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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 심보
마가복음 12:1~12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던 호재를 만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권을 사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행운이 자기 것이 되기를 원하는 때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소원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중동 아랍 지역에서 전해 내려온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의 이야기에서도 주인공 알리바바는 가난한 나무꾼으로, 산중에서 나무를 하다가 우연히 40인의 도적이 보물을 감춘 동굴을 발견하게 됩니다. 알리바바는 그 동굴에서 보물을 얻어서 큰 부자가 되었다는 줄거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적 홍길동과 임꺽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을 쌓아둔 관리와 부자의 곳간을 도둑질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불의한 사람의 것을 도둑질하여 선하게 사용하면 괜찮다고 여길지 몰라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원리는 모든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뤄져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통과하는 것을 방해하였던 시혼 땅에 대하여 신 2:3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시혼과 그의 땅을 네게 넘기노니 너는 이제부터 그의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삼으라 하시더니”라고 하였고 신 2:35 “다만 그 가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라고 하였습니다. 내 임의로 내 마음에 선한 것이라 여겨 탈취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물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지음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이 경계를 허무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참 신앙이란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로서 내가 그분을 통하여 생명이 주어졌고,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의 영혼을 노략질하는 마귀의 특징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마귀가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려는 중요한 전략 중의 하나는 도둑놈의 심보를 불어넣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마음에서 마귀에게 사로잡힌 도둑의 근성을 지닌 악한 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비유에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을 새로 내어주었기에 그에 대한 대가로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종을 보냈습니다. 첫 번째 종을 보냈는데 이들 악한 농부들은 그 종을 심히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주인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농부들이 자기 종인 줄 모르고 그랬을 것으로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외경 도마복음에서는 종이 주인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주인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마 그들이 너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은 두 번째 종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농부들은 두 번째 종에 대해서는 첫 번째 종보다 더 심하게 취급합니다. 머리를 때리고 모욕을 주었습니다. 공공연히 주인을 무시하고 대적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그 땅의 주인이 아니라 주인으로부터 땅을 임대받아 세를 내고 관리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마치 그들은 자신들이 그 땅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보통 팔레스타인에서는 포도 수확하기까지 5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당시의 유대 법에는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서 4년 동안 소작료를 내지 않고 포도원을 경작하면 소유권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이 종들을 보내다가 결국은 나타났기 때문에 소유권을 가질 수 있는 유대 법이 적용될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 종은 급기야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어서 주인은 다른 많은 종을 보냈는데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이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주인은 참지 못하고 분노를 폭발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성경은 주인의 마음에 대한 아무런 감정 표현이 없습니다. 아마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들이나 제자들이 더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 세상에 그런 배은망덕한 놈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놈들을 가만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인의 태도는 여전히 의외입니다. 주인은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로 합니다. 6절입니다.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그런데 그 악한 농부들은 그 아들마저 죽이고 맙니다.
우리가 이 비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주인의 태도입니다. 우리 같으면 한 번 종을 보냈을 때 듣지 않으면 바로 조처를 했을 것입니다. 군대를 보내거나 그들을 당국에 고발해서 포도원 운영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세 번 네 번 참으며 계속해서 종들을 보냅니다. 급기야 자기 아들을 보내기까지 합니다. 이 주인은 농부들의 악함을 모르는 무지하고 순진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주인은 바로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속이고 거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고 신뢰하는 사랑입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하며 그들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은혜와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막 12: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소출 얼마’ ‘some of the fruit’입니다. 이것은 소작인이 감당해야 할 최소의 양입니다.
유대 법에 따르면,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에서 반은 주인이 가지고 반은 소작인이 가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50:50으로 계약을 하는 것이 그 당시 일반적인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소출 얼마’ 만 받겠다고 계약을 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인식하고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를 분명하게 선을 긋는 것이 마땅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베풀어 주는 호의를 내팽개치고 소유를 내 것으로 가지려고 하는 악한 도둑놈의 심보가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나를 피조물로 분명하게 설정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죄를 짓도록 유도한 마귀의 속성은 이런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마치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유혹하여 넘어트렸습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도둑놈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사람을 훔쳐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극악한 도둑놈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도둑인 마귀에게 마음을 빼앗기면 마귀의 속성인 도둑놈의 심보가 내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지속하면 세상에서 행복을 빼앗기고 예배를 잃어버리며 재물로 인하여 얻어지는 행복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도둑놈의 심보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도둑놈의 심보를 돌이키므로 불행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세계를 누리고 안식에 들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사람의 마음을 훔쳐 어둠의 환경에서 억눌리고 신음하도록 하였고 하나님께 원망하도록 하였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도둑놈의 심보에서 나온 것입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였던 세례 요한은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하였고, 예수님은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때’ 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고 우리에게 이기는 능력을 성령으로 베풀어 주셨습니다. 요일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분으로 성령께서 그 능력을 내게 주심을 믿을 때 우리는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난 도둑놈 심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도둑은 그 양심에 찔림으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늘 곤고하고 괴롭습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비결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돌이켜 주님께 마음을 드리고 주님께 나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럴 때 내 안에 천국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육신의 것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됨으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임할 때 우리는 세상을 다스릴 수 있고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예배를 회복하므로 도둑놈의 심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히면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외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부인하고 내 인생은 나의 의지에 의하여 움직인다고 생각하며 내가 왕 노릇을 하는 어리석음을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 맘에 자리 잡고 있지 않기에 예배를 등한히 여깁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내게 시간과 생명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인이 요구하는 것은 소출의 얼마를 요구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배의 시간을 내게 주어진 전체의 시간을 드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정해진 시간에 주님이 지정하신 장소에 나와 경배하고 찬양 드릴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가 회복되므로 내게 주어진 시간이 복되고 알차게 보낼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므로 나의 생명이 보배롭고 건강하게 보존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도둑놈의 심보에서 벗어나야 재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신 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성취할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재물을 얻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다스릴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즐거워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재물은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그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도둑놈의 심보는 내 노력으로 벌어들인 것이니 재물이 내 소유라고 주장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누가복음 12장에 등장하는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그해 밭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엄청난 수확을 하였습니다. 그가 준비한 곳간이 부족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지혜를 짜내어 기존의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싸놓고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 사람이 바로 도둑놈의 심보를 지닌 사람입니다. 내가 얻은 수확은 모두 내 것이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 것으로 내 마음대로 사용하여 즐거움을 얻겠다는 도둑놈의 심보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부자를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께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므로 하나님의 나의 창조주가 되시고 나의 소득의 주관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말라기에서는 십일조에 대하여 언급할 때 이를 드리지 않은 사람을 가리켜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였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늘에 속한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재물의 풍성함만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유와 행복 그리고 기쁨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로채는 것이 탐심입니다. 이것은 우상 숭배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극도로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에게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포도원의 소유주가 일할 기회와 소출할 수 있는 기쁨을 주신 것은 분명 축복이요 기쁨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렇게 배려한 주인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를 거부하고 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시니 그분을 경배하고 섬기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도둑놈의 심보입니다.
이 마음에서 벗어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가 회복되고 재물이 온전하여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