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 65] 여호수아 16장-18장 묵상
★ 요셉지파가 얻은 기업(수16장)
여호수아서는 크게 정복 전쟁과 땅 분배 이야기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책이다. 12장까지의 정복 전쟁 이야기를 마친 뒤 13장부터 시작된 땅 분배 이야기는 요단 동편에 위치한 세 지파의 분배를 시작으로 유다 지파, 요셉 지파, 그리고 아직 분배받지 않은 나머지 지파 순으로 전개된다. 앞선 15장까지 유다 지파의 땅 분배 이야기를 마친 뒤 오늘 본문인 16장에서는 요셉 지파의 땅 분배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요셉 지파도 유다 지파와 마찬가지로 제비뽑기를 통해 땅을 분배받았다. ‘제비뽑기’에 해당하는 원어 ‘꼬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됐다. 그래서 각 지파가 제비뽑기 방식으로 땅 분배받기를 결정한 것은 인간의 자의적 결정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제안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요셉 지파에 해당하는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가 한 형제임을 보여주기 위해 제비를 두 몫이 아닌 한 몫만 뽑게 하셨다. 그런데 한 몫으로 주어진 기업이 대단히 컸다. 앞서 유다 지파가 야곱이 유다에게 베푼 축복의 성취로 넓은 땅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로 요셉 지파도 야곱이 요셉에게 베푼 축복대로 굉장히 넓은 지역을 얻었다. 그래서 유다 지파와 요셉 지파가 분배받은 땅의 크기는 요단 서편의 무려 2/3를 차지한다. 남은 1/3의 영토를 나머지 일곱 지파가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다. 요셉 지파 땅의 경계를 보면 여리고로부터 시작한다.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여 첫 전투를 치른 가나안 땅의 허리, 곧 핵심 지역이었다. 즉 요셉 지파는 넓은 땅만 배분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중심부를 얻었다. 그래서 후일에 요셉 지파 중 장자의 축복을 받은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의 대표로 불리운다(대하 25:7, 겔 37:19, 호 5:3; 6:4).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기억하시고, 열두 형제 중 유일하게 그 자손을 지파로 인정하시며 요셉에게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는 두 지파를 세워 기업을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빈손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업을 맡겨주신다. 빈손이었던 우리에게 지금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러나 죄인인 우리는 이를 망각하고, 소유라는 자극이 주어지면 욕심으로 반응한다. 성경의 첫 장면에서도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에게 다스릴 권세를 주셨지만 사람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따라 하나님처럼 되려는 죄를 범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이런 연약함을 직시하고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에브라임 지파에 둘러주신 은혜의 경계선은 동쪽인 아다롯 앗달에서 시작해 윗 벧호론에 이른다. 그리고 동쪽의 맞은편 서쪽 경계는 믹므다에서부터 시작해 한쪽은 요단강으로 이어지고, 한쪽은 지중해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알짜배기 허리 지역을 분배받았다. 에브라임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 기능을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입증되는데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출신이었다는 점, 땅을 분배받지 않은 나머지 일곱 지파가 에브라임의 기업인 실로에 모여 회의를 했다는 점,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 또한 에브라임 출신이었다는 점 등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의 대표에 걸맞는 삶을 살지 않았다. 여호수아 17장에 보면 그들은 므낫세 지파와 함께 하나님을 향해 불만을 표출했다. 불만의 내용인즉 분배받은 땅이 비좁다는 것이었다. 또한 사사기 8장에서 에브라임 지파는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 족속을 물리칠 때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면서 전쟁이 승리로 마치자 왜 자신들은 부르지 않았느냐며 추한 자존심 싸움을 벌였다(삿 8:1-3). 나아가 사사기 12장에서는 입다가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역시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면서 입다를 도발하여 입다의 군대와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켰고, 무참히 패배했다(삿 12:1-6). 이렇게 성경은 에브라임 지파의 치부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에브라임 지파는 대표라는 권리만 취하기 좋아하고, 대표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책임에는 소홀했다.
우리도 에브라임 지파처럼 땅의 크기에 마음을 빼앗기며 쉽게 미혹당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관심을 갖는 땅의 크기보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땅을 우리가 어떻게 가꾸어 가는지를 보신다. 땅이 크든 작든 맡겨진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결실하는 삶을 살아가느냐, 살지 않느냐가 하나님의 관심사이다. 크기, 자리에 연연하는 미숙한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둘러주신 사랑의 경계선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결실하기 위해 진력을 다하는 신실한 청지기로 살아가기를 소망하자.
여호수아 16장 8절까지 에브라임 지파가 받은 유산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그 외의 유산을 언급한다. 그 유산들은 므낫세 지파 내에 있었다. 이는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가 가까운 형제지간의 동맹체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오늘까지 에브라임 가운데에 거주하며 노역하는 종이 되니라(수16:10)
아직 여호수아가 생존해 있었다. 그럼에도 에브라임 지파는 정복 전쟁을 게을리 했다. 이는 대장 여호수아에 대한 불순종을 넘어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복이었다. 에브라임 지파는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다. 에브라임 지파가 그들을 노역하는 종으로 부린 것으로 보아 그들은 쫓아낼 힘이 있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들의 안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기준 삼고 행했던 것이다. 이후 게셀은 솔로몬 시대가 되어서야 그것도 솔로몬이 아닌 이집트의 바로 왕이 정복하고 자기 딸 결혼지참금으로 솔로몬에게 전함으로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었다(왕상 9:14). 이처럼 에브라임의 그릇된 한 번의 불순종은 게셀 땅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 일을 약 450년이나 지연시켰다. 그리고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들이 비록 노역하는 종이 되었어도 그들이 살아갔던 우상숭배의 삶은 결국 에브라임 출신의 여로보암 왕을 물들이는 틈이 되었고, 여로보암의 불신앙은 곧 북이스라엘 전체의 타락으로 이어졌다. 이는 오늘만 보고 내일은 보지 못한 에브라임 지파의 불신앙적 선택이 가져온 비극적 인 나비효과였다.
에브라임 지파는 하나님의 통제안에 머물며,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겠노라 다짐하여 제비뽑기로 땅을 분배받았고 하나님이 둘러주신 은혜의 경계선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분배받은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결실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더 넓고 더 좋은 땅만을 구했다. 승리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어떤 자리에 앉는지보다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둘러주신 은혜의 경계선, 곧 가정 안에서 어떤 약속의 말씀을 결실하고 있는가? 분명 태어날 때는 빈손이었는데 지금 우리 손에 들려진 것들만 둘러보아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참으로 크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많이 소유하는 것에 혈안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받은 기업을 백 배의 결실을 맺는 좋은 땅으로 가꾸는 데에 전력을 다하자. 마지막으로 시편 16편 6절의 고백이 우리 삶의 결론이 되길 소망한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아멘.
- 1년 1독 성경통독 학교, 꿀송이 보약 큐티 #
남아공 노록수 선교사 <25년3월7일,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