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에 쓴 글.
===================
문단을 향한 나의 토로
늦게 입문하여 문단의 현실을 살펴보니 이곳도 참 힘들다는 생각을 합니다. 문인이 된 이상 문단의 아픔은 바로 나의 아픔이기에 힘을 모아 바른 길을 찾아가 보자고 이 글을 씁니다.
문학인은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자신의 창작물을 발표할 공간이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신문, 잡지가 주된 공간인데 작가들의 수에 비하여 턱 없이 모자랍니다. 또 있는 잡지조차도 몇몇 잡지를 빼고는 돈을 주고 사보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게 현실입니다. 누군가가 문학을 향한 열정으로 잡지를 창간하고 자비를 들여 운영해봐야 남는 것은 빚더미일 것입니다. 궁여지책으로 잡지마다 신인 등용문을 넓히지 않을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문학인이 되는 길을 넓게 개방하는 대신 최소한의 판매부수를 확보함으로써 발표공간을 유지하려는 경영의도가 많이 깔려 있는 것이지요.
잡지가 유지되려면 최소한 한 번 발행에 500부 이상 팔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책이 잘 팔리지 않지요. 모순은 여기서 출발 합니다. 잡지를 발행할 때마다 시, 소설, 시조, 동화, 동시, 수필, 희곡, 평론의 각 장르에서 2인의 신인을 배출하고, 등단 신인상을 받는 분이 등단 기념으로 50부 정도만 책을 소비 시켜준다면 종합문예 전문지로서의 명맥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으로 만들어진 문예지가 전국 규모로 치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잡지가 계간지임으로 년 4회 발행됩니다. 한 해에 엄청난 문인들이 전국에서 배출 되겠지요. 많은 문인들의 배출은 더 많은 국민들에게 책을 읽게 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문학의 질적 저하라는 결과는 피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꼭 수필의 질적 저하만 늘 거론되는 이유가 뭐냐에 대해서는 수필인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그 배경 논리는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문학을 모르는 사람도 쓸 수 있는 글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라는 인식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 소재가 신변잡사인 탓이지요. 신변잡사를 소재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신변잡사로만 보이니까 모두가 똑 같아 보이는 만만함이 있지요. 수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만만히 보지 못할 경지가 수필인데도 다른 장르의 사람들은 물론 수필가 스스로도 수필을 만만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긴 소설을 쓰다가 머리를 식히면서 한 편, 시를 쓰다가 짧은 시어로써 다 담아내지 못한 자기 무능을 탓하지 않고 여기로 끄적끄적 한 편, 잡지사, 신문사 청탁 받아서 한편, 그렇게 쓰고는 수필이라 하기가 미안하니 산문이라고 이름 붙여서 써내면 시인, 소설가로서 쌓은 지명도에 덕을 입어 수필가들이 쓴 책보다 더 잘 읽히고 팔린다는 것이지요.
시는 은유와 상징과 비약이 원래부터 큰 장르이니 대충 써도 잘 모르지요. 논리성 자체가 결여된 것이니 따질 수도 없지요. 또 소설은 한 편을 쓰려면 원고지 2, 3백장 써야 되니 아무나 엄두를 못 내지요. 어지간한 배짱으로는 시비를 걸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수필은 체험을 써야 하니 사실과의 인과성이 결여되면 금방 비판의 화살이 날아오지요. 개인의 체험이란 게 웅대한 스케일이 있을 게 없지요. 생활 이야기가 대부분이니 수필이 동네북이 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평론가들이 다른 장르 문학의 질적 저하는 거론함이 없이 수필의 양적 팽창과 질적 저하만을 거론하는 것은 이와 같은 문학적 환경을 이용한 그들의 옹졸함과 비겁함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옹졸함이란 만만한 수필만 건드린다는 것이고, 비겁함이란 수필의 문학성만을 더 크게 거론함이 그들의 시와 소설에 대한 무지를 감추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 주변에 인간 정신을 타락시키는 매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소설도 상업주의에 젖어 감각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인간정신을 고양시키는 문학의 본질에 접근도 못한 소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뿜어내는 매연에 숨도 못 쉴 정도입니다.
문학에 대한 갈증은 모든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입니다. 그것은 영원을 동경하는 표현의 욕구인 때문이지요. 우리가 가수가 아니라도 열심히 노래를 부르듯 인간은 본질 적으로 자기표현의 욕구를 지니고 있지요.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라던가 울산 반구대 암각화 같은 것이 그것을 입증하고 원시샤머니즘의 모든 주술적인 무속행위가 다 표현의 욕구충족이지요.
문학의 대중화는 이런 표현의 욕구를 충족 시켜주는 아주 바람직한 일이며 수필의 대중화는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특히 수필의 대중화는 우리 사회를 정화시키는 커다란 힘이 있지요. 수필은 자기 고백적이지 않을 수 없으니 대중을 향해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면서 자기 세례를 하는 것이지요. 타 장르문학의 입장에서도 많은 수필가들이 종합문예지를 구독하니 수필의 덕으로 자연히 그들 장르가 많이 읽히는 효과를 얻기도 하지요. 수필의 대중화는 바람직한 현상이지 결코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수필이 대중화 되는 그 이면에는 자기 돈을 아낌없이 써가며 수필을 확산시키려 노력한 많은 숨은 수필인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클 것입니다. 오로지 수필전문지만을 고집하며 신인의 등단을 엄격히 하는 선배 수필인들의 고충이 얼마나 크겠는지요. 우리는 그분들의 지조와 정신을 존경해야 합니다. 더 많은 수필인을 배출하되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조 높은 잡지가 더 많이 팔리도록 힘을 보태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일천만 수필인을 배출 한다면 나라의 역사가 바뀔 것이고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사회 문제가 해결 될 것입니다.
시정의 비판처럼 주부도 한 편, 의사도 한 편, 농부도 한 편, 기술자도 한 편, 자기 삶에 어느 정도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편 정도의 수필을 쓸 수가 있지요. 틀린 말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수필의 문학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시인이 아니라도 시 한두 편 정도는 누구나 쓸 수가 있지요. 애초부터 문학성이란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잠재력이니까 그게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해야겠지요.
그러나 그 작업이 한두 편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십 편, 백 편이 되고, 이백 편, 삼백 편이 되어 개인 창작집으로 만들어 질 때가 되면 차원이 달라지지요.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폭포를 이루듯 사상이 되고 정신이 되지요. 그것을 읽어 내지 못하는 안목으로 문단의 주류라 칭하고 있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문학성이 높은 작품의 생산은 창작지원금을 개인에게 주느냐 잡지사에게 주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지조의 문제지요. 경영이 어렵더라도 좋은 글이 아니면 등단을 시키지 않겠다는 잡지사의 지조와 영혼을 울리는 글을 쓰겠다는 작가정신의 문제지요. 룸살롱 미스리처럼 공짜 팁은 받지 않겠다는 ‘깡아리’의 문제지 돈을 지원하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지요.
우리 문학의 현주소가 이러함에도 유독 수필의 문학성만을 거론하여 신춘문예에서 제외시키고 창작지원금 배분에서 빼버리는 행위는 수많은 수필인들에게 그나마 불러일으킨 글을 쓰려는 용기를 꺾어버리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니 즉시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글의 문학성 문제는 개개 작가의 작품으로써 판단되어야 할 사안이지 도매금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문단의 잘못된 이런 행태들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우리 수필가들은 문단으로부터 독립하고 수필의 발전을 위해 자주적인 길을 가야 한다고 감히 고언을 드리는 바입니다.
이 글은 누구를 비판하자고 쓴 글이 아니며 뒤늦게 문단에 발을 디딘 수필인으로서 올바른 문학인의 길을 걸어보자고 쓴 글임을 제현들께서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맑은 공기에서 숨을 쉬고 싶어서 수필로 왔습니다. 글의 소재는 탁한 것일 지라도 드러내고자 하는 정신은 한 줄기 청량한 바람이기를 소망 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문학가의 말이 아니고 경제학자가 한 말이지만 영원한 진실이고 더 문학적 입니다.(2009.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