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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79
11월14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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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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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zJ0PmB9h4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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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은총을 청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복음 18장 6~8절)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의 결론 말씀을 묵상하다가, 저희 살레시오회 복자(福者) 아르헨티나 출신 아르테미데 자티(Artemide Zatti) 수사님(1880~1951)의 생애가 떠올랐습니다.
자티 수사님의 성소 여정을 참으로 험난했습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늦깎이 성소자였습니다. 스무살 되던해 살레시오회에 입회하게 되는데, 공동체 원장은 그에게 작은 소임 하나를 맡깁니다. 폐결핵을 앓고 있던 한 젊은 사제를 간호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결핵이 치명적이고 감염 위험이 높던 병이었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몸을 사려가면서 간병을 했었으면 좋으련만, 뭐든 적당히 하는 법을 몰랐던 자티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인도 결핵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자티는 비에드마에 있는 산호세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사제이자 의사인 에바리스토 가로네 신부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당시 자티는 기도를 열심히 바쳤는데, 그냥 기도가 아니라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친 기도, 목숨을 건 기도를 바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모님, 부디 제 병을 낳게 도와주십시오. 만일 치유의 은총이 제게 주어진다면, 제 남은 생애를 가장 가련한 환우들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던지 자티는 기적적으로 치유가 됩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오랜 세월 꿈꾸어왔던 사제의 길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탈출구가 가로막혀 울고 앉아있는 우리에게 슬그머니 다가오시는 분, 따뜻이 우리의 등을 두드려주시고, 힘내라 속삭이시면서, 또 다른 비상구 하나를 살짝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제의 길이 가로막힌 자티에게 주님께서는 평수사로서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자티는 우선 죽을 목숨이었던 자신을 병에서 구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목표를 세웠습니다. 비에드마 산호세 병원에서 가장 가난한 환우들의 자상한 목자가 되는 목표를 말입니다.
환우들과 고통 당하는 이들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확신했던 자티 수사는 가족도 없고, 돈도 없는 위중한 환자가 병원을 찾아올 때 마다, 함께 일했던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간호사 선생님, 좋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을 위해 침대 하나 마련해주십시오.”
자티 수사의 머리 속은 자나깨나 환자들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주님 생각 뿐이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강도 높은 병원 근무를 마치고 나면, 습관처럼 아주 낡은 자전거에 올라탔습니다. 병원조차 찾아올 힘이 없는 환자들을 왕진하기 위해 열심히 페달을 밟았습니다.
자티 수사의 자전거 핸들 한쪽에는 언제나 오래된 묵주가 하나 걸려있었는데,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중증 환우들, 다시 말해서 변장하고 찾아오신 주님을 위한 묵주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저의 이 병에 대하여 저는 하느님께 항상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병은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저의 선익을 위하여 하느님이 허락하신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총을 청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많이 청하는 사람은 많이 받고, 적게 청하는 사람은 적게 받으며, 아무 것도 청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으신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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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믿음이 있는지 알아보는 가장 손쉬운 방법>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sxswaeTIz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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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도 예수님의 ‘믿음’에 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믿음이 있다면 우선 ‘주님의 종’이 됩니다. 계속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그다음엔 주님의 종이 된 것에 ‘감사’해 합니다. 사탄의 종인 줄도 모르고 살다가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이 얼마나 행복입니까? 그리고 오늘은 ‘꾸준히 기도’한다고 마무리하십니다.
기도는 무언가 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꾸준히 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물건을 잃어버려 찾을 때 조금 찾다가 포기한다면 그 물건이 거기에 있을 것이란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끝까지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과부와 재판관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재판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과부가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끊임없이 청하자 무서워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그 청을 들어준다는 내용입니다.
다른 복음에서는 이와 비슷한 내용을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신 다음에 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바쳐야 한다고 하시며 밤에 빵 세 덩어리를 얻으려고 친구의 문을 끈질기게 두드린다는 비유입니다. 세상의 것을 달라고 끊임없이 청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것들도 들어주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를 통해 청하게 되어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한다면 반드시 그 사람에겐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있는지 알아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규칙적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으면 배가 부른 것처럼, 기도하며 주님을 뵈면 나에게 영향이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노인 신자분이 아침 일정한 시간이 되면 성당에 기도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단 1분이라도 좀 앉아계시지’라고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병원에 입원하여 임종을 앞두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 그 병원에 찾아간 신부님은 그 할아버지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신부님이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좋으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기도를 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매일 성체 대전에 나가 ‘예수님, 저 왔어요’라고 인사만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당에 갈 수 없으니 그분이 매일 찾아오셔요. 제 이름을 부르며 ‘요셉아, 내가 왔다’라고 인사하고 가십니다. 아침마다 예수님께 이렇게 인사를 받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보상을 받습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그 보답이 ‘성령’입니다. 만약 그 보답을 받았다면 기도를 멈출 수 없게 됩니다. 성령은 기도 안에서만 오시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한 청년이 코로나로 성당에 나가지 못하다가 견딜 수 없어서 다시 미사에 다니기로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주일미사에 빠진 적이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안 좋은 일도 있고 해서 한 달 정도 주일미사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일도 꼬여 화를 많이 내게 되고 어머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말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렇게 기도 안에서 받아오던 것이 끊어졌을 때 꾸준히 기도하던 사람은 대번 그 은총의 끊어짐으로 오는 고통을 체감합니다. 밥을 안 먹으면 배고 고프고 물을 안 마시면 목이 타는 것처럼 너무도 명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보아 전쟁(1899-1902) 중에 한 사람이 아주 특이한 죄명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죄명은 ‘낙담시키는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군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적이 얼마나 강한가, 왜 방어하기 어려운가, 또 이 도시는 필경 점령될 거라며 여러 불안한 말을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그는 총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반역죄가 적용되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끊임없이 ‘기도하면 뭐해?’라고 반역을 일으키는 자아의 목소리가 존재합니다. 꾸준한 기도는 이 자아의 목소리를 이겼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게 만듭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주님의 기도 꼭 한 번씩이라도 바치며 성령을 청합시다. 지옥에 가면 하루 단 2분도 꾸준히 기도하지 못한 것 때문에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청해서 은총을 받아보기만 한다면 절대 기도를 멈출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시간을 조금씩 늘려가면 됩니다. 기도가 꾸준하지 않다면 아직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루 가장 적게 기도한 시간이 나의 믿음의 정도입니다. 기도를 몰아서 많이 하는 것보다 짧더라도 꾸준한 것이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매일 최소한의 기도시간을 정하고 그것을 꾸준히 지켜나가도록 합시다. 믿음이 있는지 알아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꾸준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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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8,1-8 :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예수님께서는 복된 삶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거기에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절)고 하신다. 그러면서 불의한 재판관에게 계속 졸라 대어 결국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든 과부의 예를 드셨다. 그 여자가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정이나 동정심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지치지 않고 졸라댔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항구하게 기도하면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좀 더 고집스러웠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와 인간을 업신여기는 사악함을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이겼다. 과부의 끈질김이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이란 두 나뭇가지를 변화시켜 그 성격과는 맞지 않는 달콤한 열매를 맺게 했다. 불의한 재판관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여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은총과 정의가 우리의 본성에 맞는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게 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간구하는 사람들의 청을 얼마나 잘 들어주실지 깨닫기를 바라신다. 정의가 우리를 변호하고 은총이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게 하면 억눌린 자들은 정당한 보상으로 정의의 열매를 받고, 환난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은총의 열매가 생기를 줄 것이다.
가난한 과부가 끈질기게 졸라대니 사악하고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결국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른 척 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고 더 좋은 때에 들어주실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부서진 마음과 꺾인 영을 안고 기도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더 좋은 방법으로 들어주실 것이다.
사람들은 의로움의 말씀을 팔아넘기고 많은 사람이 건전한 신앙을 버리게 만든다. 악마의 손에 놀아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입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예고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고 하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갈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에 옳고 흠 없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사람을 속이는 영들을 따라가 양심이 마비된 거짓말쟁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1티모 4,1-2)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분의 영광을 거스르는 자들의 사악함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고 그 기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고 또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하겠다. 내가 원하는 대로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에게 풍성히 이루어주시도록 맡겨드리는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며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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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신부님]
많은 경우 예수님께서는 대조와 역설을 통하여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도 그러한데,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라는 핵심 내용을, 굳이 다른 설명이 없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불의한 재판관과 하느님이 서로 대비됩니다. 이 둘은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비유 속의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재판관에게 한 과부의 호소는 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과부는 끊임없이 재판관을 찾아가 졸라 댑니다. 그제야 재판관은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하고 마음먹습니다. 비록 귀찮음 때문이지만 계속 졸라 대는 과부의 청은 불의한 재판관마저도 마침내 올바른 판결을 내리게 만듭니다.
여기서 불의한 재판관과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 사이에 차이가 생겨납니다. 불의한 재판관조차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데,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께서는 “지체 없이 판결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제 비유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인 과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바라는 과부의 간절함은 불의한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간절함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분명 우리의 청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간절함으로 주님께 기도하고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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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좋은생각’이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보았습니다. ‘기쁜소식’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하시는 분께서 미국으로 보내 주셔서 잘 읽고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5월부터 받지 못했습니다. 며칠 전에 좋은생각이 택배로 왔습니다. 5월부터 10월까지 6권이 들어있었습니다. 택배에는 배송이 늦어져서 미안하다는 편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고객을 위해서 비용이 들더라도 등기로 보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좋은생각’은 좋은 방법을 찾는 것 같습니다. 숙성된 김치가 새로운 맛을 내듯이 5월의 좋은생각을 기쁘게 읽으려고 합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의 모습을 보려고 합니다. 세상은 좋은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좋은생각들이 결실을 맺어서 코로나19의 백신과 치료제라는 기쁜소식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2020년 예수님의 성탄은 ‘하늘 높은 곳에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를 마음껏 노래하면 좋겠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지친 우리들에게, 마스크 쓰기로 서로를 알아보기 힘든 우리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위로와 용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느 백화점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백화점 식품부에서 한 여성이 포도를 보고 있었습니다. 겨울의 포도는 가격이 제법 비쌌습니다. 20,000원의 가격이 있었습니다. 여성은 2,000원 밖에 없었습니다. 하염없이 포도를 바라보는 여성에게 직원이 물어보았습니다. 포도를 사시려고요? 여성은 사고 싶은데 2,000원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직원은 가위를 가져와서 포도를 잘라서 2,000원 어치를 주었습니다. 여인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포도를 가져갔습니다. 며칠 뒤 신문에 여인의 포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여인의 딸은 백혈병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딸은 마지막으로 포도가 먹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백화점의 식품부로 갔었습니다. 딸을 치료하던 의사가 포도를 먹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던 소녀의 이야기를 신문에 기고했습니다. 100년이 넘은 백화점의 회장님은 자식들에게 이렇게 유언했다고 합니다. “손님의 옷차림으로 손님을 대하지 마라. 모든 손님을 고객으로 친절하게 대하라.” 직원들은 회장님의 유언을 잘 지켰고, 지금도 사랑받는 백화점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백화점의 물건이라면 믿고 산다고 합니다. 잘려나간 20,000원 짜리 포도는 팔 수 없었지만 결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믿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생각’을 가지고 ‘따뜻한 이웃’이 되어준 착한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많이 배웠던 율법학자도,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던 사제도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알아도, 제사를 지내도 좋은생각을 하지 못하면 강도당한 이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는 형제들을 위하여, 특히 낯선 이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던 다 성실히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 모임에서 그대의 사랑에 관하여 증언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난 꽃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덕을 베풀면 향기가 만리를 간다고 합니다. 2020년의 달력도 이제 1장 남았습니다. 좋은생각과 기쁜소식이 남은 1장의 달력을 가득 채우면 좋겠습니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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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회 서현승 베드로 신부님]
<기도>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바로 전,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처절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하지만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가장 궁극적인 기도의 원형과도 같습니다.
이를 묵상할수록,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하느님께 대한 예수님의 무한한 신뢰가 느껴집니다.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시며 ‘과부와 고약한 재판관’ 비유를 통해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의 기도를 잘 들어주는지를
강조하십니다.
평상시 우리의 간절한 바람들조차 잘 안 들어주시는 듯한 하느님을 원망해본 적이 있다면, 어쩌면 ‘고약한 재판관’쯤으로 하느님을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필요와 욕구만을 요청하는 기도에 머무는 것이 아닌 하느님과의 친교를 위한 기도라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하느님의 눈으로 배워 알게 될 것입니다.
알면 알수록 이미 우리의 삶 안에서 얼마나 많이 그것들을 무상으로 받았는지 깨달아가는 놀라움과 기쁨의 나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여 나약하고 흔들리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더 더욱 우리는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청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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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기도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대화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만큼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내가 기도하고 살 때 그분께서는 내게 응답해 주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내가 바치는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내 지향이 순수하지 못하였거나, 기도의 대상인 하느님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 때문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끈질기게 공정한 재판을 청하는 한 과부의 청원을 들어주는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아무리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끊임없이 매달리고 청하면 귀찮아서라도 그 진실을 밝혀 주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동기가 순수하지는 않지만, 그렇게라도 올바른 판단을 청하는 과부의 진심과 간절함을 비유로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를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에 기초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얻어야 비로소 신뢰를 쌓는 인간관계와는 달리, 하느님께서는 우리 생각과 기준을 넘어 당신의 기준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보살피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장은 때로 고되고 힘듭니다.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알고 따를 때 확신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올 때”, 곧 하느님을 마주 뵙게 될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하셨을까요. 오늘도 내가 바치는 기도가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해 달라는 기도로 바뀌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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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내가 드리는 기도는... >
오늘 복음의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는 루카복음에만 있는 고유사료이다.
비유의 소재는 루카가 즐겨 주제로 삼아 보도하는 기도에 관한 것이다. 그것도 인내와 끈기를 동반한 기도의 자세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중요한 점은 비유자체의 이야기에 있다기보다는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격려에 있다.
그것은 오늘 복음이 기도에 대한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종말(8b절)을 대비한 유비무환의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비유의 내용처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언제나 기도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하는데 있어서 얼마만큼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하는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으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성가실 정도로 끈질긴 친구의 청에 빵 세 개를 내어주는 비유(11,1-13)를 상기시킨다.
성가실 정도의 끈질긴 간청을 어제는 친구가 들어주고,
오늘은 거만한 재판관이 들어줄지언정 내일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b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쉽게도 예수께서는 종말을 기다리다 지쳐 이미 믿음을 포기한 사람들을 내다보시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간청하기를 수도 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염치 불구하고 끝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11,9)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인내와 끈기를 동반한 기도뿐이다.
이미 지나간 복음에서 인자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표징들이 언급되었다.(17,20-37) 노아의 홍수(창세 6-7장) 때나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창세 19장)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그리고 ‘여기’라는 일상(日常) 안으로 종말이 들이닥칠 것이 분명하다.
일상 안으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종말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더욱이 그 날이 언제가 될지를 모르고 살아간다면 다리를 펴고 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잃지 말고, 언제나 기도하되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하라는 것이다. 사실 종말의 ‘그 날’이 언제일지 정확히 안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만큼 불안하고 힘든 일이다.
알고 있다면 그 날을 향하여 한 걸음씩 다가서는 두려움과 각박함,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 모르고 있다면 넉넉함과 막막함의 엇갈린 긴장으로 불안한 인생을,
그래서 지치고 쉽게 포기할 수도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리고 ‘여기’에서 ‘그 날’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기뻐하고 감사하며 희망을 가지고 ‘오늘’ 기도하는 사람은 늘 기도하는 사람이다.(로마 12,12; 골로 4,2; 1데살 5,17) 우리들 가운데 고통을 받거나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오늘’ 기도해 주어야 한다.
올바른 사람의 기도는 ‘오늘’이 가기 전에 바로 효과가 있을 것이다.(야고 5,13.15-16) 성령의 도우심으로 ‘오늘’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의 터전 위에 스스로를 세우는 것이다.(유다 1,20)
그것은 하늘나라의 원로들이 향이 가득 담긴 금으로 된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리기 때문이다.
그 향은 곧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이다. 그때 대천사가 금향로를 들고 와서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를 향에 섞어 향로에 넣고 황금제단에 태워 올린다. 그러자 대천사의 손으로부터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를 태운 향의 연기가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묵시 5,8;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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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경제 방송사 CNBC의 장수 프로그램 ‘Night Business Report’가 방영 25주년을 맞이해 세계적인 리더 25인을 선정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애플의 스티브 잡스, 인텔의 앤드루 그로브, 아마존의 제프 베저스, 버크셔 해서웨이의 워런 버핏 등이 선발되어 세계적인 리더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선정한 후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경영대학원인 ‘와튼 스쿨’ 교수들이 이들의 공통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성향은 아주 다양했습니다. 성향에서 공통점을 찾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꾸준함’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나 원칙 그리고 꿈에 관한 꾸준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치, 원칙, 꿈에 대해서는 어떠한 난관이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물질적인 커다란 손해를 얻는다고 해도 꾸준함을 가지고 자신의 가치, 원칙, 꿈을 지켜나갔습니다.
교수들은 이 꾸준함이 그들을 세계적인 리더가 될 수 있도록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꾸준함은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데도 필요한 덕목입니다. 나의 필요에 의해서만 주님 앞에 나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주님을 잊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이 주님 앞에 꾸준히 나아갈 수 있을 때, 어떤 순간에도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끈질긴 과부의 이야기를 우리의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끈질긴 과부는 재판관에게 줄곧 졸라 댔기에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끈질김 때문에,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 그 여자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이는 우리가 자비로우신 하느님께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지 알려 줍니다. 재판관이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본인도 알고 주변 사람들도 아는 바였지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한 여자의 끈질긴 청원 앞에서는 재판관도 자신의 평판을 고려합니다.
하물며 사랑 가득하신 하느님께서는 어떻겠습니까? 모른 척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꾸준함이 요구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꾸준함,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갖는 꾸준함,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의 꾸준함. 우리가 갖추어야 할 꾸준함이 상당히 많습니다. 우리는 꾸준히 구하고 찾고 견뎌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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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형인 희망>
강론이나 강의를 할 때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희망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이분들에게 ‘주님은 희망이십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희망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입니다.’라고 말하면, 아마도 “신부님이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아서 그래요. 어떻게 지금의 상태에서 희망을 둘 수 있어요?”라고 따지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예전에 인천교구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고3 예비신학생들과 면담했을 때가 떠올려집니다. 그때 예비신학생들의 희망은 무엇일까요?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성적이 조금 모자라는 학생은 주님께 기도하면서, 신학교 입학만 할 수 있다면 정말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면서 들어간 신학교, 당연히 행복해야 할 것 같지만,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학생이 꽤 많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학생도 만났습니다.
“신학교에는 희망이 없어 보여요.”
희망은 고정형이 아니라, 진행형입니다. 진행 중인 희망인데, ‘없다’라고 단정을 짓게 되면 당연히 희망을 만날 수가 없게 됩니다. 이 진행형인 희망을 봐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순간이 희망의 완성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매 순간 희망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먼저 희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또 다른 누군가가 진행형인 희망으로 나아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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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나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자신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가 필요한 때 입니다.
그러므로 끈기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프란치스코 교황은 묻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건전지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진정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기도의 참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바와 같이 기도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법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오늘 복음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올바른 판결을 내려준다는 이야기 입니다.(루가18-4-5)
끈질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마음을 다해 청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
그렇다면 떼를 써야 하지만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순응하는 것입니다. 절실함에서 우러나오는 끈기로 기도하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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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리의 협력자>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 사랑의 환대-
근래 가톨릭 교회는 참 복이 많습니다. 성덕이 출중한 성인같은 교황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명실공히 성인입니다. 참으로 이 두분뿐 아니라 저는 주변에서 성인으로, 성녀로 부르고 싶은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저는 이런 경우 성인이라, 성녀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듣는 이도 격려와 위로가 되어 행복하고 저 또한 힘을 받고 행복해 집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인터뷰중 다음 진솔한 내용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교황님의 묘비에 무엇이 새겨지기를 바라나요?”-
“(활짝 웃으며) 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 이름만 있으면 됩니다.”
-“교황님이 주교가 되었을 때 사목표어, ‘진리의 협력자’라는 문구가 떠오릅니다. 어떻게 이런 표어를 정하게 되었나요?”-
“70년대에 어느날 문득 제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외면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모든 것을 행하는가?’그러기에 진리는 반드시 제대로 다뤄져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없지만 우리에겐 진리가 있고, 그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진리의 움직임을 따라가려고 노력합니다. ‘진리의 협력자’라는 말은 요한의 셋째 서간 1장8절의 말씀입니다. 진리는 인격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에 협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에 감동하여 더욱 진리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진리에 봉사하려는 각오가 되어 있으며, 그 진리를 위해 협력할 채비가 되어 있습니다.”
-“진리의 협력자’, 이것을 교황님의 묘비에 새기면 좋을 듯 합니다.”-
“그렇군요. 그것이 제 삶의 지표라면, 묘비에 새길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참 아름답고 감동적인 말마디가 진리의 협력자입니다. 진리의 연인이라 칭했던 성 아우구스티노가 생각납니다. 진리를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진리에 몸바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신 예수님 말씀도 생각납니다. 진리에의 헌신이 자기 삶의 목표라 하셨던 성철 큰 스님 말씀도 생각납니다.
언제 들어도 마음 설레게 하는 진리라는 말마디입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들, 진리를 찾는 열정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며 늘 푸른 영혼의 청춘을 살게 합니다. 오늘 요한 3서의 진리의 협력자라 칭송 받는 가이오는 순회 선교사들을 따뜻이 사랑으로 환대했던 환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이런 환대의 형제애가 참 진리임을, 참으로 환대의 사람들이 진리의 협력자들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환대하듯 이웃 형제들을 환대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봉사에 힘쓰는 사람들 역시 참 아름다운 진리의 협력자들입니다. 진리의 협력자들 바로 이런 이들이 성인성녀입니다.
어떻게 하면 참 좋은 진리의 협력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진리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사랑과 열정을 지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과 열정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로 표현됩니다. 참으로 진리의 협력자들은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간청을 들어 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그 과부가 이런 기도의 모범입니다.
과부은 힘도 돈도 없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달랐습니다. 할 것이라곤 기도뿐이 없었고 끝까지 기도하듯 재판관에게 매달렸습니다. 삶과 기도가 하나인 과부였습니다. 과부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종신불퇴의 자세로 항구하고 집요했으며 마침내 불의한 재판관을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오늘의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결론 말씀입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 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 거리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에 간절하고 항구한 믿음입니다. 과연 이런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을 찾아 볼 수 있는가 주님은 묻습니다. 정말 기도해야 합니다. 진리의 협력자로서 필수적 자질이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기도와 회개는,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기도할수록 하느님께 가까이 갑니다.
기도하면서 점차 우리가 청하는 것도 변화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필요한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 하나는 우리의 생각이, 꿈이, 야망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과 일치되는 것이요, 하느님이 내 삶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재미난 복음 해석을 소개합니다. 원래의 비유가 상징하는 바, 하느님은 재판관이고 우리는 과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필요가 채워질 때까지 기도에 항구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재판관일 수 있고 하느님은 과부로 볼 수도 있습니다. 재판관처럼 우리는 기본적으로 불의합니다. 우리는 때로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변 이웃들의 호소도 완강히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항구한 과부처럼 결코 포기하여 떠나는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올바른 판결을 내릴 때까지, 우리가 선으로 판단할 때까지, 우리가 사랑하기를 배울 때까지 항구히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음을 듣습니다. 하여 우리의 기도는 다음과 같아야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항구하신 분, 우리를 더욱 당신처럼 만드소서!”(Dear God, Persevering One, make us more like you!)
얼마나 참신한 해석인지요! 누가 무슨 재미로, 무슨 맛으로, 무슨 기쁨으로 사느냐 묻는다면 저는 주저없이 진리의 협력자로 사는 재미로, 맛으로, 기쁨으로 산다 말하고 싶습니다. 날마다의 강론도 진리의 협력자로서의 일입니다.
“날마다의 강론은 내 사랑이자 운명이요, 구원이자 유언이다.”
어제 게시판에 다시 각오를 새로이 하며 써 붙여 놓은 말마디입니다. 진리를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는 진리의 연인, 진리의 협력자 되어 사는 맛이 없다면 도대체 무슨 맛으로 사막같은 광야인생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진리의 협력자가 되어 참으로 보람있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화답송 시편은 어제에 이어 하느님을 경외하며 진리의 협력자로 사는 참행복을 말해 줍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시편11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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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도의 소명으로 불리운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기도는 우선 항구해야 하고, 지속해야 하며, 희망의 상태를 견지해야 합니다. 사람이 환경이나 감정의 영향을 아예 안 받을 수는 없지만, 기도가 존재의 중심에 들어선 이는 크게 전복되지 않고 기도의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내가 사랑 안에 머무르는 상태지, 원하는 걸 누르러 자판기 앞으로 가는 행위가 아니지요. 그럼에도 많은 경우 착각을 하기는 합니다. 우리가 무지하고 뻔뻔스러워서가 아니라, 그만큼 처한 삶의 질곡이 급박하고 절실해서일 겁니다.
주님 앞에 고요히 머무르며 사랑을 나누는 기도는 일상에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며, 일을 하며 마음 안에서 주님과의 끈을 유지하는 겁니다. 주님 현존을 의식하며 머무름의 상태를 지속하는 기도 안에서는 누가 누구에게 무얼 바라는지 경계가 사라지고, 그저 서로가 서로를 바라는 사랑의 갈망과 일치의 리듬이 교차합니다.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루카 18,7)
예수님은 재판관과 과부를 비유로 드십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은 물신주의에 사로집혀 오만하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대다수 세상 사람을 가리키고, 과부는 그야말로 의지할 이 없는 가난한 약자의 전형입니다. 약자는 강자를 힘으로 움직일 수 없지만, 귀찮을 만큼 끈질기게 졸라대면 결국 가능하게 되리라는 것이지요.
부르짖음이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불의한 사람조차 이를 들어 주는데, 의로우신 하느님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게다가 "주님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습니다. 기도하는 이는 이미 주님께 선택된 이들이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순회 선교사들을 위한 요한 서간 저자의부탁이 나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이므로"(3요한 7)
순회 선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러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입니다. 기쁜 소식은 널리 전해져야 하지요. 이제 막 꼴을 갖추어 가는 초대교회는 파견된 선교사들을 통해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새로운 교회를 설립합니다. 주님의 심장에서 시작되어 온 세상으로 뜨거운 핏줄을 이어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한 이들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3요한 8)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나선 이들은 자기 영달이나 안위를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기도와 헌신은 자신이나 가족의 범위를 넘어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 특별히 더 힘겹고 고통스런 처지에 있는 이들을 향하지요. 그들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도 주님 손에 의탁한 채 속셈 없고 계산 없이 살아갑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가족과 경력과 재산을 버린 채 달려나갈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다 같은 소명으로 불리움 받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주님께서 허락하신 각자의 자리에서도 "그리스도를 위한 길"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투신하는 이들을 기도와 나눔으로 지원하는 것이지요. "진리의 협력자"는 그들이 받을 상을 함께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태 10,41 참조)
이 말씀 묵상을 통해 만나는 우리 모두는 기도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입니다. 안 그렇다면 재미와 쾌락이 넘치는 이 세상에서 괜히 말씀을 찾아 뒤적이고 머무를 리가 없겠지요. 어둡고 혼란스러운 이 세상은 하느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청하며,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주님이 귀찮으실 정도로 졸라대며 부르짖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지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이기도 하고 "진리의 협력자들"이기도 합니다. "귀찮게 졸라대는 과부"이기도 하고 "밤낮으로 부르짖는 선택된 이들"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이 세상에 소중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도할 때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값싼 위로를 구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이르십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일이니, 하느님과 나, 모두 존재를 걸고 머물러야지, 입으로만 떠들고 제물만 밀어넣는 것으로는 서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도 아시고,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지요.
주님께 선택된 벗님,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나선 벗님, 진리의 협력자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끊임없이 기도 안에 머무르고, 항구히 기도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받은 소명을 완성해 나갑시다. 그리하여 사람의 아들이 오실 때 우리에게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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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바닷가 모난 돌이 파도에 서로 부딪쳐서 아름다운 동그란 조약돌이 된 거
바닷가 모난 돌이 파도에 서로 부딪쳐서 아름다운 동그란 조약돌이 된 거죠. 미움을 갖지 않기 위해서라도 결국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된 적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어떤 사람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모가 난 돌과도 같아, 멀리서 보면 예쁜 돌처럼 보여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지요. 사람을 새로 사귀는 과정은 새 신발을 신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무리 편한 신발도 처음 신을 때는 발 어딘가를 불편하게 합니다.
♣맞지 않는 신발을 신었을 때에는 발 여기저기가 붓고 발뒤꿈치가 까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왕 새로 산 신발이니 버리지 못해 신발이 내 발에 맞을 때까지 힘들게 신고 다니기도 합니다. 아무리 인상이 좋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싫증도 나고 미운 구석도 보이기 시작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변덕스러움을 자책하나, 사실은 마음이 변덕스러운 게 아니라 세상 만물이 하나가 되기 위해 겪어야 할 과정일 뿐이니까요.
*신부님들은 부딪칠 짝이 없어 세파에 부딪치지 않아서 아름다운 동그랑땡 조약돌이 되지는 못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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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오늘도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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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루카18,1)
<과부의 청을 들어 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에게 과부 한 사람이 자신의 청을 들어달라고 매달립니다. 그것도 귀찮게 끈질기게 매달립니다. 그러자 그 불의한 재판관이 그 과부의 청을 들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낙심하지 말고 하느님께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졸라대는 이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18,7) 하고 반문하시면서, 우리의 간절한 청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낙심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매달린다는 것'은
그만큼 매달리는 분께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 안에서 오늘 복음 끝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18,8)
이는 지금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간절한 '믿음' 뿐이고, 이 믿음 안에서 드리는 나의 간절한 기도와 청과 울부짖음을 주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큰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고, 사랑이신 주님과의 대화이며, 지금 내게 필요한 간절한 청원이고, 나의 간절한 울부짖음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하느님은 이것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느님을 굳게 믿으면서, 오늘도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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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2FUUE_fwF8M&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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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 1)
믿음은
기도의 힘이다.
기도는
상처의 힘이다.
살아갈수록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하다.
삶의 기쁨과
슬픔 사이에
기도가 있다.
좌절과
실패속에서도
우리는
기도한다.
기도는
눈물 젖은
삶의 조건이다.
기도 없이
십자가를
질 수 없다.
믿음을 되찾는
눈물의
기도이다.
사랑에서
비롯되는
회개의
기도이다.
마지막까지
올리는 희망의
기도이다.
십자가가
깊어갈수록
기도도
따뜻해진다.
기도는
살아야 할
우리 삶의
이유이다.
기도의 면적만큼
우리의 희망도
넓어진다.
기도가 향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기도는
이 모든 것들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로
바꾸어놓는다.
사람의
상처까지
사랑과 감사의
십자가가 된다.
기도는
삶의 힘이다.
가장 아름다운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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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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