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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려는 참으로 북방민족의 간섭과 침범 그리고 왜구의 침략으로 힘든 왕조를 꾸려 나갔다. 송에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명나라로 이어지는 나라 교체로 인해 고려는 피곤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도 힘들 판에 문신들의 권력 독차지로 인한 무신들의 반발 그로인한 무신정변, 몽골의 침입, 강화도 수도 이전, 몽골과 30년 전쟁, 몽골제국 즉 원나라 속국화, 왜구의 침략 등등등으로 고려는 그야말로 망신창이가 된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식민지화라는 엄청난 오명도 고려는 가지고 있다. 왕조 처음으로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인물에 의해 역성혁명으로 나라가 교체되는 아픔도 고려는 겪었다. 나름 자력으로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뤘지만 결국 아주 나쁜 선례를 남기고 고려는 역사상에서 사라지는 아픔을 겪는다. 그 아픔은 고려만의 아픔이 아니요 이 나라 한반도 전 국민의 아픔이다. 고려의 역사를 보면서 마음이 아프고 왜 이렇게 되도록 놔뒀을까 하는 자괴감도 많이 든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고려의 역사를 조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하고 있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다시 말하지만 고려는 한반도를 벗어난 국가가 아니고 바로 우리의 나라 한반도의 중요한 나라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원본)
고려(高麗)는 918년 건립돼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고 1392년까지 약 456년 동안 한반도에 위치했던 전제군주정인 불교 국가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거론할 때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3국시대나 조선시대에 비해 그다지 조명을 받지 못하는 왕조이다. 그리고 이런 저런 대사건이 많았던 비운의 왕조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3국시대 이후 진정한 의미의 한반도 통일국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통일신라시대가 있었지만 순수하게 신라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려와 후백제 신라로 나뉘어 대치하던 후삼국시대를 왕건이 936년에 통일하였고, 이후 약 456년 동안 모두 34명의 군주가 이어받았다. 1392년에 이성계가 주도하는 역성혁명으로 조선이 건국되기까지 고려는 운영되었다. 고려는 918년 건립되고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부터 234년을 나름 왕권국가를 이뤘으나 1170년부터 무신정권에 의해 백년동안 지냈고 무신정권이 끝난 그후 멸망할 때까지 100여 년간을 원나라 속국신세가 됐다. 공민왕때 원의 속국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고려가 망할 때까지 친원파들이 사실상 나라를 우지좌지했던 것은 사실이다. 왕조의 절반이상이 제대로 된 왕국을 이끌지 못한 형국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 여건때문에 주변국들에 의해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조선시대도 같았지만 특히 고려시대에는 주변국들의 다양한 변화가 고려왕조를 운영하는데 엄청난 변수로 작용했다. 고려시대에는 주변국들의 부침이 유독 심했다.고려는 중국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문물을 수입했지만 북방민족과는 대체로 갈등관계를 유지했다. 북방민족이라하면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등을 일컷는다. 중국과 북방민족들은 그 지배 구조가 바뀌면 어김없이 한반도를 침범해 왔다. 그런데 고려때 중국과 북방민족 땅에는 새로운 국가가 여럿 생겨나게 된다. 그 국가들이 고려를 공격했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바로 그런 나라이다. 중국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는데 북방민족과는 갈등관계를 보이는 고려에 대해 북방민족들이 좋은 시선을 보일 리 만무했다. 하필 고려시대때 중국을 차지했던 북방민족때문에 고려는 참 많이 시달렸다. 아주 피곤한 북방 정세였던 것이다.
고려 시대 이룬 범 중국지역의 새로운 국가를 보자. 중국의 경우 후삼국 통일과 비슷하게 건립된 송나라가 있다. 송나라는 960년 조광윤이 오대십국 시대의 후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나라를 세웠다. 국호는 송(宋)이었으나, 춘추시대 송, 남북조 시대의 송과 구별을 하기위해 황실의 성씨를 따서 조송(趙宋)이라고도 부른다. 당나라가 절도사들의 분열로 약화되고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고 요나라가 화북을 점령하자 한족들이 남쪽으로 밀려나가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송나라와 고려사이에 요나라 등이 있었기에 고려에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못했다. 하지만 고려는 중국의 오대(五代)와 그를 통일한 송(宋)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문물을 수입했다. 고려의 초기인 10~11세기에는 고려와 송나라 그리고 요나라가 정립한 상태에서 동북아시아 질서가 그런데로 잘 유지됐다. 고려는 송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문화를 수입한 반면에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이라는 태조 왕건이래 북진정책을 추구하면서 발해를 멸망시킨 요와 대립했다.
그 다음은 북방민족이다. 그 대표적인 곳이 요나라이다. 요나라는 916년에 거란족이 중국 화북지역을 정복하고 세운 왕조이다. 야율아보기가 거란족과 기타 이민족들을 모아 화북을 점령했다. 건국 당시 국호가 거란(契丹)이었는데, 947년에 대요로 바꾸고 2백여 년간 나라를 이끌다가 1125년에 금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요나라는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고려는 요나라와 3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북진정책으로 요와 여러차례 분쟁을 겪었다. 그 결과 성종에서 현종에 이르는 시기에 3차례에 걸쳐 요의 침입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하고 실제적으로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했다.
북방민족가운데 이번에는 여진족의 팽창이다. 여진족은 발해가 멸망한 뒤에 한동안 만주 지역을 떠돌며 거란족들을 피해 겨우 연명해갔다. 하지만 거란족 다시말해 요나라가 점점 쇠퇴의 길을 걷자 점차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다. 드디어 12세기 초에는 부족 통일을 매듭짓는다. 12세기초 여진의 등장으로 동북아시아의 질서는 변화했다. 1107년 고려의 윤관(尹瓘)이 정벌했던 여진족은 완옌부[完顔部]를 중심으로 아골타가 1115년에 금(金)을 건국하고, 1125년에는 요를 멸망시킨다. 그리고 곧바로 고려에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이자겸은 금의 요구를 받아들여 충돌을 피했다.
여기서 이자겸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고려가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고 나름 북으로 영토를 넓히면서 세력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고려가 쇠퇴해 가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이자겸이다. 사악한 인물이 들어서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나라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이자겸은 고려 예종 때 문벌귀족으로 예종의 외척이 되어 전횡을 일삼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다. 1108년 이자겸의 딸이 예종의 비가 되자 왕권의 안정을 위해 선택돼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예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권력을 모두 장악하고 반대파를 살해하거나 유배해 제거했다. 그는 결국 심복 척준경에의해 1126년에 제거됐다. 금나라와는 직접적인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신하의 나라 입장에서 금나라와 책봉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고려가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신호탄이 쏘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려가 정상궤도에서 더욱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무신들이 정권을 찬탈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금나라에게 신하의 나라로 지내면서 뭔가 창피하고 대오각성을 하고 북방국가들을 내칠 방편을 찾아야 함에도 고려 왕족과 귀족들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문신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우지좌지했다. 무신들을 얕잡아보고 모욕을 주기 일쑤였다. 권력에 취하면 백약이 무효이요 충신의 말은 강물에 멀리 떠내려가기 마련이다. 1170년에 드디어 무신정변이 일어난다. 무신정권은 1170년부터 1270년까지 백년동안 진행된다. 몽골이 침입해서 국토를 초토화 시키고 결국 백기를 들 때까지 계속된 것이다. 나라의 발전이 어디 있었겠는가. 이제 망하는 것만 남긴 고려가 아니든가.
무신정권은 1170년(명종 원년) 정중부(鄭仲夫) 등에 의한 무신정변에서 비롯되었다. 무신정변의 원인은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고려 전기 사회가 문벌 귀족들에 의한 문신 중심의 정치가 행해져 상대적으로 무신들에 대한 차별 대우가 있었다는 점이다.둘째, 일반 하층 군인들의 불만도 무신정변의 원인의 하나였다. 이들은 전시에는 물론 평상시에도 공역(工役)에 동원되었으며, 심지어는 군인전(軍人田)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였다.셋째, 무신들에 대한 외면적인 멸시와 천대에도 불구하고, 무신들의 실제적인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도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다. 이와 더불어 비대해진 문신 세력과 국왕 간의 권력에 대한 갈등과 마찰이 정변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도 지적되고 있다. 다시말해 무신정변이 왕인 의종이 자신의 신변 보호의 주축이었던 견룡군(牽龍軍)을 이용하여 문신 세력을 처단했다는 친위 쿠데타적인 성격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문신 귀족들이 워낙 설쳐대니 슬그머니 무신들을 동원해 문신들을 처단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여러 요소들은 문신 중심의 정치를 구현해왔던 고려 전기 사회를 붕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고려사회는 무신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무신들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정권이 성립되었다. 1170년 무신의 난이 성공하자 무신들은 왕 의종을 내쫒고 명종을 왕위에 올린다. 그런 왕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냥 이름만 왕이었다. 한반도 국가들을 통틀어 이렇게 왕이 허수아비인 적이 없었다. 왕의 권위는 떨어지고 무인들의 지위가 크게 상승하여 사회가 혼란하고 농민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고려의 혼탁한 내정과 관련없이 북방민족들은 분주하게 움직여 갔다. 13세기 동아시아에서는 몽골 초원에 흩어져 살던 몽골족이 1206년 통합되면서 몽골제국이 건립된다. 몽골제국은 세계의 지배자로 급부상했다. 몽골은 빠른 기병과 뛰어난 궁술 그리고 잔인한 뒤처리로 순식간에 금나라를 멸망의 지경에 이르게 한 뒤, 1231년부터 30년에 걸쳐 수차례에 걸쳐 고려를 공격했다. 6차례냐 7차례냐 설왕설래하지만 그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1231년(고종 18년) 살레타를 주장으로 하는 몽골의 대군이 쳐들어왔다. 당시 북변에는 주진군이 배치되어 있어 강력하게 저항하였지만, 몽골군은 저항군을 내버려둔 채 계속 남하하여 개경을 포위하고 충주와 청주까지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무신정변으로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무신이 권력을 잡았다고 군사력이 높아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무신들이 권력에 취해 있어 군사력은 땅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오로지 사병(私兵)들로 자신들의 자리만 보존하면 된다고 생각한 무리들이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하는 수 없이 고려의 조정은 화의를 하자고 나섰고 결국 몽골이 72명의 다루가치를 나누어 설치하는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다루가치는 고려에 파견되었던 몽골 관직 중의 하나이다. 다루가치는 '진압한다'는 뜻의 daru에 명사어미 gha와 '사람'을 가리키는 chi를 붙여서 '진압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하는 몽골어이다. 여기의 ~치는 지금까지 우리주변에 사용되고 있다. 비속어인 양아치도 바로 이 몽골의 영향이다. 몽골족은 정복지에 다루가치를 설치하여 고려를 통치했다. 무려 72명의 몽고관리들을 고려에 배치한 것이다. 몽골은 고종 19년 정월에 요동으로 철수하였다. 하지만 고려는 몽골의 심한 내정 간섭과 공물 부담을 감수해야 하였다.
고려는 몽고의 심한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특단의 조치라기 보다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겠다고 내 놓은 대책이다. 다름 아닌 1232년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는 것이었다. 당시 고려조정에서는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던 시절 아닌가. 무신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꾀를 낸다고 낸 것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면 몽골이 더 이상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몽골은 육지에서 주로 기마부대로 전쟁을 수행하기 때문에 수전 다시말해 바닷싸움에는 약하다는 것을 거론한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 작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면 나머지 본토에 있는 백성들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모택동의 추격을 받은 장개석이 대만으로 도망간 것이나 다를 것이 뭔가. 대만은 그래도 먹고 살 것이나 있지 강화도에 뭐가 있겠는가. 참으로 어리석은 판단이요 당시 무신들의 머리를 탓할 수밖에 없다.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것을 문제 삼아 몽골은 고종 19년에 다시 침략하였다. 몽골군은 강화도는 고립전략으로 내버려둔 채 그대신 한반도 내륙을 농락했다. 왕도 나라를 지키는 군사들도 모두 자기들 살겠다고 강화도로 가 있는데 누가 백성들을 보호하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당시 몽골족의 패악질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영화에서 보는 그 몽골족들의 난폭성 바로 그런 것이 강화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고려 백성들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왕과 무신이라는 부류는 없었지만 그냥 앉아 죽을 수만은 없었다. 몽골군의 별동대가 대구 근처 부인사까지 진격하였지만, 살레타가 용인에서 승려 김윤후가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등 패배를 거듭하고 결국 철수하였다. 왕도 나라의 군대도 막지 못한 것을 일부 지방 군인들과 농민과 천민들이 주축이 된 의병들이 해낸 것이다. 이것이 고려 중기의 모습이다. 이러고도 제대로 된 왕조가 계속되겠는가. 몽골군들이 국토의 대부분을 난도질하고 지나가면서 백성들이 몽골군에게 참혹하게 도륙당하는 그런 시기에도 강화도에 있던 권력자 집단인 무신정권은 호의호식을 하고 있었다. 이미 왕조로서 자격을 잃은 고려가 되고 말았다. 강화도에서 평생 살 수 없었던 왕과 무신들은 몽골제국과 화친을 도모한다. 말이 좋아 화친이지 원의 속국이 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왕조로서 권위도 힘도 잃은 고려는 그 이후 몽골제국인 원나라의 속국이 되고 원나라의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되는 이른바 부마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한반도의 최초의 식민지화가 되고 만 것이다.1260년대를 기억해야 한다. 일제에 당한 1910년만 머리에 넣어두어서는 안된다. 1260년 원나라의 속국이 된 고려도 한반도 그리고 우리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은 1271년 제 5대 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 칸이 몽골 제국의 국호를 대원 그러니까 대국 원나라로 고치면서 원나라가 건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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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 있던 왕과 무신들은 개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1270년 무신정권도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자 아주 힘든 상황에 놓인 것이 바로 무신들의 사병집단이었다. 바로 삼별초이다. 이 삼별초들은 무신정권이 막을 내렸는데 오고 갈데가 없어진 것이다. 개경으로 가봐야 누가 반겨줄 사람도 없고 자칫 옛 무신정권에 대한 보복이 두려워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삼별초의 리더격인 배중손이 들고 일어났다. 1270년 배중손은 삼별초를 이끌고 몽골 그리고 고려 왕실과의 항전을 일으켰다. 온을 왕으로 삼고 관부를 세웠는데 사태가 불리해지자, 근거지로 진도로 옮긴다. 그후 기세를 크게 떨쳐 남해·창선·거제·제주 등 30여 개 섬을 지배하는 해상왕국을 이룩한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271년 고려와 몽골 연합군이 진도에 대한 총공세를 펼쳐 함락시킨다. 삼별초는 김통정을 중심으로 근거지를 제주로 옮기고 항거했으나 1273년에 진압되다. 삼별초로서는 삼년 세상인 셈이다. 이 삼별초 항쟁은 과연 항쟁이냐 단순한 반란이냐를 놓고 아직도 역사학자들 사이에 설왕설래한다. 삼별초 항쟁은 반외세·반정부의 기치를 든 일반민중의 참여로 일어난 13세기 후반의 가장 방대한 항전이었고, 고려 정부와 원에 큰 타격을 주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반면 일각에서는 무신들의 개인 병사였다가 그 자리가 없어지니 반란을 일으킨 것에 불가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그 항쟁의 시작이 어떻게 됐지언정 그래도 식민지화되는 고려의 마지막에 저항을 보였다는 것은 그다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엔 무리가 많다고 생각된다. 시작은 잡범이지만 나중에 새롭게 평가 받는 인물들이 한두명인가. 삼별초 항쟁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연구할 것이 많은 사항이다.
몽골의 간섭을 받게 된 고려는 왕과 관련한 모든 용어가 격하되어 짐은 고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사극에서 전하...이런 것은 바로 몽골의 속국 영향이다. 왜 조선은 이런 것을 원위치하려 생각을 안했는지 아니면 하려 했지만 중국 명과 청이 들어주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관제도 명칭이 바뀌고 통폐합되었다. 일본 정벌을 위한 군사 기관으로 정동행성도 설치되었다. 고려는 몽골의 2차에 걸친 일본 원정에 많은 병사와 군수 물자의 조달을 강요받아 피해를 입었다. 원은 고려를 함락하고 여세를 몰아 일본을 점령하고자 했다. 몽골은 원래 해군이 없다. 오로지 육군으로 유럽까지 정벌한 민족아닌가. 하지만 몽골군 처음으로 해전을 하러 일본으로 가려 했다. 육군이 결코 해전을 치를 수 없다. 백전백패이다. 고려군을 동원해 일본을 치려했을 것이다. 하긴 고려군이 뭐 좋다고 앞장 섰겠는가. 해전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 시기에 태풍이 올라오는 것을 예상하고 해전을 준비했을 것이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바로 해군 출신이다. 그런 조상의 후예들이 두번이나 일본 정벌에 대패하고 만 것은 고려의 운이 완전히 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몽골의 일본 침략은 일본에게 신풍(가미가제)이란 큰 선물을 주고 끝이 난다. 일본땅에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말았으니 일본이 얼마나 파안대소를 했겠는가. 이것이 결국 조선의 임진왜란의 서곡이 될 것을 고려군사들이 알기나 했을까.
하여튼 몽골이 한반도에 끼친 해악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친원파들의 패악질을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지경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일제 만행만 머리에 있을뿐 몽골 즉 친원파들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은 우리는 거의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있다. 식민지 부역의 잔재는 그냥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추적하고 그 일당들을 처치해야만 비로서 해결되는 것이 바로 식민지 부역자들의 청산이다. 그런 민족의 아픔속에 반원정책을 펴기위해 고군분투했던 공민왕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왕이라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워낙 상식을 벗어난 왕들과 무신들 그리고 친원세력들이 고려 후기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고려를 괴롭힌 외세가 있었으니 바로 왜구였다.왜구는 고려말과 조선초에 가장 심했고, 특히 고려 말 약 40년간은 피해가 커서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왜구는 일본의 남북조 혼란기 다시말해 남북의 기점으로 서로 패권을 다투었던 일본의 내전때 남조 세력권에 있던 규슈일대의 일본인들로서, 주요 근거지는 쓰시마 등지였다. 왜구가 크게 세력을 키워 한반도는 물론 중국 연해안까지 침략하게 된 것은 동아시아 정세 변화와 이와 관련된 일본 국내의 정세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14세기 중엽에 들어 원이 쇠퇴하게 되고 일본은 남북조의 내란기에 접어들게 되는데, 남조 세력권에 있던 일부 지방세력들이 해적화하여 한반도와 중국 연해안을 침략한 것이다. 중국 대륙에서는 몽골족의 원이 쇠퇴하고 1367년에 한족왕조인 명이 건국하였으나, 북원과의 패권 경쟁으로 왜구 문제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고려는 원나라 속국시기에 원의 간섭과 감시로 자체의 군사력을 갖추기가 어려워 국방이 약화되어 있었다. 1356년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단행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지만, 약화된 군사력을 일거에 회복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더하여 다시 고려에 압력을 가하려는 북원과 중국대륙의 신흥국인 명과의 외교관계 긴장으로 왜구 침입에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북방민족의 괴롭힘과 왜구의 침입으로 고려는 그야말로 망신창이가 돼 있었다.
이때 나타나는 인물이 이성계이다. 이성계는 황산대첩으로 왜구를 섬멸하자 고려내에서 인기가 급상승했다. 이때 원나라를 밀어내고 중국을 장악한 나라가 바로 명나라이다. 명나라는 농민들이 난을 일으키고 농민의 리더가 왕이 됐으니 그가 바로 주원장이다. 주원장은 명을 건국하자 마자 한반도에 영향력을 끼치려 했다. 고려가 원의 속국임을 잘 아는 명나라는 자신들을 원나라처럼 형의 나라로 받드라고 요구했다. 원에 했던 것처럼 여자도 공물도 보내라고 압력을 넣었다. 당시 왕인 우왕과 군사력을 장악한 최영은 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고 건국 초창기에다 아직 원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닐때 명을 공격하면 고려에 대해 더 이상 간섭을 하지 않을 것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이성계에게 요동성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갈등을 겪는다. 친명 성향인 이성계는 결국 군사를 회군한다. 그리고 우왕과 최영을 처단한다. 그이후 정몽주 이색 등 온건개혁파와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 혁명파들의 대립이 한동안 계속되다가 이방원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고려는 그 막을 내리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 바로 조선이다.
고려는 참으로 북방민족의 간섭으로 힘든 왕조를 꾸려 나갔다. 송에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명나라로 이어지는 나라 교체로 인해 고려는 피곤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도 힘들 판에 문신들의 권력 독차지로 인한 무신들의 반발 그로인한 무신정변, 몽골의 침입, 강화도 수도 이전, 몽골과 30년 전쟁, 몽골제국 즉 원나라 속국화, 왜구의 침략 등등등으로 고려는 그야말로 망신창이가 된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식민지화라는 엄청난 오명도 고려는 가지고 있다. 왕조 처음으로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인물에 의해 역성혁명으로 나라가 교체되는 아픔도 고려는 겪었다. 나름 자력으로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뤘지만 결국 아주 나쁜 선례를 남기고 고려는 역사상에서 사라지는 아픔을 겪는다. 그 아픔은 고려만의 아픔이 아니요 이 나라 한반도 전 국민의 아픔이다. 고려의 역사를 보면서 마음이 아프고 왜 이렇게 되도록 놔뒀을까 하는 자괴감도 많이 든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고려의 역사를 조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하고 있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다시 말하지만 고려는 한반도를 벗어난 국가가 아니고 바로 우리의 나라 한반도의 중요한 나라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2021년 12월 29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