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4일째 4월 15일 포항 호미곶 아침 일출을 바라보며 호미곶 해안단구(海岸段丘)와
새 천년의 빛, 연오랑과 세오녀상, 상생의 손을 살피고, 국립경주박물관의 특별전
'조선 선비. 고도를 노래하다'를 관람하고 경주박물관 전시실을 돌아 보고, 경주시 서악동
태종무열왕릉과 김유신사당,숭무전을 관람하고 왔다.
호미곶 해안단구(Homigot Coastal Terrace)
상생(相生)의 손
작가 : 김승국(영남대학교 조경대학 교수)
재질 : 황동
크기 : 오른손(바다쪽) 높이 8m 길이 4m 넓이 4m, 왼손(광장쪽) 높이 3m 길이 6m 넓이 4m
제작년도 :1999년 12월
동쪽바다에 돌출된 오른손은 손가락을 넓고 강하게 펼침으로서 햇살의 이미지를 양식적인
방법으로 상징화하고 광장에 안정되게 누인 왼손은 햇살을 받아 포용하고 어우러 지면서
오른손과 화합하는 새천년의 이미지를 형상화 하고 있으며, 오른손의 만질 수 없는 위치와
왼손의 만질 수 있는 물질성의 대비로 양자의 관계성과 음양의 화합을 바탕으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 새천년을 지켜갈 강한 이미지를 표현 하였습니다.
선진일류도시 포항건설-대구은행이 함께 합니다.
새 천년의 빛
영일만 호미곶은 한반도의 최동단에 위치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돋는 곳입니다.
여기 이 [영원의 햇불] 은 새 천년이 시작된 2000년 1월1일 이곳 영일만 호미곶의
첫 햇빛으로 채화하였습니다. 이 불은 변산반도에서 채화한 지난 천년의 마지막 일몰 불과
남태평양의 피지섬에서 채화한 새 천년의 일출 불과 함께 조국의 평화 통일과 사해 동포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영원히 꺼지지 않은 민족의 불로 존치할 것입니다.
조형물의 형태는 북은 천년을 나타내는 아랫부분의 사각뿔과 새 천년을 상징하는 윗부분의
역사각뿔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이 영원과 화합을 뜻하는 원형의 고리로 연결됨으로서
지난 천년과 새 천년의 연속적인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햇불의 화반(火盤)은
이와 같은 새 천년의 빛과 정신을 사방으로 확산하는 태양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광장의 왼 손과 동쪽바다의 오른 손은 전쟁과 갈등과 배타적인 지난 천년의 [한손의 시대]
를 청산하고 평화와 희망과 번영으로 온 인류가 화해하고 서로 돕고 함께 사는 새 천년의
[두 손의 정신] 을 형상화한 섯입니다.
조형물은 300만 경북도민과 52만 포항시민의 여망을 담아 이의근 경북지사와 정장식
포항시장의 제안으로 조각가 영남대학교 김승국 교수가 제작하였고 이어령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의 적극적인 지원과 대구은행의 협찬을 바아 이루어졌습니다. 2000년 1월1일 아침
연오랑 세오녀상
연오랑 세오녀(延烏郞細烏女) 기록은 삼국유사에 수록된 설화로 단군신화가 한국문화의
뿌리를 형성했듯이 오랜 세월동안 포항문화의 큰 물줄기를 이뤄왔다. 연오랑세오녀 부부는
신라 초기 영일(迎日) 지역의 소국 근기국(勤耆國)의 인물로 신라 8대 아달라왕 4년(157)에
일본으로 건너가 길쌈과 제철기술 등 선진문화를 전파하고 그 곳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에서 일월정(日月精)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세오녀가 짠 비단을 재물로 삼아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이를 다시 회복했다는 이야기는 이 고장이 예로부터 일월숭배와 제천의식의
국가행사처였음을 일러준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 온 영일의 해맞이는 육당 최남선 등에 의해 조선십경(朝鮮十景)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으며, 오늘날 포항의 호미곶(虎尾串)이 한국에서 가장 해가 먼저 뜨는
곳이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새 즈믄해 1월1일 한민족해맞이축전의 국가행사장으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한국 일월문화의 상징인 연오랑세오녀상을 건립하는 일은 포항시민의 오랜 영원이었다.
이에 1999년 포항시 승격 50주년을 맞아 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되고, 향토기업인이자 학교법인
영암학원을 설립한 황대봉(黃大鳳) 이사장이 사재를 출연하여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오늘 연오랑세오녀상을 2000년 해맞이기념광장에 세움은 첨단과학문화도시를 자랑하는 포항의
도약은 물론 한국의 번영과 세계의 평화를 구현하려는 포항인의 기상을 내외에 천명하고자
함이라.
아, 신비롭고 찬란한 연오랑세오녀상이여! 해맞이의 성지(聖地)인 이 땅에서 웅비하는
한민족의 나아갈 길을 밝히는 영원한 빛이 되소서.
국립 경주박물관 정문
성덕대왕 신종(聖德大王神鐘, 혹은 봉덕사종, 에밀레종)
국보 제29호, 통일신라 771년, 높이 375cm, 종 입구 지름, 227cm
우리나라 범종 중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답다
주종 대박사 박대나마 기념비(鑄鍾 大博士 朴大奈麻 記念碑)
신라 성덕대왕 신종(神鍾)은 혜공왕 7년(771)에 이룩된 통일신라 문화의 기념비적 보배다.
종명(鍾銘)의 몇 구절이 이 종의 주성(鑄成) 내력과 그 신묘함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이 종은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대왕을 위하여 구리 12만근으로 1장(丈) 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에 그 아들 혜공왕은 어머니 김씨 만월부인의 도움으로
완공하였다. 사람과 신의 힘을 합하여 만들었으니 그 형체는 산악과 같이 위엄이 있고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꽃다운 인연을 맺어 복을 받는다 하였다.
실로 이 종은 조형의 아름다움이나 소리의 장중함에 있어 인류가 만든 범종(梵鍾) 중에
가장 으뜸이라 하겠다. 이 신묘한 종을 만든 신공(神工)의 이름이 종명에 새겨있었지만
천 수백년 오랜 세월이 흐름에 그 이름을 확연히 읽을 수가 없음이 애석하다.
다만 네 사람의 종장(鍾匠)이 참여하였는데 그 우두머리인 주종대박사(鑄鍾大博士)의
성씨는 박(朴)이요 그의 벼슬은 대나마(大奈麻,신라 17관등의 10관등)였다.
우리는 오늘 이 위대한 선현의 높은 예술적 경지와 뛰어난 과학 기술을 기리기 위하여
성덕대왕 신종을 만든 박대나마의 위대한 공적을 이 돌에 새겨 후일에 전하고자 한다.
1987년 경주시에서 세우고 글은 문화재위원 문학박사 황수영(黃壽永)이 짓고
글씨는 정수암(鄭壽岩)이 쓰다.
발걸이는 말을 탈 때 딛고 오르기에 편하고, 달릴 때 안정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한
말갖춤의 하나입니다. 표면에는 검은 옻칠이 칠해졌습니다.
발걸이는 발 딛는 부분의 형태에 따라 고리형인 윤등(輪鐙)과 주머니형인 호등(壺鐙)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발걸이는 주머니형에 해당합니다. 발 앞부분을 넣는 덮개는 신발을
반쯤 자른 듯한 모양이고, 덮개의 표면에는 구름, 꽃, 빗금 등의 무늬가 베풀어졌습니다.
이러한 형태와 무늬의 발걸이는 유례가 없으며, 장식성도 매우 뛰어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망새(望瓦)
경주 황룡사 터 출토(皇龍寺址出土), 신라 7세기
이 기와는 용마루 끝에 올려지는 것으로, 흔히 '치미鴟尾'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치미'라는 용어는 그 모양이 올빼미 꼬리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어서
이 기와의 쓰임새나 성격을 잘 대변하는 명칭은 아닙니다. 망새는 마루 끝에
장식하는 기와를 부르는 말이므로 적절한 용어리 여겨집니다.
아시다시피 목조건축물의 가장 무서운 적은 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옛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예방책 가운데 하나가
물의 상징물을 건물에 두는 것이었습니다.이러한 상징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용용'이었습니다. 용은 옛적에 '미르'라 불렀는데, '미르'는 '물'의 또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용마루 끝 가장 높은 곳에 달린 이 기와는 화마火魔를 막는
능력이 있는 용의 상징물이 아니였을까요?
이 망새는 황룡사 강당 터 근처에서 발견된 조각들을 복원한 것인데, 높이가
무려 182cm에 이릅니다. 그 크기가 매우 커서 만들 때나 구울 때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인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옆면과 뒷면에는 연꽃무늬와
얼굴무늬를 별도로 만들어 붙였는데, 얼굴무늬에는 수염을 새긴 것도 있어
남녀를 구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 남자 얼굴은 몇개나 될까요?
한번 세어보세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올리고(반가半跏) 오른손은 턱을 괸채 고요히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상(사유상思惟像)은 원래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 왕자였을 때
인생의 번뇌로 깊이 사색하는 젊은 싯다르타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가사유상이 지닌 특색은 사색하는 부처님의 깊고 맑은 정신적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가사유상은 그 발생이나 전개과정에 있어서도 다른 불상과는
구별됩니다.
앞을 바라보아 대중과 직접 관계를 갖기 마련인 일반 신상神像과는 달리,
반가사유상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깊이 사유하는 듯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다른 불보살佛菩薩과 거의 같은 때 발생한 반가사유상은
여래상如來像의 협시보살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나무 아래에서 사유하는 모습의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으로 나타났다가
독립된 상으로 바뀌어 우리나라에 전해졌습니다.
우리나라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 6세기부터 약 백년동안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는데,
대부분 독립된 보살상 형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중국에는 높이 20~30cm의 흙이나
돌로 만든 예가 많은데 비해, 우리나라는 1m에 가까운 대형의 반가사유상도 있으며
20~30cm의 소형 작품도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라 지역에서는 경주 단석산의 신선사 마애조상군 가운데에 반가사유상이 있으며,
경북 봉화와 경주 송화산에서 머리와 상반신이 깨져 없어진 대형의 석조반가사유상이
출토되어 당시 신라에서 반가사유상의 제작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슴걸이(胸飾)
6세기, 경주 천마총(天馬塚), 보물 619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신라는 대가야의 영역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중요한 길목에 있는 비화가야非火伽耶
(지금의 창녕)를 진흥왕 16년(555)에 병합하였습니다. 561년 진흥왕은 여러 신료들을
데리고 창녕을 순시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562년 진흥왕은 대가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습니다.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대부분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나 후반부는 비교적 선명합니다.
내용은 주로 진흥왕이 비화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 왕의 통치이념 및
포부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후반부에는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는 당시의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비문에는 대등大等, 사방군주四方軍主, 주행사대등州行使大等, 비자벌정조인
比子伐亭調人, 촌주村主에 관한 정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중앙 관리들은 대등이고, 지방의 주州에 파견된 지방관은 군주, 행사대등
등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지방행정체제가 주.군.촌으로 이루어졌으며,
지방관으로 군주軍主, 당주幢主, 도사道使가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화3년' 명 금동사리기(仲和三年銘金銅舍利器)
9세기(883년), 경주 전 황룡사터(慶州 傳 皇龍寺址)
김유신을 위해 조성한 탑을 헌강왕 9년(883)에 새로 고치면서 소탑 77기와
진언眞言(불교의 비밀 주문) 77벌을 봉안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문무왕비편(文武王碑片)
통일신라(682년 또는 687년), 경주 동부동東部洞
조선시대 후기, 경주에서 문무왕비편이 발견된 사실이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문집에 실려 있다. 이의 탑본이 청나라 유희해劉喜海에게
전해져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수록되었다. 그 후, 문무왕비의 하단 부분은
1961년, 상단 부분은 2009년 경주 동부동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문무왕비의
받침돌은 낭산 근처 사천왕사지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숭무전(崇武殿)
소재지 : 경주시 충효동 314
숭무전(崇武殿)은 삼국통일의 위업(偉業)을 완성한 흥무대왕(興武大王) 신라 김유신 장군
(新羅 金庾信 將軍)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이다.
김유신은 가야국(伽耶國)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3세손으로 신라 진평왕 17년(595)
만노군(萬弩郡) 태수 김서현(太守 金舒玄)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군은 15세에 화랑(花郞)이
되고 진평왕 51년(629) 낭비성(娘臂城)에서 고구려군에 처음 승리한 이후 백제, 고구려군과
여러차례 싸워 큰 공을 세웠다. 장군은 654년에 김춘추(金春秋)를 태종무열왕으로
옹립(擁立)하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 백제를 문무왕(文武王) 8년(668)에 고구려를 통합
하고 당군(唐軍)까지 북쪽으로 내쫓아 삼국을 통일하였다.
이에 조정(朝廷)에서는 장군에게 신라 최고의 관직인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제수하였다.
장군이 문무왕 13년(673) 79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금산원(金山原)에 장례지내고 그 뒤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
1992년에 전각(殿閣)을, 1993년에 부속건물을 세워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김유신장군 사당의 삼문 -송화문(松花門)
이것으로 부부여행기(4)- 호미곶(호미관), 경주박물관, 태종무열왕릉을 마치며
제5편 순천만 국가정원, 순천만습지를 끝으로 4박5일간의 여행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사진과 글
권진순
2018년 5월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