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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자화상 - 나혜석을 다시 읽으며
꽃이 피었다 한들 그대 위해 판 건 아냐 금지된 소망 앞에 슬픈 꽃말 피어난다고 세상에 맞춰 살라는 그런 말 하지 마 수없이 피고 지는 삶이 곧 사람인 걸 덧칠해도 더 불안한 세월은 마냥 붉고 한 시대 행간을 건너는 여자가 거기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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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화처럼
온종일 전화벨이 울리지 않았어 고요를 갉아먹는 벽시계 초침 소리 펼쳐둔 팔레트에는 긴 침묵이 묻어 있어
묵직한 황색 문이 열리면 좋을 텐데 먼지 낀 유리창으로 계시처럼 들어온 빛 오래된 질문지처럼 그냥 앉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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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콩꽃
낙태한 아이를 버린 분홍빛 고쟁이같이
소로도 못 나면 여자로 나는 거라고 하늘에 해 박은 날이면 칠성판 등에 지고 제 생을 자맥질하듯 저승까지 넘나들던, 어미 팔자 대물림 딸에게 이어질까 몸 풀고 사흘 만에 속죄하듯 물질 가던,
어머니 애간장 녹아 전설처럼 피어난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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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달팽이를 위하여
반지하 계단 아래 창문도 없는 방
무너지는 건 순간 꿈은 늘 외로워
홀로이 걸어가는 길 가도 가도 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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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화柳桃花
젖 곯아 밥 곯아 꽃들이 진다
팔월 염천에 눈 뜨고 진다
“함부로 손대지 마라” 허옇게 품은 독毒,
내리 사흘 배고파 한 살 여동생 울었다
영문 모르는 폭도 새끼 젖 한 모금 못 얻어
열한 살 내 품에 안겨 벌겋게 꽃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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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눈깨비 - 형무소 가는 길
눈물이 마르기 전 항구에 닿았다
풍문에 묻어오던 가벼운 목숨들
파르르 포승에 묶여 목포항에 내렸다
침 뱉으며 노려보는 시퍼런 눈빛들
빨갱이 새끼들! 삘갱이 섬껏들!
너덜한 갈옷 사이로 파고드는 저 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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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목구멍에 뜨신 밥 넣고 눈 붉히는 저 할매
겹겹 덧댄 포장지 꺼풀을 벗겨내면 쑥스런 알맹이들이 얼굴 아니 붉히던가 부풀려진 밥덩이 조찬 되고 오찬 되고 만찬이 되는 순간 신분 상승하는 건가 나리님들 조찬 오찬 만찬까지 드실 때 그 밥에 눈치코치 섞어 아등바등 비벼 먹는데
고장 난 벽시계 보며 시계 밥도 안 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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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꽃의 존재론
1. 겨울 산 초입에 깡마른 산수국
누런 꽃 대궁에 나풀나풀 흰 나비
아마도 저 웃음 뒤엔 큰 슬픔도 있겠지
2. 배갯동서 들이고 눈물로 새던 밤 알알이 예쁜 사랑 꿈꾸다가 엿보다가 불임의 슬픈 유전자 비소 뒤에 숨기고
살아야 강한 거라 이 악물고 걸어온 길 사무쳐 그리운 이 가슴에 품고서 하늘이 허락한 길로 꽃인 듯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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