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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후 제2주를 맞이하였습니다. 부활절부터 성령강림절까지 이어지는 일곱 주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은총과 감격을 기억하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부활절기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였습니다. 왜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는지, 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는지, 그 의미를 묵상하는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왜 주님은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주님의 고난은 사랑이었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셔서 인간이 되셨고,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의 제물로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또 하나, 주님의 고난은 순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마주친 고난의 운명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찾으셨고, 그 뜻대로 순종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저마다의 고난을 마주하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도대체 왜 내가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왜 이런 고통이 나에게 주어졌는지를 질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이 역사를 섭리하심을 믿습니다. 그것을 믿기에 우리는 우리가 겪는 그 고난에도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에 의미없는 고통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때때로 고난이 닥쳐올 때, 그 고난에 좌절하거나 아니면,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 가운데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 뜻을 찾을 때 우리는 내 삶의 의미와 소명을 발견하게 되고, 고난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고난은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그 축하는 단순히 삶은 달걀을 깨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내 삶 속에서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부활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축하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전해준 복음에 대하여 ‘이것은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복음을 전해 받고 그 복음의 말씀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이란 말의 의미는 글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이 기쁜 소식은 어떤 소식입니까?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바울이 말한 우리가 받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복음 안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 복음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존재의 근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믿음은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존재의 근거가 됩니다. 총선이 눈앞에 다가왔는데, 권력과 재물이라고 하는 우상 앞에서 춤추며 뛰어노는 군상들로 세상이 소란합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거짓말을 하고 불법도 저지릅니다. 권력 혹은 재물이라고 하는 우상을 믿기 때문입니다. 권력이나 재물이 나를 구원하고 나의 삶에 진정한 의미와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이 그의 존재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그의 말이나 그의 살아가는 방식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다. 바로 이 부활 신앙의 기초 위에 우리는 서있고, 그 믿음 위에 우리의 삶을 세워갑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당연히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반드시 구별되는 삶을 우리는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의 근거가 되고 우리의 삶의 모습을 결정짓는 이 복음은 두 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소식을 듣고 그 믿음 위에 서서 자신의 삶을 세워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을 당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곧 패배인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조차 그것이 패배요 수치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서 영광은 경쟁에서 이기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기기 위하여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은 권세를 가지려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희생하는 십자가는 세상의 지혜로 볼 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자기 희생과 헌신과 사랑, 자기 포기의 길을 예수님은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하여 당하신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옳다는 사실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그 십자가가 세상적으로는 어리석은 것 같고 패배인 것 같지만, 그것이 진정한 승리의 길이요 부활과 영생의 길이라는 사실을 확증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죄 값을 대신하여 십자가 희생의 제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 희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와 같은 사실을 확증해 주는 증거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이 모든 우리의 믿음은 무너지고 맙니다.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어떤 사람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5장 12이하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질문하면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일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명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에게 전해준 복음은 자기 자신도 전해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시는대로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에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직접 말씀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십일을 머무시고 하늘로 승천하셨는데, 그 주님을 뵙지도 못했습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 공동체에 성령이 임하고 사도들과 교인들이 예수 부활을 선포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폭발적으로 부흥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성령을 체험하지도 못했고, 여전히 부활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 부활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앞장서서 핍박하였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을 잡아 가두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들고 살기등등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던 중,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바울이 물었을 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는 대답이 뚜렷이 들려왔습니다. 그날 이후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복음 전파를 위하여 일생을 드려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그 신앙 위에 자신의 삶을 새롭게 세워가게 된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믿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는 사람과 죽음은 끝이 아니고 부활이 있음을 믿는 사람은 분명히 다른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삶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기에, 오늘 먹고 마시고 더 많이 즐기자는 가치관으로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더 많이 즐기기 위하여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고, 더 많이 소유하고 즐기기 위하여 또 더 많은 권력을 탐하게 되고, 결국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기 보다 물질주의, 쾌락주의, 권력욕에 빠져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소비하며 인생을 즐겨보지만 만족이 없습니다. 내일이 불안합니다. 가진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 내 생명이 끝이 날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결국, 채울 수 없는 탐욕과 가시지 않는 불안 가운데 일생을 살아가다가, 인생은 참으로 허무하다고 탄식하며 삶을 끝내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죽노라! 나의 욕심, 정욕, 이기심,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기에 그렇게 날마다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스데반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할 때도, 부르짖기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나에게 돌을 던지는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은 그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내일 다시 일어날 것을, 지금 비록 이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내일 다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일어날 것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기 전에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야고보도 요한도, 모두가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 더 높은가 서로 경쟁하고, 예수님의 좌우 편에 앉아서 세상을 호령하고 세상 권력이 가져다 주는 명예와 물질적인 만족과 인간적인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을 꿈꾸는 속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두려움에 떨면서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가 다 앞다투어 달아났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들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권력이나 명예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목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물질보다도, 세상의 명예보다도, 권력보다도 더 소중하고 의미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일생을 드려 헌신하고 마침내 순교의 자리까지 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다소라고 하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입니다. 다소는 오늘의 터기 중남부에 위치한 도시인데, 이 도시는 스토아 학파의 중심도시 가운데 하나로, 뛰어난 헬라 철학의 거장들을 배출한 철학의 도시였습니다. 당연이 이곳에서 나고 자란 바울은 헬라의 문화와 철학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율법에 대한 지식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웠고 또 그 율법대로 살기를 힘썼습니다. 그 시대의 율법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자였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이렇게 헬라의 철학과 문화, 그리고 유대교의 율법에 대해서 뛰어난 식견을 갖춘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가 부활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가두고 핍박하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을 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난 후로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로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두 눈에서는 비늘이 벗겨졌습니다. 철학적인 지혜나 율법적인 지식으로 눈이 가리워져 그 동안 미쳐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두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철학과 교양, 율법적인 의라고 하는 것이 결코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혜나 세상적인 학문으로는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지혜나 학문, 명예나 물질, 권력, 이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율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고 자신하던 교만도 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며 진정한 구원의 도를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삶으로, 그 믿음을 증언하는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 신앙에 서서 살아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십자가를 사랑하며 살아왔기에, 인생에 수많은 고난을 당하였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그 믿음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였고,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기에, 내 인생의 소명을 다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고백이 우리의 마지막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