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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26일(사순절 첫 번째 주일)
요한복음 6:22-40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우리가 잘 아는 기적 가운데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굶주려 있는 오천 명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셨다는 내용이지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니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음식을 먹었을 겁니다.
또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이 기적이 얼마나 인상 깊었던지 사복음서의 저자들은 이 사건을 모두 기록해 놓았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가운데 잘 알려진 것이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에 대한 기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밤 중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시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놀랍니다.
그때 제자 중 하나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물 위를 걷다가 그만 바람과 풍랑을 보고 물에 빠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기적이 얼마나 인상이 깊었던지 마태, 마가, 요한복음서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이 두 사건이 한 세트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고, 곧바로 물 위를 걷는 기적이 뒤따라 나옵니다.
자! 이 두 가지 기적을 접한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사복음서 중에 오직 요한복음에만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의 반응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는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요 6:14-15).
그뿐만이 아니지요? 그 이튿날, 어제의 기적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또다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날 요량으로 어제 기적이 행해졌던 장소까지 찾아갔습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기 위해 배를 타고 멀리 가버나움까지 갔습니다. 그들은 운 좋게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반가운 목소리로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라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갑게 인사를 전하는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절).”
적당히 미소도 지으시고, 사람들 등도 두드려주시면 좋으련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심리적 거리감이나 논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의 논쟁이 기록된 책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 간의 논쟁이 본격화된 것은 요한복음 5장부터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0장에 가서는 이 논쟁이 최고점에 다다릅니다.
논쟁이 최고점에 다다른 10장 이후부터 예수께서는 영광된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묵묵히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최후만찬과 고별설교, 예수님의 고별기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부활 이후의 행적, 이것이 요한복음 후반부의 내용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안식일에 이루어졌다며 꼬투리를 잡아서 예수님과 안식일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안식일을 범한 죄 외에 신성모독죄를 추가시켰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 6장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라고 하는 보잘것 없는 음식재료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셨습니다.
곧이어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심으로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두 기적은 과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 번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 위를 걷는 기적이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나요?
여러분은 예수님이 그 자신의 주장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여러분의 참된 구원자가 되심을 믿고 계십니까? 만약 그렇게 믿고 있다면 여러분은 성경이 주장하는 메시지를 잘 붙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떡을 찾습니다. 여기서 ‘떡’이라고 하는 것은 떡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모든 현실적인 필요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떡이라는 개념에는 물질과 출세와 건강과 행복을 포함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한 번 떡의 문제에 집착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떡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우미 정도로 인식하더라는 거지요.
물론 우리가 처음에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대부분 그런 동기를 가지고 나옵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거창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인류 복음화를 위해 예수를 믿겠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처음에는 당장 필요한 떡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C. S. 루이스 같은 분은 “하나님은 처음 믿은 초신자에게는 굉장히 관용하시고 너그러우신 것 같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처음 믿은 신자들이 기도하면 하나님은 비교적 신속하게, 그것도 기도의 응답이 눈에 보이도록 신기하게 응답해 주세요.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를 잘 했다고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신앙이 성숙해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떡의 문제가 급급해서 교회에 나왔다면, 나중에는 그 떡을 주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더욱 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처음에는 육신의 떡을 구할 수 있지만, 신앙의 연륜이 더욱 깊어갈수록 떡 자체보다 그 떡을 주시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썩어질 육신의 양식만을 구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그 마음 안에는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또 다른 우상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부어 만들었던 사건을 잘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출애굽기 3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 고리를 아론에게 가져오면서 무엇이라고 요구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출 32:23).”
사람들의 종교심은 항상 이런 식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베풀어 줄 신을 요구합니다. 인생에 도움도 되고, 필요할 때 기적도 베풀어 주는 신 말입니다. 만약 그런 신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라도 그것에게 위안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이기적인 종교심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또 우리가 그 분을 어떻게 알 수 있고,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사랑이라는 동기아래 나를 위해, 나를 돕고, 인도할 신을 찾을 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 정도로 여겼습니다. 언제든지 기적적인 능력으로 현실적인 필요들을 채워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이런 분만 옆에 있다면 정말 이 세상에 그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단호하게, 아주 단호하게 이러한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자신을 붙들어서 그들의 임금을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아무도 모르게 홀로 산으로 몸을 피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떡’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니까 혹시 이 가운데 “그래 목사님은 떡 없이도 살 수 있나 봅시다!”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치열한지, 또 이 세상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지를 몰라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떡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수고하고 애쓰는 이유도 사실 알고 보면 다 ‘떡의 문제’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현실적으로 썩을 양식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수고가 필요합니까? 새벽부터 일어나 밤늦게까지 수고해야 썩을 양식이라도 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느 날 도서관을 방문해서 책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도서관에 꽂힌 수많은 책 제목들 중에 다음과 같은 책 제목들이 눈에 띠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직장에서 성공하는 방법, 입사 3년 안에 꼭 알아야 할 75가지, 좋아하는 일 하면서 먹고 살기, 잘 나가는 직장인은 1%가 다르다. 지금 힘들다면 잘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 성공의 조건, 일을 했으면 성과를 내라, 목표에 집중하라,
적게 일하고 많이 거둬라, 나는 어떻게 돈을 벌었는가, 소리 없는 전쟁, 여성이 직장에서 성공하는 지혜,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 여자 20대 10년 후 명함을 준비하라, 밑천 없이도 억만장자가 될 수 있다.”
계속할까요? 이 수 많은 책들이 다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일까요? “떡이 중요하다. 떡이 중요해…” 그런 말들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떡의 문제가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우리 주님은 여러분의 관심이 언제까지나 떡의 문제에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자칫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떡의 문제를 위해 예수님을 좇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은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육신의 떡만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다니지 말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반응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저는 사람들의 이러한 질문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인간의 공로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도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 곤 합니다. 그 때 저는 사람들에게 천국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돈이나, 공로나, 자격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많은 분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그 귀한 걸 어떻게 공짜로 받아요. 뭔가 내가 대가를 지불해야지 천국을 어떻게 공짜로 갑니까?” 사람들 속에는 뭔가 깊은 공로의식이 들어 있습니다.
심지어 제가 만났던 어떤 분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선생님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다고 말하자 정색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니, 내가 지은 죄는 내가 갚아야지 왜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갚아? 그건 말도 안 될 노릇이지.”
이런 말을 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남보다 착하고 양심적으로 인생을 사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느냐?”라고 식의 공로의식이 우리에게서 뽑히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2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력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틀린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하지 말고 그냥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토록 믿음이 중요합니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그에 대한 대답이 35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 다 함께 35절을 찾아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만이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의 떡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 떡을 먹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만족과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떡은 우리의 일이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과 공로를 통해서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님이 구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부인하는 셈이 되고 맙니다.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공로를 힘입어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참된 믿음은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행함의 열매를 거두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일을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영적인 원리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먹는다”라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대하고 있는 요한복음 6장에는 유난히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먼저는 ‘오병이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영생을 얻는 양식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생명의 떡’ 이야기가 나오고, 후반부에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성만찬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두 하나같이 먹는 이야기입니다.
왜 예수님이 믿음을 소개하시면서 ‘먹는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사람은 반드시 먹어야 삽니다. 먹는 문제는 사람의 생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사람은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믿음은 먹는 것에 비유됩니다. 음식은 본래 나와는 전혀 다른 물질입니다. 그런데 이 음식이 내 몸에 들어와 소화가 되면 이 음식은 나와 둘이 아니라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생명적 연합을 이룹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십니다. “내가 그분을 믿는다.”라는 것은 예수님과 영적인 연합을 이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영적인 연합을 이루면 믿은 것과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별개의 사안이 아닙니다. 나는 생명의 떡을 받아들였고, 그 생명의 떡이 내 안에서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예수님과 영적인 연합을 이룬 사람은 먼저 자신의 뜻을 내려놓습니다. 예수님이 38절 이하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믿음으로 예수님과 영적인 연합을 이룬 사람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 안에서 행하시는 이의 능력을 따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39-40절에는 하나님의 뜻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하나님의 뜻은 한 영혼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이 이 세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루하루 무엇을 구하며 살아갑니까? 혹시 아직도 썩을 양식을 구하며, 그것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떡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만 인생의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떡을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은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일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새로운 인생 가치관으로 변화되는 일입니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내리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