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8. 05;30
약했던 눈발이 서서히 굵어진다.
지난 월요일부터 새벽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라 산에 가지 않았더니 온몸이 근질거리기도
하지만 오늘같이 눈 내리는 새벽엔 안 나갈 수가 없다.
잠시 굵어졌던 함박눈은 싸락눈으로 변하고 들고 나온 우산을 펼칠 사이도 없이 바람에
흩날린다.
05;50
4거리 횡단보도에 걸린 '구직 희망자' 모집을 안내하는 현수막이 눈바람에 펄럭이며
비명을 지른다.
수일 전 저 현수막을 보고 모집장소에 무작정 찾아갔다.
마침 그날이 마감이라 담당자는 나보다 먼저 116명이 접수했고, 면접일자는 휴대폰으로
통보를 해주겠다고 무덤덤하게 말한다.
내가 이 나이에 면접이라~~
면접이라는 단어 한마디에 타임머신을 타고 반세기 전으로 돌아간다.
내 인생에서 첫 번째 면접은 밍크비누와 말표세탁비누로 유명한 '천광유지'에 입사할 때이다.
당시 면접관이었던 박현준 상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는지 여부를 묻기에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고 하니 계단 개수를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54개'였다고 답을 하자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즉석에서 '합격'이라며 다음날부터
출근하라는 거다.
두 번째는 육군 37사단 증평 신병훈련소를 거쳐 21사단 66연대 보충대에 도착하자,
연대 군수과 급양관과 선임 부사관이 펜글씨를 써보라고 한다.
당시 군대 행정을 보려면 볼펜이 귀했던 시기라 먹지를 사용한 복사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잉크와 펜을 사용하여 문서와 장부를 작성할 때니 간부들로서는 펜글씨를 잘 쓰는
사병을 선호하였다.
군 제대 후 은사이신 고 심영구 선생님이 '조광피혁'을 추천하셨고,
연락을 늦게 받아 초평저수지에서 낚시를 하다 상경해 수염도 깍지 못한 채 면접을 보았다가
보기 좋게 낙방을 한다.
주택은행 면접은 이미 필기시험에 합격하였으니 요식행위에 불과했고,
그 후 책임자로, 관리자로, 지점장으로 근무를 하며 피면접자에서 면접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거래선, 직원 등 모든 사람에 대해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슬쩍 면접을 하는
입장이 된 거다.
주치의는 머리 수술 후 일을 하지 말라고 했다.
좋아하는 것만 하고, 좋은 거만 보라고 한 덕분에 12년간 전국의 산을 신나게 오르고,
당구도 배우고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를 정도로 놀았다.
그러나 저 현수막을 보는 순간 마음이 움직였다.
그동안 많이 놀았고 코로나 거리두기로 당구장에도 나갈 수 없으니 불현듯 일이 하고 싶어졌다.
면접일이 예정보다 10일 당겨졌다는 연락을 받고 11일 면접장에 들어간다.
예전 이력을 감출 수 없어 사실 그대로 썼는데, 면접관은 무엇을 물어보고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예상대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면접관은 내 스펙(Specification)이 화려하고 고급
인력이었는데 '허드렛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지난여름 오피스텔 분양현장에서 시간제 알바를 할 때 아는 척을 했다가 면박을 당했던 기억이
생각나 그냥 웃음으로 넘기고,
두 번째는 컴퓨터 사용 능력과 문서작성 등에 대해 질문을 한다.
먼저 면접을 본 사람들은 대개 10분 이상 시간이 걸렸는데 나는 불과 3분 이내로 짧게
단답형으로 끝났다.
면접장에서 나오니 내 뒤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세 명이 대기석에 앉아있다.
내가 괜히 청년의 일자리를 뺏으러 온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며 귀가를 한다.
합격자 발표 전 내 스펙이 제일 좋다며 전일제 또는 시간제 근무를 했으면 좋겠다는
최고 책임자의 전화를 받는다.
인생 3막 3장에 찾아온 기회라, 넘치지 않게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그냥 내 호흡대로
꾸준히 걸어가리라.
2020. 12. 18.
석천 흥만 졸필
첫댓글 수고 많았다. 석천선생
응원할게 열심히해봐.... 첫봉급타면 호떡1개 쏴.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