 설교하는 것이 명설교인 것으로 착각해서 평신도를 신학생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정으로 목회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41p).
⇒ ‘수준 높은’에 대한 오해/선입견은 아닌가? ‘수준 높은=어려운’은 불변의 원칙이 아니다. 수준이 높아도 쉬워야 한다.
설교 전환 능력의 범위는 설교 작성뿐만 아니라 표현까지도 포함한다(41p).
⇒ ‘설교 작성’이란 기본적으로 ‘원고 작성’과 관련된 ‘쓰기’를 말하는 것이요, ‘표현’은 그것의 매끄럽고 알아듣기 쉽게 해주는 표현 능력(문학적 능력, 쓰기 기술)을 말하는 것이다. 뒤에 나오는 포인트워드 ABC에 대한 이론이 바로 쓰기 기술과 관련된다. 한편 저자가 말하는 ‘표현’은 ‘스피치’ 능력도 포함하는 듯…
설교를 잘하는 것은 단순히 말재주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 설교는 말재주로 하는 것이 아니다. … 모든 청중이 은혜롭게 이해하고 변화될 수 있는 설교가 훌륭한 설교이다. 그렇다고 수준 낮은 내용으로 설교하자는 것이 아니다. 수준의 높낮이의 문제가 아니라 평신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42p).
⇒ Amen!!! 그러면서도 가능한 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자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c.f. speech와 설교, 웅변과 설교…
기존 설교의 내용을 어떻게 개선해야 청중들에게 새롭게 들리며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하는 설교가 되게 할 수 있는지가 위대한 설교자들이 갖는 관점의 비밀이다(43p).
⇒ 새롭게 들리고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른 깨달음과 결단이 중요하다! 물론 ‘새로움’은 ‘관심’을 유도하기는 한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아덴 사람들은 새로운 것만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행 17:21). 그러므로 너무 새로움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 다양한 성경 흐름, 성경 배경, 예화, 간증 등을 모아 그것을 연결하고 하나의 관점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43p).
⇒ 그렇다! ‘관점’과 함께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목사들도 상당히 많다!
어떤 설교자의 경우에는 성경 본문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고도 일반적인 삶과 신앙의 내용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 영향력은 놀랍게 컸다(43p).
⇒ 설교란? 설교가 ‘청중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에 불과하다면, 저자의 평가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라면, 성경 본문에 대한 언급도 없이 일반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은 결코 ‘설교’라 할 수 없는 ‘신앙 강연’에 불과한 것이 된다. 설교란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설교가 영향력과 무관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영향력’(=결과! 실용주의!)으로 설교를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게 실용주의적이고 단편적인 방식이다!
이러한 현상은 설교의 내용이 주제 설교이기 때문에, 즉 자신이 전하고 싶은 주제를 갖고 설교하기 때문에 생긴다. … 그러나 주제 설교라 할지라도 하나의 관점으로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더 많은 기도와 예배를 통해서 삶과 신앙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 대형교회들 가운데는 본문 설교보다 주제 설교를 하는 교회들이 더 많다(44p).
⇒ ‘영향력’은 설교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 게다가 설교는 ‘자신이 전하고 싶은 주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전하는 것이다! ‘영향력’에 현혹되어 ‘신앙 강연’과 ‘설교’를 혼동하지 말라!
(주제 설교의 경우) 많은 본문을 말하지만 그 본문들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난다(44p).
⇒ 본문 설교가 늘 ‘많은 본문’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설사 저자가 지적하는 방식으로 설교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본문을 다룬다는 면에서는 성경을 무시하는 주제 설교보다는 낫다!!!
위대한 설교자들은 성경 본문 내용을 오히려 좁혀서 한두 문장이나 단어로 설교를 하지만 설교와 성경 본문이 잘 연결되며 또한 설교의 에너지가 잘 나타나게 한다(44p).
⇒ 로이드 존스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 같은데… 물론 그는 많은 경우 특유의 ‘현미경적인 설교’를 한다. 하지만 그의 설교는 대부분 ‘연속 강해’이기에 단편적일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본문에서 한 단어, 문장을 뽑아서 설교한다면 그것은 단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마틴 로이드 존스, 찰스 스펄전, 척 스윈돌 같은 설교자들은 적은 내용을 가지고 하나의 설교적 관점으로 자신의 설교를 깊게 만들었다. 이런 관점이 그들로 하여금 성경 구절 이면에 있는 깊은 의미와 뜻을 성도들에게 전달하게끔 하는 힘을 얻게 했다(45p).
⇒ 이들의 경우 본문의 문장/단어에 집중한다 하여도, 그것은 본문의 배경 속에서 다루어지므로, 그것을 ‘주제 설교’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세상에서 주목받는 글이나 연설문, 설교문은 다양한 내용을 포괄적으로 담지 않고 한 가지 관점을 갖고 기록되었다(45p).
⇒ 당연히, 한편의 설교는 가능한 한, 하나의 관점/주제를 가지고 다루어지는 것이 좋다. 한편의 설교에서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지식을 갖기만 하면 삶이 윤택해지고 문화적으로 향상되리라고 믿었다. 지금도 이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지식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다(46p).
⇒ 계몽주의적 관점의 문제점이기는 하다. 하지만 계몽주의와 무관하게… ‘지식이 삶의 중요한 가치’라는 것은 옳은 관점이다! ‘계몽주의’라는 목욕물을 버리면서 ‘지식의 가치’라는 아기도 함께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서재에 있는 많은 정보와 자료들이 관점이 없는 목회자들 때문에 돌처럼 굳어 있다. 자신만의 관점을 소유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부작용이다(47p).
⇒ ‘자신만의 관점’은 필요하고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자신만의’ 관점은 또한 ‘옳은’ 것이어야 한다. 성경의 전체적인 교훈과 합치되는 것이어야 그 가치가 인정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자신만의 관점’은 편견이나 선입견이 ‘되기도’ 하고, 그러한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관점’을 평가할 수 있는 ‘바른 기준과 관점’이 계발/소유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 페이지의 맨 끝에서 ‘성경적 관점’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관점이다.
관점이 없는 사람들은 관점 있는 정보와 자료들을 읽으면서 나중에 관점이 생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는다고 관점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관점을 간절히 원하거나 희망한다고 저절로 생기거나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47p).
⇒ 관점 있는 정보와 자료들을 겪으면서 관점이 생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더군다가 그가 관점을 얻고자 하는 의도로 그러한 자료들을 접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성경은 하나님이 하고 싶은 말을 기록한 것이다(50p).
⇒ 그렇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고 싶은 말’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설교’는 ‘하나님이 하고 싶은 말’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일을 부여하시면 종은 분명한 관점을 갖고 그 사역을 하게 된다. 하나의 관점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각 사역자에게 주신 소명이기 때문이다. 사역자의 소명이란 관점에 따라 독특하다. 그것은 선지자로 똑같이 부름을 받지만 각 선지자마다 세움 받은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관점도 다른 것이다(51p).
⇒ ‘관점’의 의미가 여태까지 이야기한 것과 조금 다른 뉘앙스를 띄는 듯하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소명이 다르다’고 한다면 이해가 되지만,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관점이 다르다’고 하면… 조금은 껄끄럽게 들린다. 무슨 의미로 말하는지는 기본적으로 알겠지만, 오해의 여지도 생기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의 ‘소명’(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은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관점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목사의 사명도 그러하지 않은가?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관점도 다르고, 소명도 다르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모두가 설교를 잘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예레미야처럼, 세례 요한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독특한 관점으로 그의 사역자가 되게 하신다(52p).
⇒ 독특한 관점, 독특한 소명, 독특한 사역! 설교 사역, 찬양 사역, 상담 사역… 그렇게 다 다르다. 그런데도 누구나 다 설교를 잘해야 한다고? 모든 목사가 설교 사역에만 부름 받은 것일까? 모든 목사가 목회자로 부름 받은 것일까? 문서 사역이나 문화 사역을 하는 목사는 목사가 아닌가?
성경의 관점이 중요하듯이 설교의 관점도 중요하다. … 설교를 할 때에 자신의 관점과 의도가 없다면 성경을 인용하는 것도 난해할 수 있다. 설교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관점을 갖는 것이다(55p).
⇒ 성경의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이고, 선지자의 관점도 하나님의 관점이라고 하면서도 왜 설교의 관점만큼은 설교자의 관점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물론 설교자의 관점이 필요하며 인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설교가 성경에 근거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측면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마치 현대의 ‘독자(reader) 비평’을 보는 느낌이다. 성경이 기록된 원래의(하나님의) 의도는 어딘가 사라지고, 그것에 근거하여 설교하는 사람의 의도만이 강조되다니!!!
설교의 내용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관점이다. … 어떻게 작은 내용을 갖고도 그토록 심오하고 깊게 설교할 수 있을까? … 바로 설교의 강한 관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55p).
⇒ 너무 단정적인 판단!
설교는 내용만을 추구하면 아무것도 제대로 만들 수가 없다(55p).
⇒ Yes! 그리고 또한(vise versa) ‘관점’만을 추구해도 아무것도 제대로 만들 수가 없다!
관점을 추구하면 설교의 깊은 내용을 만들 수 있다. … 설교의 관점이 내용을 만든다(56p).
⇒ 관점만 있으면 없던 내용이 생기는가?
설교의 관점은 설교의 내용을 단순히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관점과 시각으로 온 세상을 놀라게 한다(56p).
⇒ 새로운 관점과 시각으로 온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현대 설교는 내용을 추구하다가 설교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시대이다. 이제 모든 목회자들이 설교의 내용을 추구하기 위해서 빠르게 뛰어다니는 것보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설교의 관점을 만들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설교를 향상시키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57p).
⇒ 관점 지상주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의 내용이 좋거나 기교를 잘하고 못하는 것보다 설교자의 의도대로 설교가 되는가 안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공적인 설교의 가장 중요한 척도다(64p).
⇒ 설교를 communication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저자의 평가 기준은 단연 옳다! 하지만 설교가 ‘하나님의 뜻의 선포/전달’이라고 이해한다면, ‘설교자의 의도 성취’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말씀을 제대로 전했느냐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런 설교자들은 의도한 목적대로 설교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청중들이 모르는 경우가 많다. … 이런 현상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포인트워드이다(64p).
⇒ 확실히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포인트워드를 반복하는 수준이라면 해결이 불가하다. 포인트워드의 바른 활용이 필요하다!
자신의 처음 목적과 의도는 상실하고 앞의 논리를 증명하는 데 급급해져서 설교의 전체적인 의도가 없어지고 목적도 사라지게 된다. … 이것은 설교자가 설교의 목적성 없이 원고 작성에만 열중하거나 구성 준비가 미비한 채 설교문을 작성할 때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다(66-67p).
⇒ 이런 경우에… 반대로 특정 단어나 문장을 반복하게 되기도 한다. 횡설수설하면서도 설교자의 마음에 있는 핵심적인 내용을 장황하게 반복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도 그것이 포인트워드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설교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잘된다. 그래서 청중에 대한 설득이 쉽게 된다(67p).
⇒ 설교에서 청중의 설득을 잘하는 것과 쌍방향 communication는 관계없다. 그것은 여전히 일방향 communication에 불과하다. 다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한 것뿐이다. 청중이 설교자에게 질문을 하거나, 의견을 제시한다면 ‘쌍방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방적으로 듣기만 한다면, 심지어 설득이 잘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쌍방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바른 용어 사용이 필요하다. 좋다고 아무 것이나 갖다 붙이면 안 된다.
청중의 문제에서 포인트워드는 출발해야 한다(68p).
⇒ 설교가 text 중심이어야 하는지 context 중심이어야 하는지는 오래 된 논쟁 주제이다. 설교자는 물론 context를 무시하지 말아야 하며, text 역시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둘 중에 어느 것이 우선이냐고 한다면, 단연 text가 우선이어야 한다! 설교는 상담이 아니기 때문이다. context에서 시작하는 것이 때로 필요하고 유익할 수도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원칙으로 작용한다면, 결국 성경은 ‘문제 해결 방법 모음집’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설교는 청중의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청중에 대한 하나님의 뜻/말씀의 선포를 위한 것이다. 설교의 중심은 하나님이지 청중이나 청중의 문제가 아니다!
포인트워드는 성도들이 신앙과 삶에서 추구해야 하는 단어이다(68p).
⇒ 맞는 지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명제 아래 설명되는 것은 포인트워드의 정개념과 반개념에 대한 내용들뿐이다. 그것과 성도들이 신앙과 삶에서 ‘포인트워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포인트워드를 더욱 powerful하게 만들려는 몰아주기?
성경은 하나님이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포인트워드가 더 강하고 뚜렷하게 나타난다(69p).
⇒ 논리적 선후관계가 서질 않는다! 성경이 하나님이 기록한 책이라는 것과 성경에 포인트워드가 더 강하고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포인트워드를 세워주기 위해 이런 말 저런 말을 다 끌어들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성경을 통해서 포인트워드를 배우고자 하는 것은 설교의 향상을 사람에게서 배우지 않고 기록한 분이신 하나님에게서 직접 배우기 위함이다. 포인트워드가 말을 하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면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70p).
⇒ 포인트워드가 하나님이 만드신 방법이라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이 포인트워드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무엇이든 강력하고 효과적이면 다 하나님의 지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히브리서 저자는 관점을 통해 구약을 재해석했고(83p)…
⇒ 저자는 ‘포인트워드’와 ‘관점’이라는 단어를 혼용하고 있다. 그러나 두 가지 개념은 전혀 다른 것이다. ‘관점’이 ‘포인트워드’로 표현될 수 있다. 그래서 ‘포인트워드’를 보면 ‘관점’을 파악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이렇게 신앙적 포인트워드는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것을 나타내는 좋은 방법이다. 이런 포인트워드를 사용해서 히브리서 저자처럼 예수님을 설명하고 예수를 믿도록 만드는 능력이 모든 설교자에게 있어야 한다(89p).
⇒ 이것은 pointword의 문제가 아니라 viewpoint의 문제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둘은 서로 혼용해도 상관없는 같은 개념을 보여주는 단어들이 아니다. 게다가 신약 저자의 그리스도 중심적 구약 해석은 사실상 매우 독특한 것이어서, 우리는 그들이 말한 것 이상으로 넘어갈 수 없다! 즉, 신약 저자에게는 그것이 가능하지만 우리를 그들과 동일선상에 놓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의 독특성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의 저자들은 분명한 관점, 곧 분명한 포인트워드를 갖고 성경을 기록한다(102p).
⇒ 일반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관점’이 곧 분명한 ‘포인트워드’는 아니다. 관점을 가지더라도 그것을 포인트워드로 만들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설교를 할 때에는 신학적 입장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성도들의 영적 문제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접근해야 한다. … 설교의 동기가 성도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설교는 설교자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닌 성도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03p).
⇒ 하나님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말씀하시는가? 설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요, 그 다음이 성도이다. 성도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과 성도가 설교의 유일한 ‘동기’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이것은 목회자의 마음이기 보다는 탐구자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 성경을 읽으면 성도들의 탄식에 귀 기울이는 하나님과 그들의 아픔을 향하여 손 내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성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다(104p).
⇒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을 찾기 위해서 보아야 한다. 탐구자의 마음도 목회자의 마음도 모두 필요하다. 목회자의 마음으로‘만’ 성경을 보는 것은 흔히 지적하듯이 ‘설교 재료’를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탐구자의 마음으로‘만’ 성경을 보면 ‘연구 재료’로만 성경을 보는 것이 된다.
설교는 사람을 하나님께 이끄는 것(103p)이어야 하고, 성도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과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문제 해결’을 위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문제에,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더 초점을 맞추게 한다. 설사 설교/말씀을 통해 성도의 문제가 해결된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목사와 설교를 사용하시는 것이어야지, 목사가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 되면 곤란하다. 설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한다!
위대한 설교자들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증명하려고 설교하지 않는다. 성도들에게 형이상학적 주제에 관심을 갖도록 설교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성도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서 설교한다. 그들이 설교하는 동기가 많은 사람들로 그 교회를 찾아오게 한다. 그 목사가 학식이 많고 인격적으로 덕이 있어서 찾아오기보다는 자신의 탄식과 눈물을 닦아주기 때문에 그 교회에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104p).
⇒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목회적’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것은 부담스럽다. 게다가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한 설교를 교회 부흥의 도구로 제시하는 것 역시 부담스럽다.
신학자는 신학적 관점의 금맥을 발견해야 하지만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하여 목회적 관점의 금맥을 발견해야 한다(104p).
⇒ No!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 교회와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을 찾아야 한다. context를 고려하되 text가 우선이다! 설교의 출발점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목회자의 관점은 하나님을 모르면 가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성도들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하나님을 깊이 알았다면 성도들의 아픔에 눈을 돌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치료해 주어야 한다(105p).
⇒ 이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며, 또한 강조되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양 주장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구원을 위한 책이지 인간의 끝도 없는 상상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한 백과사전이 아니다(105p).
⇒ 뿐만 아니라, 인간의 끝도 없는 문제 해결을 위한 지침서도 아니다! 설교 역시 인간이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비록 그런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 할지라도!)
기드온에게는 분명히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후에 이 문제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한 후에는 완전히 새사람, 곧 큰 용사가 된다(107p).
⇒ ‘큰 용사’는 ‘완전한 새사람’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큰 용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했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허점/허물 많은 인간이었다. 첩을 많이 둔 것이나 에봇을 만들어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되게 한 것 등…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고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미래의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해 주신다. 또한 이를 위해 교회와 목회자를 오늘까지 보낸다. 성령님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쉬지 않고 도우신다(107p).
⇒ 저자의 모든 시각은 ‘인간의 문제 해결’에 맞추어있는 것 같다. 물론 ‘구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근본적인 문제’요 시급한 문제였고, 성경은 인간 구원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본다면(인간 구원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왜 성경이 66권이나 필요한가? 몇 권, 또는 몇 가지 이야기로 충분하지 않을까? 성경은 ‘구원’만을 담고 있지 않고 더욱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구원’에 대해서도 이러하다면, 일상적인 ‘문제 해결’에 대해서라면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은 불가하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을 보면서 바울 신학의 중심이 ‘구원론’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나, 구약 신학의 중심이 무엇이냐는 논쟁들이 떠오른다. 신약이 중심이 그리스도라면 구약의 중심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할 수 있다(학자들 사이에서는 확정된 것이 아니지만). 그런데 하나님/예수님이 인간과 관계되는 것은 오로지 ‘구원’ 문제에 있어서만은 아니다. 물론 ‘문제 해결’도 아니다. 하나님과의 풍성한 관계와 풍성한 삶(요 10:10)이다. 그런데 왜 저자는 굳이 ‘문제 해결’이라는 좁은 주제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문제’가 문제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종교는 전도되지 않는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종교는 성직자는 많아져도 성도는 없어진다. 인간은 영적이든 정신적이든 육적이든 모든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110p).
⇒ 물론 그렇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문제 해결의 종교인가? 성경은 문제 해결의 지침서인가? 설교는 문제 해결을 위한 전용 수단인가? 마이클 호튼은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에서 ‘간증’의 실용주의적 측면/배경을 지적한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간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조니 에릭슨 타다 같은 경우).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 종교가 전도가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요, 종교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문제’냐는 것도 문제이고,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논지에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설교에서 사용되는 목회적 포인트워드란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상황과 문제를 안고 있는 성도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그들의 문제를 포인트워드로 해결해주는 것이다(111p).
⇒ 아, 포인트워드에게 능치 못할 일이란 없는 것인가! 전능한 포인트워드여!
예수님은 그들의 육체적 문제만 해결해 준 것이 아니다. 그들의 육체적 문제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인 영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시기 원했다(114p).
⇒ 맞는 말이다. 예수님은 영과 육 모두를 다 고치신다. 하지만 순서가 뒤바뀌었다. 영혼의 문제가 먼저이고 육체적 문제가 나중이다. 저자가 이 순서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계속해서 강조하여 말하는 ‘문제 해결’에 있어서 그 ‘문제’라는 것이 ‘우선적으로’ 육체적인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은 믿음이란 단어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신다. … 예수님은 인간들이 아프면 병원에 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친히 고쳐주시면서 목회적 포인트워드인 믿음을 말씀하셨다(115p).
⇒ 어떻게 ‘고쳐주셨다’보다 ‘포인트워드를 말씀하셨다’가 우선적일 수 있는가?! 예수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고쳐주셨고, 그러한 치유의 근원은 포인트워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아닌가! 포인트워드가 병자를 치료해 주었는가? 아니다! 저자는 포인트워드를 드높이기 위해서 예수님조차 포인트워드의 그늘 아래에 세운다.
기적과 믿음을 연결 지어 말씀하셨다. 믿음과 기적의 상관관계를 나타내 보이신 것은 기적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적을 바라보지 말고 그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기적과 믿음이 분리되지 않게 하신 것이다. … 이것은 기적을 향한 신앙생활이 아닌 믿음을 향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121p).
⇒ 예수님과 믿음의 상관관계를 나타내 보이신 것은 믿음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 자신을 바라보게 하기 위한 것이다. 믿음과 예수님이 분리되지 않게 하신 것이다. … 믿음을 향한 신앙생활이 아닌 예수님을 향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없을 때에라도 성도의 신앙이 견고해지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목회적 포인트워드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견고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한 것이다(122-123p).
⇒ 드디어 포인트워드가 신격화되는가? 이 땅에 없게 되신 예수님을 대신하는 것이 성령님(요 16:7)이 아닌 포인트워드라고?
목회적 안목이 떨어지는 목회자보다 목회적 안목이 뛰어난 목회자가 큰 교회를 담당하게 되는 이치가 바로 이러한 부분에 있다. 목회적 포인트워드를 적절하게 잘 선택하는 것이 목회의 큰 능력이고 힘이다(124p).
⇒ 포인트워드=목회적 안목? 포인트워드는 알파와 오메가인가?
목회적 포인트워드를 잘 사용해서 목회와 설교를 하게 되면 짧은 시간 안에 청중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124p).
⇒ 포인트워드 사용과 성도의 변화는 직접적 관계성을 갖지 dskg는다. 즉, 변화는 별개의 문제라는 얘기다.
목회자가 뿌리고 심은 대로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125p).
⇒ 일반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좋은 포도를 심어도 들포도가 나는 경우가 있음(사 5:4)을 간과하지는 말라!
성도의 신앙과 삶의 문제를 바르게 고쳐 주고 지도하는 것이 목회이다. 목회적으로 성도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그들의 신앙과 삶을 고려해서 성경의 다양한 시각 중에 한 가지로 성도들을 교육할 수 있어야 한다(147p).
⇒ 포인트워드가… 꼬리가 몸통을 좌우한다! 디모데후서 3:16에 의하면 하나님 말씀으로 하는 목회는 ①교훈 ②책망 ③바르게 함 ④의로 교육(훈련)의 순서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교훈이 먼저 와야 한다. 그 다음이 책망과 바르게 함이고, 그 후에는 다시 훈련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저자의 목회에 대한, 성도를 보는 기본적인 시각은 ‘문제 해결’에 있다. 문제 해결이 목회이고, 늘 문제꺼리를 안고 있는 성도이고… 게다가 저자가 강조하는 그 ‘문제’라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문제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청중을 위해서 목회적 포인트워드를 다양하게 사용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목적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149p).
⇒ 이 부분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이렇게 적었다.
“성경이 말하는 다양한 내용을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발생할 여지는 처음부터 없다!”
그런데 저자가 실례로 제시한 사도행전 20:17-24을 ‘기도, 사랑, 믿음’이라는 포인트워드로 읽은 것을 기록한 예(150-154p)를 보면서 이렇게 적었다.
“Ah! ‘기도’라는 포인트워드를 잡으면서... 본문을 모두 기도라는 벽지로 도배해 버린다! 기도와 무관한 내용까지도!!! 포인트워드는 ‘틀’(frame)인가?!!”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부른 목적! 기도, 사랑, 믿음이라는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이것과 관련하여 2가지 태도/방식을 취할 수 있다. ①저자처럼 다른 것을 무시하고 한 가지만을 유일한 의도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②또는 (나라면) 세 가지를 다 소개하고 그 중에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하는 것이다. 전자보다 후자가 더 솔직하고 바른 태도가 아닐까? 빌라도 모의재판에서 변호를 맡았던 청년 시절이 떠오른다. 빌라도에게 유리한 것은 크게 확대하고, 그에게 불리한 것은 숨기고픈 유혹! 하지만 그것이 옳은가!”
아래는 그 가운데 ‘기도’라는 포인트워드로 읽은 내용이다. 밑줄은 강조를 위해 본인이 그었다.
첫댓글 후원이 없습니다 약값부족으로...
약을 못사고 있습니다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후원을 해주셔야 카페가 계속해서 운영됩니다
그렇지만 후원참여는 전혀 안되고 있습니다....
후원은 카페지기에게 큰힘과 용기가 됩니다
치료약값이 필요합니다 많이 힘이드네요...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먹을것 반찬거리도 사야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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