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7월30일(목)■
(빌립보서 3장)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묵상/빌 3:4-9)
◆ 육체를 신뢰하는 자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4)
사도 바울은 3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에 자기가 육체적으로 신뢰할만한 것을 열거한 것은 자신이 그것을 배설물로 버렸음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허세를 부리고,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원조인 행세를 하면서 이방인으로 하여금 할례를 받아 유대인으로 귀화시키려고 했다. 그것을 보면서 바울이 그들에게 도전한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이상의 모든 조건을 갖춘 자다. 할례 받은 자, 정통 이스라엘인, 순혈 히브리인, 바리새인,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오늘날에는 바리새인이 위선자의 대명사처럼 쓰이지만,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에게 존경받고 추앙받는 랍비들이었고 가혹할 정도로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그 자부심이 남달랐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과거에 자부심을 가졌던 그런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그 배설물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유대인들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는가?
육체를 신뢰하는 것은 세상의 원리다. 명문대 출신, 높은 지위, 잘 생긴 외모, 좋은 가문, 많은 재산 등이 모두 자랑거리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림없다. 그런 것은 배설물로 취급되어야 한다. 만일 얼굴이 예쁘다고 영적인 사람으로 간주된다면 그 교회가 정상적이겠는가? 말도 안된다. 마찬가지로 세상적인 신분이 교회 내에서 높은 지위를 얻게 한다면 그 공동체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도대체 세상 박사학위가 영적인 것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전혀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 학위로 대접받고자 하는 생각 자체가 불법이고 어리석은 것이다. 이 원리는 신학교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신학교 교육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많은 유익을 줄 수 있지만, 신학교를 나온 졸업장이 그가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 졸업장으로 성도들에게 군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지극히 육체적인 것이다.
◆ 가장 고상한 것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8)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허망한 것을 쫓았나를 깨달았다. 자신이 애써 이룩한 율법적인 공로와 열심히 갈고 닦은 자기 의의 정체가 결국 '자기 자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의라는 것은 겉으로는 대단해 보이지만 그 이면은 더러운 걸레조각에 불과하다.
윤리 도덕을 입버릇처럼 설교하고, 모든 사람에게 청렴하다는 것을 칭찬받아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다. 욥같이 대단히 순결한 자도 그 안에 뿌리 박혀있는 '자만심'은 친구도, 본인 자신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후에야 욥은 재 가운데서 회개할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진정한 의를 얻을 수 있을까?
성도들에게 율법 준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도 못 날면서 열심히 노력해서 독수리처럼 날아야 한다고 떠들어 대는 닭과 같다. 노력해서 되는 것이 있고,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 인간은 노력해서 의를 얻으면, 반드시 노력한 만큼 자랑하게 되어있다. 한줌도 안되는 의를 가지고 그들이 생색내는 것은 역겨운 것이다. 바리새인이 기도하러 올라가서 한 기도 내용을 보라. "나는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눅 18:11,12) 온통 자기 자랑과 남을 멸시하는 내용이다.
우리 주변에는 기독교인들이 세속화된 것을 한탄하면서 그 처방책으로 율법을 제시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다. 언뜻 들으면 그들의 말이 너무나 옳아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다. 사실 나는 그들이 거듭났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들은 믿음이란 사도신경을 외우고 교리에 지적으로 동의한 정도라고 생각한다.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현실성없는 덕담 정도로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늘 '믿음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을 옮겨본 사람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본 자들은 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세계를 여는 지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거룩과 의로운 삶으로 갈 수 있다는 이 놀라운 비밀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고전 1:30). 사도 바울은 집사가 되는 최소한의 자격을 이러한 '믿음의 비밀'(딤전 3:9)을 가진 자일 것을 권면했다. 오늘날 교회들이 몇 년만 출석하면 자동으로 집사를 주는 이런 시스템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놀라운 세계를 보았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진정한 의와 사랑과 능력이 발생함을 체험했다. 예수님만 있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고, 그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예수님이었고, 그를 아는 지식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안 만큼만 성화될 수 있다. 우리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면 죄를 안지으려고 몸부림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죄가 혐오스러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더 큰 욕망이 육체의 작은 욕망을 삼켜버린다(갈 5:16-18).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가 평생 추구해야 할 공부 제목이다. 성경을 읽는 목적도, 기도를 하는 목적도, 우리가 형제들과 교제하는 목적도 첫번째가 더욱 주님을 알고자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용서와 용납을 배우게 되며, 기도가 능력있게 된다.
주 예수님, 제가 주님을 더욱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얼굴 빛을 제게 비추어 주셔서,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