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 톨스토이 /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한 사람의 죽음이 알려지고, 추도식이 열리는 과정으로 시작된 이야기의 첫 장이 마치고 망자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다. 그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22. 이반 일리치가 살아온 삶은 굉장히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아주 끔찍하기도 했다.
2장부터,
그의 삶은 단순하고 평범했는데, 왜 그리 끔찍했을까?
나의 삶을 한 문장으로 적는다면 어떻게 적을까? 라는 물음을 가지고 소설을 읽게 된다.
법률학교 졸업. 현지사의 특별보좌관(십등문관), 예심판사, 결혼(프라스토비야 표도르브나)까지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공사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일했고, 합당하게 처신했으며, 사람들과 관계도 치우침이 없었다. 승진을 위해, 더 나은 자리를 위해 고군분투하여 동료보다 더 나은 자리로 옮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그렇지 못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병과 사투를 벌이다, 고통 속에 삶을 마감한다. 평범하고 단순하다.
삶의 변화는 결혼 이후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29. 하지만 아내가 임신하고 몇 달이 지나면서부터 뭔가 갑작스럽고 낯설고 불쾌하고 힘겹고 점쟎치 못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일도 벌어진 것이 없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이 문제다. 결혼이라는 것은 내가 혼자가 아닌 둘로서 온전한 내가 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자녀가 생긴다는 것은 결혼이라는 사건과 비교해서 더욱 신비한 사건인데 이반 일리치 부부의 삶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는 임신한 아내에 대한 살핌이 없었다. 물론 자신에 대한 살핌도 없다. 그는 아내를 철저히 무시했으며 "가볍고 유쾌하게" 생활했다.
30. 그는 결혼 생활이-적어도 아내와는-유쾌하고 품위있는 삶에 늘 밑거름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런 삶을 파괴할 때가 많고 따라서 이 파괴에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1. 결혼한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서, 이반 일리치는 결혼 생활이 어느 정도는 삶을 편한하게 해줄지 몰라도 본질적으로 굉장히 복잡하고 힘겨운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사교계에서 인정받는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에서 그렇듯 결혼 생활에서도 확실한 태도를 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결혼 생활에 대해 나름의 태도를 정했다"
32. 그는 이미 이런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자신이 이루어야 하는 목표로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의 목표는 이 불편한 상황에서 가능한 한 더 멀리 떨어지고 그런 상황을 자신에게 아무런 해도 미치지 않는 자련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점점 줄여갔고, 부득이 함께 있어야 할 때는 다른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 했다. 중요한 것은 이반 일리치에게 일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모든 삶의 재미를 일에 집중하면서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 재미가 그를 삼켜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생은 한 개인의 삶에 어떤 목적을 두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고독하게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함께 나누고 즐거움을 같이 나누는 것에서 참된 의미를 찾아야되는 것이 아닐까
결혼하고 17년후, 1880년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심지어 아버지조차 도움을 주지 않아 버림받았다고 느낄때 그는 그의 아내를 이렇게 생각한다.
34. 자신에게 부당한 대우를 인식하고 아내의 끝도 없는 잔소리에 시달리며 분수에 안 맞게 사느라 빚을 진 처지가 정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이반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가족, 부부라는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생각에 사로 잡혔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에, 그에게 기회가 왔다. 훨씬 많은 봉급에 좋은 조건의 자리로 옮기게 된 것이다. 돈과 지위가 보장된 환경에서 그의 가정은 다시 사랑이 넘치고 활기가 느껴진다.
37. 이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부부의 목표도 같았으므로, 두 사람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젓었다뿐이지 결혼 초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사이가 좋았다.
부부는 닯아간다고 햇던가! 새로 옮긴 집을 직접 꾸미던 중, 이반은 사다리에서 떨어져 창틀 손잡이에 옆구리를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다. 단순한 멍처럼 보이는 사고....
44. 가족 모두 건강했다. 이반 일리치가 이따끔 입 안에 이상한 맛이 느껴지고 왼쪽 옆구리가 어쩐지 거북하다고 하긴 했지만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9쪽으로 시작해서 99쪽까지 이르는 소설에서 44쪽 이후에는 계속 이반의 건강이 악화되고 가족은 없다고 봐야 할 상황이 펼쳐지고, 고통에 괴로와하며 이반 일리치는 생을 마감한다.
초기의 질문은 '이반 일리치는 언제 죽었는가?' 라고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는 어쩌면 어느 순간 사라진 존재일 수도 있다. 한 가정을 이루고 한 사회의 일원이라는 개념으로 볼때 그는 단지 헛개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실체가 없는 존재. 소설의 반을 할애해서 그가 죽음을 향해 달리는 순간들을 묘사한다.
죽음과 삶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거창하게 국가와 민족 또는 인류를 위헤 거창한 일을 한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났을때 우리는 우리 가슴에 그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소한 그러기를 바란다.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닐지라도 사랑을 진심으로 주고 받은 사람이 우리의 곁을 떠났을때 우리는 보내면서도 늘 함께 있다고 믿는다. 신을 믿는 경우는 신께 돌아가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동일하게 땅으로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와 나는 늘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동일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어쩌면 삶과 죽음을 넘어서 하나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이반 일리치는 결혼하면서 자식의 죽음을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죽지 않았다는 것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혼자의 삶이 아닌 가정 안에서의 삶을 그는 살지 못했다. 그는 어떤 기계의 부속품처럼 자신을 정의했다. 사람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2장의 첫 문장에 나온 "단순"과 "평범"에 붙어있는 "굉장히"라는 꾸밈에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이건 단순하지도 평범하지도 않다. 수많은 갈등을 함께 헤쳐나가고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싸우고 화해하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보듬으며 지켜가는 것이 삶이다.
이반 일리치를 통해서, 바람직한 삶이란 가족을 이웃을 사회를 아름답게하고, 즐기고 감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 해본다. (평상심)
첫댓글 빌린 책을 열심히 읽고나서
톨스토이의 모든 글들은, 참 쉽게 쓴 것 같아,라는 느낌인데 리얼리즘이군요.
그의 년표를 읽고 보니, 그가 동방 정교회에서 파문 당한 점과 노벨문학상 심사에서 여러차례 낙방한 점은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카잔차키스의 경우와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