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을 돌아보면, 삶이란 그저 좋기만 할 수는 없다.
꿈같은 아름다운 세월만 있을 줄 알았는데 살아보니
우리의 삶에는 어두운 터널도 있었고 가시밭 길을 걸으면서
피를 철철 흘리는 고통도 있었다.
감당하기 힘들 때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하기만 한 것 같아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것 저것 고통 없는 삶은 없다.
한번쯤 절망과 좌절에 빠져 허우적거려 보지 않고서
어찌 행복의 진정한 값을 알 수 있겠나?
5년 전, 남편은 그 동안의 병치레 말고 다른 이상 증상이 오기 시작했다.
인근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래서 지역에서는 크다는 종합병원을 찾았다.
여러 가지 검사 결과, 남편의 병명은 림프종 혈액암.
만약 다른 장기에서 전이 된 것이라면 암 4기 아니면
말기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진단이었다.
살 가망이 없느냐고 물어보니 지금 상태로는 확실한 진단이 어려워
뜬구름 잡는 치료밖에는 할 수 없다고 한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맷돌질을 하는 충격을 받았다.
배에는 복수가 차서 2L짜리 3병을 두 번씩이나 뽑아내고
날이 갈수록 점점 야위어가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너무 절망적이었다.
혹시 오진이 아닐까 싶은 마음과, 치료를 받더라도 큰 병원이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큰 딸 집 근처에 있는 서울대 병원으로 옮겼다.
큰 병원에 오니 담당교수님께서
남편을 살려 줄 것 같은 믿음이 나도 모르게 생겼다.
하지만, 당장 입원할 수 있는 병실이 없어서
큰 딸네 집에 며칠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급해 죽을 지경인데...
다행히 이틀 뒤에 연락이 왔다.
2인 무균실에 입원해서 외부 사람과는 단절하고 다시 한 번 정밀 검사를 했는데,
암이라는 동일한 진단이 나왔다.
그리고 남편이 입원해 있는 일주일 동안 사는 게 이렇게 허망하나 싶을 만큼
주변 사람들의 죽음의 비보가 날아왔다.
사촌 시아주버님이 위암 10년차 재발로 몇 달 앓다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그 충격도 이만 저만 아닌데 이틀 후에는 둘째딸 시아버지가 알츠하이머로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몇 백억원대의 재산이 있어도 무슨 소용인가?
평생을 재산증식에만 노력하다가 돌아가신 바깥사돈의 죽음.
그 충격으로 지친 몸을 가누기에도 벅찼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충격!
3일 후, 막내딸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다.
폐암 진단을 받고도 5년 동안 희망을 잃지 않던 그였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여행도 다니고 늘 긍정적으로 버텨오던 안사돈.
이제 며느리도 보고, 즐거운 황혼을 즐겨야 할 60대의 나이에,
너무나도 안타깝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일주일 동안 가까운 세분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나니 가슴이 먹먹한 게
남편도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암으로 고통 받던 분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은 어떨까?
남편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져 너덜거렸다.
남편은 여러가지 충격으로 기진맥진한 중에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1차 치료 후 일주일 정도 지나자,
퇴원을 했다가 3주에 한번 씩 내원하여 항암 치료를 받으라는
담당 의사의 지시가 내려졌다.
우선은 병원과 가까운 큰 딸네 집에서 기거 하며 2차 항암치료까지 마쳤다.
당장이라도 죽는 줄 알았지만, 다행히 2차 항암 치료 후 결과가 좋았다.
그래서 단양 집으로 내려와서 다음 치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몇 명의 동창 친구들이 회복을 축하한다고 찾아 와서
함께 식사하고 기분 좋게 들어왔다.
그런데, 자정부터 갑자기 남편의 열이 39도까지 오르더니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항암치료 중 열이 38도 정도 올라가면 무조건 가까운 대학병원에라도 가야 한다는게
급처치 목록 중에 있는 사항이다.
119를 불러야겠다고 안달을 했지만 남편이 기다려보라고 해서
하룻밤을 자고 서울대 병원 응급실로 가니,
남편에게 폐렴에 패혈증까지 왔다는 거다.
죽음을 맞는 마지막 순간을 예고하는 게 패혈증이다.
아빠 앞에서 울지 않고 참고 있던 큰 딸도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 순간 시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멀쩡하게 잘 살던 작은 아들이 암이라고 하면 충격 받으실까봐,
캐나다에 살고 있는 둘째 딸 네 집에 잠시 다녀온다고 하고,
몰래 암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 아들이 죽었다고 하면,
시어머니가 받을 충격이 얼마나 클까.
그 동안 담담했던 남편 역시, 엄마에게 거짓말한 게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리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가슴을 쥐어 짜내는 고통이었다.
남편은 담당교수님의 주선으로 단기병동에 입원했다가
외부 출입이 안 되는 무균실로 이동이 되어 패혈증 치료가 시작되었다.,
고향 동창들 간에는 남편이 살 가망이 없다는 절망적인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인생 참 허망하다. 예기치 못하는 암으로 남편이 없는 세상을 생각하니
아무리 자식이 잘해준다고 해도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 줄 수는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자식들도 다 키워놓았으니,
그 순간에는 남편을 따라 죽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83㎏ 건장한 체격이었던 남편의 몸무게가 62㎏가 되었다.
얼굴이 점점 야위어갈 뿐 아니라,
치료하는 내내 죽음에 대한 공포로 힘들어 하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며,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정말 다행히도 암 치료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며 추적관찰을 받으며 다시 우리 부부의 일상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지난 5월에는 암이 깨끗이 없어졌으니,
1년 후에 검사 받으러 오면 된다는 이야기를 의사로부터 들었다.
그 기쁨이란 애드벌룬처럼 하늘을 둥둥 뜨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걱정하고 죽음까지 생각할 만큼 절박했는데,
의사의 말 한마디는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마법과도 같다.
우리 생명의 은인인 담당 교수님. 남편을 살려주신 고마운 분으로
영원히 내 가슴속에 남아 있을 분이다.
남편은 중증 근 무력증을 10년쯤 앓으면서 6개월에 한 번씩 받던 정기검진을 받고
비뇨기과 치료도 받았는데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이제는 한주먹씩 먹던 독한 스테로이드제 약을 다 끊고 어떤 약도 먹지 않는다.
처음 암 진단을 받은 지 이제 곧 5년.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뒤 지금은 부러울 게 없는 안정된 삶이지만
암재발의 공포는 언제나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 같다
하지만, 암 투병 후 우리에게 온 변화는 삶은 하루하루가 소중하다는 것,
남은 날 후회 없이 잘 살자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종처가(아내가 하자는 데로 하는 남편),
황처가(아내가 같이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해 하는 남편)로
나를 위해 남은 인생 투자하겠노라고 한 남편의 변화된 삶의 모습에
나도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고 산다.
사랑은 상대적이니까.ㅎㅎ
이것이 암에서 승리한 우리의 변화된 값진 삶이다.
우리의 삶의 마지막 종착역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미지수지만
오늘도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하고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남편 김영복 씨.
출처 : 제천단양뉴스(http://www.jdnew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