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게 웅크린 동유럽의 도시
왕들이 거닐던 땅… 아픈 전쟁의 생채기를 만나다
폴란드 크라쿠프는 깊게 웅크린 도시다. 깊어서 빛이 다르고 드리워진 음영도 투박하다. 거리를 다니는 트램의 바퀴 소리마저 더딘 템포로 흐른다. 아픈 기억이 서린 아우슈비츠가 아니더라도 정제되지 않은 도시는 숱한 사연을 간직한 채 고요하게 엎드려 있다.
500년간 폴란드 문화의 중심지였던 크라쿠프에서는 낮은 음영이 어울린다.
시장 광장은 유럽에 남아 있는 중세의 광장 중 가장 넓은 규모다.
체코 프라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깊은 동유럽’을 만나기는 힘들다. 여행자로 가득 채워진 프라하의 카를 교나 부다페스트 왕궁에 서면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와 있는 듯하다. 다국적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언어, 빠른 발소리는 귀를 어지럽게 만든다.
직물시장인 수키엔니체는 크라쿠프의 골동품처럼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크라쿠프는 동유럽의 달그락거리는 돌길이 어울리는 도시다. 거리에 흐르는 언어는 무뚝뚝해도 통일감이 있다. 비스와 강에는 부다페스트의 도나우 강처럼 유람선이 번잡하게 다니지도 않는다. 주민들은 9월 말 꺼낸 두꺼운 외투를 5월 초까지 입는다. 오스트리아 빈과 체코 프라하에서 열차로 8~9시간. 크라쿠프는 쉽게 다가가기 힘들도록 깊게 웅크려 있다. 흐린 날이면 중세의 마을처럼 구름이 낮게 드리우는 풍광이 매력적이다.
크라쿠프를 말하다 보면 1990년대 초반에 제작된 한 편의 흑백영화가 떠오른다. 유대인 학살의 내용을 그린 <쉰들러 리스트>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였으며 아카데미 7개 부문을 휩쓸어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됐다. 그 참담한 영화의 배경이 된 도시가 바로 크라쿠프다. 중앙 시장 광장이나 유대인 거주지였던 크라코브스카 거리는 영화 전반의 배경이었고 후반 유대인 학살의 현장이었던 아우슈비츠의 도시 오시비엥침 역시 크라쿠프 인근에 있다.
영화 이전부터 크라쿠프는 동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였다. 폴란드의 수도가 바르샤바로 옮겨지기 전까지 크라쿠프는 500여 년간 폴란드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 구시가 일대는 중세의 고성과 교회들이 제2차 세계대전의 풍파를 벗어나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나치 주둔지와 유대인 수용소가 있었던 슬픈 역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도시를 전쟁의 공습에서 벗어나게 했다. 유독 크라쿠프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옛 동유럽의 흔적을 보게 되는 까닭이 그 때문이다. 2000년에는 유럽의 문화 도시로 지정되었다.
▶시장 광장 앞 거리에는 고풍스러운 마차가 오가며 운치를 더한다.
동유럽의 오래된 도시일수록 구시가와 신시가의 경계선은 명확하다. 구시가는 중세의 고풍스러운 건물과 문화유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구시가 외곽인 신시가에는 번화한 쇼핑 거리가 조성되거나 반듯한 도로가 뻗어 있다.
500년간 폴란드 문화의 1번지
크라쿠프의 구시가 일대는 잔잔한 감동이다. 예전 왕들이 대관식에서 걸었던 플로리안스카 거리를 스쳐 지나면 시장 광장이 나타난다. 시장 광장은 유럽에 남아 있는 중세 광장 중 가장 넓다. 중앙에는 ‘폴란드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동상이 서 있고, 그 앞은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비보이들의 아지트다. 동상 뒤편의 직물회관 수키엔니체에서는 침대보나 식탁보 같은 생활용품을 판매한다. 명물이 된 기념품점은 양쪽으로 100m가량 도열해 있다. 시장 2층은 폴란드의 조각과 회화를 전시하는 국립박물관이다.
언뜻 직물시장과 박물관이 공존하는 모습이 부조화스럽지만 수키엔니체는 그 자체로 크라쿠프의 골동품 같은 존재다.
구시가의 골목길에서는 오래된 상점들을 만날 수 있다.(왼쪽)
코페르니쿠스 등을 배출한 야기엘론스키 대학.
여행자의 발길은 광장 옆 성 마리안 성당에서 오랫동안 멈춘다. 1220년 건축된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에서는 매시간 탑 꼭대기에 나팔수가 직접 나와 나팔을 분다. 나팔 부는 시간만 되면 사람들이 빼곡히 성당 주변으로 몰려든다. 사실 유럽의 여러 도시들이 성당, 시청사 시계탑 세리머니를 준비해두었지만 직접 사람이 나와 나팔을 부는 경우는 드물다. 타타르족의 침입을 알리던 파수병이 나팔 연주 중 화살에 맞아 죽은 사연을 기리는 것인데, 실제 연주도 중간에서 멈춘다.
▶즈고디 광장은 영화의 단골 촬영장소로 쓰인다.
영화 속에서 강제수용소로 이송할 유대인을 집결시킨 장소는 중앙 시장 광장과 유대인이 많이 거주했던 즈고디 광장이다. 그러나 지금은 노천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관광객과 그들을 상대로 다양한 몸짓과 음악을 선보이는 거리의 예술가들만 북적인다.
해질녘 광장 앞은 영화와 방송의 단골 촬영장소로 변신한다. 중세의 모습을 배경에 담으려는 카메라와 조명이 바쁘게 돌아간다. 크라쿠프 광장 앞에 서면 오래된 구식 슬라이드가 흘러가는 느낌이다. 광장 안에는 시린 역사와 낭만, 현실과 허구가 공존한다. 크라쿠프의 독특한 첫인상은 이런 모습들이 한몫을 한다.
크라쿠프를 이야기할 때 폴란드 최고의 대학인 야기엘론스키 대학과 바벨 성을 빼놓을 수 없다. 1364년 카지미에즈 비엘르키 왕이 설립하고 왕비가 보석을 팔아 세운 야기엘론스키
대학은 동유럽 최고의 명문 대학이다. 지동설의 코페르니쿠스와 2004년 타계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대학 출신이다.
이곳에서 케밥집과 노천바들이 늘어서 있는 글고츠카 거리를 지나면 바벨 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비스와 강변의 언덕 위에 위치한 바벨 성은 11세기에 건축되기 시작해 16세기에 완성된 모습을 갖추었다. 그래서 대성당, 지그문트 탑 등의 부속물이 500년 역사 속 다양한 건축양식을 자랑한다. 바벨 성은 폴란드 국왕들의 거처로 사용되었고 수도가 17세기 바르샤바로 옮겨진 뒤에도 대관식만은 이곳
대성당에서 거행됐다. 폴란드 사람에게는 성스러운 터로 여겨지는 공간이다. 바로크 양식의 대성당과 르네상스 풍의 지그문트 탑은 작고 소박하지만 예술미가 뛰어나다고 정평이 나 있다.
바벨 성을 나와 크라코브스카 거리로 향하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 된 골목들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예전 유대인을 위한 벼룩시장이 아직도 있으며 영화 촬영지를 둘러보는 투어도 인기가 높다.
세계문화유산인 소금광산과 아우슈비츠
▶크라쿠프 구시가의 상징인 성 마리안 성당. 나팔수가 직접 나팔을 부는 것으로 유명하다.
많은 여행자가 크라쿠프에 매력을 느끼는 데는 또 다른 매개가 존재한다. 비엘리츠카의 소금광산과 오시비엥침의 아우슈비츠, 나란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 두 명소는 크라쿠프의 ‘웅크린’ 보물이다.
비엘리츠카의 소금광산은 동굴의 길이가 총 300km나 되고 역사도 700년이나 됐다. 중세시대부터 지금까지 작업이 계속되며 한때 폴란드 왕궁 전체 수입의 3분의 1이 소금광산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이곳에서 일하던 광부들은 암염으로 조각된 예술품을 만들어냈다. 지하 110m에 위치한
킹카 성당은 소금광산 여행의 백미로 역대 왕과 샹들리에 조각들이 찬란하게 재현돼 있다. 동굴 안에 작은 연못도 있고 유럽에서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우체국도 있다. 비엘리츠카의 소금은 그 기능 면에서도 박수를 받는데 여성들의 피부 미용에 좋다고 한다.
크라쿠프 여행의 또 한 축을 이루는 곳이 아우슈비츠다. 아우슈비츠는 크라쿠프 서남쪽으로 75km 지점에 있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어 지명이고, 폴란드어로는 오시비엥침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대인 수용시설을 활용해
만든 제1수용소는 옛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일하면 자유롭게 된다(ARBEIT MACHT FREI)’는 독일어 문구도 그대로 붙어 있다. 겉으로 보이는 아우슈비츠 전경은 전형적인 동유럽 시골 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수용소 사이로 높게 솟은 나무들의 정취도 언뜻 보면 탐스럽다. 하지만 문을 들어서면 고압전류 철조망과 어두운 해골 이정표가 드러나는 음울한 구조다.
전시관에는 당시 강제노동에 시달린 유대인의 안경·신발·사진 등이 헝클어진 채 전시되며 머리카락·칫솔·우유병 등이 남아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제2수용소인 브제진카 수용소에는 유대인을 태운 기차가 들어왔던 ‘죽음의 문’과 막사들이 드넓은 공간에 흩어져 있다. 죽음을 짐작하게 하는 굴뚝과 벽돌이 뒹구는 황량한 풍경이다.
시린 폴란드의 역사지만 현장에 서면 그 슬픔을 공유하는 데는 민족과 나라의 구별이 따로 없다. 깊게 웅크린 동유럽의 도시에서 전해지는 복잡다단한 사연이 오랜 상념으로 가슴에 남는다.
■ TIP
가는 길
바르샤바나 프라하에서 열차로 크라쿠프로 가는 루트가 일반적이다. 프라하에서 오전 7시에 출발하면 오스트라바와 카토비체에서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 오후 4시쯤 크라쿠프 캘로니 역에 도착한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버스는 중앙역 뒤편 시외버스 정거장에서 1시간 단위로 출발한다. 같은 노선이라도 별도 회사의 버스들이 운행되기 때문에 버스 안에서 티켓을 구입해야 편리하다.
음식
크라쿠프에서는 현지인이 즐겨 찾는 ‘밀크바’에 들러보자. 이곳에서 주민들에게 우유를 배급했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국가의 보조를 받기 때문에 음식값이 저렴하다. 대표적인 음식은 ‘비고스’로 그릇 모양의 딱딱한 빵 안에 고기와 양배추 절임이 들어 있다. 한국의 만두를 닮은 피에로기도 입맛에 맞는다.
기타 정보
폴란드 입국에 별도의 비자는 필요 없다. 4, 5월까지 기온은 낮은 편이다. 이곳 트램에서는 수시로 티켓 검사를 하니 반드시 티켓을 구입하고 개찰구에 티켓을 찍어야 한다. 여행자 카드를 구입하면 대중교통뿐 아니라 박물관, 관광명소의 입장 할인을 받는다.
(월간중앙 201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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