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 다시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젊은 날에 매일 매일 쓰던 편지를 일 년에 한 통도 쓰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매일 내가 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은 <.... 건너는 강>외엔 편지를 쓰지도 받지도 않은 나날, 가끔씩은 누군가 직접 쓴 편지를 받아보던 때가 그리운 것은 그 새 추억을 먹고 사는 시절에 다가섰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랫동안 자네에게 편지를 쓰지 못했네. 나는 그동안 프랑스에 있으면서 슬프고 고독한 대지를 보았다네. 남부 프랑스의 목동들, 하나하나의 아름다움, 애국적인 의혹과 굶주림의 불안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강력한 원소, 하늘의 불과 인간의 고요,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삶, 그리고 그들의 제한됨과 만족이 끊임없이 우리들을 나를 사로잡았지.(...)
어쨌든 곧 답장을 써주게. 나는 자네의 순수한 목소리가 필요하네. 친구 사이의 영혼, 대화와 편지에서의 생각의 형성이 예술가들에게는 필요하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네, 시인은 우리가 만든 성스러운 형상에 속하지. 잘 있게.“
자네의 K, 1802년 가을에 휠덜린이 그의 친구인 뷜렌도르프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분이다.
“편지를 쓰려면 지필묵보다 마음이 가뿐한 시간과 고독이 필요하다“ 고 말한 라이네 마리아 릴케의 말을 그대로 따랐던 적이 있었다. 어둠이 깊어지고도 오랜 시간이 지난 한밤에 쓴 편지일수록, 아침에 다시 보면 보낼 수가 없어 찢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마음이 울적해지고, 그리고 오랜 시간 산책을 끝낸 후에 쓰는 편지, 그때야 말로 닫힌 마음을 열고, 그 마음을 다 보여주며 쓸 수가 있었다. 그때 내가 무슨 내용의 편지를 썼는지는 이미 잊었다.
그때 습관처럼 썼던 수많은 편지, 그 편지를 쓰던 것도 어쩌면 글을 쓸 수 있도록 나를 채근했던 하나의 예비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편지를 쓰지 않는다. 다만 지문이 닳도록 문자를 보내거나 카카오 톡, 트위터를 중독자들처럼 보내는 것이 일상화가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습관이란 많은 것을 뜻한다고 생각해.! 습관은 사람들에게 어떤 빌어먹을 짓도 하게 만들지”
습관도 좋은 습관 나쁜 습관이 있다, 편지를 쓰는 습관, 그것도 정제된 마음으로 정갈한 편지를 쓰고 받을 수 있는 습관이 온몸에 체화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밤, 내가 보내는 이 글이, 이전의 그 낡은 편지지속에 담겨져 그대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23년 10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