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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묵상글 들 ( 주님 부활 대축일 - 그리스도 우리의 빛, 우리는 세상의 빛.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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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대축일-그리스도 우리의 빛, 우리는 세상의 빛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오늘 독서들은 하느님의 천지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장대하게 노래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천지창조와 구원 사이에
창조 질서를 훼손하는 인간의 죄와 그 벌로서의 고통의 역사가 있지만
하느님은 인간이 회개하도록 벌도 내리지만 구원도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이렇게 거시적으로 보면 창조와 구원의 역사인데,
문제는 우리의 역사를 하느님의 역사하심이라는 관점에서
크게 보지 못하고 미시적으로 보기에 구원과 희망을 보지 못합니다.
거시적인 역사는 이렇습니다.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고 없애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넘어뜨리는 분도 하느님이시고 일으키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찌르시는 분도 하느님이시고 꿰매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어제 아침 성무일도 독서 호세아서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백성은 괴로움을 참다 못해 마침내 나를 애타게 찾으리라.
어서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은 우리를 잡아 찢으시지만 아물게 해주시고,
우리를 치시지만 싸매 주신다. 이틀이 멀다 하고 다시 살려 주시며 사흘이
멀다 하고 다시 일으켜 주시리니, 우리 다 그분 앞에서 복되게 살리라."
그런데 모든 것을 하시는 이 하느님의 역사 안에서
주인공이신 하느님을 빼고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읽을 수 없게 될 것이고
우리는 당장의 현상을 미시적으로 보고 거기에 함몰되고 말겠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신앙인이 보는 역사는 하느님의 역사이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벌을 주시고, 구원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런 만큼 우리가 구원을 받는 길도 분명합니다.
하느님을 무시하고 창조질서를 어겼던 옛 인간의 죄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구원을 받는 하느님 자녀가 되고 새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현 상황에 비춰 보겠습니다.
코로나를 의료인이나 과학자들은 의학적으로 그 원인을 보고
당연히 의학적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정치인들은 이것을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고 해결책을 찾습니다.
경제인들은 당연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법으로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고,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은 코로나 불루 해결책을 제시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 다 좋고 모두 각기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때 종교인들과 우리 가톨릭은 어떻게 해야 하고,
더 좁혀서 이때 우리 지도자들과 수도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하느님에게서 원인을 찾아 신앙인다운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런데 신앙인다운 해결책이라면 어떤 것입니까?
무당이 굿을 하듯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입니까?
기도가 필수이고 기본이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이 어두운 때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빛이심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백신보다 빛이 되겠습니까?
아니, 세상의 빛 이전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빛이 되고 있습니까?
마스크가 코로나를 더 잘 막아 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 되고 우리의 빛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이런 면에서는 빛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다른 빛이고 다른 희망이며
이것을 우리가 존재로서 증거해야 하고,
그래서 어둠을 밝혀 달라고 한 뒤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의 존재가 되게 해달라고 프란치스코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마스크와 백신은 필요없고 그리스도만 믿는다는 그런 믿음도 아니고,
마스크와 백신만 믿고 그리스도는 믿을 수 없다는 그런 믿음도 아니며
이 모든 것들과 함께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그리스도가,
의사가 옆에 있는 것보다 더 듬직한 그리스도가 우리 배에
함께 타고 계시기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올바른 신앙 위에 확고한 희망이 있게 되겠지요.
하느님과 함께 있지 않고 코로나와 함께 있는 사람은 코로나와 함께 죽지만
오늘 제2독서 말씀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리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희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빛으로 증거해야 할 것은 부활로서 드러난 그리스도의
능력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부활로서 드러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아무리 코로나가 설쳐도 하느님의 사랑이 같이 죽지 않고,
이까짓 것 때문에 하느님 사랑이 죽지 않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빛이시고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등불을 등경 위에 올려놓고 비추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엇이 빛입니까?
사랑이고 무엇보다도 두려움 없는 사랑이 빛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코로나를 핑계로 사랑을 멈추었거나
코로나에 의해 우리의 사랑이 죽어 있었는데
죽어있던 그리스도의 사랑이 다시 살아나고 그래서
멈추었던 우리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올해 우리의 부활이 아닐까요?
미얀마 사태 때 용기있는 두 수녀님이 미얀마인들에게 빛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두려움 없는 사랑도 코로나 불루를 이겨내는 데 힘이 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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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고도미니코 신부님.-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히 내리시길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주간 첫날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그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어머니의 순결무구한 태에서 태어나셨듯이 닫힌 무덤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당신 어머니의 맏이로 나셨듯이, 당신의 부활에서도 죽은 이들 가운데 맏이가 되셨습니다. 인간을 위해 태어나신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들과 함께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날은 부활하신 분과 함께 하늘문이 열리는 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그리스도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복음서 전승에 의하면 부활 신앙은 바로 빈 무덤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주님 부활을 알리는 오늘 복음은 부활 신앙의 증인과 여정을 보여 줍니다. 부활체험의 시작은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둠은 불신과 의혹을 상징합니다. 이 믿음의 과정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믿음이 부족한 마리아는 아직까지 예수님의 시신에만 집중되어 있어서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상태입니다. 빈 무덤을 보고 마리아는 어둠 속에서,곧 불신하는 가운데 도망쳐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갑니다. 두 제자 역시 아직 불신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둠 속을 헤치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 사건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그들은 흩어져 있는 수의와 더불어 예수님의 머리를 싸댔던 수건이 한 곳에 잘 개켜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 라자로는 죽음의 천으로 묶여 있었지만,부활하신 예수님의 경우에는 아무것도 그분을 속박할 수 없었습니다. 두 제자는 빈 무덤과 수의와 수건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분이 부활 하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불신에서 불완전한 믿음을 거쳐 완전한 믿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엿볼수있습니다. 빈무덤 사건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한 제자들은 이제 슬픔에서 기쁨으로,흔란에서 깨달음으로,불신에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의 눈은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복음은 부활신앙의 첫 목격 증인은 그당시 사회적으로 힘없는 연약한 여성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부활 예언의 말씀을 기억하고, 제자들에게 전달한 최초의 증인이자 선포자는 여성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이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고 베드로 역시 믿음에 이르지 못하였으나,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여 부활 사건을 믿고 이해한 첫 선앙인이자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첫 증인은 교회의 최고 권위자인 베드로나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사랑받았던 요한이 아니라 당시 소외된 여성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 했던 제자들이 스승 예수님을 배반하였던 것과는 달리,여성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따르고 그분의 죽음과 묻히심 그리고 부활에 이르기까지 예언자의 전 과정에 함께 한 충실한 제자요 증인이었습니다.
부활신앙의 초석이 된 것은 이처럼 여성과 같은 힘없고 소외받는 가난한 이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듯이 오늘날에도 또한 교회는 소외받고 가난한 이들을 통해서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고 도미니코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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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부활대축일: 낮 미사
복음: 요한 20,1-9: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주간 첫날”(1절), 오늘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당신의 탄생으로 인간의 탄생을 거룩하게 하신 분이 당신의 부활로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날, 부활하신 분과 함께 낙원이 열린다. 그 낙원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인간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에 갔다. 그곳에 분명히 주님께서 묻히셨는데, 돌은 치워져 있었고, 그 안에 시신은 없었다.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마리아는 시신이 없자 누가 훔쳐 갔다고 생각한다. 마리아는 무덤에 왔을 때, 아직 어둠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절)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 갔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셨지만, 예수님께 대한 존경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있음을 보인다. 살아계실 때처럼 똑같이 ‘주님’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그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무덤을 살핀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부리나케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본다. 그것이 부활의 표지이었다. 누가 시신을 훔쳐 갔다면, 시신과 함께 아마포까지 다 들고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몰약을 바르면 아마포가 납처럼 시신에 달라붙지 않는다. 예수님의 얼굴을 싸매었던 수건이 아마포와 따로 잘 개켜져 놓여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분의 시신을 누가 훔쳐 갔다고 하는 사람들 말에 넘어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보았는데 베드로는 수의가 흩어져 있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따로 한 곳에 잘 개어져 있었음을 보았으나 그는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믿음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빈 무덤이나, 예수님을 싸맸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의 믿음은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나, 베드로의 경우처럼 시각적인 면에서 ‘보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차원, 보이는 현상을 넘어 내적인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해하는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으로 얻는 것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파악하려고 하는 것에 감화되고 매료되어 자신을 그 현실에 동화시켜야 한다. 따라서 사랑, 연민, 다른 사람의 요구에 대한 개방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보고 믿었던’ ‘다른 제자’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소개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요한이 아직 예수를 보지 않고서도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보고’ ‘믿게’ 해준 것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힘으로 요한만이 빈 무덤과 개켜져 있던 수건에 감추어진 의미를 이해했다.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 구체적으로 성서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지, 빈 무덤이나 잘 개켜진 수건과 같은 어떤 구실이나 단서를 찾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9절).
부활의 은총으로 새로이 창조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상을 갈망하면서 부활을 숨 쉬며 살아야 한다. 부활을 숨 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삶이 매 순간 부활을 체험하며, 부활 체험 안에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저 위에 있는 것들은 바로 우리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랑의 마음과 봉사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며, 이로써 부활하신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형제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고 구원을 주실 수 있었던 한없는 사랑을 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 사랑에 대해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삶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국의 삶을 이미 이 땅에 끌어내려 사는 삶이 될 것이다. 이 삶은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며, 부활한 후의 삶은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그분이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이제 우리가 부활을 확실히 체험하는 것이다. 천상의 것을 추구하면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연습, 아니 죽어야 한다. 죽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으며, 우리는 사도들이 한 말과 같이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복음선포이며, 그리스도, 즉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도 항상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전할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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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빈 무덤이 부활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부활 사건 자체를 눈으로 직접 본 증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복음사가도 그것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부활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고, 무덤이 비었으며, 예수님의 수의인 아마포와 수건이 개켜져 있는 사실 앞에서 제자들은 그분의 부활을 믿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간 첫날 새벽 아직 어두운 때에 빈 무덤을 확인하고는 제자들에게 알립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곧바로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보고 믿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탐욕으로 죄를 짓고, 그 결과 세상에 죽음이 들어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파괴되고 죽음이 들어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십니다”(요한 3,16). 이 세상에 오신 아드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끝까지 이르는 사랑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되살리시고 죽음의 사슬을 끊어 버리십니다. 십자가의 은총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다시 사랑의 관계로 회복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이,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자연이 화해하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새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된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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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사실 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이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며 축하하기는커녕 스승의 시신이 도난당했다는 충격에 휩싸였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나마 이 빈 무덤의 소식은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 드리려던 향료와 향유(루카 23,55-56)를 가지고
이른 새벽에 돌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에 의해서 알려진 소식이었고,
정작 제자들은 이미 돌아가신 스승보다는 남겨진 자신들의 안위를 더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예수와 한 패라는 이유로 잡혀갈까봐 두려워서 문까지 닫아 걸고 숨어 있었습니다
(요한 20,19). 몸과 마음이 오그라 들어서, 광장공포증과 대인기피증이 겹친 듯한 증세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밖으로 나오게 한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외침이었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찍이 일곱 마귀를 달고 지옥 같은 나날을 고통스럽게 보내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어느 날 만난 예수님께서 그 지긋지긋한 마귀들을 쫓아내어 주신 이후부터(루카 8,2)
구원을 확신하고 그분을 따라 다닌 열혈 제자였습니다(마태 27,56-57).
그는 마귀들로부터 자유로워진 그 무렵부터 성모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과 그 제자 일행의 복음선포 활동을 뒤에서 돕던 숨은 제자였습니다.
그는 안식일이 끝나는 시점 이른 새벽에 무덤에 가서 시신에 향료와 향유를 발라 드리려던 것이었는데,
시신이 보이지 않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여 제자들에게 알리러 달려간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 대부분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놀라서 뛰어 나왔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이토록 애달파하듯이,
두 제자도 스승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워낙 컸기 때문에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이 무덤에 도착하자 자세한 정황이 밝혀졌습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은 요한이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라서는,
몸을 굽혀 빈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봄으로써 시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베드로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뒤따라온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 보았더니, 빈 아마포와 함께
예수님의 얼굴을 감쌌던 수건이 따로 한곳에 가지런히 개켜져 있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시신이 없어지기는 했어도 도난당한 것은 아니라는 중대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들 모두가 빈 무덤의 충격에 빠진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사라진 시신과 예수 부활을 그리 쉽사리 연결지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사가는 이 점을 분명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요한 20,9).
초대교회의 그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부활 신앙에 대한
확신이 모자라거나 아예 없다는 점에서 오늘 복음의 마무리 말씀은 커다란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그나마 부활 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는 경우에도, 죽은 후로 그 부활 시점을 미루어서
도저히 검증 불가능한 확신으로 막연히 지니고 있거나, 그것도 그 시점은 우리가 죽은 직후가 아니라
역사의 종말이 이루어지는 공심판 때로 미루고 있기도 합니다. 전통교리가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 전통적인 부활교리는 신학자들도, 교도권자들도 모두 부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과 콜로새 편지에서 사도들은 예수 부활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믿게 하기도 했고(사도 3,6),
8년 동안이나 중풍으로 누워있던 타비타를 낫게 하기도 했으며(사도 9,40).
헤로데의 감옥에서 풀려나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사도 12,11).
사도 바오로 역시 유럽으로 건너가 복음을 전했던 필리피에서 감옥에 갇혔다가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서 풀려날 수 있었는가 하면(사도 16,26),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사도 19,11-12).
이 두 사도는 이러한 기적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자신들에게
일하시는 것임을 체험했으며, 이 체험을 통해 확신을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일꾼으로 삼아 여전히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대하여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증언하였습니다.
전에 없던 이러한 기적 능력이 일어나게 된 데 대해 자신들의 능력인 양 자만하지도 않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기지은(四奇之恩)을 입은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막달레나도, 베드로도, 바오로도 처음부터 이렇듯 부활을 확신했던 것은 아니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발현 체험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막달레나는 동산지기 차림으로 나타나신 그분을 뵈었고(요한 20,16),
베드로는 낙담하여 돌아간 갈릴래아 호수에서 어부 차림으로 나타나신 그분을 뵈었으며(요한 21장),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신자들을 체포하러 가다가 벼락을 맞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사도 9,5).
그리고 이들에게는 각기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컸거나
또는 그분이 쓰시려는 필요가 특별히 있었다는 특징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도
첫째는 우리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자각함은 물론 그분이 우리를
쓰시려는 계획을 자각하려는 깨달음이요, 둘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체험하면 달라집니다. 인식의 한계를 돌파하고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체험하지 못하면 확신하기 어렵고 불신이나 주저함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와 함께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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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사도들과 예수님의 목격증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빈무덤(요한 20,1-2)에 대한 기억과 함께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심을 “부활하셨다”(일으키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라고 선포했습니다(35년경에 글로 쓰였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던 이들의(1코린 9,1) 이 선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이 선포를 한결같이 한 여인의 증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몹시 사랑했기에 끝까지 십자가 곁에 머물러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요한 19,25)가 “주간 첫날”(안식일 다음날 = 주일 = 그리스도인들이 전례에 모이는 날), “아직도 어두울 때”(요한 20,1) 혼자서 예수님의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사람이 아니라(요한 11,41) 누군가에 의해 치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여인은 즉시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다.”(요한 20,2)고 합니다. 요한복음이 당시 유다인들 사회에서 법적 증거능력이 없던 여자의 증언을 끌어들인 것은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실제로 있었던(역사적) 사건임을 말해줍니다.
여인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요한 20,2)가 무덤에 도착했으나 무덤 안으로 먼저 들어간 것은 베드로였습니다(1코린 15,5). 이들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24) 빈무덤에는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과 아마포가 따도 한곳에 개켜져 있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길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아마포로 시신을 감싸지도 않았을 것이며, 누가 시신을 훔쳐갔다면 수건을 걷어서 개킨 다음 아마포와 따로 두는 성가신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신 채로 가져갔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에 많은 몰약을 발라 아마포로 감쌌다는 것은 앞일을 내다본 것입니다. 몰약을 바르면 아마포가 납처럼 시신에 달라붙지 않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요한복음 강해』, 85,4) 부활의 표징이 된 빈무덤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유일한 증거이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을 순수한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셨기(요한 13,1) 때문에, 그리고 땅에서 들어 올려지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이끌어 들이기 시작하신 것입니다(요한 12,32).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나 빈무덤을 보고서야 믿었습니다(요한 20,8-9). “옛것은 지나갔고, 보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라는 깨달음이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사건도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부활) 뒤에야 알아들었습니다(요한 12,16).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정화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음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다(요한 2,22). 이렇게 제자들은 빈무덤을 보고나서야 부활에 대한 것은 물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깨달을 수 있었고, 구약성경을 다시 읽고 나서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요한 5,45-46).
제1독서(사도 10,34ㄱ.37ㄴ-43)는 이방인(로마인)을 향한 베드로 사도의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주신(마르 16,9) 마리아 막달레나가 알려준 대로 빈무덤을 확인했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간략하게 그분의 출신과 갈릴래아에서 보여주신 구세주로서의 삶(좋은 일, 악마로부터의 해방, 치유)을 요약합니다. 루카(사도행전의 저자)는 간략하지만 결정적인 내용을 모두 담고 있는 베드로의 설교를 초기교회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모범적인 방식(그리스도론)으로 삼았음을 말해줍니다. 동료 사도들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인 베드로는 로마인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했던 설교에서 이방인들에게 모세의 율법 준수의무를 부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이 나자렛 출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다고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목격증인으로 미리 선택되었음은 물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기도 했다면서 확실한 목격증인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이심을 선포하고 증언하라는 선교사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을 예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다시 읽고, 구약의 모든 말씀(율법과 예언서)이 예수님을 미리 증언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옛 계약을 어긴 죄를 용서받는다고 선포합니다.
제2독서(콜로 3,1-4)는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의 신비에 결합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가르쳐줍니다(콜로 2,20-3,17).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이미 죽었고, 아직은 충만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드러날지 모르니 옛 인간의 삶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의 삶을 살아가라고 합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 사랑으로 사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도 영광 속에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므로 항상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저 위에 있는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계시된) 새 생명의 법칙을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면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오르기 위해 지금 아래에서부터 부단히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10)
빈무덤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내용은 언뜻 보기에는 어설프지만, 역사적이면서도 믿음의 사건이라서 말문이 막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초월적인 사건이라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이라서 복음사가들은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할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도 끊임없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입증하셨고, 이에 대한 믿음을 계속 요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당신의 아드님이심을 확인해주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는 항상 너울(율법)이 덮여 있어(2코린 3,15)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들도 이제 빈무덤 사건을 통하여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 3,18)
우리는 주님의 빈무덤으로 달려갈 수도 없고, 아마포를 볼 수도 없지만,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빈무덤에 대한 증언을 전해줄 사람은 많습니다. 매우 소극적이고, 무책임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단지 성경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주님에 관한 기록들(루카 24,27)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사건 자체가 역사적이며 인간적인 이해(인식) 방식을 벗어나기 때문에 사실 복음서들도 자세하게 설명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성경 저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역사적 사실보다는 자신과 사도들이 체험한 진실을 전하는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만일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자 했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시간과 날자는 물론 구체적인 인물묘사 등 많은 것들을 함께 적었어야 했지만 복음사가들은 단지 예수님의 체포, 수난, 죽음, 무덤이 비어있음, 그리고 그분의 발현을 통해 체험한 사실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증언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체험으로 말미암아 사도들과 목격증인들에게는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마르 12,27), 곧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임마누엘) 생명의 하느님이심을(사도 2,28) 깊이 느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던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콜로 3,1)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바뀐 것입니다(2코린 5,17).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서(로마 6,4; 12,1-8) 그분의 부활을 증언하는 운동(선포)을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사도 9,2)은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마태 5,11). 그런데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은 계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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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2021년 부활 담화문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1.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축하드리며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을 마련해 주신 날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은 감격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죄와 악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습니다. 또한 우리는 언젠가 불현듯 찾아올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가 결코 풀 수 없는 죄와 죽음의 문제에 대한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해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묻히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셨습니다”(이사 25,8). 그리하여 예수님을 구세주 그리스도로 믿고 세례를 받으면 누구나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세례로 예수님과 함께 죽고 묻힌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28항, 로마 6,4-5 참조).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며, 늘 기도하는 삶의 토대요 원천이 되었습니다(1테살 5,16-18 참조).
3. 주일은 부활하신 주님의 날입니다. 주일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주일은 매주간 돌아오는 ‘작은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다음날, 곧 주간 첫날에 부활하셨습니다(마태 28,1 참조). 초대교회 신자들은 처음부터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간 첫날을 ‘주님의 날(주일)’로 지내기 위해 함께 모여 성경 말씀을 듣고 성찬례를 거행하였습니다. 교회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자녀들이 매주일 함께 모여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주일미사를 줄곧 거행하여 왔습니다. 이처럼 주일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핵심이 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급변하는 우리사회의 여러 상황들은 신자들의 주일미사 참석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주일의 근본적 의미가 상실되고, 단지 주말의 일부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확산은 신자들의 주일미사 참석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한때는 모든 본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하는 주일미사가 중단되었고, 이후에도 장기간 제한적 인원으로 미사를 거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교회는 부득이 신자들에게 (평화방송미사, 유튜브 미사 등) 비대면 방식의 대송으로 주일미사 참례의무를 대신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교회법 1245조, 한국천주교회 사목지침서 제 740조 4항 참조). 이와 같은 교회의 조치는 주일을 꼭 지켜야 한다는 신자들의 의식에 큰 혼란을 초래하였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주일미사 참례는 신자 각자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신자들은 누구나 주일미사에 참여할 중대한 의무가 있습니다”(교회법 1247조 참조). 주일미사 대송허용은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교회가 주일미사 참여의무를 대신하도록 한시적이며 예외적으로 허용한 결정이지, 신자 각자가 아무 때나 임의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핵심이 되는 날입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인 생활 속에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일 년 52주 주일미사에 꼭 참여하는 가운데 활력 넘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4. 주일은 사랑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여라”(요한 13,34)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신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지극한 사랑의 기억이자 기념인 “주일의 성찬례는 우리에게 사랑의 의무를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갖가지 애덕과 신심, 그리고 사도직 활동에 투신하도록 촉구합니다”(주님의 날, 69항 참조). 사도시대 이후부터 주일 모임은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형제애의 나눔을 실천하는 시간이었습니다(주님의 날, 70항 참조).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공경하고자 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께서 헐벗으셨을 때 모른 체하지 마십시오. 비단으로 장식된 성전 안에서 그분을 공경하면서, 그분께서 바깥에서 추위와 헐벗음으로 고통당하실 때는 모른 체하지 마십시오. 먼저 그분의 주린 배를 채워드리고 나서 남은 것으로 제대를 꾸미십시오”(주님의 날, 71항 참조).
우리 주변에는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장기화 여파로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는 일일노동자,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찬례는 우리에게 형제애를 실천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매주일이 고통과 가난, 그리고 외로움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들에게 물질과 시간을 나눔으로써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5.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부활대축일을 맞이하여 주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금 마음에 깊이 새기며, 주일을 거룩히 지키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당부합니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2021년 4월 4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청주교구장 장 봉 훈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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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며칠 전부터 성당 뜨락에 있는 큰 목련나무 가지 마다에 꽃봉오리들이 맺힌 것을 보고 곧 예쁘고
하얀 목련 꽃이 피어나겠다는 말들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겨우내 그 가지는 마치 죽은 것 같았습니다.
요즈음 TV에서 동물의 세계를 잘 소개해 주어 지난 과거보다 우리가 더욱 자연과 특히 동물과
친근함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굼벵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더군요. 매미가 되기까지 알에서 굼벵이 유충 그리고 그
것이 나무나 풀에 매달려서 탈바꿈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이미 매미가 나가고 없는 빈 유충이 붙어있는 빈껍데가 남아 있는 것을 볼 때도
있습니다.
누가 굼벵이에서 그리고 유충에서 매미가 나올까 의아해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 변화에 대해서 믿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식물도 마찬가지이요. 그 작은 까만 씨앗에서 푸른 채소가 나오리라고는 작고
길죽한 씨앗에서 코스모스가 핀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이 자연은 사실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신 십자가와 무덤에서 부활하리라고 누가 믿을 수가 있겠어요?
주님을 직접 따라다니고 사랑하던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면 우리야
오죽하겠어요?
복음서 (마태 28,1-8; 마르 16,1-8; 루카 24,1-12; 요한 20ㅡ1-10)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
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1)
시간적으로 후에 쓰여 진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주님의 빈 무덤의 상황을 마리아 막달레나와
연결시켜 상세하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하던 스승께서 무너지고 무참하게 돌아가신 모습에 어찌할지
모르겠습니다.
무덤을 찾은 요한과 베드로는 주님께서 안 계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 사실은 주님 살아생전에 세 차례에 걸쳐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는데 막상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겪은 충격으로 스승께 말씀하셨던 ‘다시 일어나리라.’라는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새벽부터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 부활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 시신이 없어진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두 제자는 그녀의 말을 듣고 서둘러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그 여인이 했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곳에는 예수님 시신은 없고 그분의 얼굴을 쌌던 수건과 시신을 둘렀던 아마포가 한 켠에 잘 개켜져
있었을 뿐입니다.
못 알아듣기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9)
놀라운 것은 주님의 부활은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만이 직접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그 장소에서 그 순간에 두려움을 체험했을 뿐이고 스승의 부활 후에 여인들도 제자들도 주님의
시신이 없었던 것을 확인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부활 후에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기적’을 확신시켜 주신 것입니다.
비록 빈 무덤으로부터 시작한 부활의 사건이2) 제자들에게 의해서 선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승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확신을 가지고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사도 10,39-40) 그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부활 후에도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41)
겨울 내내 추운 바람 속에서, 눈 속에서 그 가지들은 죽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지에서 새 봄이 오면 다시 새싹이 트고 아름다운 꽃들이 핀다는 것을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다린대로 봄은 어김 없이 찾아왔고 모든 나무들에서는 봄 기운과 함께 새싹이 돋고
꽃들이 피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또 다시 나무들의 꽃들에서 열매들이 열리고 가을에는 수확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빈 무덤과 같을 수 있습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지금은 아니지만 미래에 주님께서 약속하신 주님의 재림과 하는 나라를
희망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보일지라도 겨울의 가지에 새싹과 꽃을 기다리 듯
우리는 빈 무덤과 세상살이에서도 주님의 부활을 믿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죄와 죽음을 이기고 주님의 생명을 주시는 부활을 우리는 맞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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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의 부활하시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다.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빌라도에게 무덤을 지킬 병사들을 청하지만 거절당하고 성전경비병들을 시켜 무덤을 지키게 한다. 이 경비병들이 무덤 현장에서 밤을 지새웠기 때문에 가장 가까이에서 주님부활의 정황을 목격한 자들이다. 마태오는 이렇게 전한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기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해 앉는 것이었다.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졌다.”(마태 28,2-4) 경비병들은 이 사실을 수석사제들에게 알리지만 그들은 돈을 받고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라고 거짓진술을 해서 그나마 주님의 부활을 증거할 만한 것도 변질되었다. 스승의 부활 사건은 먼저 빈 무덤에서 생명을 되찾으신 주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뒤에 확실한 믿음으로 증거되었다.
2) 마르코가 전하는 주님 부활의 소식은 마태오와 약간 다르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무덤으로 간다. 하얀 긴 옷을 입은 한 젊은이가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소식을 전하지만 그녀들은 겁에 질려 무덤에서 나오자마자 달아난다. 그녀들은 두려운 나머지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한다.(마르 16,1-8)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마리아에게 마리아 막달레나 나타나셨는데 그녀는 슬피 울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으려한다(마르 16,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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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이 왔지만 봄의 따뜻함을 느낄 수 없는 마음과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걱정과 근심이 있다면 봄의 향기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슬픔과 고통이 있다면 봄의 초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2020년 부활이 그랬습니다. ‘부활래불사부활(復活來不似復活)’이었습니다. 코로나19로 미사가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삼일 전례를 교우들과 함께 하지 못하였습니다. 부활찬송도 함께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부활이 왔지만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없었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지는 못하였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지치고, 힘든 모든 사람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셨습니다. 2021년에는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이 온 세상에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어제 부활 성야미사의 독서와 복음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자식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셨고,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 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만을 믿고 광야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바다를 건너 젓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거센 폭풍우에서 구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와 잘못으로 고난과 고통이 다가왔지만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우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유배지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향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힘들고 지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지혜는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재물, 권력, 명예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참된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줍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니,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부활 성야 독서와 복음은 ‘빈 무덤’에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천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셨던 곳, 표징을 보여 주셨던 곳 갈릴래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새로운 탄생이 아닙니다. 부활은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부활은 슬픔에서 기쁨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다시금 허리띠를 동여매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는 더 이상 치욕과 굴욕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구원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12명의 제자가 시작한 하느님 나라 운동이 2000년 역사를 이어온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하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십자가를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환상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조직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교회는 언제나 위기를 겪었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고통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내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교회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아픔에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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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키엣대주교님.
주님의 부활을 보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부활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절망에 빠졌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놀라움과 희망을 찾았고 고집센 토마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에 숨죽여 걷고 있던 엠마우스로 가던 제자들은 다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나약함으로 숨어들었던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이기심으로 다투던 그들은 마음을 열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가 되고 온 몸을 바쳐 희생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보았느냐. 믿었느냐?’ 무엇 때문에 보게 되었습니까?
주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영혼에 새 새명을 주었고 그들의 영혼도 부활했습니다. 주님 옆에서 가장 가까이 그리고 주님을 진실로 사랑했기에 주님의 부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간 첫날이 되자 가장 먼저 주님의 무덤을 찾은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삶에 지쳐 힘들고 어려웠던 그녀를 다시 희망으로 살게해주신 그분이기에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이른 아침 서둘러 주님의 묘지를 찾았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란 그녀는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달려갔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도 밖으로 나와 주님의 무덤에 좀더 빨리 가까이 가기위해 달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무덤에 가지 않은 사람들, 주님의 그늘에서 벗어나려하는 사람들도 주님과의 거리를 넗히기 위해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들은 보았습니다. 과거를 버리고 회개했기에 볼 수 있었습니다.
무덤안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텅빈 무덤에서 그들은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주검이 있는 절망의 무덤이 아닌 빈 무덤에서 충만한 희망을 보았습니다. 빈 무덤은 혼란과 절망을 벗어나 주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시작점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주검이라는 절망에 억매이지 말고 살아계신 주님과 더 가까이해야함을 느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과거와 죽음이라는 육체의 현실을 벗어나 생명이 넘치는 미래를 지향해야함을 알려주었습니다.
겸손했기에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몸을 숙이고 무덤안을 보려고 하였지만 주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더 몸을 숙여 무덤안으로 들어가자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바다로 깊이 들어갈수록 바다를 볼 수 있듯이, 돌풍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그 형체를 볼수 있듯이 마음도 같습니다. 나의 깊은 내면, 영혼을 보려면 깊이 깊이 들어가야 볼수있습니다. ‘마음의 평안’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았기에 볼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먼저 빨리 달려 무덤에 다달아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주님과 가장 가까이 옆에서 스승을 모셨던 요한 성인은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아마 것도 없는 무덤에서 주님의 흔적을 보았습니다. 한곳에 개켜져 있는 아마포는 바로 주님의 손으로 직접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활의 기적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세상입니다. 작년 처음으로 맞이한 비대면 부활절, 일년후에도 또 다시 이런 날을 맞이하리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참 좋습니다”라고 말할때가 언제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불안한 하루를 지내는 지금 더욱 주님의 부활이 소중합니다. 게으름과 안일함에서 벗어나 불신과 비판을 버리고 진실된 마음과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고 이웃에게 먼저 따뜻한 손을 내미는 부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보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희망이 빛으로 인도해 주실것입니다. 기쁨과 희망, 사랑의 은총을 주실것입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주님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있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저의 영혼이 진실로 다시 살수 있기를 바라옵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단 한 번 주님의 부활로 제자들의 영혼은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수많은 부활절을 맞이한 나는 그 동안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2. 왜 그 옛날 주님의 제자들처럼 변화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3. 부활하신 주님을 묵상하며 마음이 행복한 평안한 부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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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영국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에 따르면 우리가 사회에서 맺을 수 있는 인맥의 최대 숫자는 150명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마당발이라 불릴 정도로 관계의 폭이 넓은 사람도 그 이상의 인맥을 형성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 휴대전화에 저장된 연락처 숫자는 1,000명이 훨씬 넘습니다. 얼마 전에 한 차례 정리했는데도 이 정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100명도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관계를 만들어나가려 해도 한계가 있다는 말에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이 정도 해줬는데 상대방은 내게 왜 그 정도도 못 해줄까 하면서 관계 맺지 못하는 상대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덜 상처받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관계를 완전히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회복할 수 있는 관계가 될 것입니다.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을 줬으니 상대도 사랑을 그만큼 줘야 한다는 세상의 법칙은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법칙을 계속해서 따르고 싶나 봅니다. 그래서 인맥의 최대 숫자가 150명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유일하게 이기신 분이 되셔서 우리에게 더 큰 사랑으로 오신 것입니다. 큰 사랑을 주셨지만, 이 사랑을 죽음으로 돌려준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관계를 끊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거부한 것조차 당신의 사랑으로 감싸 안으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크게 기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나 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150명과도 관계 맺기를 힘들어하는 우리인데, 주님께서는 당신을 거부하는 사람들과도 관계를 끊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역시 그 사랑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관계를 끊는 것에 집중하는 삶이 아닌, 관계를 이어가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삶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따른다는 것은 그만큼 할 것이 많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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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책임질 준비를 하는 데서 나온다(디트리히 본회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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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은 빨리 끝내야 합니다.
‘차를 바꿀까?’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우선 10년 이상을 타서 주행거리가 많다는 것, 계속 새로운 잔고장이 생긴다는 것, 여기에 요즘 좋은 차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 고민의 이유입니다. 주변에서도 “경유차 10년 이상 타면 잘 탄 거야.”라면서 지금도 쌩쌩 잘 달리는 제 차 바꾸는 것은 낭비가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특히 자동차의 앞 유리가 깨져 있어서 교체해야 하고, 타이어도 모두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지금이 차를 바꿔야 할 적시인 것 같기도 합니다.
워낙 차 한 대 가격이 고가이다 보니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는 고민하지 않기 위해 정비소로 달려갔습니다. 자동차 앞 유리를 교체하고, 타이어 역시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얼마의 비용이 들었는지, 운전하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이렇게 큰돈 들여서 교체하고 나니 고민이 사라졌습니다.
제대로 한 결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고민은 빨리 끝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민이 길수록 갈등이 커지고 삶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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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부활의 증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 주십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요한 20,1)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가로 간 시간적 배경을 서술한 이 문장 안에는 많은 상징이 담겨 있습니다. 사흘 전 예수님을 잃고 도성 구석구석으로 숨어버린 제자들의 마음, 사랑하는 이를 비극적으로 떠나보낸 여인들의 마음, 아드님의 죽음 앞에서 예전에 천사에게 들었던 구원자 잉태 소식을 떠올리는 성모님의 마음, 창조주를 잃은 모든 피조물의 마음... 분명 예수님은 부활하셨건만 아직 이를 모르는 이들의 마음은 여전히 동이 트기 전의 어두움 상태입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간 마리아가 말합니다. 시신조차 사라져 버린 철저한 주님 부재의 상황 앞에서 인간의 한계는 "무지"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무덤에 다다른 두 제자 역시 모르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들이 믿었다는 건, 그저 마리아가 전한 빈무덤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걸 확인으로 믿었다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합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9)
말씀을 깨닫는 것은 인간 고유의 능력을 넘어섭니다. 말씀하신 아버지의 뜻과, 말씀이신 아드님의 순종을 성령께서 일깨워 주셔야 가능한 은총이지요. 비록 제자들이 그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여러 차례 듣기까지 했어도 그들은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 초입의 시간적 배경처럼, 빈 무덤 앞에서 제자들의 앎은 "아직 어두운" 상태입니다.
제1독서는 베드로의 설교 부분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사도 10,39)
베드로는 자신을 포함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그분이 하신 일을 직접 본 증인임을 밝힙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사도 10,41)
그리고 부활하신 뒤에도 자신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이야기하지요. 비록 그분의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전복되어 관계를 부인하고 도주하고 숨었지만,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 그분과 먹고 마시면서 믿기지 않았던 부활의 현실을 직접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사도 10,42)
제자들의 무지와 배반의 흑역사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증언과 선포의 소명으로 바뀝니다. 부끄럽지만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엄청난 변화가 부활의 은총을 더 강력하게 보여 주니까요.
제2독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시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려면, 그 전에 이미 죽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으니, 우리는 그 죄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 죽음이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게 해 줍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2)
물론 지상 순례길에 묶여 있는 동안 땅의 것과 전혀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먹고 살고 낳고 키우고 부양하고 성취하려면 땅의 원리와 완전히 별개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부활의 은총으로 다시 살아나 "저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 하느님 나라와 영의 원리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사람은 땅에 살되 땅에 묶이거나 집착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먹고 살고 낳고 키우고 부양하고 성취하면서도 땅을 딛고 나아갑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지만 아직 마음속에 먼동이 트기 전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부활은 오늘 복음 속 제자들에게처럼 부활하신 분과의 만남, 들음, 만짐, 체험, 깨달음을 통해 점진적으로 열리는 신비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어제 부활 성야 미사 때 우리는 "예, 끊어버립니다!", "예, 믿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결단과 신앙을 비장하게 고백했지요. 비록 여전히 마음 안에 동이 트지 않았고 무지와 의혹의 빈 무덤 가를 떠나지 못한 상태라 해도 괜찮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각자의 때에 맞게 점진적으로 다가오시어 우리를 일깨우고 평화를 선사하실 것이고, 어둠이 짙을수록 그 변화의 폭은 엄청날 테니까요.
주님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과 평화는 감정을 넘어서는 은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부활의 은총을 믿으며, 부활의 증인으로 불리웠음을 믿는 이는, 믿는 대로 행복할 것입니다. 여러모로 녹록치 않은 현실이지만, 믿음으로 복된 부활 대축일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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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16,6)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주님 부활을 축하드리면서, 이 큰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배둔공소에서 처음으로 거행된 파스카 성삼일 전례여서, 이것저것 관심을 가져야 할 것들이 많았는데, 여러 형제자매들이 함께 도와주어서 오늘 파스카 성야미사까지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ㅎㅎ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온갖 수난을 감수 인내하시면서 마지막 수난인 죽음까지 받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마침내 되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주님 부활은
우리의 결정적인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예표입니다.
주님의 육화(겸손)와 세례와 광야에서의 유혹과 공생활의 땀과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은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이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미리 보여 준 예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6,4)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시다!
이제 우리가 부활해야 합니다.
이제 내가 부활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처럼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 덩어리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반드시 내가 먼저 죽어야 부활할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죽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부활하는 길이고, 너와 모두를 부활에로 인도하는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는 삶입니다.
"하느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로 이 거룩한 밤을 비추셨으니, 저희가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깨닫고, 저희 모두 몸과 마음이 새로워져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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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부활하신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알렐루야! 부활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달려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그렇다면, 그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혹 여러분도 그분이 어디에 모셔졌는지 모르십니까? 진정, 부활하신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디에 모시고 계십니까?
‘부활하신 분이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를 보기 위해, 먼저 ‘부활은 대체 어디에서 벌어지는지?’를 들여다봅니다. 그것은 당연히 무덤에서 벌어집니다. 곧 죽음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니 죽음이 있는 곳에 부활이 있습니다. 이는 죽음 없이는 부활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죽음에 부활이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새로운 탄생으로 건너가는 죽음이라야 부활입니다.
그런데 부활이 죽음에 있다면, 사람은 대체 왜 죽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죽음의 공통적이고 일차적인 이유는 ‘태어났음’에 있습니다. 그 누구도 태어나지 않고서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났기에 죽습니다. 그러니 탄생이 죽음의 제1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단 한 분 예외가 있습니다. 부활의 신비는 바로 이 분에게서 드러납니다.
이를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분의 탄생의 결과라고 말하기보다,
그분이 죽을 수 있도록 탄생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탄생’이 발생했다는 의미입니다. 곧 탄생이 죽음의 원인이 아니라, 죽음이 탄생의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죽음이 탄생의 원인이라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지만, 바로 이 죽음에는 탄생이 있습니다. 곧 탄생에 죽음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탄생이 내포되어 있고, 죽음이 부활의 새로운 탄생이 됩니다.
여기서는 탄생, 죽음, 부활이 하나로 삼위일체를 이룹니다. 그야말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탄생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참 생명에 결합되는 삼위일체의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참 생명을 인간에게 건네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이 얼마나 크고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랑의 신비인지요!
이를 히에로니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시고 잉태되셨다. 그리고 세상은 만들어졌다.”
이는 성령의 날인인 ‘못 박힘’으로 잉태되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무덤으로부터 부활한 ‘새로운 창조’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해 봅니다. ‘이 부활’, ‘이 사랑’은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은 대체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대체, ‘왜 끝나지 않았는가?’
대체, ‘왜 끝나지 않았는가?’ 그것은 비로소 부활과 함께 새로운 생명,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삶의 방식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는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삶으로 증거 해야 하는 소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파스칼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끝 날까지 고통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죽음 가운데 부활의 생명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곧 부활을 증거 하는 우리의 삶 안에, 사랑을 증거 하는 우리의 순교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부활은 지금 우리의 고통, 우리의 죽음 가운데 있고, 우리의 죽음을 통하여 드러날 것입니다. 곧 부활은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빈 무덤’, 죽음이 죽어버린 '빈무덤'의 형상으로 들어와 있고, 우리의 증거의 삶 안에 보이지 않는 '빈무덤'으로 살아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죽음의 삶 가운데 모셔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아버지께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드시어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오늘,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사랑이 드러나는 생명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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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짜 신자信者의 삶
-만남, 증언, 추구-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작년에 이어 이렇게 마스크 하고 노래 부르지 못하기는 처음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맘껏 노래할 수 있었던 예전이 부활 축일이 그립습니다. 예전, 오늘 부활 대축일에 함께 불렀던 시편 화답송은 얼마나 흥겨웠던지요.
“이날이 주께서 마련하신날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함께는 못해도 오늘 혼자 거닐 때 노래 기도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어제에 이어 장마같은 비오는 날씨 역시 기후변화의 탓 아닌가 생각됩니다. 파스카의 봄꽃들은 활짝 만개했지만 웬지 모르게 우울하게 쓸쓸하게 느껴지는 올해의 부활 대축일입니다. 이태리 로마에 있는 수녀님의 편지 역시 어둡고 힘든 분위기였습니다.
“신부님,
주님 부활 축하드립니다. 지금쯤은 성야 미사준비하시겠군요.
저는 현재 공동체에 코로나 환자가 13명 발생하여 격리중에 있습니다. 2주간을 갇혀 있으니 신경만 곤두섭니다. 모든 전례도 TV로 하고 사순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모르게 지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조심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뵐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전세계적으로 코로나로 인한 전무후무한 재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 부활 찬미의 기쁨이 재앙을 축복으로 바꿉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카의 기쁨을 살아야 합니다. 만개하기 시작한 온갖 봄꽃들 주님 부활의 기쁨을, 파스카의 기쁨을 살라고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요즘 피어나기 시작한 예쁜 튤립은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고, 활짝 피기 시작한 진달래꽃의 꽃말은 ‘사랑의 기쁨’이라 합니다. 이들 꽃말처럼 영원한 사랑을, 사랑의 기쁨을, 파스카의 주님을 노래하면서 오늘 부활 대축일을 맘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방금 들은 파스카의 부속가와 알렐루야가 우리에겐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후반부 내용 그대로 인용합니다.
“내 희망 그리스도 살아계시니 그 제자들 앞에서 갈릴래아로 가시리라.
그리스도 죽은이들 가운데서 정녕 부활하심을 우리는 아노니
승리자 임금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그리스도 우리의 빠스카 제물로 희생 되셨도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삶의 현장인 갈릴래아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부활한 우리들입니다. ‘알렐루야!’, 우리의 영원한 화두입니다. ‘알렐루야’로 살다가 ‘아멘’으로, 즉 ‘찬미’로 살다가 ‘감사’로 인생 마칠 수 있도록 주님의 축복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 계시기에 살맛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부활하신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이 어둡고 힘든 무지와 허무의 광야인생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파스카의 예수님 계시기에 괴물怪物이나 폐인廢人이 되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가, 빛의 자녀가 되어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행복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진짜 신자로서 살아갈 수 있겠는지 그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주님을 만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만개한 봄꽃들이 상징하는 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파스카의 주님을 만날 때 꽃처럼 환히 피어나는 꽃같은 마음에, 꽃같은 얼굴입니다. 언젠가의 활짝 웃는 분을 보며 던진 “꽃인지 얼굴인지 구분이 안됩니다”란 덕담이 생각납니다. 꽃 한송이를 선물로 가져온 분에게 드린,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짧은 덕담같은 시도 생각납니다.
파스카의 주님을 만날 때 꽃처럼 피어나는 마음이요 얼굴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만남에 앞서 필히 전제되는 바 사랑의 갈망입니다. 간절한 주님 사랑이 있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바로 오늘 복음중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가 이런 사랑의 모범입니다. 흡사 다음 장면은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의 사랑의 경주같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사랑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베드로보다 앞선 요한의 사랑입니다. 다음 대목에서도 요한의 겸손한 사랑이 빛을 발합니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수제자 베드로에 대한 사랑의 배려가 참 아름답습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애제자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참으로 영적으로 깨어 있던 관상가 요한은 직감적으로 주님의 부활을 믿었고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보고 믿었다.’ 짧은 말마디가 강렬한 느낌을 줍니다. 빈무덤을 보는 순간, 전광석화 믿었으니 애제자이자 관상가인 요한에게 빈무덤은 그대로 주님 부활의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으로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린 요한에게 무덤은 텅 빈 공허가 아닌 텅 빈 충만, 파스카 주님의 현존이었던 것입니다. 눈먼 이에게는 삶은 ‘텅빈 공허’에 고해인생이겠지만 눈이 열린 이에게는 텅빈 충만에 축제인생이 될 것이며 바로 이때 외로움도 그리움도 눈녹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둘째, 주님을 증언하십시오.
대기만성입니다. 수제자 베드로에게 딱 드러맞는 말씀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였지만 날로 주님께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 앞섰습니다. 이어 주님 부활을 체험한 베드로는 주님의 용사로 돌변하여 주님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일에 모두를 바칩니다. 옛날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정말 파스카의 주님을 만날 때 회개로 인한 참된 변화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만남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난 관상가는 결코 자기도취의 관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주님의 활동가가, 주님의 전사가 되어 주님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삶에 몰두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그 모범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설교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 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포자와 증언자,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비상한 복음 선포나 주님 증언이 아니라 우리 평범한 일상의 삶을 통한 선포요 증언입니다. 참으로 평생 끊임없이 사랑으로 주님을 만나 회개할 때 주님을 닮아 관상가에 이어 복음의 선포자와 주님의 증언자가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지상에만 머무르는 관상가와 증언자가 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눈들어 항상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늘을 잊으면 길을 잃을뿐 아니라 멀리 내다보는 깊고 넓은 시야를 지닐 수도 없습니다. ‘마음의 근시’보다 영성생활에 큰 손실은 없습니다.
하늘이 상징하는 하느님은 우리의 영원한 꿈이자 희망이자 비전입니다. 바로 그 꿈의 사람이, 희망의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 적절합니다. 관상가와 증언자에 이어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구도자로, 신비가로 살 것을 촉구합니다. 콜로새서 2독서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현재의 우리에게도 영원한 진리가 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천상의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땅의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초연하라는,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탐욕의 무지의 병에 대한 치유의 처방도 이것 하나뿐입니다. 이래야 눈먼 사랑이 아니라 눈밝은 사랑입니다. 기후변화. 기후위기에 대한 근원적 답도 여기있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사랑할수록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참 생명을 살 수 있습니다. 마지막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우리의 궁극의 미래입니다. 새삼 파스카의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사랑이자 생명이요, 희망이자 기쁨이요 영광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이런 파스카의 예수님은 우리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을 잊을 때, 잃을 때 그대로 무지와 허무의 늪에 빠질 것이며, 얼빠진 유령같은 헛것같은 삶이 될 것입니다. 살아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파스카의 주님과 일치될수록 참나의 실현이며, 하여 우리 삶은 ‘예닮의 여정’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부활 대축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생명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당신의 관상가와 증언자, 신비가로 살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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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이 부활로 인해
볼일이 있어 시내에 나갔다가 여의도를 지나가는데, 벚꽃 축제가 막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화려하게 만개했던 꽃잎들이 속절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더군요.
차도며 인도며 온 세상에 꽃비가 내려 쌓였습니다.
사람들은 아쉬운 마음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에는 약간은 울적하고 우울한,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또 꽃이 지는구나. 또 한 번의 봄날이 가는구나.
또 한 살을 더 먹는구나. 죽음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내게 다가오는구나.’
그런데 또 하나의 풍경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꽃잎이 떠나간 자리를 유심히 바라보니 연초록빛 나뭇잎들이 앞 다투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생명의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꽃잎들이 고집 부리면서 끝까지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잎들은 어떻게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나무는 또 어떻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참으로 자상하시기도 하십니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의 출발이요 서곡이라는 것을 대자연의 순환 속에 아로새겨놓으셨으니 말입니다.
오늘 부활대축일은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요 또 다른 생명의 시작임을 장엄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은혜로운 사실 한 가지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죽음은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이제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부활로 인해 유한한 존재였던 우리 인간이 그분의 무한성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비참하게 소멸될 육적 존재였던 우리 인간이 그분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필멸의 가련한 존재였던 우리 인간이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
너무나 가슴 벅차고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과 새 삶을 선물로 주신 부활하신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분 죽음과 부활의 의미, 내 죽음과 내 삶의 의미가 대체 무엇인지 계속 찾아나가야겠습니다.
성토요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던 중 빅터 프랭클 교수의 회상록을 읽게 되었습니다.
2차세계대전중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보낸 3년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화두 한 가지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매 순간 맞닥뜨리는 죽음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인가?’
1942년 빅터 프랭클은 가족들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부모님과 형, 부인은 모두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곧 세상을 떠나겠지.’ 하고 자포자기하고 있던 그는
한 가지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배급받은 죄수복 주머니 안에 작은 종이쪽지 하나가 접혀져 있었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죄수가 쓴 글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네 마음과 네 영혼과 네 힘을 다해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 글귀는 빅터 프랭클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열심히 살아서 내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찾으리라.
그리고 반드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리라.’
그 후 빅터 프랭클의 삶을 180도 뒤바뀌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극한의 공포 속에서도 언제나 초 긍정의 마인드를 유지했습니다.
늘 밝게 늘 긍정적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했고, 다들 짐승처럼 변해가는 수용소 안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하루 단 한 컵 배급되는 물의 반을 남겨 세수를 하였습니다.
자기 존중과 관리의 표시로 유리 조각으로 매일 면도를 했습니다.
그 혹독한 길, 삶과 죽음 사이로 펼쳐진 벼랑 끝 길을 걸어가면서도 계속해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추구했고 자신에게 부여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그의 삶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 각자의 삶에는 저마다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 의미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삶에 깃든 의미는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내 인생에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깊이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오늘 부활대축일에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과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은혜롭게도 우리의 삶과 죽음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의미는 부활하신 그분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를 때 참된 가치와 진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는 살아도 그분의 것, 죽어도 그분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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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대축일]
왜 운이 좋은 사람은 항상 운이 좋을까?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그러나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옵지 못하면 주님 부활을 기뻐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다 기뻐했던 것은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만나주신 이들만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 극소수의 공동체에 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부활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부활을 체험한 이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났는지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소개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가장 처음 부활의 소식을 접하게 된 여인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부활 성야 미사에서 읽히는 복음에서는 여인들이 주일 아침 일찍 향료를 사서 주님의 무덤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무덤을 막고 있는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돌이었습니다.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사실 이성적으로는 그녀들은 무덤 앞에서 허탕 치고 다시 돌아왔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돌이 굴려져 있었고 천사가 그녀들을 맞아주었습니다.
그녀들이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는 아니었음을 우리는 그녀들이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두려워 입을 막고 있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은 당신을 만나기 위해 막연하게나마 노력하는 이들의 수고를 헛되게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하는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반드시 주십니다.
그녀들이 무작정 무덤으로 달려가서 얻게 된 것은 천사와의 만남이었습니다.
행운은 바로 막연하게 행동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진정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떠한 식으로든 체험하고 만나는 것은 ‘행운’입니다.
그런데 그런 행운 앞에는 항상 커다란 돌이 놓여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특별한 사람들만이 이 세상에서 그런 행운을 만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런 행운을 위해 막연하게나마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있고, 막연해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막연하게나마 무언가 하는 사람 마음 안에는 ‘희망’이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그 막연함을 지금 처지에 머물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핑계 대는 이유로 삼습니다.
우리는 행운이 누구에게 찾아오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막연한 희망으로 지금의 처지에서 벗어나 무엇이라도 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느냐고 물으면 모두에게 빠지지 않는 답 중의 하나가 ‘운이 좋았다.’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들에게만 그런 행운이 찾아드는 것일까요? 바로 ‘희망’의 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희망이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임을 알아야 합니다.
옛날 우리나라 왕에게 근심이 생겼습니다.
중국 왕이 우리나라 왕에게 선물을 보내왔는데 그중에서 가장 비싼 것을 가려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보내온 것은 배가 뿔룩 나온 승려 상 4개였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완전히 똑같았습니다.
어느 날 한 선비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아주 가느다란 철사를 꺼내 승려 상 하나를 택해 그 철사를 찔러넣어 보았습니다.
철사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선비는 말했습니다.
“이 승려 상은 귀가 막혀 있습니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여 이 상은 값싼 것이옵니다.”
선비는 다른 상에도 철사를 찔러넣었습니다.
철사가 귀로 들어가더니 다른 쪽 귀로 통과되어 나왔습니다.
“이 상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는 뜻이니 남의 말을 소홀이 듣는다는 뜻입니다.
이것도 값싼 물건입니다.”
선비는 세 번째 상에 귀에 철사를 찔러넣었습니다. 이번에는 철사가 입으로 나왔습니다.
“들은 것을 바로 발설하는 자이니 이것도 값싼 것이옵니다.”
마지막 상의 귀에 철사를 찔러넣었는데 철사는 계속 들어가기만 하였습니다.
그러자 선비가 설명했습니다.
“귀로 들어간 철사가 계속 뱃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는 말을 듣고 깊이 간직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상이 가장 비쌀 수밖에요.”
[출처: 『돈보다 운을 벌어라』, 김승호, 유튜브 채널, ‘책한민국’]
운명은 내가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들은 것을 다른 귀로 흘려보내거나,
입으로만 말하는 것으로는 바꿀 수 없습니다.
내가 들은 것이 몸에 소화되어 ‘행동’으로 나와야 합니다.
들은 것이 ‘희망’이 되었다면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이는 사람만이 들은 것을 행운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제가 십일조를 하라고 해도 하시는 분들보다 안 하시는 분들이 훨씬 많을 것임을 압니다.
분명 들은 것을 아무 생각 없이 해 보려는 사람보다 아예 귀를 막고 들으려고 하지 않거나 다른 귀로 흘려버리거나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그것이 옳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행운이 오겠습니까?
그들을 막고 있는 그 막연함의 돌이란 ‘내가 옳다.’는 자기주장입니다.
그 내가 옳다는 생각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어떤 희망도 자신 안에 머물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그 돌 뒤에 있는 행운의 천사를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좌 때 군대에서 귀신을 본다는 청년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귀신을 본다고 무서워 매일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괴롭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저는 전화를 받으며 그 귀신에게 아무런 반응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나는 이 세계에 머물고 싶지 않아. 나는 다시 인간 세계에서 살고 싶어.”라는 의지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런 막연한 시도가 귀신이 더는 괴롭히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어머니와 청년은 막연하게나마 주님이 계심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려 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매일 전화하는 것을 선택했고, 어머니는 오랜 냉담을 풀고 사제인 저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이런 마음으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적어도 ‘희망’이란 것이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히는 할 수 없어도, 그냥 무엇이라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막연함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 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행운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체조배에 관한 저의 동영상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실제로 성체 앞에 시간을 정해서 앉아있으려 하고, 어떤 분들은 그런 행동까지 가지 않습니다.
행운은 내 엉덩이를 집 소파가 아닌 성당 의자로 옮겨 놓는 행동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은 막연한 희망에서 나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돌이 치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돌로 막혀 있는데도 막연하게나마 향유를 들고 길을 떠났던 여인들이 가진 희망의 덕을 묵상합시다.
왜 운이 좋은 사람들은 계속 운이 좋을까요?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시기에 좋은 것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항상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희망의 힘입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희망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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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복음 묵상방.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나는 과연 부활했는가? 답은 아직은 아니요입니다.
새롭게 다시 우린 태어났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실제 느끼시는지요? 저는 오늘 복음 묵상을 하면서 과연 우린 전례적으로는 부활 성야 미사를 봉헌하면서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경축함과 동시에 우리 자신도 사순시기를 보내면서 기도도 많이 하고 어쩌면 이 날의 기쁨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에 절제를 하고 단식도 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과연 부활했는지 자문해 봅니다. 개종 후 열 번째 맞는 부활입니다. 오늘 저는 형식상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날인데 다른 분은 만났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 영혼은 지금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전례를 같이 하면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하느님을 경배하는 예식 하나만큼을 절대 개신교가 따라올 수 없다는 걸 항상 느끼지만 오늘은 그렇게 느끼는 반면에 한편으로는 씁쓸한 걸 느낍니다. 이건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외형적인 모습에는 단연 제가 봐도 주님이 부활하시지 않으면 안 될 그런 분위기임에는 확실합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건 좋은 일이지만 아무리 주님이 부활하셔도 자기가 부활하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내년에도 다시 어김없이 사순시기가 오고 또 부활을 맞이하는 전례가 거행될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다시 월요일부터 교회의 전례를 따라가면서 다시 저만의 사순을 따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실패한 부활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해서 부활이라는 개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때 죽음은 진정한 죽음입니다. 진짜 죽지 않으면서 부활했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생각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처럼 과연 진정으로 자신을 죽이고 짓이겼는가 하고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한다면 죽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 본성이 죽지 않는 한 절대 부활은 있을 수 없다는 걸 저는 오늘 깨달았습니다. 수요일에 저는 개인적으로 로마에서 영성심리학을 공부하신 수녀님을 대전에서 만나 뵈었습니다. 수녀님의 개인적인 인적 사항은 밝힐 수가 없습니다. 작년에 이 수녀님을 알게 되었습니다만 이번에 어떻게 기회가 돼 만나 뵈었습니다. 상담 내용은 밝힐 수가 없지만 이번에 수녀님을 만난 후에 많은 걸 배웠습니다. 다섯 시간 정도 수녀님과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마지막 두 시간은 수녀님으로부터 제가 상담한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일종의 신앙 강의를 들었습니다. 원래 독일에서 이미 개신교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신 분이였습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영성 심리학을 공부하셨는데 그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날 저한테 두 시간 동안 알려주신 내용이 수녀님이 로마에서 10년 동안 죽어라고 공부한 내용의 결과물이라고 하셨습니다.
한국에 되돌아오셨을 때 이걸 깨달으려고 그렇게 공부를 했던가 하고 어떨 경우는 허탈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허탈해서 허탈한 게 아니고 예를 들면 저만 보더라도 수녀님은 그렇게 고생해서 공부해 알게 된 신앙의 지식이라면 지식인데 저는 그냥 두 시간 정도 걸려서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수녀님께서도 누가 이런 걸 알려줬다면 지금 수녀님의 인생에서 수녀님의 신앙이 어떻게 더 업그레이드 됐을지 모를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공개를 하는 것은 민감한 내용이고 해서 공개를 할 수가 없지만 이것 하나만큼을 알려드릴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아주 단순한 것이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근데 그게 엄청난 진리입니다. 수녀님이 이야기를 해 주실 때 전부 다 성경 속에서 답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강의를 마치면서 물론 제가 그냥 강의라고 표현했습니다. 지혜서의 한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은 기간도 중요한 게 아니고 또 수많은 기도도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기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 전에 전제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변화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오늘 성야 미사를 가기 전에 지혜서 전체를 다시 한 번 더 읽었습니다. 오늘 성야 미사를 봉헌하고 돌아오면서 수녀님과 나눈 대화가 생각나면서 부활을 생각해봤습니다. 오늘 미사 때 신부님께서 말씀을 하셨고 부활을 축하한다고 하셨는데 과연 정말 영적으로 예수님처럼 부활한 모습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수녀님 말씀에 비추어보면 ‘아니오’가 답이었습니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에서 원장 신부님께서 말씀도 하신 적이 있지만 실제 하느님을 평생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외국에서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을 봐왔고 또 한국에 오셔서 다양한 사람을 경험하신 걸 토대로 봤을 때 실제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서 하느님을 찾는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 근본 정체성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헤어지면서 수녀님이 저에게 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님, 신앙생활을 거창하게 하려고도 또 사람들 관심을 끌려고도 하지 말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하는 아주 기본적인 덕을 실천하는 게 즉, 다시 말해 사랑을 실천하는 게 수많은 기도와 선행도 좋지만 그런 바탕 위에 있지 않으면 그런 선행도 자기만족이지 하느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그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전에 어떤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성경학자와 신학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비결을 알고 있는 게 아니고 실제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할 정도로 하느님 말씀을 가슴에 담는 사람이지 머리에 담는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말은 청산유수처럼 바리사이처럼 잘해도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건 힘들지만 그 빈도가 너무나 차이가 난다면 그 또한 하느님을 기만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사람들은 하느님을 자주 기만하면서 사랑한다고 늘 입에 달고 있고 또 고백한다고 하셨는데 저는 이 말씀이 얼마나 뜨끔했는지 모릅니다. 저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지금 운전을 할 상태가 아니라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갔다 왔습니다만 마산으로 돌아오면서 많을 걸 생각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 맨 마지막 말씀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짜 하느님을 제대로 믿기는 믿는지 생각해보면 수녀님을 만나고 와서는 사실 자신이 없습니다.
외국 신부님이 하신 말씀처럼 하느님을 기만하면서 하느님을 늘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과도 어쩌면 같은 사람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언젠가 하느님 앞에 갔을 때 이런 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하느님을 농락했을까를 생각해보면 과연 하느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있을지 상상만 해도 무섭기까지 합니다. 정말 외국 신부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을 늘 기만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과연 이렇게 해가지고 오늘 부활했다고 자축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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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강만연 어부베드로
앗! 한 가지 빠진 내용이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가슴에 담는 사람은 안 변할래야 안 변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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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주님 부활 대축일. 김 로마노 형제님.
주님 부활 대축일 제1독서 (사도10,34ㄱ.37ㄴ-43)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39ㄴ-40)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본문은 베드로가 이방인 백인 대장 코르넬리우스 집에서 예수님에 관하여 증언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구속 사업의 절정인 십자가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갈라디아 3장 1절에서 바오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신명기 21장 23절을 인용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9절의 '나무에 매달아'에 해당하는 '크레마산테스 에피 크쉴루'(kremasantes epi chsylu;hanged on a tree)도 신명기 21장 23절의 문장 형태와 유사하다. "죽을 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그날로 묻어야 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땅을 부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신명21,22-23) 베드로는 바오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나무에 매달리심을 신명기 21장 23절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신명기에 따르면, 사람이 범죄하여 처형당할 경우에 그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경계의 표본으로 삼았는데, 시체가 나무에 매달린 것은 그가 저주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면서 '십자가'라는 표현이 아닌 '나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저주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가 받은 저주는 장차 인간들이 당할 모든 저주에서 인간들을 건지는 대속적 저주였다. 베드로는 '나무'라는 단어를 통해 바로 이러한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2장 24절,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에서도 예수님의 죽음을 '(십자)나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한편 '매달아'로 번역된 '크레마산테스'(kremasantes)는 '걸다', '~에 달려있다'를 의미하는 '크레만뉘미'(kremannymi)의 부정(不定) 과거 분사로서 '매단후에' 라는 뜻이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매단 이후에 죽였다는 사실이 이 부정 과거 분사형 단어에 나타나 있다. 유대인들은 범죄자를 처형할 때 돌로 쳐서 죽였다. 때로 그들은 형을 집행하여 이미 죽은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수치스러움과 저주 받았음을 나타내고,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범죄자를 산 채로 십자가에 매달아 형을 집행하였으며, 본문의 시제는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로마인들에게 십자가 처형을 요구했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0) 사도행전 10장 40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결코 실패가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언급이다. 원문의 뉘앙스를 가지고 번역하면, '하느님께서는 일으키셨다. 그리고 그분은 공공연히 보이도록 그를 내주셨다' 가 된다. '일으키시어'에 해당하는 '에게이렌'(egeiren; raised up)은 '에게이로'(egeiro)의 부정(不定) 과거 3인칭 단수이다. 고전 희랍어에서 '에게이로'(egeiro)는 세가지 기본 개념으로 쓰였다. 첫째는 '깨우다', '자극시키다'이고, 둘째는 '일으켜 세우다', 셋째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다' 라는 의미이다. 본절에서는 세번째의 개념인 '죽은 자를 다시 살리다'는 의미로 쓰였다. 한편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로 번역된 '에도켄 아우톤 엠파네 게네스타이' (edoken auton emphane genesthai; caused him to be seen)에서 '엠파네'(emphane)는 '명백한', '보이는'을 뜻하는 형용사 '엠파네스' (emphanes)의 목적격이다. 이 단어는 '나타내다', '전시하다' 를 의미하는 '엠파니조'(emphanizo)와 관련되며 신약에 단 두번 나타난다. 본절은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는 뜻이다(로마10,20참조). 베드로 사도가 이러한 단어를 사용해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 그를 공공연히 나타나게 하셨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코르넬리우스 집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이들이 이방인들이고,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다는 유대인들이 퍼뜨린 헛소문(마태28,13)을 들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 부활 대축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진짜 기쁜가요?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진짜 기쁘냐?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죄의 대속이었음을 믿는다면~ (콜로2,20-3,4) 2,20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이 세상의 정령들에게서 벗어났으면서도,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규정에 얽매여, 21 “손대지 마라, 맛보지 마라, 만지지 마라.” 합니까? = 세례로 예수님의 죽음과 한 몸이 되어 세상에서 죽은, 끊어진 하늘의 존재들이 여전히 사람의 규정에 얽매여 있느냐? 묻습니다. 22 그 모든 것은 쓰고 나면 없어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규정으로, *인간의 법규와 가르침에 따른 것들일 뿐입니다. = 하느님의 법규와 가르침이 아닌 것을 따른다고 지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골로2,3) 23 그런 것들은 자발적인 신심과 겸손과 육신의 고행을 내세워 지혜로운 것처럼 들리지만, 육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데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 인간들의 법, 규정을 열심히 따르는 그 행위의 신심은 사람들의 눈에는 훌륭하게 보여 칭찬등으로 오히려 육의 욕망을 부추킬 뿐입니다. 사람의 높은 평가 그 칭찬을 하느님은 혐오스러워 하십니다.(루가16,15) 육의 욕망은 카인의 후예들이 만들어 낸 죽음의 문화 경제로 하느님의 사랑까지 거스르게 하며 세상의 노예로 살게 할 뿐입니다. 3,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 육의 욕망을 다스릴 하느님의 말씀, 가르침을 원하라 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오른쪽에 계신~ 오른쪽- 오른, 참, 진리이신 그 그리스도를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 위, 하늘의 것~ 하늘의 생명으로 이끌어주실 그리스도의 영, 성령 입니다. (탈출 25,21-22) 21 너는 그 속죄 판을 궤 위에 얹고, 궤 안에는 내가 너에게 줄 증언 판을 넣어라. = 대속의 속죄 판이~ 심판의 증언 판(십계명)을 덮고 있어 심판을 못하게 되는 모습입니다. 22 내가 그곳에서 너를 만나고, 속죄 판 위, 곧 증언 궤 위에 있는 두 커룹 사이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내가 너에게 명령할 모든 것을 일러 주겠다.” = 하느님께서 모든 심판을 속죄 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를 살리시겠다는 뜻입니다. (요한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 위에 있는 것, 심판의 계명, 법을 덮고 있는 속죄 판~ 곧 '육의 죄를 덮으시기 위해 대속 하신 그 속죄의 그리스도를 향하라' 입니다. 땅, 세상의 것~ (골로2,8)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 신앙인이 버려야 할 육의 욕망을 부추기는 땅-세상의 철학, 사람들의 전통입니다. (갈라5,16-17) 16 내 말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17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 우리의 본성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지 않도록 성령께 의탁 하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 위에 것을 깨닫는 이는 세상에 대해 죽은 것이고 하느님의 것이 됩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느님 아버지의 것이 되었습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 내가 세례로 죽은 것이 맞나? (골로2,12-14) 12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 세례 때 ‘끊어 버립니다’로 약속 드렸던, 사람의 전통이 구원의 헛된 것임을 깨닫는 그 부인, 죽음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그분의 지체로 살아가고 있는지, 하느님의 열심 그 사랑의 능력을 믿으며~~ 13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오늘 제 게 다시 묻습니다. (요한11,25-26) 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 주님! 제가 아닌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예수 부활 대축일 복음 (요한20,1-9)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7) 여기서 '수건'으로 번역된 '수다리온'(sudarion)은 요한 복음11장 44절에서 라자로가 죽음에서 깨어나 무덤에서 나올 때 얼굴에 감싸인 채 있던 수건과 동일한 단어인 것을 볼 때, 장례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수의의 일부분이다. 예수님의 몸을 쌌던 아마포와 얼굴(머리)를 쌌던 수건은 약간 떨어진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 '아마포'(flax)에 해당하는 '오토니아'(othonia)는 '고운 베' 또는 '세마포'(linen) 라고도 하는 천으로서 이집트(1열왕10,28)나 시리아(에제27,16)로부터 수입되어 팔레스티나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만남의 천막 재료(탈출26,1)나 사제의 의복 재료(탈출28,5~8)로 사용되었다. 이 아마포는 눈처럼 흰색을 가지고 있어서 장례용 수의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40절에는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몸을 감싸는 데 사용한 천으로 나온다. 이것은 비싼 천이었으므로 만일에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면, 이 아마포도 당연히 가져갔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 부활의 간접적 증거가 된다. 또한 '개켜져'로 번역된 '엔테튈리그메논'(entetylligmenon; wrapped; was folded up)의 원형 '엔튈릿소'(entyllisso)는 우리말 '개키다'가 갖는 '잘 포개접다'의 의미가 아니고, 둥그렇게 말려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즉 수건으로 머리와 턱을 동여맸던 상태 그대로 놓여 있던 것이다. 이런 정황을 근거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면서 부활하신 몸이 신비스런 방법을 통해 수의나 머리를 감싼 수건으로부터 저절로 빠져 나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수의를 입고 있는 상태에서 몸만 빠져 나간 것과 같은 모양이다. 그러니 만일에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면, 시신에서 아마포와 수건을 일일히 벗겨내거나, 벗겨냈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가지 않고 다시 개켜 놓은 뒤에 시신만 훔쳐 갔을리가 만무한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빈무덤 사화를 부활의 첫 메세지로 선포함으로써 역사의 예수님을 믿음의 그리스도, 생명의 주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이고 믿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옛날이여! '코로나19'로 인해 신자들과 함께하는 부활대축일 미사 전면중지 상태임. 2020. 04. 12. 04시 현재상황 전세계 확진자 1,764,309 사망자 107,806 19, 대한민국 확진자 10,480 사망자 211 1.미국 확진자 522,320 사망자 20,086 '코로나19'로 인한 부활대축일미사 정원의20%(거리두기 2단계) 2021. 04. 4. 06시 현재상황 전세계 확진자 131,332,958 사망자 2,857,573 대한민국 확진자 107,734 사망자 1,740 1. 미국 확진자 31,371,071 사망자 568,3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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