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원픽 캡슐
김혜련
카페를 끊고 매일 에스프레소 한 잔을 돼지 저금통에 넣어요
스위스 편도 티켓 한 장 구입하려고요
예전엔 곽 소주에 오징어 땅콩도 쑤셔넣고 돌아올 땐 호텔 슬리퍼까지 공수해왔던
그런 캐리어 말고 달랑 주머니 하나가 전부인 여행을 시작하려고요
죽음에도 꿈은 필요해요
필립 니츠케 박사가 발명한 캡슐형 조력자살기계, 안에 들어가 버튼을 누르거나
눈 한 번 껌뻑여도 고통 없이 죽음을 맞는다는데
얼마 뒤 캡슐을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스위스발 기사에 죽음에도 팡파르가 울려요
성모호스피스 병동 203호, 시간이 먼저 죽어간 외숙모에게 이 소식이 닿았었더라면
지구살이의 마지막 여정에도 달러가 필요합니다
죽음의 방식에도 상품을 선택할 수 있어요
이것은 커피를 차곡차곡 저축하게 만들고, 내 꿈도 뽀얗게 살이 오르지요
아무도 모르게 키워졌던 나의 불온不溫한 심장 반쪽이 이젠 순간접착제 같은
쎈 편이 생긴 듯 든든해요
품
핼쑥한 낮달이 구름 속으로 살며시 사라지나
하지의 시계는 여전히 밝고 멀다
무슨 일이 터질 듯 조마조마한 너무 환한 저녁
얼굴을 가린 여자가 숨겨온 아기를
베이비 박스에 밀어넣고 소나기처럼 지나간다
품에 들자 안심한 듯 불안한 듯 울어젖히는 갓난아기
그 울음의 유기되지 않는 족보가 있다면
아기는 이마에 새 가계를 얹기도 한다지만
신도 잊은 그들에게, 고향집 뒤뜰의 풀 한 포기
품이라도 내주려는 베이비 박스의 주름살은 늘어만 간다
가장 높은 곳에서 어둑할 때까지 바라보던
멍울진 구름
달맞이꽃 한 송이 밀어올린다
「계간문예」 2023. 겨울호
김혜련 시인
2021 「계간문예」 시 등단
[출처] 내 마음에 원픽 캡슐 / 김혜련|작성자 마경덕