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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회:서울대공원(총동창회등산대회)〕
1.일시:’23.5.20.토.9:00시
2.장소:과천서울대공원동물원매표소
2.참석자(18명):고경수+1.김광수+1.김영배+1.김창덕.노태섭.박문우.박호봉.오춘식.유재성.이명호.이우석+1.장용인+1.황양연.고은곤(회식).김승호(회식).
3.코스:①.산행팀(6명.산림욕장.7km.2:30):김창덕.노태섭.박호봉.오춘식.이우석+1.
②.트래킹및행사참여팀(둘레길.4.5km.1:30):고경수+1.김광수+1.김영배+1.박문우.유재성.이명호.장용인+1.황양연.
오늘은 총동창회등산대회의 날.
선후배가 1년에 한번 만나는 날이다.
과천서울대공원동물원매표소입구에서 유재성 총무가 2023년총동창회등산대회안내도와 since1946이라는 글이 세겨진 바클을 나누어 주고 있다.
바클에 세겨진 ‘since1946’이라는 뜻은 1946.09.09.남자4학급 여자1학급 250명(3회졸업생)입학한 개교년도를 표현한 것이다.
모교를 졸업한 동문은 74회(‘23.2.8) 229명 졸업을 포함하여 현재 40,184명이다.
‘1974.3월 고교평준화 조치로 28회 졸업생 첫 입학하다’라는 기록도 있다.
작년(‘22년) 행사에는 1,350명이 참가하여 모교에서 출발하여 남산 둘레길 걷기를 하였으며 올해는 10,000여명이 과천서울대공원매표소에 모여서 서울대공원산림욕장을 걷는 행사를 하게 된다.
산행팀 6명이 삼림욕장 7km를 세 시간의 종주를 마치고 다람쥐광장에 12시에 도착하여 이미 와 있던 트래킹 및 행사참여팀을 만나게 된다.
과천에 사는 이우석부부는 대공원이 앞마당이어서 부러움을 받는데 종주에 참여하여 체력을 과시하였으며 장용인 동문은 부부와 딸과 외손자 3대가 참가하여 동기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부부 동반으로 참여하는 동문이 부럽고 본받아야 한다는 동문들의 말도 있었다.
점심으로 나온 도시락과 오징어무침과 특히 시원하게 제공된 열무김치는 대 인기였다.
행사무대 뒤쪽에는 90고령의 3회 선배님들의 특별석이 있었고 17회에서 65명 참석하고 18회에서 60명 참석했다고 하여 환호를 보낸다.
미륵산 농원에서 찬조한 된장·고추장선물셑트를 경품으로 추첨된 황양연 동문이 다음 모임 때 가져와서 맛을 보여 주겠다고 재담을 펼치는데 어떻게 보여줄지 궁금하다.
행사 마지막에 합창하는 용산의 교가는 언제나 장중하며 의기충만하다.
이수역 14번 출구를 나오면 명동찌게 마을이 있다.
김승호동문이 기다리고 있고 고은곤 동문이 저번 용두열 등산 때 모습보다도 훨씬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좋은 친구들 건강하게 오래오래 우정을 나누며 살자
오늘 유난히도 이런 생각으로 감동을 한다.
오늘 총동창회등산대회를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생각하니 깨달은 바가 많다.
그동안 모교에 대해 무지했으며 무심했던 것들이 많았다는 반성이다.
용산고등학교 홈페이지 ‘용산70년사(2046~2016)’에서 자료를 보면서 모교의 자랑스러움과 소중함을 느끼는 기회가 된다.
오늘 서울대공원에 모인 1000여명의 많은 용산인들을 보며 9회 동문들이 분석한 글에 동감을 한다.
‘용산인은 누구인가?’
‘공부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용산, 그 힘은 단결력이라는 9회 선배들의 글이다.
용산의 전통이지 않는가.
모교를 상징하는 것들의 뜻을 모르고 있었으니 다시 새겨보는 기회라 본다.
校訓:至誠은 다듬어진 인간 곧 인격자가 되라 함이며
校章:智仁勇을 뜻하며, Y자를 가로지른 두 줄의 흰선은 백의민족인 우리의 魂을 뜻하고 푸른색 바탕은 무궁한 진리를 표현하고 예리한 펜은 진리를 그리고 Y는 굳센 두 팔로 굳건한 신체를 단련함을 뜻한다.
校旗:지성의 자줏빛은 온 누리에 떨쳐나가는 용산을 뜻하며
校木:나무 껍질이 하얀 천연기념물 백송이라는 소나무는 체육관 앞에 자라고 있는데 의지의 용산인을 뜻한다.
校花:고귀하고 성실의 꽃말을 가지고 있는 철쭉은 용산인의 슬기를 상징한다.
용산70년사에 기록된 용산 역사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잘도 이겨냈으며 그럴 때 마다 선후배의 뜨거운 용산사랑을 볼 수 있었다.
파란만장의 용산역사의 구구절절한 사연에서 모교를 염려하고 사랑하는 마음들을 보며 미안한 마음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의지의 용산이구나. 대단한 용산이구나. 자랑스러운 용산이구나.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선후배들이 만들어 놓은 용산이어서 나도 자랑스러운 용산인이 되었다는 생각에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용산70년사에 담겨진 이야기들은 다짐과 추억의 시간이 되게 한다.
개교 50주년 이래 매 10년마다 동창회에서는 슬로건을 제정해 왔는데
50주년에는‘세계의 용산인, 인류의 큰그릇’이었고,
60주년에는‘이웃과 더불어, 인류와 더불어, 큰그릇 용산인’이었으며,
70주년에는‘용산 70년 세계를 담는 큰그릇’으로 정하였습니다
동창회가 매우 활성화되어있으며 동창회의 영향력이 크며, 여러 행사를 주최한다.
2016년에 동창회비 100억원을 달성했으며 동창회 기금으로 기숙사 운영비를 전액 지원한다.
매학기 성적 우수자들에게는 동창회에서 90만원 상당의 한 학기 장학금을 지급하며,
서울대학교에 진학한 학생에게도 동창회에서 장학금을 지급한다.
현재는 동창회가 가지고 있는 건물 값이 많이 올라 재정 상태가 많이 풍족해져서 아예 회비도 받지 않는다.
서울 중부지역외에도 동작구, 관악구, 구로구 등 한강이남 지역에서 오는 학생 수도 적지 않다.
비룡관에 "정상영 학사"라는 기숙사가 있는데 KCC 명예회장인 정상영 동문이 후원한 것으로 정원은 70명이고 기숙사생은 3학년의 비율이 가장 높다. 기숙사 내에 기숙사생들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별도의 학습실도 있다.
특이하게도 교칙에 연애 금지 조항이 있는데, 이는 교내에서 남자들끼리 연애하는 걸 금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교칙이 만들어질 당시엔 용산고 옆에 여고가 하나 있었기 때문에 이 학교의 여학생들과 연애를 하지 말란 뜻으로 만들어진 조항이다.
(용중 존속 항의 농성 사건의 배경)
1969년 10월 30일,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뜻밖의 조치를 발표했다. 종전의 중학교 무시험 진학과 평준화 계획에 따르면 1969년에는 경기, 경복, 서울중학교와 경기, 이화여자중학교 를 폐쇄하고 1970년에는 용산, 경동, 사대부속중학교와 창덕, 수도여자중학교를 폐쇄하는 대신고등학교학급을늘린다는것이었다. 그러나 1969년 10월 30일, 시교위는 1970년도폐 교 대상 다섯 학교 중에서 경동과 수도여중 두 곳만 폐쇄하고 용산, 사대부속중학과 창덕여 중은그대로존속시키겠다고번복한것이다. 이 보도에 접한 용산의 재학생들은 크게 실망하고 반발했다. 타 명문고는 우수 학생을 두 배로선발하여학급과인원이늘지만, 용산은그렇지못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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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점생 교장은‘학생 처벌 은 최소한도’에 그치겠다고밝혔지만, 14일에대규모학생처벌이발표되 었다. 학생회장 정준석(3학년·21회)과 자율봉사반장 김형광(2학년·22 회)의 퇴학 및 23명의 무기정학, 19명의 유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11월 21 일에학교는다시문을열고 12월 6일부터 9일까지중간고사를치렀다. 이 후 정준석, 김형광은 모두 고시에 합격하여 국가 공무원이 되었다. 21회, 22회 동기회에서는 당연히 두 사람을 동기회원으로 명부에 올리고 있다. 특히 정준석은 21회 동기회 제3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모교와 동창 회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으며 김형광은 용림회(임산업계 동문 모임) 1994년~1996년 총무를 역임하였다. 총동창회와 학교 당국은 이 두 사람 의용산사랑을기리고명예를회복시켜주기위하여개교 50주년을맞아 이들에게명예졸업장을주었다.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용산중학교는 폐교되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도신입생을 2학급증설된 10학급을받는성과를얻었다. 무엇보다가장큰성과는총동창 회의각성과활성화의전기를마련한것이었다. 동문들은모교에서일어난사건의해결과수 습에동창회에서할수있었던일이아주미약했음을자성했다. 이때 1회졸업생들은마흔살 안팎의 나이로 비로소 사회적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동문들은 김종양(1회)을 신임회장으로 선출하여모교발전에주춧돌이되기로다짐하였다
(가장 귀중한 것)
27회 동문들 때의 일인데, 그 당시 고문을 담당하던 김갑재 선생님은 용고 11회로서 이들에게는 아득한 선배가 된다. 워낙 성품이 조용하고 선비같이 얌전한 분인데 오히려 그런 선생님의 모습이 학생들에게는 스승 같기도 하고 사려 깊은 형 같기도 해, 가깝고도 어려운 사이였다.
어느 학생이 번번이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해 오지 않고 배짱 좋게 버티다가 드디어 더 이상 피할길이 없는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다. 언제까지 숙제를 해오겠느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다음번 시간에 꼭 해오겠습니다.’하는 큰소리로 대답.
다음 순간 번쩍하고 뺨을 맞는 순간을 기대했던(?) 학생들 앞에서 ‘그걸 어떻게 믿느냐?’는 물음에‘용고학생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립니다!’이어 선생님의 말씀 ‘암, 용고인을믿어야지’ 또 한 번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나 자신이 내 명예의 수호자가 되어야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었다.
(금남의 집 나들이)
“심술궂은 친구 하나가 교모를 눈 깜짝 할 사이에 슬쩍 벗기더니 수도여고 교정을 향해 냅다던져버리는것이었다. ……얼굴이벌겋게달아갖곤무서운여학교수위아저씨에게수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연을 얘기하고 그렇게 들어가고 싶었던 여학교 교정을 밟아보게 되는데. …… 이런 장난은 14회 동문 때부터 (2000년 수도여고가 동작구로 이전하기 전인) 32,33회때까지 꾸준히 전통이이어져 왔다
(양호할머니)
…… 용고에서 유일한 여성인 양호 선생님이 계셨는데 안타깝게도(?) 60세가 거의 되어가셨기에 학생들은 양호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보다는‘양호 할머니’라고 부르며 따랐다. 선생님은 연세에 어울리지 않게 부르는 애창곡은 혜은이의‘당신만을 사랑해’여서 학생들에게 여간 인기가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양호 선생님과 친했던 32회 동문들이 3학년 1학기가 되었을 때 그만 선생님은 정년을 맞으며 학교를 떠났다. 한 동안 소식을 몰라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졸업하던 날 식장한 구석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졸업생들을 지켜보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닌가? 졸업생들은 일제히‘양호할머니~’하고 뛰어가서 재회의 기쁨, 석별의아쉬움을 나누었다. 참으로 지금도 보고싶은 할머니의 인자한모습……박신실선생님이셨다.
(학교급식)
“학교 다닐때는 몰랐는데 막상 졸업하고 나니까 용산 고급식이 그리운 거예요. 대학에진한 아이들은 물론 재수하는 친구들은 더욱 그리워했지요. 특히 빵에 다진 고기 속과 야채를 넣어 각자 만들어 먹는 햄버거를 우리는‘용고 킹’이라 부르며 좋아했지요. 아이들 사이에서 ‘입맛 까다로운 이촌동 아이들 입맛까지 사로잡은 용고 킹’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어요.
(70년 전통 용산의 30년 후 미래를 짐작케 한다)
그 힘과 가속도로 앞으로 30년도 잘 달려나갈 것이다.
김의응(28회)의 다음발언이 70년 전통 용산의 30년 후 미래를 짐작케 한다.
“대림산업 사우디 현장 건설소장으로 근무하다가 휴가를 얻어 잠시 귀국하여 본사에 들르니 25회 선배가 모교에 갈 기회가 있으면 학교 교표를 사달라고 부탁 하시는 거야. 모처럼 모교 매점을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총동창회 사무총장을 만났는데, 졸업 동문들을 위한작고 앙증맞은 교표 및 흰색‘Y’자가 선명한 버클이 달린 허리띠를 주시는 거야. 얼마나 고맙고 귀하던지늘 차고 다니지. 귀한 선물을 챙겨들고 남영동 길을 걸어 나오다가 복장 불량한 몇 녀석이 길거리에서 낄낄거리고 있는 거야. 등짝을 힘껏 내리치면서‘나 28회다. 신성한 교복을 입고 길거리에서 무슨짓 거리야?’라고 혼내주었지. 나도 학교 다닐 때 선배들에게 혼난적이 있지만, 막상 졸업하니 그 꼴을 못 보겠더라. 그런데 녀석들도 고개를 숙이고는 멋진 동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더라고. 그모습이 귀엽고 믿음직해서 억지로 용돈을 손에 쥐어주었지.”
(아침등굣길)
원효로 효자동간을 달리던 땡땡이 전차가 용중입구에 정차하면 용산의 건아들이 5리가 채 못 되는 좁은 길을 새까맣게 물들이며 쏟아져 나온다.
중앙선도로 분계선이 없는데도 왼쪽으로는 새침한 수도여중고생들의 긴 행렬,
오른쪽으로는 어깨가 떡벌어진 용산 건아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는 아침등굣길. 길가 개천바닥에서 울어대는 오리 떼들의 울음소리가 귀가 따갑도록 요란한 아침등굣길.
지금은 복개되어 차들로 메워진 추억의 그 길을 다시 한 번 걸어보고 싶구나.
2023.5.22.월
〔한국인과 龍〕
용의 순수한 우리말은‘미르’이다. 미르는‘물[水]’과 상통하는 말인 동시에‘미리[豫]’라
는 말과도 상통하는데, 이는 물의 신을 용왕이라 하고, 우리의 야화나 설화에 등장하는 용의출현은 반드시 개인이나 나라에 일어날 큰 일을 예시해 주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중국 고대 문헌은 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용의모양은다른짐승들과아홉가지비슷한모습을하고있다. 즉 머리는 낙타, 눈은 토끼, 귀는 소, 코는 돼지, 목덜미는 뱀과 비슷하며, 배는 큰 조개를 닮고,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 그중에는 9×9 즉 81개의 비늘이 있고, 그 소리는 구리로 만든 쟁반을 울리는 소리와 같고, 입 주위에는 긴 수염이, 턱밑에는 밝은구슬이, 목 아래에는 거꾸로 박힌 비늘인 역린(逆鱗)이있으며, 머리위에는 박산(博山)이있다.”
“용은 물에서 태어나, 그 색깔은 오색을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조화의 능력을 지닌 신이다.
작아지기로 하면 번데기처럼 작아질 수도 있고, 커지고자 하면 천하를 덮을 만큼 커질 수도있다. 또한 높이 오르고자 하면 구름 위로 치솟을 수 있고, 아래로 들어가고자 하면 깊은 샘속으로 잠길수도 있는 변화무일(變化無日)하고 상하무시(上下無時)한신이다.”
이러한 용에대한 인식이 우리에게 수용되면서 여러 설화와 전설, 조각과 회화등 예술의 제재로 사용되었다. 더불어 풍수설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니, 풍수에서는 산을 가리켜 용 혹은 용날이라 부르고있다. 그것은 기복의 변화가 무쌍한 산이 마치음양 조화를 마음대로 하는 용과 상통한다고 보았음을 뜻하는데, 우리나라의 태조산인 백두산으로부터 뻗어나온 큰 산맥을 간룡(幹龍)이라 하고, 거기서 나뉘는 지맥을 지룡(枝龍)이라 일컫고 있다.
〔용산과 남산〕
▲ 용산 터의 내력(朝鮮朝靑華白磁龍文盤로도알 수 있다)
용산이라는 지명은‘백제 3대 기루왕 21년, 한강에 두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에서 유래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용산의 산세가 인왕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 내려간 모양이 흡사 용의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고려때 이미 용산이라는 지명이 사용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곧 고려 15대 숙종때 남경(南京)을 두기 위해서 용산을 그 후보지의 하나로 정하고 사람을 보냈으나 도읍으로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25대 충렬왕은 원나라에 볼모로 가 있는 동안 제국공주를 아내로 삼아 귀국하여 한양으로 와서 용산 근처에 별궁을 짓고 살았는데, 여기서 공주가 원자를 낳으니 용산원자(龍山元子)라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충렬왕은 이를 기뻐하여 그때까지 과주(지금의 과천 혹은 시흥)에 속해 있던 용산을 부원(富原), 곧 기름진 땅이라 이름하여 현으로 격시켰다는 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태조 3년에 고봉군에 속했는데, 태종 13년에 고봉과 덕양 두현을 합하여 고양이라 했다 한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을 때 잠두봉을 가을두 또는 용두봉이라 칭했는데 양화나루 동쪽을 일러 용산이라 했다는구절도보인다.
개화기를 거쳐 일본인들이 촌락을 형성하기까지 용산 일대는 경관이 빼어나 시인묵객들을 부르던 곳이었으니, 용산팔경이라 하여 이곳에서 조망할 수 있는 한강변의 아름다움을 추억하게 하는 글이 전해오고 있다. 지금도 원효로 일대를 구용산, 그리고한강변 일대를 신용산으로 부르고 있는데, 삼각지 로터리에서 동쪽으로 나지막한 구릉이 있어 예로부터 이 야산을 가리켜 둔산(屯山), 혹은 둔지산이라 불렀다. 둔이란 군대의주둔지를 가리키는 말로 조선초기부터 이곳에 군인을 파견하여 한강진의 관선을 관장케했다.
이렇듯 군사적 요충지였던 이곳은 임진왜란 때도성을 점령한고니시유키나가의 주력부
대가 주둔했었으며, 한말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군란진압을 핑계로 출병했던 청나라 오장경의 부대가 역시 주둔했었다. 이후로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의 여단사령부가 둔지산 일대에 주둔하면서 신용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광복 이전까지 조선군 사령부가 있었다. 광복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미군사령부와우리나라 육군본부가 차례로 자리잡았으며 한국전쟁 이후로는 유엔군 사령부가 들어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둔지산은 일본군이 주둔하자 왜둔산(倭屯山)이라 부르기도 했고 그 남쪽에 왜군의 병영이 있다하여 남영동(南營洞)이라는 동네이름까지 생겼던 것이다.
조선조 이후 용산 일대의 행정 구역을 정리해 보면, 조선 초기에는 한성부 성 아래 남쪽 10리의 구역을 용산이라 불렀다. 중엽 이후에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이 되었고, 한일합방 후인 1911년에는 경성부였다가 1914년에는 다시 고양군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36년 경성부의 구획 확장으로 다시 경성부에 편입, 같은 해 2월 경성부 출장소를 두었고, 1943년 6월 용산구역소로 개칭하였다가 광복후 용산구라 이름하여오늘에 이르고 있다.
▲ 남산
남산의 본래 이름은 인경산(引慶山)이었다. 태조의 한양 천도 이후 목멱산(木覓山)이라 불렀고, 그 밖에도 종남산(終南山), 열경산(列慶山), 마뫼 등의 이름이 있었다.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을 때, 남산은 풍수지리설 상으로 안산(案山) 겸 주작(朱雀)에 해당하는 중요한 산이었다. 조선은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목멱산을 따라 도성을 수축하였다. 남산에는 조선중기까지 봄, 가을에초 제(醮祭:도교에서별을향하여지내던 제사)를 지내던 목멱신사(木覓神祠), 즉 국사당이 있었으며, 조선시대 통신 제도의 하나인 봉수제의 종점인 봉수대가 있어 8도의 위급상황을 전달 받았다. 그러나 국사당은 1925년 일제가 허물고 대신 그들의 천조대신을 모시는 조선신궁을 세웠는데 광복 후 그 자리에 안중근의사의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남산은 애국가에 등장하듯 한국의 민족혼에 각인되어 있는 산이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라는 가사에도 나타나 있듯이 남산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빼어난 경관과 기상을 함께 갖춘 산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한국의 정신을 빼앗기 위하여 소나무를 마구 베어내고 아카시아 등 잡목을 심어 본래의 모습을 훼손시켰다.
용산고가 자리잡고있는 서남쪽을 보면 구용중이 개교하던 때만 하더라도 후암동에서남영동 일대까지 울창한 숲이었으며, 남산의 계곡물이 지금은 복개된 옛 수도여고 앞 개천을 따라 흘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후암골짜기에는 후암약수가 있어 찾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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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1회 정준석에 대한 신문기사와 필자와의 인연이야기입니다.
‘강력한 리더십과 온화한 카리스마.’ 한국산업기술재단 초대 상근 이사장.
용산고 시절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는 등 학창시절부터 리더의 기질을 보였다.
인천고를 졸업하고 연세대학 3학년 때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군 복무를 마치고 4학년으로 복학한 후에는 행정고시에 도전해 당당히 합격해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정진석부부(중등교사)와는 용산 매치포인트 테니스회에서 함께 테니스도 하였지요.
언제나 웃는 얼굴로 깍듯이 인사하던 예의바른 후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